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8호][칼럼]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지만 혼자 일하는 사람들 (김영선)

언제 어디서나 연결되어 있지만 혼자 일하는 사람들 (김영선)

월간 <일터> 134호

 

『미생』의 장그래가 드라마 상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다. 오과장이 회식 후 길거리에서 만난 옆 팀 과장에게 “너희 애 때문에 우리애만 혼났잖아!”라며 고래고래 소리친 말에서 장그래는 ‘우리’라는 표현에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시청자는 그 우리라는 표현이 실질적인 의미의 우리는 아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장그래에게 만큼은 형식적으로라도 일정한 시간동안 특정한 공간에서 함께 티격태격 할 수 있는 그런 집합적인 관계 자체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분명 벅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에게 장그래가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던 ‘우리’라는 표현은 사실 성립되기 어렵다. 그것은 디지털 모바일 노동이 집합적이고 관계적이고 의례적인 시공간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기 때문이다.

노동과 비노동 간의 관계와 관련해 산업사회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동시간과 여타 남는 시간 간의 ‘분리’다. 대공장으로 표상되는 산업사회 이후 노동시간은 불규칙적이고 불연속적이고 성긴 형태에서 규칙적이고 연속적이고 조밀한 형태로 바뀌었다. 동시에 작업장 내에서 성기고 느슨한 시간이나 ‘낭비적인’ 요소들은 여지없이 제거되고 작업장 밖 여타 남는 시간으로 배치되어야 했다. 이것이 ‘분리’가 함축하는 바다.

그런데 디지털 모바일 시대에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간의 명확했던 경계는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노동시간과 여타 남는 시간 간의 구분이 흐려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다양한 요인을 들 수 있겠지만, 노동과 비노동 간 경계의 흐려짐은 산업시대 ‘표준화’를 지향했던 노동시간의 패턴이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매개로 ‘비표준화’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그 변화는 단순한 형태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공통 토대를 삭제하는 방식의 질적인 차이를 내포한다. 여기서는 그 질적인 차이를 중심으로 디지털 모바일 시대의 노동시간과 비노동시간 간의 관계가 어떻게 재구조화되는지 일별한다. 디지털 모바일 시대의 노동시간 문제는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유난히 빠르게 파급되는 한국사회에서 더욱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나아가 디지털 기술의 구조변동이라는 맥락에서 우리는 빠른 기술 변화와 동시에 급격한 노동시간의 유연화가 상동한다는 가설 아래 그 구조적 유사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비판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공통적인 시공간의 삭제

 

디지털 모바일 시대 눈에 띠는 변화는 산업사회가 표상했던 표준화된 전일노동이라는 노동패턴이 전반적으로 감소한다는 점이다. 출근에서 퇴근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진 노동패턴이 아닌 비표준 형태의 노동들이 여기에 해당할텐데, 이를테면 대리운전의 경우, 콜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대리운전 기사에게 언제, 얼마동안 일하느냐하는 시간의 관리는 기존의 전일노동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퀵서비스 기사, 방문판매원, 보험설계사, 프로젝트 기반의 전문직 종사자 또한 마찬가지다.이러한 노동자들은 독특한 시간의 세계에 놓이게 되는데, 그것은 출퇴근이라는 규칙적인 리듬과는 별개로 콜 신호에 따라 이곳저곳에서 접속/해제하는 그런 비규칙적인 리듬의 세계다. 여기서 연속적인 길이로서의 전일노동은 무의미하다. 디지털 모바일 기술은 업무의 발생시점, 빈도, 순서, 지속시간, 종료시점을 재구조화함으로써 노동의 단시간성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대리운전 기사는 일하는 시간을 얼마나 어떻게 쪼개든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시공간에 구속된 업무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자율적이다. 그러나 콜 신호에 따라 여기저기 이동하며 조각난 일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자율성은 허구적인 수사에 불과하다. 형식적으로는 자율적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콜 신호를 받기 위해 항시 대기해야하고 여러 건수들을 알아서 꾸리고 엮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감을 따라 부초처럼 정처 없이 표류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리차드 세넷의 지적은 이와 상통한다. 이러한 노동세계에서 전일노동이라는 시간적 묶음은 진부한 것이 된다.

공간 차원에서도 디지털 모바일 노동의 질적 차이는 발견되는데, 그것은 공장이나 사무실 같은집단적인 장소에 구속됐던 업무들이 탈공간화된다는 것이다. 노동과정의 공간적 집중이 불필요해진다는 이야기다. 산업사회의 기술이 ‘작업장’의 노동시간을 표준화 모델에 따라 연속적이고 조밀한 시간으로 최대화하는데 맞춰졌다면, 디지털 모바일 시대의 기술은 노동시간의 공간성 자체를 탈각시켜 버린다.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매개된 노동에는 특정한 장소에의 구속이 더욱 불필요해진다. 온갖 생산도구 기능이 집단적인 장소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인간의 신체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개별 노동자는 비가시적인 디지털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로 조각난 업무들을 실행할 뿐이다. 이러한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특정한 장소에서 서로 얼굴을 맞댈 필요가 없이 비동시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 디지털 모바일 기기에 연결되기만 하면 된다. 그것은 네트워크 상에서 끊임없이 유동하는 일종의 노드 형태로 공장이나 사무실에 구속된 노동과는 상이한 모습이다. 노동의 집단적 장소성은 사라지고 오직 ‘개인화된 노동’만이 디지털 네트워크에 걸쳐져 있기에 전례 없는 수준으로 이동성이 극대화된다.

