[뉴스레터9호][칼럼]존귀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_오혜진

존귀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오혜진(근현대문화연구자)

 

올봄에 읽은 한 소설이 남긴 강렬한 장면에 줄곧 사로잡혀 있다. 백화점 침구류 판매직원 여성인 ‘나’의 세계를 묘사한 황정은의 <복경>(<한국문학> 2015년 봄호)이다. 이 소설은 우선 우리가 익히 잘 안다고 생각하는 ‘서비스직의 감정노동’ 문제를 다룬다. 그 세계는 ‘고객과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착각하면 울게 되는 것은 나’뿐인 세계, ‘판매원과 계산원과 미화원과 조리사’가 서로 증오하는 세계다. 이 작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펼쳐지는 계급적 경험과 파토스를 날카롭게 그려내기로 유명한데, 이 작품도 기꺼이 그 평에 값한다.

최근 보도된 고객, 재벌가의 ‘갑질’과 ‘진상짓’을 깊이 의식했을 이 소설을 읽고, 나는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한 풍경을 떠올렸다. 처음 그 말이 미디어에 등장해 널리 회자됐을 때, 나는 그것이 지닌 대단히 효율적인 지시성에 놀랐다. 그리고 모종의 통쾌함(?)을 느꼈던 것도 고백해둔다. 그 말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는 일상다반사로 겪는 고객, 상사 혹은 상부기관이 행하는 폭력과 부당행위의 세목을 나열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언어를 낭비했던가. ‘갑질’이라는 신조어는 그런 수고로움을 없애 주었음은 물론, 그 ‘진상짓’에 함축된 권력관계를 간단히 드러냄으로써 ‘갑을관계’를 이 세계의 지배질서로서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그런데 이후 벌어진 상황은 내가 느낀 통쾌함을 다소 배반했다. 고용주와 자본가, 고객의 횡포에 대응하여 “좋은 건물주”나 ‘착한 갑’ 담론이 부상한 것이다. 게다가 ‘갑질’의 부당함을 탓하기보다, 무시당하지 않도록 내면의 강인함을 키워 저항하라는 도덕적 훈계도 등장했다. 진정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걸까? <복경> 작가라면 “존귀”, 그것은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라고 반문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자체로 존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인간에 속한 게 아니”라고.

‘갑질’이라는 말은 부당행위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할 뿐, 그 말이 전제하는 계급격차와 권력관계를 가능케 한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계급권력으로부터 촉발되는 부당행위에 이름을 부여해 그것을 실체화한 것이 ‘갑질’이라는 말의 공적이라면, 그 권력관계 자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자연화한 것은 한계다.

  종속관계를 정당화하거나 자연화하지 않는, 존귀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인간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복경>이 만들어낸 의미심장한 ‘전도’ 혹은 ‘뒤틀림’의 장면을 보자.이를테면 ‘화장실에 두고 온 내 핸드백 좀 주차장으로 들고 내려오라’는 고객의 전화에 ‘나’는 “직원은 고객용 화장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고객님”이라고 답하며 은밀하게 웃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어 감질나지만 기쁜 웃음. 조소나 냉소가 아닌, 백화점의 고객접대 매뉴얼에 명시된 웃음은 더더욱 아닌 이 웃음을 서술자는 특별히 “웃늠”이라고 적어놓았다. 이 “미친년” 같은 ‘웃늠’을 웃는 순간, 한 치의 의심 없이 명백하게 ‘갑’인 ‘고객님’에게 판매직원이자 명백하게 ‘을’인 ‘나’는 잠깐이나마 익숙하지만 낯선, 그래서 기이하고 두려운 존재로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복경> 나름의 항변이다.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2581.html, 2015.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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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9호][칼럼]사랑과 환멸의 대중탕_권명아

[야! 한국사회] 사랑과 환멸의 대중탕

 

권명아(동아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한국 사회의 미래와 대중 정치에 대한 환멸이 담론 공간을 강하게 채우고 있다. 1960년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에 담긴 다소 영웅적인 어조는 환멸에 대한 단절의 태도이기도 했다. 2015년 “껍데기는 가라”는 ‘이놈도 저놈도 마찬가지’인 세상에 대한 환멸이 되었다.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앎을 절대화하는 지적 오만이다.

