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9호][칼럼]‘쿡방’은 무엇을 요리하는가_문강형준

‘쿡방’은 무엇을 요리하는가

 

문강형준(문화평론가)

 

‘먹방’의 인기와 더불어 생긴 ‘쿡방’은 ‘먹방’의 변주다. ‘먹방’이 음식을 먹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쿡방’은 그 음식을 만드는 상황에 집중한다. 예전에도 ‘요리 프로그램’은 고정적으로 편성되었다. 요리 연구가들이 나와 조용히 음식을 만들고, 영양을 설명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지금의 ‘쿡방’은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과 다르다. ‘요리 연구가’라는 어정쩡한 명칭은 ‘셰프’라는 전문가적 명칭으로 바뀌었다. 요리 연구가가 대체로 40-60대의 여성이었다면, 셰프는 대개 30-40대의 젊은 남성이다. 요리 프로그램이 음식의 조리과정과 영양과 식단에 집중되는 일종의 ‘교양’이었다면, 쿡방은 연예인 MC의 사회와 흥겨운 음악과 토크와 웃음과 게임이 모두 버무려진 ‘엔터테인먼트’이다.

 

요리 프로그램을 대체한 쿡방의 인기는 요리라는 문화적 영역에서의 변화들과 맞물려 있다.과거의 요리는 여성들의 ‘살림’ 영역이었다. 요리 연구가가 ‘엄마’를 환기시키는 여성이었던 것은 이를 보여준다. 쿡방에 등장하는 젊은 남자 셰프는 이제 요리가 사적 영역을 넘어 전문지식이 필요한 영역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요리 연구가들이 한식 전통을 이어받는 ‘승계자’였다면, 현재의 ‘셰프’는 유럽과 아메리카의 유명 요리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체인을 가지고 있는 ‘전문가’이자 ‘사업가’이다. 쿡방에서의 인기는 셰프의 레스토랑 매출로 이어진다. 요리는 이제 지식-비즈니스가 되었다.

 

쿡방의 인기는 요리연구가에서 셰프로의 변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쿡방의 인기는 그것이 사실은 ‘요리’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점에 기인한다. 이 엔터테인먼트의 기본 성격은 판타지다. 가지 않아도 가 있는 것처럼, 놀지 않아도 노는 것처럼, 먹지 않아도 먹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판타지. <꽃보다 할배>에서는 노동해야 하는 노인들 대신 배우 출신의 연예인 ‘할배’들이 아름다운 그리스를 여행하고, <무한도전>에서는 학업과 알바에 쫓겨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는 청년들 대신 연예인들이 다양한 ‘도전’을 즐긴다. 신자유주의 노동사회의 ‘서바이벌’은 필연적으로 ‘힐링’을 짝패로 삼을 수밖에 없으며, 대부분의 예능은 우리 대신 경쟁하고 놀고 여행하고 위로받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연예인들을 통해서 이 두 임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쿡방은 이 둘의 결합이다. 그것은 ‘서바이벌 경쟁’이면서 동시에 스트레스를 푸는 ‘힐링’이다.

 

<냉장고를 부탁해>가 그리듯, 셰프들은 편을 짜서 연예인의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을 가지고 15분 동안 요리를 만들어낸다. 핵심은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며, 짧은 시간 동안 그럴 듯한 요리를 뚝딱 만들어내는 속도감과 그 결과에 대한 평가와 승패에 있다. 15분 동안의 요리 경쟁이라는 ‘서바이벌’은 냉장고 속 별 것 아닌 재료가 한 편의 ‘디쉬’로 재탄생하는 것을 지켜보는 데서 오는 ‘힐링’과 결합한다. 이 쿡방은 출연자들이 요리를 먹으며 감탄사를 내지르는 먹방으로 이어지며 완결된다.

 

   먹방과 쿡방의 인기는 대중의 삶의 질이 더 나아졌음을, 시간과 여유와 취향이 풍부해졌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노동사회를 무너지지 않게 지지하는 대중문화가 ‘식욕’이라는 가장 일차원적 감각의 영역마저 판타지로 장악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요리에 쏟을 시간이 없기에 쿡방을 본다. 이 역설의 근거는 ‘배달앱’이다. 먹방과 쿡방이 많아질수록 배달앱 광고는 미디어의 광고판을 도배한다. 쿡방을 보면서 배달앱을 누르는 역설, 이것은 ‘요리’로 표상되는 일상의 실천이 이제는 미디어 재현과 상품의 세계, 곧 비즈니스의 세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한겨레> ‘크리틱’ 2015.5.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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