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8호][칼럼]성적 수치심과 혐오의 프로파간다(손희정)

성적 수치심과 혐오의 프로파간다

 

글. 손희정

웹진 글로컬포인트 기고문

(http://blog.jinbo.net/glocalpoint)

 

인터넷은 다양한 입장들이 부딪치고 대결하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문화적 전쟁터다. 이런 전장에서 동성애와 관련된 검색어를 넣으면 온갖 혐오발화들이 튀어오른다. 그 중에는 성적으로 자극적인 내용을 통해 동성애자를 혐오스럽게 그리는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대표적으로는 2010년 신문 광고로 실렸던 한 ‘탈(脫)게이(?)’의 ‘양심 고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거 게이로서의 삶을 회개하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동성애자의 ‘더러운 성생활’을 ‘폭로’한다. 예컨대 찜방에 대한 묘사라던가, ‘식’으로 말해지는 취향 중심의 연애 행각, 항문성교와 AIDS에 대한 공포 조장 등이 그 내용을 채우고 있다.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이고 선정적인 내용은 불쾌와 혐오를 통해 오히려 독자를 매혹시킨다. 그리고 그런 ‘불쾌의 매혹’ 속에서 동성애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구성하며, 동성애자 당사자에게 모멸감을 주고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이런 혐오발화는 지나치게 파편화되었거나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고 왜곡되었거나 편향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내면서 동성애자 개개인의 삶을 제도적, 실존적인 위기로 내몬다. 뿐만 아니라, 다양성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로의 변화를 막고 그런 변화를 추동할 수 있는 가능성의 주체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문제적이다.

그런데 이처럼 ‘혐오의 프로파간다’에 기대는 반동성애/반게이 운동의 중심에 한국 개신교 우파가 있다. 이 글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적 상황과 깊게 연루되어 있는 한국 개신교 우파가 성적 수치심을 경유해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를 재/생산하고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에 대해 주목하면서, 어째서 그들이 혐오와 수치심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정동을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방법론으로 취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개신교 우파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에 기반한 원리주의적이고 극단적인 교리해석을 선보이면서도, 동시에 완벽하게 세속화된 방식으로 정·경과의 유착을 통해 거대한 시장을 형성해 왔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 문화가 되었고, 마침내 미국으로 가서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와서 대기업이 되었다.” 다큐멘터리 <쿼바디스>에 등장하는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한국 개신교 우파의 동성애 혐오발화는 단순히 종교적 믿음이라는 개인적 차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라는 제도 자체와 한국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혐오의 정동 자체의 문제다.

 

‘증오의 프로파간다’와 헤게모닉 남성성

개신교 우파가 해방 이후 교세를 확장하고 한국 사회의 기득권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기대고 있었던 어떤 정동의 구조와 지금 개신교 우파의 반동성애/반게이 운동을 추동하고 있는 정동의 구조가 매우 흡사하다는 것은 흥미롭다.

김진호는 해방을 전후해서 반공주의와 발전주의의 조우 속에서 한국 교회가 성장할 때 공산주의와 북한체제에 대한 ‘증오’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증오는 개신교 우파의 ‘마음의 제도’였다. 이때 1950-1960년대에는 반공에 기댄 ‘파괴적 증오’였던 것이 1960년대에서 1987년에 걸치는 기간에는 발전주의에 기댄 ‘생산적 증오’로 전환된 것은 한국 교회의 성장과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함께 진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파괴’에서 ‘생산’으로의 전환은, 해방 후 한국 정부가 반공주의와 일민주의에 기대어 국가 정체성을 세우는데 집중하고, 군사정권 이후 ‘희망과 발전’이라는 긍정의 수사에 기대어 전일적인 산업화, 서구화를 추구했던 것과 정확히 그 궤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증오라는 마음의 제도를 추동하고 그 성격을 규정한 문화적 바탕은 성별 이분법에 기반한 남녀의 성역할 구분이라는 가부장제적 성별 구조였다. 김진호는 이처럼 젠더화된 교회의 성격을 ‘과잉 남성성’이라 설명하고(김진호, 111), 김나미는 ‘과잉 남성적 개발주의’의 ‘헤게모니적 남성성’으로 설명한다(김나미, 282). 전통적인 이성애중심주의와 남성중심주의, 그리고 성차별주의가 한국 개신교 우파의 조직 성격과 작동 체계를 결정짓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셈이고, 한국 사회의 발전주의가 전일적인 근대화를 추동했던 방식도 마찬가지였다. 강력한 남성 지도자와 헌신적인 여성 내조자를 바탕으로 기업과 교회, 정치권력이 성장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기업과 교회와 정권이, 세습된다. 정·경·교의 닮은꼴은 우연적인 유비가 아니라, 필연적인 유비인 셈이다.

