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21호][발표문] 라캉 또는 X: 한국 프랑스철학회 2017년 여름 학술대회 발표문

최원의 [저자와의 대화] 라캉 또는 X: 한국 프랑스철학회 2017년 여름 학술대회 발표문.

원문 링크: http://experimentor.adcomm.kr/bbs/board.php?bo_table=b0503&wr_id=403

—————————————————————————————————-

출판된 지 1년이 지난 책, 그것도 상업적으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책에 대해 많은 선생님들과 이런 토론의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저로서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자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자리를 만들어주신 한국 프랑스 철학회 황수영 회장님과 회원 여러분, 그리고 특히 이 토론회를 제안해주시고 조직해주신 김은주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또 바쁘신 와중에도 저의 책에 대한 논평과 토론을 흔쾌히 맡아 주신 진태원, 이성민, 한보희 선생님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책 『라캉 또는 알튀세르』에서 제가 하려고 했던 것은 알튀세르를 가장 완강한 구조주의자로 보면서 라캉을 그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자로 제시했던 지젝의 해석을 반박하고 라캉-알튀세르 논쟁에 대한 대안적인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젝은 주로 라캉의 욕망 그래프 안에 설치된 두 층(수준) 사이의 차이에 준거해 알튀세르-라캉 논쟁을 분석합니다. 요컨대 지젝은 욕망 그래프의 아래층(1층)이 상징계의 확립을 설명한다면, 위층(2층)은 그런 상징계가 어떻게 실재에 의해 관통되는지, 구멍 뚫리게 되는지 보여준다고 주장합니다. 알튀세르가 상징계 안에서 주체의 ‘소외’가 일어나는 아래층에 논의를 한정하는 반면, 라캉은 그 위에 한 층을 더 추가해 실재(주이상스)의 차원을 도입하고 상징 그 자체로부터 주체의 ‘분리’가 어떻게 가능해지는지 보여준다는 식입니다.

  저는 지젝의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으며, 욕망 그래프의 아래층이 (상징계가 아닌) 상상계를 도식화하고 위층이야말로 상징계를 도식화한다고 주장하면서, 지젝의 오해는 라캉이 모든 주의를 기울여 구분한 두 종류의 상징을 혼동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곧 상상적 시기에 ‘미리 도착해 있는 상징’(아래층에 도입되는 모성적인 상징적 질서)과 ‘고유한 의미의 상징’(위층에서 상상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오는 순수 상징으로서의 부성적인 상징적 질서). 이 둘을 혼동함으로써 지젝은, 라캉의 ‘분리’라는 개념이 단지 대타자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하며 이런 분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주체가 아버지의 은유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놓치게 되는데, 결국 지젝의 이런 체계적인 오해야말로 상징의 절대적 필연성을 주장했던 라캉의 구조주의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을 인지 불가능하게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라캉과 알튀세르의 텍스트 안으로 실제로 들어가서 검토해보면 두 사람 사이의 진정한 쟁점은 주체가 구조에서 분리될 수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형성이 경제나 정치 같은 다른 사회적 실천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그들은 주체와 구조 중 어디에 우위(또는 강조점)를 둘 것인가 하는 이론적으로 불모적인 질문을 묻는 대신, 상이한 사회적 심급 간의 접합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 초점을 맞췄던 것이지요. 이 문제를 검토하면서 저는 제 책에서 당시 구조주의를 옹호했던 것은 여전히 라캉이었음을 보여줬는데, 라캉은 상이한 사회적 실천들 간의 관계를 ‘구조적 상동성’의 논리에 따라 이해하고 각 학문분과의 종별성을 언어학의 부당 전제된 일반성으로 환원함으로써 구조주의를 옹호했다면, 오히려 알튀세르는 언어학과 정신분석학을 모두 국지적 이론들로 바라보면서 국지적 이론의 대상들이 서로에 대해 맺는 미분적 관계가 분절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일반 이론을 구축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알튀세르에 따르면,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자신의 유명한 주장에서 시작해 점점 더 언어학이나 “언어학과 연대한” 정신분석학이 모든 인문과학들에 대한 ‘모체-학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은 이런 일반 이론의 부재 때문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알튀세르가 저항과 해방의 정치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라캉보다 좀 더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가라고 주장합니다. 반면 라캉은 혁명주의자가 아니라 극단적 폭력의 쟁점과 대결한 시민공존(civilité)의 이론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이름’에 대한 라캉의 유명한 정식화는 극단적 폭력을 감축하는 헤게모니적 이데올로기의 긍정적 차원을 인식하려는 이론적 노력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런 이데올로기의 역할은 혁명 정치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라캉 또는 알튀세르』는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라캉과 알튀세르의 수렴과 발산의 지점들을 모두 최대한 정확하고 풍부하게 파악하면서, 그 속에서 하나의 단일한 논리로는 환원될 수 없는 정치의 다면성을 그들의 이론과 함께 사유해보고자 한 시도였다고 말씀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이 제 책의 문제의식에 대한 요약이었고요…….