환멸(disillusion)은 말 그대로 이전에 가졌던 환상이 깨지면서 촉발된다. 환멸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계를 보는 거울이 깨진 데서 비롯된다. 거울이 깨지자 세상도 깨져버린다. 환멸 속에서 ‘나’에게 세계는 끝장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끝장은 ‘나’와 ‘나’를 지탱하던 거울의 끝장이다. 그래서 환멸이야말로, 끝장난 ‘나’와 단호하게 이별하고,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알림 신호이다. 그러나 막상 오늘날 환멸은 ‘나’가 아닌 ‘끝장난 대중’에게로 향한다. ‘나’는 환멸 속에서 더욱 고매하게 빛난다.

에스엔에스가 진보 정치를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환멸로 이어진 것도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대중이나 대중 미디어에 대한 환멸은 실상 지금까지 대중의 흐름을 파악해온 방법론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근대적인 학문 방법론이 ‘대중’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은 많은 학자가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경우 대중의 흐름은 훨씬 더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이른바 대중 네트워크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은 어느 사회보다도 사회 기저에 강력한 네트워크 힘이 흐르고 있다. 사실 한국 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대중 네트워크를 전체로 조망하는 연구는 아직 없다. 가장 오래된 상호부조 형식이라 할 ‘계’의 경우도 식민통치와 군사독재를 거치며 대중 동원의 도구가 되거나, ‘퇴폐풍조’로 전락했다. 한국의 특이한 대중 네트워크의 하나는 대중목욕탕인데, 이는 가장 고전적인 ‘풀뿌리’ 네트워크라 할 만하다. 풀뿌리 네트워크라는 의미는 ‘민중적’이라는 의미보다는 지배적인 흐름이 변해도 한국 사회의 기저를 단단하게 동여매고 있는 흐름이라는 뜻에 가깝다. 대중목욕탕은 모든 정보가 모였다가 나가는 중계점이고, 모든 담화와 정보는 ‘생활적’이다. 드라마 선택에서 투표 후보자 선택까지 다양한 판단 지점에 이러한 생활적인 정보와 담화는 주요한 변수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대중목욕탕은 상품 정보에서 인물평까지 다양한 평판을 구성하고 생산하는 ‘뒷말’ 공간이다.

  대중목욕탕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지만, 독특한 내적 친밀성을 기반으로 관계가 형성된다. 모두가 잘 아는 공간이지만, 실상 논리적 파악이 힘들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막상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건 쉽지 않다. 이 네트워크는 최근 들어 에스엔에스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친구와 동료들만의 단체 방의 형태로도 변형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 대중목욕탕은 에스엔에스와 비교하면 접근도 어렵고 내밀한 관계 형성을 통한 정보 수집에도 한계가 있다.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강해서 흐름의 변화는 여기서 비롯된다. 풀뿌리 네트워크 자체가 본래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보수나 진보의 이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잠재성을 가졌다. 대중 네트워크의 흐름을 연구하는 건 이제 시작 단계이다. 대중목욕탕 네트워크 하나만 연구하고 조사하려 해도 누군가의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할 정도의 시간과 애정이 필요하다. 환멸은 그런 시간과 사랑을 소모하고 잠재성을 잠식해버린다. 환멸에 머무는 한 기저를 관통하는 흐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1044.html, 2015.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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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9호][칼럼]공동(空洞)의 문학(1)_김대성

공동(空洞)의 문학(1)

김 대 성(문학평론가)

 

 