이렇게 헤게모닉 남성성을 중심으로 하는 ‘증오’의 정동에 기대고 있던 한국 개신교 우파는1990년대 “민주화와 소비사회화”에 영향을 받게 된다. 권위주의적 독재정권의 체제와 “너무나 닮은 개신교의 제도와 담론은 민주화 이후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되었고, 타인의 취향과 신념에 대한 배타적인 일방주의는 소비사회적 주체가 된 자존성 강한 시민들에게 지체된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이는 개신교 우파의 성장 둔화와 감소로 이어지게 된다(김진호, 122). 동시에 교회의 시장화와 함께 개신교 내에서의 신자 유치를 위한 무한경쟁이 시작되면서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과제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서 개신교 우파는 ‘외부의 적’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하여 개발해내는 것이 전통적인 반공주의로부터 게으르게 되살려 낸 ‘종북’이었으며, 여기에 그 외의 다양한 소수자들, 특히 (성적자기결정권을 가진) 여성, (성적 규제를 벗어난) 10대, 그리고 (무조건 성으로 환원되는) 동성애자와 같은 ‘성적으로 문란한 소수자들’이 덧붙여졌다. ‘외부의 적’이라는 수사는 “상실감에 빠진 개신교 신자에게 목표 의식과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리고 이는 “여러 극우 기독교 베이스의 인터넷 미디어, 그리고 온오프라인의 극우 네트워크 조직이 탄생”으로 이어진다(김진호, 127-128).

이때 ‘종북’과 견줄 수 있을 정도로 핵심적인 적대의 대상으로 성적 소수자들, 특히 남성 동성애자가 등장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개신교를 지탱하고 있었던 헤게모닉 남성성이 위기를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헤게모닉 남성성은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여성주의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신사회 운동의 성과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를 강타한 경제위기 등을 이유로 풍전등화와 같은 상태에 놓인다. 이 시기와 맞물려 등장한 “동성애자 인권 운동, 혹은 이반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운동을 주도했던 LGBT 조직들”은 “헤게모닉 남성성에 대한 진보적인 저항”의 주체가 되었다(김나미, 287). 개신교 우파는 이런 헤게모닉 남성성의 위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우려했는데, 이런 위기는 곧 기존의 성별위계와 성규범에 변화가 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는 개신교 우파가 기대고 있었던 효율적인 성별체계를 뒤흔들 뿐만 아니라, 교회의 정체성 혼란마저 불러오는 것이었다.

이런 맥락 안에서 한국 개신교 우파는 가장 교란적이고 위협적인 존재로서 ‘성소수자’ 특히 헤게모닉 남성성의 허상을 폭로하는 존재로서 ‘남성 동성애자’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하게 된다. 여기에서 증오의 프로파간다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미묘하게 그 결을 달리하는 혐오의 프로파간다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 전면전은 모멸감을 주고 수치심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수행된다. 그야말로 ‘수치스럽게 하기’가 혐오를 생산하는 공격적이고 부정적인 방식의 문화적 실천이 되는 것이다.

 