그런데 사실 저는 이 토론회의 준비 과정에서 특별한 주문을 받았습니다. 바로 ‘작년에 계간 <문화과학>지 주최로 열린 북클럽 토론회에서는 주로 알튀세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니 이번 토론회에서는 라캉에 초점을 맞춰 발표문을 준비해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미 출판이 1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알튀세르건 라캉이건 간에 책에 이미 제가 써놓은 내용을 이 자리에서 단순히 반복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라캉에 초점을 맞추되 제가 해석한 라캉이 알튀세르 뿐 아니라 또 다른 프랑스 현대 철학자, 특히 데리다나 들뢰즈와는 어떻게 관련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중심으로 제가 요즘 하고 있는 생각을 조금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드릴 내용은 매우 가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먼저 여러분께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오늘은 일본의 철학자들도 몇몇 거론할 예정인데, 저는 사실 요즘 일본 철학자들의 작업들을 기회가 될 때마다 매우 흥미롭게, 그리고 약간의 부러움을 갖고, 읽어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프랑스 철학자들의 관계들을 과감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그들 철학의 잘 보이지 않던 면들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 해석 자체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저 또한 그런 작업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지적 자극을 받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일본의 철학자 사토 요시유키는 발리바르의 지도 하에 쓴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한 『권력과 저항』에서 1960~70년대에 구조주의를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논쟁의 구도를 묘사하면서, 알튀세르, (후기) 푸코, 들뢰즈, 데리다의 철학적 작업들은 모두 라캉의 구조주의적 입장에 대한 반발 내지 비판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도 제 책 서문에서 이런 사토의 해석을 언급하며 일정하게 공감을 표한바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는 동시에, 라캉에 대한 이들의 비판이 외재적인 비판이 아니라 내재적인 비판이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들은 라캉의 단순한 외부에 진을 치고 원거리 포격을 해 댔던 사람들이 아니라 라캉의 진지 안으로 들어가 근거리 육탄전을 벌이거나 게릴라전을 펼쳤던 사람들이라는 말이지요. 바꿔 말해서 이들은 라캉의 이론으로부터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온 후에 그 지반 위에서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캉은 어쩌면 공공연한 라캉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비-라캉주의자 또는 심지어 반-라캉주의자 안에도 어느새 이미 들어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프랑스 철학을 하고 있는 우리는 예외 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간의 라캉주의를 비밀처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제 책의 제목 ‘라캉 또는 알튀세르’가 사실은 ‘라캉 또는 데리다’, ‘라캉 또는 들뢰즈’와 같은 ‘라캉 또는 X’의 환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저는 최근에 또 다른 일본의 철학자인 아즈마 히로키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에 쓴 『존재론적, 우편적』이라는 책에 대한 세미나를 해방촌에 위치해 있는 ‘우리 실험자들’이라는 연구공간에서 조직했습니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런 책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상적인 그 책은 데리다에 대한 아즈마의 해석을 담고 있는 책이지만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데리다 뿐만 아니라 라캉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즈마의 해석에 따르면 데리다는 전기 데리다와 중‧후기 데리다로 나뉠 수 있는데, 전기 데리다가 어떤 형이상학적 시스템이 갖는 메타 레벨과 오브젝트 레벨의 단락(court-circuite)으로 인해 그 시스템이 자괴되는 지점을 보여주는 괴델적 탈구축(또는 존재론적 탈구축)을 행하고 있다고 한다면, 중‧후기 데리다는 오히려 모든 각각의 낱말이 필연적으로 갖고 있는 에크리튀르적 차원 때문에 그것이 잘못 배달될 수 있는 가능성(오배 가능성)에 주목하는 우편적 탈구축을 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즈마는 사실상 전기 데리다의 괴델적 탈구축을 행하는 가장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이론가로 라캉을 꼽고 거기에 후기 데리다를 대립시키지요. 아즈마에 따르면, 라캉은 시스템의 불완전성 또는 불가능성이 드러나는 지점(자괴점)으로서의 ‘실재’에 주목하면서, 그것은 ‘어떠한 목적지에도 도착하지 않는다’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는 역설적 주장을 펼치는 데에서 정확히 멈춥니다. 저는 이런 아즈마의 해석은 사실 몇 가지 점에서 중대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전기 데리다의 탈구축과 후기 데리다의 탈구축을 이와 같이 구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저는 충분한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제 논의의 초점인 라캉과 관련해서도, 과연 라캉이 ‘실재’를 그런 것으로 사고했는가, 더 나아가서 과연 라캉과 데리다 사이의 쟁점이 언어의 에크리튀르적 차원에 주목했는지 여부에 있는가 자문해 보게 되는데, 이에 대한 답은 저의 견해로는 명백한 ‘그렇지 않다’입니다.