텅 빈 건물을 지키는 관리인이 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중단되었던 재개발이 시행될 때까지 건물을 텅 빈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거지 연립’이라 불리는 그 건물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되었으나 관리인은 매일 밤 건물의 모든 문을 두드리고 열어본다. 이전부터 닫힌 뚜껑과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두려워해왔다는 관리인의 이력이 매일 밤 건물의 닫힌 문을 두드려 확인하는 이유인 것은 아니다. 밤마다 어김없이 불안한 예감에 휩싸이며 급기야 건물 어딘가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비명 소리까지 듣는 관리인의 강박, 혹은 신경쇠약이 내겐 지금 이 순간에도 참혹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는 건물에 상주하며 매일 밤 닫힌 문을 두드리고 열고 닫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텅 빈 세계에서 불침번을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안보윤의 소설 「안절부절 모기씨」(『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2014)의 이 같은 서사축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텅 빈 건물을 바장이며 닫힌 곳을 두드리는 관리인의 행위가 ‘관(棺)’으로 기우는 세계를 ‘문(門)’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애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쓸모를 잃어버린 텅 빈 건물이 죽음의 장소로 침몰하지 않도록 매일 밤 두드리는 일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곳이 단박에 다른 곳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 테지만 아무런 생산성이 없어보이는 그 무용의 행위의 반복이 명멸(明滅) 하고 있는 어떤 표지처럼 여겨진다. 명멸한다는 것은 불빛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곧 꺼진다는 것과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 명멸은 구조 요청을 닮아 있다.말하자면 명멸을 마주한다는 것은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의 자리에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없앨 수도 없고 기왕의 쓸모를 회복할 수도 없는 텅 빈 건물의 불침번을 서는 행위에서 나는 문학의 곤궁한 지위를 떠올리게 된다. 공동체(共同體)가 붕괴된 세계에서 텅 빈(空洞) 건물이 죽음의 장소로 침몰하지 않도록 깨우는 일. 텅 빈 세계에 불침번을 서는 것은 그곳에 아직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것은 쭉정이 같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쓸모를 잃어버린 텅 빔은 죽음에 임박한 빈사(瀕死) 상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무너지고 불타 사라진 폐허 위에 개시된 영도(零度)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서둘러 묻게 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예감하며 텅 빈 건물을 깨우는 행위의 반복이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의 한 방식일 수 있을까. 지금, 이곳에서 체감하는 ‘세계의 침몰’이 더 이상 구조 요청에 응답하지 못/않는 상태라 바꿔 말할 수 있다면 구성원을 구조 하지 않는 시스템의 몰락에 한탄하거나 환멸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들이 행하고 있는 구조 요청에 대한 다종한 응답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문학을 공동체(共同體)의 회복이 아닌 공동체(空洞體)라는 없던 관계망의 지평 위에 명멸하도록 놓아둘 때 종언이라는 선언에 기생하며 반복적으로 회귀하곤 하는 새로움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잠재된 에너지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끝이면서 동시에 임박한 시작점이기도 한 ‘텅 빔’이라는 상태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개별자들의 공통된 영토인지도 모른다. 텅 빈 영토를 두드리며 지키고 있는 이들을 호명해보고 싶다. 빈틈없이 꽉 차 외부적인 그 무엇도 틈입할 수 없는 공동(共同)의 회복을 종착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공동(空洞)이라는 다른 시작점을 도약대로 삼을 수 있을까.

 

오늘의 한국 문학, 그 성(城)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이들 중에 아무도 없는 건물의 문을 두드리는 관리인과 같은 이들이 있다. 텅 빈 건물에 머물며 매일 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쓸모를 잃어버린 대상의 쓸모를 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문’이 ‘관’으로 침몰하는 것을 붙들어두는 이 행위로 상실되었던 문의 기능,그 잠재적인 역량이 지켜진다. 두드리는 행위는 그 맞은편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희망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어떤 작가들에겐 ‘문학을 한다는 것’이 텅 빈 건물의 ‘문을 두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할 테다. 죽음(관)으로 기우는 세계를 두드려 문으로 깨우는 일. 두드려 깨우는 행위의 지속이 “응급상황에서 문을 부서뜨리는 데 쓰는 도끼”(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말해도 좋을까. 죽음으로 기울고 있는 세계에 불침번을 서는 일. 막힌 벽과 닫힌 문을 두드리는 무모함으로,그런 간절함으로 깨우는 일. 설사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해도, 죽음으로 기우는 것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고 해도, 그 일을 계속하는 것, 반복하는 것, 실패하는 것, 거듭 실패하는 것. 구조 요청에 대한 문학의 응답은 절망의 언어로 점철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절망한다는 것, 바라던 것(望)을 버리는 것(絶)은 역설적으로 직전까지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절망이 어제의 희망을 증명한다. 오늘도 절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기꺼이 그렇다고 답한다는 것은 내일의 절망 또한 수락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응답은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절망하기로써의 희망하기. 텅 빈 건물에서 불침번을 서는 일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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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9호][칼럼]걸그룹의 문화경제학_이동연