관습과 도덕을 전달하는 그릇이자 자아 파괴의 정동, 수치심

그렇다면 왜 수치심일까? 수치심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인간적이고 고유한 정동affect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분노하거나 울거나 웃거나 행복해 하는 동물은 많지만,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붉히는 동물은 인간 외에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매우 ‘인간적’이라는 의미에서, 수치심은 또 한편으로 개인의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차원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가 다른 이들과 맺는 관계의 문제이며, 동시에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문제이기도 하다. 리즈 콘스타블은 이처럼 수치심이 개인적, 간주체적,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복잡한 상태를 “상관적 문법relational grammar”이라고 규정한다. 예컨대 2014년에 한국에서 사회적으로 공분을 불러일으켰던 ‘12세 어린이 성폭행 3년 구형’ 사건에서도 이런 상관적 문법이 작동하고 있다. 피해자는 성폭행을 ‘공포’로 경험했지만, 어머니가 그 사실을 듣고 음독하는 순간 이것은 그저 공포스러운 일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수치스러운 일’로 각인된다. 그리고 3년 구형의 원인인 ‘충분히 저항하지 않았음’은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적 성관념이라는 사회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피해자에게 ‘수치심’을 강요한다. 이처럼 상관적 문법 안에서 피해자의 공포는 수치와 중첩되거나 혹은 수치로 전환된다. 그리고 사회는 다시 그런 수치심을 ‘성’에 대한 인식을 구성하고 그를 둘러싼 도덕과 규범들을 공고히 하는데 이용한다. 상관적 문법과 그 악순환의 고리는 수치심을 사회의 관습과 도덕을 전달하는 일종의 그릇으로서 작동하게 한다. 수치심이라는 정동이 성이라는 문제 있어 “사회적 상호작용의 핵심적인 규제담당자”(Johnsohn&Moran, 8)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수치심은, 만회할 수 있는 행위로부터 비롯되는 ‘죄책감’과 달리, 개인의 정체성에 달라붙어 돌이킬 수 없는 근본적인 고통을 주는 정동이다. 사회의 성적 규범은 ‘온전한 성’, 즉 ‘인종적으로 주류인 이성애 비장애인 남성의 성’으로부터 변별해 낸 차이에 기반한 몸, 섹슈얼리티, 성적 정체성을 수치심의 공간으로 구성하고, 그에 기대어 제도적 규범을 견고하게 만들고 영속시킨다. (이때 ‘차이’란 오직 규범적인 성이 그것을 ‘차이’로 인식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특성으로 부각된다.) 개인들은 자신이 여자라서, 동성애자라서, 트랜스젠더라서, 장애인이거나 혹은 이인종이라서,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수치심은 “한 인간의 자기 존재에 대한 감각에 깊이 자리잡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용서될 수도 없다”(Johnsohn&Moran, 2). 그렇게 수치심은 사회의 규범적인 성을 유지하는 데 가장 강력한 기제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수치심의 효과는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악성이다.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리고 싶었다,바닥으로 꺼지고 싶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와 같은 수치심에 대한 은유들이 보여주듯이 수치심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자기 삭제 혹은 자기 파괴적인 성격을 띈다.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은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개인의 욕망을 손상”시키며, 그/녀로 하여금 자신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으며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한다. 수치심은 개인을 “깊은 수동의 상태(Wurmser, 78)”로 몰아넣고, 이런 수동의 상태는 또 다른 수치심을 낳는다.

수치심은 그 효과가 오랜 시간에 걸쳐 증명되어 온 방법론이자 가장 파괴적인 방법론 중 하나다. 그리하여 개신교 우파는 대중이 선고하는 ‘명예형’이라고 할 수 있는 집단적 혐오발화를 수행한다. 그것은 때로는 직접적으로 수치심을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모멸감을 주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모욕은 모멸감 주기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 모멸감은 기실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모멸감은 부당하다는 인식과 억울함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수치심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성격을 띈다. 그리하여 모멸감은 분노의 정동을 생산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분노하라!’라는 요청이 보여주는 것처럼, 분노는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다. 모멸이 수치로 전환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여기에서 개신교 우파가 혐오발화를 장기전으로 끌고가는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만성적인 ‘망신주기’는 점차로 개인으로 하여금 타인이 강요하는 수치심에 굴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결점있고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한다. 원죄와 수치의 수사가 지니고 있는 자기 파괴적 속성의 효과에 익숙한 개신교 우파는 스스로 ‘포비아’라는 ‘만성적인 질병’이 되고자 한다. 견고한 성별위계에 균열을 내는 성소수자들이 펼쳐보이는 전복의 에너지를 견제하기 위해, 그들은 혐오를 필요로 한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단순히 ‘이건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다’라고 수치의 수사를 무시한다고 해서 그것이 쉽게 극복되거나 폐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혐오와 수치는 실체가 없는 이미지에 기대고 있는 환상이지만, 명백하게 실효를 발휘하고 있는 환상이다.수치심은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상관적 문법 안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개인이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주위에서 그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개인에게도 강제함으로써 수치심의 거미줄을 친다. 이 거미줄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삶의 조건 속에서 촘촘하게 그/녀의 삶을 옥죄어 온다.