외려 저는 언어의 에크리튀르적 차원에 가장 먼저 주목했던 것은 데리다가 아니라 라캉이라고 거꾸로 주장하고 싶습니다. 「‘도난당한 편지’에 대한 세미나」(1956)와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1957)이라는 논문에서 볼 수 있듯이 라캉은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데리다보다 적어도 10년을 앞서서, 언어의 문자적/우편적 차원, 곧 lettre의 차원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했고, 그 위에 자신의 정신분석학적 담론 전체를 구축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라캉이 이런 에크리튀르의 차원에 대한 분명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려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아즈마에 따르면, 데리다의 산종(dissémination) 개념은 전통적으로 인정되어온 다의성(polysémie)과 구분된다는 점에서 그 개념적 독자성이 평가되어야 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다의성은 환원 가능하고 소진 가능한 다양성으로서 텍스트의 저변에 있는 어떤 콘텍스트(들)의 풍부함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산종은 환원 불가능하고 소진 불가능한 다양성으로 오히려 에크리튀르가 그 모든 콘텍스트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풍부함입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라는 작품이 원래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들(콘텍스트들)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의미가 나올 수 있었다고 파악한다면, 이는 다의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에크리튀르이며, 이 에크리튀르가 그 후에 오는 다양한 콘텍스트들과 마주침으로써 다양한 의미가 나올 수 있게 된다고 파악한다면, 이는 산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다의성의 모델을 따라 우리가 사고한다면, 『햄릿』 안에는 아무리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어떤 한정된 숫자의 다양성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하나하나 이끌어내는 작업은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다의성은 환원 가능하고 소진 가능한 다양성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만일 산종의 모델을 따라 우리가 사고한다면, <햄릿>이라는 기록은 도래할 그 모든 무한수의 콘텍스트들과 마주침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환원 불가능하고 소진 불가능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다의성과 달리 산종은 어떤 기록이 콘텍스트를 만나 비틀어지는 현상을 일컫고, 그러므로 언제나 사후적인 방식으로만 생산되는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종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에크리튀르의 단수성이 먼저 있고 그것이 산종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의 산종은 라캉이 환유적 누빔점(point de capiton)에 대해서 설명한 것과 정확히 동일하지 않습니까? 라캉에 따르면, 우리는 어떤 기표의 연쇄를 들을 때, 그 기표의 기의를 처음에, 그리고 듣는 순서대로 확정하지 못하고, 오직 어떤 누빔점이 형성되었을 때에만 회고적인 방식으로 확정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의 첫 번째 기표인 ‘나는’은 처음에 그것을 들었을 때는 그 기의가 일인칭 주어를 뜻하는지, 아니면 ‘날아가는’의 의미를 갖는지, 그도 아니면 ‘나라는 글자는’인지 의미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오직 문장을 다 듣고 난 후에야 우리는 ‘나는’의 기의를 확정할 수 있지요. 그러나 라캉이 동시에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 통시적 성격의 환유적 누빔점은 또 다른 기표들의 도착으로 인해 언제든 다시 해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배가 고프다’에 이어 ‘바로 지식에 굶주려 있다는 뜻이다’라는 기표사슬이 도착하게 되면 첫 번째 문장은 ‘나는 뭘 좀 먹고 싶다’가 아니라 ‘나는 뭘 좀 배우고 싶다’로 둔갑해 버리듯이 말입니다. 이런 환유적 누빔점의 형성과 해체가 가능한 이유는 애초에 라캉에게 있어서 기표가 기의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쉬르에게 있어서 ‘기호=기표+기의’이며 따라서 그의 기표 개념은 항상 기의와 결합되어 있지요. 그는 그 두 가지를 종이의 앞뒷면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종이의 앞면은 놔둔 채 뒷면만 자를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라캉은 기의로부터 분리되는 기표의 차원, 기의 없는 기표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로 인해 기표와 기의가 서로 미끄러진다는 것을 보여주었지요. 바꿔 말해서 라캉에게서 기표는 기의 또는 의미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물질적인 또는 심지어 물리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라캉이 das Ding(사물)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이런 사물로서의 언어의 차원지요. 예컨대 ‘나무’라는 기표는 나무의 관념을 기의로 갖지만, 그것과 별도로 단순히 ‘나’라는 음소를 통해 ‘나비’, ‘나병’, ‘나체’ 등의 다른 기표와 연관을 맺을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라캉에 따르면, 우리의 무의식은 바로 이런 기의 없는 기표의 차원에서 조직됩니다. 무의식은 의식처럼 의미를 따라, 의미의 논리를 따라 운동하지 않고, 기표의 차원, 다시 말해서 의미 없는 음향적 차원이나 더 나아가 소리 없는 문자의 (비)논리를 따라 운동하며,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무의식은 모순을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게다가 심지어 만일 우리가 다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면, 꿈속에 등장하는 어떤 단어는 그 자체로 두 가지 국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때 그 단어는 소리의 차원을 사실상 넘어가게 됩니다. 아즈마 자신이 지적하듯이, 제임스 조이스의 ‘He war’라는 문장에서 war는 ‘전쟁’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일 수도 있지만 ‘존재했다’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저 war는 소리 내어 읽을 수 없는 에크리튀르의 차원을 보여주며, 에크리튀르가 갖는 소리에 대한 우선성을 보여주는데, 라캉은 바로 이 에크리튀르의 차원을 ‘무의식에서의 문자의 심급’이라고 불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라캉적이건 프로이트적이건 간에) 정신분석학에 대해 사람들이 갖는 흔한 오해에 대해 한 마디 하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정신분석학적 임상치료란 결국 내담자 또는 환자가 들려주는 이러저런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들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의 도식으로 환원시켜서 ‘넌 엄마를 사랑하고 아빠를 미워하거나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이며, 그런 생각을 고쳐먹어야 해’라고 말해주는 것으로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갖는 중요성을 부인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라캉도 오이디푸스의 중요성에 대해 누누이 강조했으니까요.

  그러나 정신분석학이 만일 저런 도식으로 모든 이야기를 환원하는 실천에 불과하다면, 사실 내담자는 정신분석가를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실 그건 그리 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지 않습니까? 정신분석학에 대한 작은 안내책자를 한 권 만들어 모두들 사 보게 만드는 것이 아마 훨씬 빠르고 경제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사실 많은 내담자들은 정신분석학을 나름대로 공부하여 분석가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꿈이나 개인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것을 스스로 분석하고 ‘이게 이런 뜻 아니겠냐, 저런 뜻 아니겠냐’고 분석가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때 만일 정신분석가가 그 해석을 긍정하거나 또는 반대로 부정한다면 그는 전혀 정신분석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맞는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내담자의 나르시시즘을 강화할 것이며, ‘틀린 해석’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담자의 저항을 강화할 것이기 때문이지요(그리고 이 또한 나르시시즘적 저항이겠지요).