걸그룹의 문화경제학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풍뎅이, 립서비스, 원피스, 7학년1반, 베드키즈, 단발머리, 딸기우유, 러블리즈, 그리고 레드벨벳. 이 단어들은 2014년 데뷔한 걸그룹의 이름이다. 2014년에 데뷔한 걸그룹은 어림잡아 40팀 가까이 된다. 같은 해 데뷔한 남자 아이돌 그룹이 20여 팀인 점을 감안하면 걸그룹의 수는 압도적이다. 이 글을 읽는 30-40대 남성들 중에서 앞서 열거한 걸그룹의 이름을 반 이상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부인 몰래, 혹은 가족 몰래 숨죽이며 걸그룹 팬질 삼매경에 빠진 ’삼촌팬’일 것이다. ‘소녀시대’의 ’지’ 열풍 이래 조심스레 형성된 삼촌팬은 ’크레용 팝’에 이르러 당당히 커밍아웃하더니, 지금은 ’에이 핑크’, ‘걸스데이’, ‘AOA’ 등 잘 나가는 걸그룹의 전위대로 공공연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국정원의 슬로건처럼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케이팝 걸그룹의 든든한 정보원들이다. 요즘 걸그룹 전성시대는 삼촌팬들의 성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걸그룹들은 정말 삼촌팬들만을 위해 존재할까? 그렇지는 않다. 걸그룹은 연예기획사를 위해, 방송미디어를 위해, 부모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한다. 한국의 아이돌, 혹은 걸그룹 형성원리를 잘 모르는 분들은 이렇게 많은 걸그룹이 어떻게 데뷔가 가능한지, 도대체 이들이 뭘 먹고 사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걸그룹이란 세계 안에는 이 시장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나름의 문화경제학이 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해외를 포함해 케이팝 아이돌이 되고 싶은 지망생 수는 대략 3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 메이저 연예기획사는 연간 5만 명 정도의 아이돌 지망생을 직간접적으로 테스트한다고 한다. 이러한 아이돌 지망생 중에서 걸그룹이 되고 싶은 10대 소녀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예중이나 예고에 진학하려는 학생들 중에서 여학생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과 연관된다. 걸그룹 지망생 부모는 딸의 진학을 위해 예능교육을 시키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많은 걸그룹들 수는 결코 많은 게 아니다. 설사 무명이라 해도 그녀들은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걸그룹으로 데뷔했다. 이들이 처음 걸그룹 지망생일 때는 모두 SM, YG, JYP와 같은 메이저 연예기획사에서 데뷔하고 싶지만, 현실은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메이저 연예기획사 연습생을 전전하다 결국 나이가 더 먹기 전에 한 단계 아래의 기획사를 찾아 데뷔하고, 그마저도 안 되면 데뷔만 시켜주면 감사한 마음으로 이름 없는 연예기획사를 찾는다. 이른바 과잉된 걸그룹 지망생이 케이팝 시장의 과잉 공급 사태를 야기한 것이다.

 

걸그룹이 과잉 공급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두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걸그룹들은 이미 데뷔시절부터 상위그룹-중간그룹-하위그룹으로 구별되고 그 위계에 맞게 활동의 무대가 결정된다. 메이저 기획 출신 상위 그룹들은 데뷔전부터 화제를 뿌리며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하다 해외 진출로 향하지만, 중간그룹들은 한 두 번의 방송출연 이후 인기가 없으면 곧바로 각종 생계형 이벤트 시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하위그룹들은 방송 데뷔만 해도 감사하고, 매우 낮은 인지도를 이용해 처음부터 각종 지방의 축제 이벤트 행사장에 투입된다. 데뷔한 걸그룹이 인기가 없어도 상관없다.  데뷔를 기다리는 걸그룹들이 줄 서 있기 때문이다.