 

함께 쉬기의 침식

 

“노동과정이 장소에 묶이지 않는다.”는 말을 관계 차원에서 다시 풀어보면, ‘동일한 장소에서 함께 일하기’의 정체성이 침식된다는 의미다. 공동의 장소에서 특정한 시간 동안 함께 일하기가 가져다주는 집합적인 경험과 감각 말이다.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적용되면서 특정한 장소에서 함께 일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자체가 줄어들기에, 콜 신호에 의해 매개되는 개인화된 노동 이외에 어떤 사회적 관계도 발생하지 않는다. 동료 관계는 사라지고 콜 신호를 향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만이 작동한다. 물론 콜 신호 주변의 사회관계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시간성이 요구되는 ‘관계’라기보다는 일종의 우발적이고 단속적인 ‘마주침’에 불과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의 사회관계 방식은 정주형(定住型) 관계 보다는 호텔 투숙형 관계가 일반적이게 된다. (여기에서 앞서 말한 『미생』의 인턴사원 장그래가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던 ‘우리’라는 표현은 성립할 수 없다.) ‘결속’에서 ‘접속’으로 옮겨가는 소통 방식의 변형인 것이다. 프랑코 베라르디의 말대로 소통 과정의 디지털화는 ‘쓰다듬고 냄새 맡을 시간’, ‘공간을 위한 시간’, ‘과정에 대한 감각’을 감퇴시키고 경험의 빈곤화를 유발한다. 결국 시간성이 요구되는 ‘오르가즘’이 사라지고 즉시적이고 자폐적인 ‘흥분’으로 대체된다.

노동의 탈공간화는 또한 ‘함께 쉬기’의 정체성을 여지없이 침식한다. ‘(업무 전) 차 한 잔 합시다’,‘(점심식사 후) 커피 한 잔 합시다’, ‘(쉬는 시간) 담배 한대 태워요?’처럼 누군가에게 건낼 수 있는 여유시간과 휴게시간이 발생할 수 없다. ‘퇴근은 언제하나요?’, ‘(퇴근 후) 소주 한 잔 합시다’, ‘올 여름 휴가는 언제로 잡아야하는지?’ 등의 표현도 성립되지 않는다. 관계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의 함께 쉬기는 사라지고 만다. ‘우리’, ‘동료’라는 표현이 발생할 수 없는 그런 노동 세계인 것이다.

경험은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생겨난다. 공통의 시공간은 집합적인 경험을 담아낼 수 있는 포괄적인 틀을 제공한다. 전통적으로 노동자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공장지대나 의복양식, 조직의례, 이완의 시공간이었다. 이에 반해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의 경험들은 콜 신호가 뜨는 곳곳으로 쪼개진다. 문화적 동질성을 구축할 공통의 토대가 사라지면서 디지털 모바일 노동자의 시간은 지극히 개인화된 사건과 경험들로 채워진다. 이렇게 노동의 탈공간화는 (노동일에 포함되어 있던)‘집단이 공유하는’ 공간에 대한 공통 경험, 시간에 대한 공통 감각, 다시 말해 집합적인, 관계적인,의례적인 시공간감의 사라짐을 내포한다. 산업자본주의가 ‘근면한 신체’를 주조했던 것처럼,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매개로 자본은 사회적 인간형을 새로운 방식으로 주조하는데, 그것은 ‘구체성을 잃어버린 신체’, ‘분해되는 신체’의 형태를 띤다.

 

미래 서사가 불가능한 삶

 

자연 리듬에 맞춰 작업이 진행되던 ‘업무 지향적인’ 노동패턴이 산업화 이후 시계 시간에 의해 규정된 ‘시간 지향적인’ 노동패턴으로 변화한 것이 산업사회의 결정적 특징이라면,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계기로 시간 지향적인 노동패턴은 퇴색된다. 이는 노동과 비노동 간의 분명한 구분을 의미했던 노동패턴이 ‘노동시간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건수에 따라 조각난 업무를 수행하는 방식’으로 전환돼 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시공간에서의 작업과정과 작업시간에 기초한 업무평가가 아니라 콜 신호로 상징되는 건수에 기초한 평가가 중요해지는 노동세계의 도래 말이다!