  분석가는 그런 식의 의미 찾기(herméneutique)에 몰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스스로를 완전히 다른 수준에 위치시켜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담자의 이야기의 의미가 아니라 그 의미의 실패의 수준에서 작업해야 하는 것이지요. 내담자가 말실수 하는 곳, 당황해 하는 곳, 침묵하려고 애쓰는 곳이 어디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석가는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 걸까요? 바로 ‘기표’입니다. 기의 없는 기표, 무의식 안에 억압되어 있는 의미를 갖지 않은 기표를 발견해서 그것을 꺼내오고 그것을 다른 기표들과 연결하여 (특히 시적인 은유의 메커니즘을 통해) 의미화하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적 해석(Auslegung)이 목표로 하는 것이지요. 이 기표는 의미의 논리를 따라서 운동하지 않고 음향적 차원이나 문자적 차원에서 운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구체적으로 발견하는 일이란 매우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이는 단지 라캉적 정신분석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데리다와 매우 친화적인 니콜라스 아브라함과 마리아 토록의 비밀어(cryptonimie)에 대한 논의는 그 핵심 메커니즘에 있어서 라캉적 기표 분석, 문자 분석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문자의 차원에 집중한다면 왜 정신분석학은 대화 치료법을 채택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확실히 모순이 아닐까요?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대화 치료의 다음과 같은 면들을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 대화 치료는 분명 음성언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음성중심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으며, 오히려 음성언어를 일반화된 에크리튀르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뤼스 이리가레는 어디선가 정신분석 클리닉에 등장하는 기이한 배치를 강조한 바 있지요. 내담자는 분석을 받기 위해 분석실에 들어오게 되면 긴 소파에 비스듬한 자세로 눕게 되는데, 그것도 분석가를 등지고 그렇게 눕게 됩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대화의 배치가 아니지요. 이런 배치는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내담자를 일상적인 현전(présence)의 모드에서 빼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음성언어를 통해 어떤 오염도 없이 그대로, 그리고 매우 즉각적으로 상대편의 영혼 안으로 전달되고 있다는 현전의 환상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음성중심주의에 연결되어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겠지요. 정신분석 치료의 기이한 배치는 바로 이것을 교란시키고 방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언어의 에크리튀르의 차원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제가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데리다 번역자로도 유명한 정신분석가 앨런 배스 선생님의 강의를 두 학기 정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배스 선생님은 자신의 분석이 실패했던 사례를 하나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내담자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정신분석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은 내담자가 옆에 놓여 있는 티슈를 담아 둔 실버 커버를 통해 분석가인 자신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 즉시 분석을 중단하고 그 내담자를 다른 분석가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지요. 배스 선생님은 이 때 그 실버 커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하나의 페티시를 형성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을 현전의 페티시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제 우리는 라캉적 정신분석학이 괴델적 탈구축을 하는 데에 머물고 있다는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캉적 정신분석학은 시스템이 자괴되고 있는 곳에 놓여 있는 텅 빈 대상으로서의 대상 a를 단순히 지적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은폐되어 있는 ‘실재’로서의 구체적인 기표 또는 문자를 발견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pur-loin-ed letter, lettre en souffrance, 배달이 지연되고 있고 고통받고 있는 편지/문자를 다시 배달하기 위한 작업이 정신분석학적 치료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이는 라캉이나 데리다나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는 말일까요? 글쎄요.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적어도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라캉과 데리다 사이의 논쟁은 아즈마가 말하듯이 에크리튀르의 차원에 주목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라캉에 대한 데리다의 1975년 비판(「진리의 배달부」)은 아즈마가 말하듯이 괴델적 불가능성만 강조하는 라캉 정신분석학의 부정신학적인 성격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팔루스-로고스중심주의를 향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데리다는 부성적 상징법칙 또는 아버지의-이름이 편지를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하게 만든다는 라캉의 관점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는 제 책에서, 라캉이 사실 1973~74년 세미나인 『앙코르』에서 부성적 상징법칙의 필연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따라서 ‘편지는 자신의 목적지에 반드시 도착한다’라는 자신의 중심 테제 또한 포기했다는 것을 논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이때 더 이상 ‘과학’이 아닌 ‘노하우’로서의 포스트-정신분석학으로 이행한다고 평가했지요. 그의 스물세 번째 세미나에 등장하는 생톰(sinthome)에 대한 논의는 이런 관점에서 부성적 은유로 한정될 수 없는 수많은 상이한 은유들의 폭발적인 과잉생산이라는 조이스적 실천에 주목하는데, 이는 사실상 데리다의 철학과 상당히 수렴하는 것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통상 믿는 것과는 달리 데리다는 라캉과 전혀 다른 곳에서 작업했던 것이 아니라, 푸코 또는 오히려 발리바르 식으로 말한다면 라캉이 만들어 놓은 바로 그 에피스테메 안에서 이단점(point d’hérésie)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사실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저는 심지어 라캉의 아버지의-이름이라는 개념조차 쉽게 기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책의 마지막 부분은 폭력이라는 쟁점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서 저는 라캉의 아버지의-이름을, 데리다 식으로 표현하자면, ‘의사-초월론’적인 방식으로 다룰 필요성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키아벨리적인 방식으로 좀 더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양태를 갖는 복수의 초월적인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때 데리다의 논의는 매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가 초월적인 것을 단순히 부정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라캉이 말한 아버지의-이름이라는 것도 단순히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라캉은 은유 또한 환유와 마찬가지로 기의 없는 기표나 문자의 수준에서 이론화 했지요. 물론 그다지 없는 의미를 생산하는 환유와 달리 라캉에게서 은유라는 것은 의미의 생산으로 파악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라캉은 이런 의미의 생산은 의미와는 상관없는 차원에서, 곧 기표 또는 기표보다도 더 심층에 놓여 있는 음소(phonéme)나 문자의 차원에서 발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은유를 pas-de-sens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pas는 아마도 중의적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의미 아님 또는 의미 없음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의미의 비의미적 디딤돌 또는 비의미에서 의미로 나아가는 첫 걸음을 지시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와 관련하여 저는 이번에는 라캉을 들뢰즈와 접근시켜 보고 싶습니다. 과연 들뢰즈는 많은 이들이 말하듯이 라캉의 완전한 대척점에서 작업했던 것일까요?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은 무엇보다도 의미의 생성에 대한 발생론적인 추적의 시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물질적이고 경험적인 질료가 그 자체의 역량만으로 비물질적인 의미를 발생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물으면서, 의미의 발생 또는 단적으로 의미 자체를 바로 ‘사건’이라고 명명했지요. 그런데 들뢰즈가 질료로부터의 의미의 이런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 의존하는 이론은 바로 라캉의 정신분석학이었습니다. 적어도 『의미의 논리』에서 들뢰즈의 설명은 제가 보기엔 라캉적 인식의 장을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비물질적이거나 이념적인 의미를 발생시키는 사건으로서의 특이점을 설명하기 위해 두 계열(기표와 기의의 계열)에 동시에 속하는 역설적 심급에 대해서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 역설적인 심급의 특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 심급은 두 계열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놀랍게도 이 순환이 [두 계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기표 계열과 기의 계열 양자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두 얼굴의 심급이다. 그것은 거울이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말이자 사물이며, 이름이자 대상이며, 의미이자 지시된 것이며, 표현이자 지시 작용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것이 돌아다니는 두 계열의 수렴을 보장한다(물론 이는 그들을 끊임없이 발산하게 만든다는 조건하에서이다). (『의미의 논리』, 이정우 역, 한길사, 104쪽, 강조는 인용자)