 

혐오, 그리고 모멸의 문화

혐오는 증오보다 그 실체를 포착하기 힘든 정동이다. 스튜어트 월턴은 혐오를 설명하면서 “혐오의 촉발이 침, 콧물, 가래, 귀지, 오줌, 똥, 정액, 피(특히 생리혈) 같은 고약한 신체 분비물이나 썩거나 곪는 생물학적 과정의 구체적인 예에 뿌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모른척 할 수는 없다”(월턴, 141)고 말한다. 즉 혐오는 깨끗하고 안전한 주체의 견고한 경계를 위협하는 더럽고 천한 것(정신분석학적 용어로 하자면 비체적인 것)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일견 정확한 설명인데, 우리는 ‘똥’을 혐오하지만 증오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혐오의 대상이 실제로 나에게 어떤 위협을 가하거나 혹은 나를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그(것)들은 안정적인 정체성의 감각을 유지하는데 위협이 되기 때문에 배제되고 타자화될 필요가 있는 어떤 것일 뿐이다. 내가 단정하고 깨끗한 존재이기 위해서, 내 몸 안에서 나온 똥은 더러운 것이 되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즉각적으로 처치되어야 한다. 그러나 똥이 우리에게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이처럼 실질적이거나 물질적으로 나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서 위험한 것, 불쾌한 것, 제거되어야 할 불순물로서 여겨지는 것들이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 혐오란 우리 시대에 점차로 불안정해지고 있는 정체성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정동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즉, 혐오란 냉전시대의 반공주의가 선보였던 것과 같은 강력하고 절대적인 적대가 제거된 시대에 어떤 집단적 정체성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등장하게 되는 타자화의 정동인 셈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고, 그렇게 강조하지만, 성적 소수자성이란 그 자체로 이성애 남성 한민족을 중심으로 상상되는 낡은 정체성에 균열을 내겠다고 위협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성소수자의 시민권을 의제로 내건 운동들은 그에 적극적으로 균열을 내고 있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염려스럽게도 혐오는 개신교 우파만의 정동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총체성이 사라지고 거대한 담론이 죽어버린 시대에, 그리고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오랜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상상되지만 기실은 경제적, 정치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시대에, 반동적인 방식으로 정체성의 불안을 극복하고 복고적으로 견고한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 자체의 정동이 되어버린 것 같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공간에서 혐오의 정동이 꿈틀거린다. 이는 정치적 입장이나 종교적 믿음, 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념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나와 다른 타인을 배제하고 공격하는 수단이 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만성적인 망신주기”, “만성적인 혐오발화”가 어떻게 개인으로 하여금 수치심에 굴복하게 하는가를 떠올리게 된다. 이런 ‘혐오-만성적인 망신주기-수치심’의 삼각형은 다양한 인터넷 공간에서 타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모멸의 문화’가 지배적이 되고 있는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개신교 우파의 혐오발화가 모멸감을 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일베에서의 여성 혐오, 호남 혐오, 이방인 혐오 역시 모멸감을 주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디지털 시대의 ‘모멸의 문화’는 과거 공동체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주기public shaming’가 그러했던 것처럼 배타적인 공동체성을 구축하고 그 공동체의 내부 규범을 강화시킨다. 이것이 개신교 우파의 혐오발화를 특정 종교의 문제, 혹은 특정 종교인의 문제로만 국한시켜 이해할 수 없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좀 더 광범위하게 한국 사회를 사로잡고 있는 반동적 복고주의와 모멸의 문화를 고민해야 한다.

 

 

 

참고문헌

김나미, 「한국 개신교 우파의 젠더화된 동성애 반대 운동」, 『말과 활』 7호, 일곱번째숲, 2015.

김진호, 「한국 개신교 반공주의와 ‘증오의 정치학’」, 『모멘툼』 vol.01, 자음과 모음, 2014.

김찬호, 『모멸감』, 문학과 지성사, 2014.

스튜어트 월턴, 『인간다움의 조건』, 이희재 역, 사이언스 북스, 2012.

 

Erica L. Johnson·Patricia Moran eds., The Female Face of Shame, Indiana University Press, 2013.

Léon Wurmser, The Mask of Shame, Baltimore: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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