 

걸그룹은 시장의 사용가치의 논리에 의해 데뷔와 해체를 반복한다. 사용가치가 없는 걸그룹은 곧바로 시장에서 퇴출된다. 걸그룹의 스타일도 마찬가지다. 요즘 데뷔하는 걸그룹들이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그 안에도 다양한 스타일의 차이가 있다. 스타일은 대중들의 욕망을 위해 다양한 형태로 배치된다. 걸그룹의 사용가치는 곧바로 욕망의 교환가치로 전환한다. 걸그룹 ’7학년1반’은 ”오빠바이러스”라는 노래로 젊은 삼촌팬의 혼을 빼놓지만, 평균 나이 34세의 줌마 걸그룹 ’소녀시절’은 ”여보야 자기 사랑해”라는 뽕끼나는 노래로 장년팬을 유혹한다. ‘스칼렛’은 엉덩이, ‘EXID’는 위아래 운운하며 난잡한 섹시미를 과시하고 싶은 반면, ‘러브리즈’나 ’라붐’은 앙증스러운 귀여움으로 어필하려 든다. ‘섹시’와 ’큐트’라는 걸그룹의 상반된 코드는 모두 계산된 걸그룹의 상품형식이다. 그래서 문화경제의  교환가치 논리대로 하면, 걸그룹을 욕망하는 것은 삼촌팬도, 대중도 아니다.그것은 시장 그 자체, 생존하고 싶은 걸그룹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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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9호][칼럼]‘쿡방’은 무엇을 요리하는가_문강형준

‘쿡방’은 무엇을 요리하는가

 

문강형준(문화평론가)

 

‘먹방’의 인기와 더불어 생긴 ‘쿡방’은 ‘먹방’의 변주다. ‘먹방’이 음식을 먹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쿡방’은 그 음식을 만드는 상황에 집중한다. 예전에도 ‘요리 프로그램’은 고정적으로 편성되었다. 요리 연구가들이 나와 조용히 음식을 만들고, 영양을 설명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지금의 ‘쿡방’은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과 다르다. ‘요리 연구가’라는 어정쩡한 명칭은 ‘셰프’라는 전문가적 명칭으로 바뀌었다. 요리 연구가가 대체로 40-60대의 여성이었다면, 셰프는 대개 30-40대의 젊은 남성이다. 요리 프로그램이 음식의 조리과정과 영양과 식단에 집중되는 일종의 ‘교양’이었다면, 쿡방은 연예인 MC의 사회와 흥겨운 음악과 토크와 웃음과 게임이 모두 버무려진 ‘엔터테인먼트’이다.

 

요리 프로그램을 대체한 쿡방의 인기는 요리라는 문화적 영역에서의 변화들과 맞물려 있다.과거의 요리는 여성들의 ‘살림’ 영역이었다. 요리 연구가가 ‘엄마’를 환기시키는 여성이었던 것은 이를 보여준다. 쿡방에 등장하는 젊은 남자 셰프는 이제 요리가 사적 영역을 넘어 전문지식이 필요한 영역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요리 연구가들이 한식 전통을 이어받는 ‘승계자’였다면, 현재의 ‘셰프’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유명 요리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체인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이자 ‘사업가’이다. 쿡방에서의 인기는 셰프의 레스토랑 매출로 이어진다. 요리는 이제 지식-비즈니스가 되었다.

 

쿡방의 인기는 요리연구가에서 셰프로의 변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쿡방의 인기는 그것이 사실은 ‘요리’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한다. 이 엔터테인먼트의 기본 성격은 판타지다. 가지 않아도 가 있는 것처럼, 놀지 않아도 노는 것처럼, 먹지 않아도 먹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판타지. <꽃보다 할배>에서는 노동해야 하는 노인들 대신 배우 출신의 연예인 ‘할배’들이 아름다운 그리스를 여행하고, <무한도전>에서는 학업과 알바에 쫓겨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 청년들 대신 연예인들이 다양한 ‘도전’을 즐긴다. 신자유주의 노동사회의 ‘서바이벌’은 필연적으로 ‘힐링’을 짝패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예능은 우리 대신 경쟁하고 놀고 여행하고 위로받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연예인들을 통해서 이 두 임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쿡방은 이 둘의 결합이다. 그것은 ‘서바이벌 경쟁’이면서 동시에 스트레스를 푸는 ‘힐링’이다.

 

<냉장고를 부탁해>가 그리듯, 셰프들은 편을 짜서 연예인의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을 가지고 15분 동안 요리를 만들어낸다. 핵심은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며, 짧은 시간 동안 그럴 듯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내는 속도감과 그 결과에 대한 평가와 승패에 있다. 15분 동안의 요리 경쟁이라는 ‘서바이벌’은 냉장고 속 별 것 아닌 재료가 한 편의 ‘디쉬’로 재탄생하는 것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힐링’과 결합한다. 이 쿡방은 출연자들이 요리를 먹으며 감탄사를 내지르는 먹방으로 이어지며 완결된다.