저는 제 책의 앞에 삽입한 용어해설에서 라캉의 ‘억압’ 개념에 대해 설명하면서 라캉에게 있어서 억압이란 다름 아닌 기표의 억압이며 어떤 특정 기표가 막대 아래의 기의의 영역으로 눌려 내려가 그곳에서 기의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현상을 지시한다고 말했습니다. 기표의 영역에는 따라서 하나의 결여(공백)가 생겨나게 되고 기의의 영역에는 하나의 과잉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정확히 이렇게 두 계열이 단락되는 지점에 놓여 있는 심급을 역설적 심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다른 구절을 인용해보지요. 들뢰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조주의의 문학적 짝은 카뮈가 아니라 캐럴이다. 왜냐하면 부조리의 철학에 있어 무의미란 단순히 의미와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반대로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너무나 많은 의미가 존재한다. 과잉은 자체 결핍으로서의 무의미에 의해 생산되고 과잉 생산된다. 야콥슨이 정의한 제로 음소, 즉 어떤 규정된 음운학적 값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음소와 대립하기보다는 음소의 부재에 대립하는 음소처럼, 무의미는 어떤 특정한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 생산물과 우리가 원하는 단순한 배제의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과잉생산하는 의미에보다는 의미의 부재에 대립한다. 무의미란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 줌을 수행함으로써 의미의 부재에 대립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의미(non-sense)라는 말에 의해 이해해야 할 바의 것이다.(150,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우리는 들뢰즈가 의미의 발생을 설명하기 위해서 바로 라캉의 은유 개념에 의존하고 있음을 어떤 모호함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들뢰즈는 특히 여기서 가방어(portemanteau), 다시 말해서 합성어 형성의 메커니즘을 통해 의미의 생산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데, 이는 사실 제 책의 제1장 마지막 절에서 제가 보여드린 것처럼 라캉이 1957~58년 세미나, 곧 다섯 번째 세미나에서 이미 풍부한 방식으로 설명한 것이지요. 1969년에 나온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는 확실히 라캉의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거나 기껏해야 변주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말하면 곧바로 예상 가능한 반론은, 들뢰즈의 이런 논의는 ‘정적 발생’에 한정된 것이며 ‘동적 발생’은 이런 라캉적 논의 틀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라캉은 캐럴의 수준에 멈추어 있다면 들뢰즈는 아르토의 수준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겠지요.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라캉에게 있어서 은유는 확실히 캐럴적인 “표피적 수준”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아르토적인 “심층적 수준”과 무관한 것까진 아닐지라도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려고 하진 않는다는 점에서 확실히 정적 발생에 연관되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라캉에게 사물로서의 언어는 단지 은유나 또는 환유에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하는 존재(parlêtre)로서의 대타자(모성적 대타자)와의 첫 마주침에서 주체가 경험하는 ‘기의 저편’의 차원을 가리킵니다. 무엇보다도 이는 아직 환유도 은유도 형성되기 전에 어떤 의미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주체가 자신의 목구멍에 숟가락으로 억지로 쑤셔 넣어지고 있는 사물로서의 기표, 기의 없는 기표를 간신히 삼킬 때 체험하는 차원인 것이지요. 목구멍이 긁히는 소리 없는 소리, 그 비명의 차원 말입니다.

  그러나 들뢰즈와 라캉이 정확히 일치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이런 ‘기관 없는 신체’로서의 질료적인 기표의 수준에서의 경험을 진정 하나의 ‘발생’으로 봐야 하는가 하는 쟁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여기서 들뢰즈와 라캉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들뢰즈는 발생론적인 관점에서 초월성(곧 의미)을 생성시키는 경험적인 것으로서의 질료적 기표나 기표의 조각들을 말하고 있지만, 라캉은 그런 사물로서의 기표라는 것은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대타자에 의해 강제되거나 부과된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벤베니스트가 소쉬르 이전의 19세기 언어학과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을 대조하면서 전소쉬르적인 언어학은 언어의 기원, 언어의 발생이라는 질문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한다면, 포스트소쉬르적인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의 기원이라는 질문에 대한 과감한 거부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게 됩니다(지나가는 길에 제가 책에서 말했듯이 알튀세르는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도 언급해 두고 싶습니다). 확실히 들뢰즈는 그런 면에서 볼 때 그가 구조주의적 논리를 차용해 올 때조차도 전-구조주의 또는 반-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가 아니라)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또 다른 일본의 철학자인 고쿠분 고이치로가 『들뢰즈 제대로 읽기』에서 말했듯이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 이후 과타리와의 공동 작업에 돌입함으로써 어떤 심대한 변화를 겪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통해 그가 완전히 라캉의 틀을 벗어나는 논의를 시작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솔직히 말해서 이런 주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에 대해 아직 이렇다 할 확신이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말하자면 저의 앞으로의 연구 주제인 셈이지요. 다만 이 자리에서는 제가 가진 소박한 문제의식을 여러분과 공유하는 것에 만족하고 싶습니다.

  『천 개의 고원』에 등장하는 리좀적인 것과 수목적인 것의 대립 및 리좀적인 것의 특권화가 있기에 앞서, 『안티 오이디푸스』에는 이미 그런 리좀적인 것을 예상하는 논의가 나오고 있지요. 많이 인용되는 그 책의 첫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쉬고, 열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e ça)라고 불러 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김재인 역, 민음사, 23쪽) 오래 전에 김재인 선생은 여기서 “그것”은 입이라고 볼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하자면, 입은 말할 때는 말하는 기계이지만, 키스할 때는 키스하는 기계이고, 성기를 애무할 때는 씹하는 기계이며, 숨 쉴 때는 호흡하는 기계라는 것이지요. 사실 들뢰즈와 과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드는 유명한 예인 말벌과 서양란(오르키데) 사이의 관계도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전혀 상이한 두 개체가 서로 접속하면서 서로의 본질을 전혀 다른 맥락으로 탈영토화시키는/재영토화하는 관계 말입니다.

