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9호][칼럼]혐오의 역설, 혐오의 귀결_문강형준

혐오의 역설, 혐오의 귀결

 

문강형준 | 문화평론가

 

생각해 보면,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혐오’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기계처럼 끊임없이 혐오를 필요로 했다. 분단과 전쟁 이래 지금까지도 ‘북한’은 같은 민족이 아니라 대표적인 혐오의 대상으로 호출된다. 70년대 이후에는 ‘전라도’와 ‘빨갱이’(‘북한’의 변주)가 박정희 및 전두환 독재정권의 존속을 위해 혐오되어야 했고, 90년대 이후에는 여성과 동성애자, 장애인, 비정규직, 동남아 노동자 등으로 혐오의 대상이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혐오 대상의 변화 및 확장은 각 시대적 국면에서의 지배적 질서 유지와 관련된다. 요컨대 분단과 냉전 체제는 북한을, 독재체제는 전라도와 빨갱이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는 취약하거나 소수인 주체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요청한다. 가상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내부의 구조적 모순을 가리는 방식. 여기서 핵심은 혐오의 대상이 사실은 ‘죄가 없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기보다(그 작업엔 ‘끝’이 없을 것이다),혐오를 요청하는 구조적 메커니즘을 살피는 데 있다.

가령 우리 시대의 ‘여성혐오’는 어떤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하는가? 기본적으로 한국의 여성혐오 정서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가부장제의 유물이다. 가부장제의 여성혐오는 여성이 약자이자 수동적 주체로 남아있는 한 문제될 일이 없겠지만, 여성이 그렇게 살지 않기 시작할 때부터 ‘문제’가 된다. 한국이 추구했던 근대화 과정의 핵심은 자본주의의 수용인데, 자본주의적 경제는 반드시 문화적인 개방성을 함께 요구할 수밖에 없다. 여성은 경제적 주체이자 문화적 주체로 거듭나야 하고, 그렇게 되었다. 문제는 자본주의의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문화가 가부장적 가치관을 ‘대체’하지 못했고, 이 둘이 공존하는 데서 발생한다. 여성은 노동자이자 소비자로, 나아가 평등한 사회적 존재로 변모해나갔지만, 뿌리 깊은 가부장적 전통은 이를 수용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로 인해 사회 전체가 무한경쟁의 서바이벌 전장으로 변해감에 따라, 남성들은 여성들의 부상에 의해 기존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흔들리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한국사회의 여성혐오는 경제적 성장과 함께 문화적 성장을 견인해내지 못한 채 달려온, 즉 압축적인 ‘한국적’ 자본주의의 모순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여성을 자본주의 사회의 완전히 평등한 구성원으로 만들어내는 경제적,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앞으로 달려가는 것만 아는 이 눈 먼 자본주의는 시스템의 일을 사적인 문제로 뒤바꾼다. 경제는 성장하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환호 옆에 혐오로 표상되는 퇴행적인 문화적 현상이 자리 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자, 무한경쟁 속에서의 생존이 삶이라는 무대의 유일한 장치가 되었고, 이 무대 위에서의 승패는 모조리 개인의 책임이 되었다. 조금만 한 눈 팔면 ‘루저’가 될 수 있는 이 살벌한 세상에서 개인들이 ‘정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무차별적 생존경쟁 과정을 정당화해 줄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긍정’에 대한 믿음, ‘승자’에 대한 찬양, ‘힐링’의 필요 등이 이런 이데올로기들이다.

                온통 착하고, 긍정적이며, 열망으로 가득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관념들은, 그러나, 지독히도 어두운 그림자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이들,승자가 되지 못하고 패배한 이들, 그러면서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 힐링 대신 기존의 구조를 문제 삼으며 변혁을 외치는 이들에 대한 혐오가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긍정과 열망과 희망이 과도하게 예찬되는 사회는 반드시 예찬의 반대편에 놓인 이들에 대한 끈질긴 혐오도 함께 끌어들인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취약함과 대중의 불만 속에서 제3제국 건설의 희망을 말하기 위해서 나치는 ’거머리 같은 수전노 유대인’이라는 이미지를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긍정의 물신화는 강력한 혐오의 대상이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의무 대신 권리만 주장하고, 짐을 나에게 떠넘기며, 나의 자리를 위협하는 ‘여성’,실패를 떠올리게 만드는 ‘장애인’과 ‘동남아 노동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성정체성의 범주를 뒤흔드는 ‘동성애자’, 내가 이토록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이 질서를 중단시키고 변혁하려 하는 ‘좌파’와 ‘파업노동자’들, 끊임없이 보수정권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전라도 사람들’—이들은 다양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이유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내게 ‘편한’ 기존 질서를 위협하거나 그 질서에서 배제된 자들이라는 이유. 신자유주의적인 질서 속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하는 ‘나’에게 이들은 불편함을, 위협감을, 불안감을, 피곤함을 느끼게 만든다. ‘나’는 이러한 기분을 느끼지 않고 ‘편하게’ 생존경쟁에만 힘쓰며 살고 싶은 것이다.

‘혐오’가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것, 이를 뿌리 뽑기가 불가능한 것, 혐오의 대상의 죄 없음을 증명하거나 혐오의 주체들을 도덕적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혐오가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지배질서인 신자유주의는 긍정과 혐오를 함께 필요로 하고, 이 사회에서 생존하는 게 유일한 목표인 ‘우리’들을 긍정과 혐오의 이중구속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혐오의 대상이 혐오의 주체가 되는 일도 흔하다),어쩌면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다. 새로운 ‘자유’(신자유)를 추구하는 사회의 이 ‘부자유’, 이 ‘출구 없음’의 감각과 세상의 끝을 그리는 파국 서사의 유행은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다. 여성에 대한 혐오에서부터 무슬림에 대한 혐오에 이르는 혐오의 물결이 희망과 욕망과 소통과 힐링을 긍정하는 한국과 전 세계에 ‘글로벌’하게 퍼져있고, 이 긍정과 혐오의 세계화로부터 다시 세계의 끝에 대한 상상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당분간, 긍정과 혐오와 파국이라는 감각의 트라이앵글은 우리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로가 될 것이다. 이 통로가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월간 chaeg 6월호 칼럼)

이 글은 카테고리: 알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한 명이 [뉴스레터9호][칼럼]혐오의 역설, 혐오의 귀결_문강형준 에 응답

  1. 핑백: 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9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