네트워크에 접속-이탈하는 식으로 조각난 노동을 수행하는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삶의 파편화 가능성도 일반화시킨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자신의 삶을 연속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어떤 전후 연관성도 사라지게 한다. 서사적인 인생사를 꾸려가는 게 의문시된다는 말이다. 평생 계획은 커녕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는 게 불가능하다. 오늘의 일과표와 내일의 일과표 간의 연속성을 찾을 수도 없다. ‘견고한 제도 속에서 안정적으로 뿌리내리고 미래 서사를 기획’한다는 이야기는 이제 옛것이 된다.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를 예측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 역설적으로 노동자 개인은 수시로 자신의 인생사를 취사선택하고 끊임없이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자기계발의 방식이든 인생2모작의 방식이든! 이러한 맥락에서 위험을 계급지위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위험 가능성이 하층에 더욱 축적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취약 노동자 개인의 생애사는 파손당하기 십상이다.

또한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안정성과 주기성을 확보하기 곤란하게 만들어 노동시간 전후의 여타 남는 시간들을 안정적으로 기획하기 어렵게 한다. 생활패턴을 엇갈리게 하는 것은 물론 가족시간을 단절시킨다. 사회관계 시간은 비동기화되면서 여지없이 쪼그라든다. 식사시간, 쉬는 시간, 여가시간, 수면시간 역시 파편화시킨다. 접속적인 노동패턴은 시간 사용의 불규칙성과 비예측성을 낳고 자율적인 시간 사용의 안정적인 주기성까지 침해하기 때문이다.

시간구조는 우리의 삶(식생활이나 일패턴부터 가족관계, 사회관계, 여가활동, 수면패턴까지의 모든 부분)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특정한 노동시간표는 여타 남는 시간을 질적으로 다르게 모양짓는다는 점을 감안할 때, 디지털 모바일 기기를 장착한 노동자들에게 노동과 여가라는 산업사회의 전통적인 구분법 또는 소위 ‘8시간 잠-8시간 노동-8시간 휴식’이라는 구호는 공허하기만 하다.

 

위험의 개인화

 

디지털 모바일 기술에 따른 노동의 탈공간화는 산업사회가 요구했던 근면한 인간형이 굳이 필요치 않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자본은 더 이상 출퇴근시간 같은 집단적인 규칙으로서의 시간규율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본은 시간규율을 위한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콜 신호에 따라 이곳저곳 이동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외적인 형태의 시간규율은 무의미해진다. 노동자들에게도 시간규율은 더 이상 노동통제의 수단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지각했다.”, “시간을 못 지킨다.”, “점심시간이다.”, “퇴근시간이다.” 등 집합적이고 규범적인 차원의 표현들은 모두 퇴색되고, 모자이크처럼 되어버린 시간 파편들만 남게 된다. 여기서는 오직 개별적으로 분절된 콜 신호에의 시간엄수가 관건이 된다. 이는 산업사회의 집합적인 시간엄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디지털 모바일 노동의 새로운 모습은 전일노동이 담보했던 조직적 전제들이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는 점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전일노동 시대 기업 조직이 제공해야 했던 집합적인 보장·보호 기능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전일노동 중간중간에 배치됐던 휴게시간은 발생하지 않는다.  휴가, 상여금, 퇴직금 등의 각종 부가급여도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전자장비를 구입·유지하기 위해 들이는 모든 비용은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 더욱 눈여겨 볼 점은 건강상의 위험이나 미래 불안에 대처하는 비용까지 노동자 개인이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탈공간화된 노동패턴에서 보장·보호 장치들은 공적인/조직적인 통제를 벗어나고, 위험을 처리하기 위한 집단적인 대응에 기대기도 어렵다.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언제나 핵심 언어인 연대는 시간의 파편들 사이에서는 생겨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위험 처리 비용은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공간적인 탈중심화가 이뤄지면서 노동자는 자기노동에 대한 주권을 얻은 듯 보이지만, 동시에 이런 노동에 있어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은 사적인 문제가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해 세넷은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은 죽은 셈이라고 지적한다. 디지털 모바일 노동은 위험을 더욱 개인화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모바일 기술을 매개로 더욱 두드러지는 (노동과 비노동 간) 시간 경계의 모호함은 노동시간을 둘러싼 노동과 자본 간의 투쟁 더 구체적으로 말해, 자유시간을 손에 넣기 위한 노동의 투쟁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노동과 자본 간 공통의 분모가 되었던 ‘노동시간’의 척도적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시간당 얼마’라는 시간과 임금 간의 연결고리가 서서히 해체되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노동의 오랜 구호는 무용지물이 된다. 오직 콜 신호에 따른 건수와 실적을 채우는 것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동시간으로 환원할 수 없는 형태의 일들이다. 노동과정의 디지털화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 세계에서 시간을 파편화하는 기획들에 저항하면서 자유시간을 손에 넣기 위한 투쟁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시간 투쟁은 과거 산업사회 패러다임의 노동시간 단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어야 한다. 이는 디지털 모바일 기술이 유난히 빠르게 파급되는 한국사회에서 더욱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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