  그런데 라캉주의자의 눈으로 본다면, 이는 정확히 앞서 설명한 환유적 누빔점의 형성이 아닐까요? 입이라는 기표, 말벌이라는 기표, 서양란이라는 기표는 각각 자신의 본래의 기의를 갖는 것이 아니며 오직 그 옆에 오는 (누빔점의 역할을 하는) 또 다른 기표에 의해 그 본질을 부여받을 뿐이라고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만일 그렇다면, 리좀적인 것이란 사실 환유를 의미하며, 수목적인 것이란 사실 은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과연 라캉을 벗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라캉이 마련해 놓은 바로 그 지반 위에서 내적인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아직 확실히 이렇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라캉은 생각보다 훨씬 더 우리 가까이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 등 뒤에 이미 와 서 있으며, 우리 등 뒤에서 그 약간은 음탕해 보이고 약간은 재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읊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지요.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만큼은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저 자신이 ‘라캉-또는-X주의자’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설익은 생각을 끝까지 참고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21호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신간안내] 오창은 평론집 『나눔의 그늘에 스며들다』 (문화다북스, 2017)

 『나눔의 그늘에 스며들다』 (문화다북스, 2017)

문학평론가 오창은의 세 번째 평론집. 저자는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에서 당선된 이후 계간 「실천문학」의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2017년 현재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 중앙대 다빈치교양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오창은 문학평론가는 당대 시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삶과 결합된 평론을 줄곧 써왔다. 시대를 외면하지 않고 시대의 중심에 들어가 올곧은 평론을 쓰려는 저자의 태도는 이번 평론집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문학이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은 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문학을 나눔과 스밈의 식사자리라고 말한다. 문학은 낯선 것을 배제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고, 급하게 다그치지 않는 여유가 있으며, 깊이 음미하고 공감하려는 윤리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평론집의 제목을 ‘나눔의 그늘에 스며들다’로 정한 것은, 한국사회의 아픔을 되새겨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문학 비평이 나의 이야기이면서, 누군가의 이야기이고, 모두의 이야기가 되는 나눔이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자신의 비평이 시대의 어둠과 그림자, 아픔과 상처에도 눈길이 가는 글쓰기였다고 말한다. 문학 텍스트를 통해 작가는 독자에게, 비평가는 작가와 독자에게, 독자는 모두의 삶의 저변에 스며듦으로써, 삶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에 흠뻑 젖어드는 나눔의 경험이 공유되었으면 한다.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정책자료] 새정부문화정책토론회

Download (PDF, 308KB)

Download (PDF, 498KB)

Download (PDF, 530KB)

Download (PDF, 2.96MB)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정책자료] 예술인 종사실태를 고려한 고용보험 적용방안 연구

Download (PDF, 2.73MB)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정책자료] 예술인고용보험 적용을 위한 연구

Download (PDF, 1.75MB)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칼럼] 써드라이프의 시대가 온다 (이동연)

써드라이프의 시대가 온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전 세계 게임스타일의 지형을 흔들었던 ‘포켓몬 고’의 열풍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로 읽을 법하다. ‘포켓몬 고’는 증강현실 기술과 소위 ‘구글맵’으로 대변되는 위치 추적 장치를 이용해서 최고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의 캐릭터들을 포획하는 게임이다. 기술적으로는 높은 수준을 적용한 게임은 아니지만, 컴퓨터와 미디어 안에 갇힌 기존 게임의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말하자면 게임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충격효과는 게임을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있다. 기존 게임들은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여, 가상공간에서의 특이한 체험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꾀했다. ‘써든어텍’ 같은 1인칭 슈팅게임, ‘리니지’, ‘와우’같은 온라인 게임 등은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생생한 현장감을 즐기게 하지만, 그 자체가 현실공간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융합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상공간이 실제 현실 안으로 들어와 개인의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놀이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포켓몬 고’는 이러한 현상의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써드라이프’(Third Life)라고 명명하고 싶다. ‘써드라이프’는  말 그대로 제3의 삶의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현실공간에서 물리적인 삶을 사는 단계가 ‘퍼스트라이프’라고 한다면, 가상공간에서 잠시 흥미롭지만, 허구에 불과한 체험을 하는 단계는 ‘세컨드라이프’로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한 때 큰 인기를 얻었던 ‘세컨드라이프’라는 게임이 이에 해당된다. 실제 현실과 구분되어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집을 짓고, 가상의 애인과 결혼을 하고, 가상의 직장을 다니는 게임에 심취한 사람들은 대체로 현실공간에서 만족하지 못한 삶을 가상공간에서 보상받고 싶은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써드라이프의 시대는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판타지 혹은 허구적인 대리 만족을 현실공간에서 체험하게 함으로써, 가상현실이 곧 실제 현실이 되게 하는 삶을 기능케 한다. 써드라이프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함께 연계-결합이 가능한 초현대 하이퍼 현실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한다. 최근 유행하는 “3D프린터”, “홀로그램”, “증강현실”을 활용하는 기술혁신과 그 기술을 활용한 놀이 콘텐츠들은 라이프스타일의 문화환경이 써드라이프로 이동 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6년 다보스 포럼 이후, 한국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혁신과 시민들의 일상의 변화에 대해 많은 예측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서는 “생명안전, 인공지능, 산업자동화, 메이커운동,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딥러닝, 스몰비즈니스, 원격의료서비스” 등이 각광받을 예정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신경제가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인데, 자본의 논리가 아닌 문화의 논리에서 볼 때, 신경제란 과학과 공학의 첨단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윤택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경제, 인간에게 이로운 신 홍익인간 산업,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며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신인류산업을 의미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정작 그러한 산업적 변화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중요한 것은 산업과 경제, 자본의 재생산에 있는 게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래 사회에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바뀌고, 개인은 어떤 문화를 원하는 가에 대한 감성적 간파이다.

  써드라이프의 시대는 유비쿼터스 정보 기술과 생명공학 혁명에 따라 개인의 신체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그래서 “초감각지능산업”, 이른바 가상현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창의적인 이야기가 가미된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산업이 발전할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개인의 인지적 역량과 일상적 놀이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미래 예측이 필요하다.