 

   먹방과 쿡방의 인기는 대중의 삶의 질이 더 나아졌음을, 시간과 여유와 취향이 풍부해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노동사회를 무너지지 않게 지지하는 대중문화가 ‘식욕’이라는 가장 일차원적 감각의 영역마저 판타지로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요리에 쏟을 시간이 없기에 쿡방을 본다. 이 역설의 근거는 ‘배달앱’이다. 먹방과 쿡방이 많아질수록 배달앱 광고는 미디어의 광고판을 도배한다. 쿡방을 보면서 배달앱을 누르는 역설, 이것은 ‘요리’로 표상되는 일상의 실천이 이제는 미디어 재현과 상품의 세계, 곧 비즈니스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겨레> ‘크리틱’ 2015.5.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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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9호][칼럼]혐오의 역설, 혐오의 귀결_문강형준

혐오의 역설, 혐오의 귀결

 

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생각해 보면,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혐오’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기계처럼 끊임없이 혐오를 필요로 했다. 분단과 전쟁 이래 지금까지도 ‘북한’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 대표적인 혐오의 대상으로 호출된다. 70년대 이후에는 ‘전라도’와 ‘빨갱이’(‘북한’의 변주)가 박정희 및 전두환 독재정권의 존속을 위해 혐오되어야 했고, 90년대 이후에는 여성과 동성애자, 장애인, 비정규직, 동남아 노동자 등으로 혐오의 대상이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혐오 대상의 변화 및 확장은 각 시대적 국면에서의 지배적 질서 유지와 관련된다. 요컨대 분단과 냉전 체제는 북한을, 독재체제는 전라도와 빨갱이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취약하거나 소수인 주체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요청한다. 가상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내부의 구조적 모순을 가리는 방식. 여기서 핵심은 혐오의 대상이 사실은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기보다(그 작업엔 ‘끝’이 없을 것이다),혐오를 요청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살피는 데 있다.

가령 우리 시대의 ‘여성혐오’는 어떤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는가? 기본적으로 한국의 여성혐오 정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가부장제의 유물이다. 가부장제의 여성혐오는 여성이 약자이자 수동적 주체로 남아있는 한 문제될 일이 없겠지만, 여성이 그렇게 살지 않기 시작할 때부터 ‘문제’가 된다. 한국이 추구했던 근대화 과정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수용인데, 자본주의적 경제는 반드시 문화적인 개방성을 함께 요구할 수밖에 없다. 여성은 경제적 주체이자 문화적 주체로 거듭나야 하고, 그렇게 되었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문화가 가부장적 가치관을 ‘대체’하지 못했고, 이 둘이 공존하는 데서 발생한다. 여성은 노동자이자 소비자로, 나아가 평등한 사회적 존재로 변모해나갔지만, 뿌리 깊은 가부장적 전통은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인해 사회 전체가 무한경쟁의 서바이벌 전장으로 변해감에 따라, 남성들은 여성들의 부상에 의해 기존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한국사회의 여성혐오는 경제적 성장과 함께 문화적 성장을 견인해내지 못한 채 달려온, 즉 압축적인 ‘한국적’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여성을 자본주의 사회의 완전히 평등한 구성원으로 만들어내는 경제적,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앞으로 달려가는 것만 아는 이 눈 먼 자본주의는 시스템의 일을 사적인 문제로 뒤바꾼다. 경제는 성장하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환호 옆에 혐오로 표상되는 퇴행적인 문화적 현상이 자리 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 무한경쟁 속에서의 생존이 삶이라는 무대의 유일한 장치가 되었고, 이 무대 위에서의 승패는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었다. 조금만 한 눈 팔면 ‘루저’가 될 수 있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개인들이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무차별적 생존경쟁 과정을 정당화해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긍정’에 대한 믿음, ‘승자’에 대한 찬양, ‘힐링’의 필요 등이 이런 이데올로기들이다.