  써드라이프 시대는 또한 ‘예술과 문화, 기술과 과학’이 통섭하여 새로운 초감각적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섭적 환경이 주는 감각의 새로운 지평들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문화 혁명에 따라 기존의 문화콘텐츠 영역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문화콘텐츠 산업이 어떻게 지배적인 영역으로 부상하고 이들이 이용자들의 기술 감각과 콘텐츠 관여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일지에 대한 전망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개인의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써드라이프”의 시대는 책, 영화, 음악, 게임, 모바일, 메신저커뮤니티와 같은 미디어콘텐츠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체험이 그 자체로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칼럼] 지식생산의 민주화 (강내희)

한겨레 칼럼

지식생산의 민주화

강내희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

오늘 칼럼 쓰는 데 참고하고자 발터 베냐민의 ‘내 장서를 풀며’라는 글을 다시 읽어 보려고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결국 못 찾고 말았다. 그 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누가 자기 장서를 보고 “선생은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것 아니냐”고 하자 십분의 일도 못 읽었다며 집에 도자기 그릇이 있다고 매일 사용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프랑스가 한 말은 사실이라고 본다. 나도 읽지 않은 무수히 많은 책을 서가에 보관하고 있다.

  베냐민은 책 모으는 일이 꼭 읽기 위함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용 때문보다는 흥미로운 물건이라는 점 때문에 책을 수집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책은 그 생김새나 냄새, 또는 그것을 구한 장소나 관련된 어떤 사연 때문에 소중할 수 있다. 이럴 때 그것은 지식의 보고이기 전에 소유의 대상이다. 아니 책이 소유의 주체가 될 때도 있다. 책 ‘안’에서 살아가는 ‘책벌레’, 서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애서가, 마음에 들면 꼭 사고 마는 사람에게 책은 이미 그의 주인이다. 이처럼 책은 꼭 읽을 대상으로만 그치진 않는다.

  하지만 책 수집은 이제 먼 옛날이야기다. 책 수집가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것은 베냐민도 자기 시대에 인정한 바다. 물론 그는 책 수집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기꺼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관행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퇴색해가는 그것의 모습도 소중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의 시대는 전성기가 끝났고, 책 수집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으며, 화면 읽기가 보편적이 되면서 ‘독서’라는 표현도 시대착오적일 정도가 되었다.

  사실 오늘 아침 베냐민의 책을 찾지 못했어도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피디에프 파일로 된 그의 글을 인터넷으로 바로 찾아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을 쓸 때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이 10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근년에 출간한 단행본 두 권을 준비할 때도 ‘구글링’을 자주 사용했던 편이다. 개인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서재는 여전히 소중한 공간이지만, 컴퓨터 화면으로 글을 읽는 일이 잦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와서는 자료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현직에 있을 때는 학교 도서관에 접속해 그곳과 연결된 다른 도서관 자료까지 검색해 내려받을 수 있었으나 정년 뒤에는 그러지 못한다. 주변에서 알아보니 비정규직이나 독립 연구자의 경우 비슷한 불편을 겪는 사례가 많았다. 얼마 전 참석한 한 토론회에서 듣기로는 국내 대학 도서관 가운데는 학술지 등의 구독료로 연 100억원대 예산을 쓰는 곳도 있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이긴 하지만, 그런 대학에 적을 둔 학생과 교원, 연구자는 세계 유수의 도서관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는 셈이다.

  반면에 내가 학장으로 있는 곳에서는 외국 자료 구입이란 상상도 못한다. 재정이 열악한 대안대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생들이 있고, 교수들이 있는 곳인데, 학술자료를 아예 접할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한국에는 독립 연구자도 많다. 이들 대부분은 대학 도서관 자료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자료 검색을 원활하게 할 수 없는 연구자는 연구 등 지식생산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한국의 지식생산은 다른 열악한 점도 많지만, 학술자료에 접속하기 어려운 연구자들이 있는 만큼의 장애도 갖고 있는 셈이다.

  요즘 연구자는 책 수집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전자책이 제법 많이 보급되었고 기존의 책도 피디에프 파일로 전환되어 있거나 특히 학술자료가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 높은 자료를 읽으려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문제다. 대학에 적을 두지 않은 연구자도 학술자료를 쉽게 검색할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지식생산에 참여해 사회적 창의성을 높일 수 있다. 연구자들이 필요한 자료를 쉽게 구하게 되면 지식생산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그러려면 대학 도서관을 통하지 않고도 좋은 자료를 볼 수 있게 적어도 공공도서관 한 곳에서는 외국 학술지를 포함한 자료를 확보하고 연구자 대중이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식생산도 민주화될 수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0161.html#csidx46d01fdfa4182e7b0946e1d2891b572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칼럼] 자라지 않는 남자들의 연대 (손희정)

경향신문 칼럼

자라지 않는 남자들의 연대

손희정
문화평론가

‘자라지 않는 아재들’은 최근 한남 엔터테인먼트의 흥미로운 광경 중 하나다. <아는 형님>(JTBC)에서 아재들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으며, <미운 우리 새끼>(KBS)에서는 아직도 ‘생후 오백 몇 개월’을 사는 어머니의 아들이다. <아재 독립 만세!! 거기서 만나>(TV조선)의 내레이션은 원로배우 김영옥이 맡았다. 나이든 ‘어머니뻘’ 여성이 아재들을 굽어보며 행동 하나하나에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코멘트 하는 것이다.

  이 퇴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특히나 우리 시대에 아버지란 <명량>이나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70~80대 어르신의 얼굴이 되어버린 지금, 대중문화는 왜 40~50대 남자를 어른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가 한국 사회의 남성 중심적 역사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386 남성들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고, 그리하여 어른의 몸에 갇힌 ‘어린 아들’의 정신세계를 살고 있다. ‘자라지 않는 아재’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문 대통령이 얼마나 성숙한 어른인지와 무관하게 그에게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며 “오구오구 우쭈쭈”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문인들이 대선 당시 그를 지지하기 위해 만든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가 ‘www.5959uzuzu.com’이었다는 건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 사이트는 비판적인 칼럼이 한 편 등장하자마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이에 대한 책임 있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 그저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표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기실 여당 및 그 지지자들이 짜고 있는 정치적 프레임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때 정청래 전 의원의 ‘소수 권력’이라는 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팟캐스트 <파파이스>에 출연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아직은 ‘소수 권력’이라고 말하며 ‘감시 없는 지지’를 호소했다. 이 말은 기이하다. ‘소수’란 단순히 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위계에서 하위에 놓인 존재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할 때, ‘소수 권력’은 말 그대로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불가능한 유머에 불과하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역사 인식 안에서 유시민 작가의 ‘진보 어용 지식인 선언’ 역시 가능해진다. 청와대 권력만 바뀌었을 뿐 한국 사회의 적폐 권력은 그대로라고 주장하면서, 유 작가는 문재인 정부의 ‘열악한 위치’를 이유로 ‘어용’이라는 단어에 새겨질 수밖에 없는 수치심을 간단히 지워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보, 어용, 지식인이라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세 단어가 하나의 단어를 구성하는 놀라운 시대를 살게 된다. 이야말로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남자들의 화려한 정치적 쇼다.

  하지만 ‘어용 지식인’조차도 냉정한 얼굴로 문재인 정부의 선택에 철퇴를 내리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앞에서였다. 그는 <썰전>(JTBC)에 출연하여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한다”면서 강 후보자를 폄하했다. 국민의당에서 “지금은 안보 현안이 중요한 만큼 이번에는 국방을 잘 아는 남자가 해야 한다”거나 “여객선이라면 모를까 전시를 대비할 항공모함 함장을 맡길 순 없다”며 부적격 입장을 낸 것과 다르지 않은 수사다.

  ‘어용 지식인’은 자신들의 권력적 지위를 부인하고 계속해서 ‘지켜 달라’고 징징거리면서도, 여성 앞에서만은 짐짓 근엄한 척한다. 남자들이 스스로 자라지 않았다고 주장할 때에도 누구를 배제하면서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가는 명백해 보인다.

  이 철없는 남자들의 강고한 연대는 역시 탁현민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을 비호하는 것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탁현민의 10년 전 책은 그저 ‘젊은 한때의 과오’가 아니다. 사과 한마디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어른스럽게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6122115005&code=990100#csidx27b4e3b328375c9bdaae3d4515e399d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

[뉴스레터21호][칼럼] 인격? 우우우! (서동진)

한겨레 칼럼

인격? 우우우!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지난 몇 주 성가시리만치 문재인 정부의 새 내각 인선을 둘러싼 청문회가 이어졌다. 새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될 인물의 면면을 헤집고 고발하면서 적임인지 아닌지 시비가 뜨거웠다.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될 인물이, 누가 봐도 본보기가 될 만한 인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범적인 인격을 지닌 이들에 의해 세상이 좌지우지된다는 선량한 믿음 속에는 어딘지 구린 구석이 있다. 의롭고 떳떳한 인물을 정치지도자로 뽑아야 한다는 원칙은 그럴듯하지만 정치가 인격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볼 이유는 전연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 숭배는 오늘날 갑질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호황을 누리는 주인의 인격에 대한 호된 비판과도 상관이 있을 듯싶다. 헤겔은 어느 책에서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주인이 좋은 주인인 줄만 알고 도덕적으로 지저분한 짓을 한 주인을 흉보면서 주인을 이겼다고 믿는 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크게 먼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 정치 행위는 정당이나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으로부터 더없이 멀어져 있다. 대신 명사나 스타와 같은 정치지도자에 대한 팬 혹은 ‘안티’가 되는 것이 그나마 정치 행위라면 행위이다. 당연히 인격이라는 휘장은 개인의 내면적인 인격을 들여다보느라 그 뒤에서 자연처럼 굳건히 굴러가는 얼굴 없는 지배를 잊는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가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곳의 사람들과 돈과 상품으로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세계의 모델로 삼는다.

  배려, 존중, 인정, 공감 등의 모호한 윤리적 개념이 사회적 관계를 바꾸는 원리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모든 개념들은 오직 개인들만이 살아가는 세계, 원하든 원치 않든 어쩔 수 없이 생존을 하자면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관계를 까마득히 잊은 세계를 가리키는 탓이다. 내가 너와 맺는 관계의 윤리는 고용도, 계약도, 자격도, 소외도 없는 세계일 것이다. 너를 배려하기 위해 후한 임금을 준다거나 너에게 공감하여 이자를 받지 않겠다거나 너를 존중하기 위해 기꺼이 국적을 주겠다거나 하는 일은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자연현상인 듯 오늘의 날씨와 함께 등장하는 오늘의 주가는 어떤 인격적인 만남 없이 펼쳐지는 세계의 풍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오늘의 온도처럼 오늘의 삶의 바로미터로 삼는다. 그런 세계에서 인격이 더없이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심상찮은 일이다.

  평생 법 없이도 살 것처럼 순하게 묵묵히 일만 하는 부모들을 보며 대학으로 공장으로 갔던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걸음을 디뎠다. 그들이 본 것은 아름다운 인격 따위는 아랑곳 않은 채 군림하는 구조적 지배였다. 그때 나는 어떤 불온한 대학생 서클에서 세미나를 하다, 대체 몇 번이나 구조란 말들을 뱉는지 세어보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구조를 향해 아무런 구조도 없는 거리로 나섰다. 전투경찰만 보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도로에서 그들은 목이 터져라 새로운 세상을 요구했다. 민주화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손을 뻗어야 할 곳은 다시 그 구조일 것이다. 가진 자들이 행한 구조조정을 잊은 채 인격만 따지다간 이제 다시 그 구조를 바로잡을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인격이라고? 우우우우우!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0032.html#csidxf6e68856e0fe3418c204e145a3be4dd

카테고리: 알림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