                온통 착하고, 긍정적이며, 열망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관념들은, 그러나, 지독히도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이들,승자가 되지 못하고 패배한 이들, 그러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 힐링 대신 기존의 구조를 문제 삼으며 변혁을 외치는 이들에 대한 혐오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긍정과 열망과 희망이 과도하게 예찬되는 사회는 반드시 예찬의 반대편에 놓인 이들에 대한 끈질긴 혐오도 함께 끌어들인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취약함과 대중의 불만 속에서 제3제국 건설의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 나치는 ’거머리 같은 수전노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긍정의 물신화는 강력한 혐오의 대상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의무 대신 권리만 주장하고, 짐을 나에게 떠넘기며,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여성’,실패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애인’과 ‘동남아 노동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성정체성의 범주를 뒤흔드는 ‘동성애자’, 내가 이토록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질서를 중단시키고 변혁하려 하는 ‘좌파’와 ‘파업노동자’들, 끊임없이 보수정권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전라도 사람들’—이들은 다양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내게 ‘편한’ 기존 질서를 위협하거나 그 질서에서 배제된 자들이라는 이유. 신자유주의적인 질서 속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는 ‘나’에게 이들은 불편함을, 위협감을, 불안감을, 피곤함을 느끼게 만든다. ‘나’는 이러한 기분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생존경쟁에만 힘쓰며 살고 싶은 것이다.

‘혐오’가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것, 이를 뿌리 뽑기가 불가능한 것, 혐오의 대상의 죄 없음을 증명하거나 혐오의 주체들을 도덕적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지배질서인 신자유주의는 긍정과 혐오를 함께 필요로 하고,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게 유일한 목표인 ‘우리’들을 긍정과 혐오의 이중구속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혐오의 대상이 혐오의 주체가 되는 일도 흔하다),어쩌면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로운 ‘자유’(신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의 이 ‘부자유’, 이 ‘출구 없음’의 감각과 세상의 끝을 그리는 파국 서사의 유행은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다. 여성에 대한 혐오에서부터 무슬림에 대한 혐오에 이르는 혐오의 물결이 희망과 욕망과 소통과 힐링을 긍정하는 한국과 전 세계에 ‘글로벌’하게 퍼져있고, 이 긍정과 혐오의 세계화로부터 다시 세계의 끝에 대한 상상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당분간, 긍정과 혐오와 파국이라는 감각의 트라이앵글은 우리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이 통로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월간 chaeg 6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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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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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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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8호] 문화연대 소식, 하나

[문화연대 소식]

1. 맑스코뮤날레 분과세션 발표 : 문화연대 & 예술인소셜유니온 세션
<예술노동의 일상성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하여>
- 일시: 5월 15일 금요일 13시 30분~15시
- 장소: 서강대학교 다산관 D412
- 사회자 : 김현 (문화연대)
- 발표자 : 하장호 (예술인소셜유니온)
- 토론자: 권은영(진동젤리)
박은선(리슨투더시티)
염신규(한국문화정책연구소)
홍진훤(사진작가)
영연석(음악가)

2. 문화연대 운동회 개최
- 일시: 5월 31일 일요일 10시
- 장소: (미정)
- 일정: (추후 공지)

[문화사회연구소 소식]

5월 월례발표회
<‘돌봄’의 정치경제학: ‘사회적 돌봄서비스’의 ‘사회효과’를 중심으로>
- 발표자: 정용택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 토론자: 맹기돈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
- 일시: 5월 27일 19시 30분
- 장소: 문화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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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8호][행사소식] 2015 맑스 코뮤날레 문화과학 세션

제7회 맑스코뮤날레가 오는 5월 15일(금)-17일(일) 까지 서강대학교(금/토)와 성공회대학교(일)에서 개최됩니다.

<문화/과학>의 분과 세션 일정

일시: 5월 16일(토) 오전 10:30~12:30

장소: 서강대학교 정하상관(J관) J110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습니다.

 

주제: 일상의 변혁과 대안문화를 상상하기

사회: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계간 <문화/과학> 편집인)

발표

○ 장시간 노동사회에서 대안을 모색하기(김영선,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서 대안을 모색하기(강정석, 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

○ 문화행동은 무엇을 꿈꾸었나?-대안문화 행동의 일상적 실천에 대하여(이원재,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

 

토론

김성일(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손희정(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강사)

최현정(일상예술창작센터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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