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20호][연구자료] 블랙리스트 제도개선 국회토론회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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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연구자료] 네덜란드 문화창조산업 동향, 각국문화정책동향(프랑스, 중국, 일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네덜란드 문화창조산업 동향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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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프랑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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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중국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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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일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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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세상 읽기]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한국에서 인종적 소수자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인정되지 않는’ 존재였다. 인종적 소수자는 ‘혼혈 연예인’으로 범주화되어 계속 미디어에 등장했지만, ‘시청자들’의 단일민족 신화는 이어졌다. 순수혈통 계승의 서사는 ‘악의 없이’ 인종적 소수자를 사회에서 지워버렸다. 인종적 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는 데에는 단일혈통의 서사만이 아니라 사회 통념과 미풍양속의 이념이 함께 작용했다. 인종적 소수자는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퇴폐풍조의 온상으로 여겨져 ‘혼혈문제’라는 분류 항목으로 처리되었다.

혈통 계승과 사회 통념의 명목으로 소수자는 삭제 처리되었고, 대상을 바꾸며 반복되었다. 사월혁명 이후 5·16 쿠데타 세력은 ‘제어할 수 없는 미성년 주체의 정치적 열정’에 강한 공포를 느꼈다. 박정희 체제는 청소년을 범죄의 온상(우범소년)으로 간주하고 무지막지한 통제를 지속했다. 학교 인권 조례와 청소년 인권 조례 제정을 위한 운동은 이런 오래된 ‘적폐’와 싸우는 최전선이다. 학교 인권 조례 제정은 극우 세력에 의해 계속 저지되고 있고, 청소년 노동 인권 조례 역시 혐오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작년 12월에는 인천시, 이번 달에는 달서구가 조례 제정을 보류했다. ‘정상적’ 인구 재생산이라는 혈통 계승 서사와 청소년을 자기규율이 불가능한 미숙한 집단으로 분류하는 범주화를 통해 청소년 인권 침해는 이어졌다.

한국에서 소수자를 삭제하는 방식은 독재와 파시즘을 정당화하고 계승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혈통 계승의 서사는 매번 혁명을 배신하고, 학살된 소수자의 피를 제단에 바치며 이어졌다. 성 소수자에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발언이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한국교회연합을 방문한 다음날 자문단 ‘10년의 힘’이 출범했다. 문 전 대표는 축사에서 차기 정부를 “제3기 민주정부”라고 칭하고 “제3기 민주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고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 정부가 ‘10년의 힘’의 계승자라는 이런 논리는 자신을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의 적자로 자리매김하는 혈통 계승 서사의 전형이다.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를 계승하는 적자라는 혈통 서사는 또다시 소수자를 배제하고, 혁명의 열망을 배반한다. 이 장면은 역사적이다. 그 역사는 단지 성 소수자 문제와 관련된 역사가 아니다. 혁명을 배반한 역사, 혁명 대신 상속만이 남은 역사가 이 장면에서 다시 연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성 소수자라는 특수 문제로 전가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혁명을 배신한 혈통 서사에 입적한다. 그렇게 적자들의 혈통 서사는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계승되는 것이 아니고 발명되는 것이며, 정치적 주체는 적자 경쟁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 정국이 혁명의 시간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누적된 세습 권력과 ‘아비-적자’로 이어지는 ‘한국식 민주주의’와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촛불 정국의 혁명적 열기가 고조되면서 미지의 정치적 주체가 출현하고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광장을 불태웠다. 자신을 ‘민주주의의 적자’로 여기는 이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이 마냥 반갑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상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자들’이라는 기이한 가부장적 혈통 계승의 서사가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적자들’은 혁명을 소문으로 만들고 있다. 혁명의 열정은 타오르는데 자칭 ‘민주주의의 적자들’은 아비의 목은 치지 못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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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소설과 지성 (이명원)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소설과 지성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황해문화>를 읽다가 문학평론가 오길영의 평론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는 세 권의 창작집을 대상으로 문학에서의 지성 문제를 논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문제제기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출발점은 한 좌담에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한 발언이었다. 요즘 소설을 읽어보려 애썼는데, 작가들이 자전적 경험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소설에서 객관화의 문제는 중요하다. 개인과 상황의 갈등은 근대소설의 핵심 문법인데, 많은 경우 현대소설은 개인의 내적 갈등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자의식과 정서 모두에서 주관적 과잉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1인칭이나 3인칭과 무관하게 주인공 시점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다.

오길영은 이인휘의 <폐허를 보다>에 대한 세간의 호평에 이견을 제출한다. 이 소설 속의 화자 ‘나’는 “너무 쉽게 인물과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소설 속에서 되풀이되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이 정서적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현장에 대한 묘사와 등장인물의 상황인식 역시 “현 단계 노동과 자본이 처한 실상, 그 사이의 세력관계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묘사”를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정조”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침묵과 삶의 복마전 속에서 소설에 대한 재기를 다짐한 작가 입장에서는 아픈 비판일 수 있다. 만약 내가 이인휘의 소설에 대해 썼다면, 오길영이 지적한 한계를 단편 양식의 불가피성이라는 문제로 논의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의 전반적인 기저음을 이루고 있는 상실감과 부채의식을 소시민성과 관련해 분석하면서, 이인휘의 편에서 공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는 유혹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길영의 주장이 중요한 문제제기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어찌 보면 내가 공감적 논의라고 겸양되게 표현한 것 역시 오길영이 말하는 “강인하고 냉철한 지성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문학비평에서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연루된 동족관계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지성의 힘으로 작품과 대결하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작가와 화해하려는 포즈가 비평으로 오인되는 일도 자주 나타난다.

백수린의 <참담한 빛>이나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에 대한 논의 역시 귀담아들을 만하다. 오길영은 백수린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공간적 배경인 이국의 도시들이 갖는 효과의 적절성에 대해 말한다. 즉 백수린의 소설에서 이국적 공간은 “독특한 현실탈출의 분위기, 혹은 인물들의 고통과 기억을 강화시키는 주변적 분위기로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물과 공간이 단지 애매몽롱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면 최은영의 소설은 공간적 배경의 이국성은 유사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생활감각”이 살아있으며, 서사와 묘사에서의 “구체적 섬세함”은 문학적 정확성 혹은 지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소설가는 지성을 필요로 한다. 소설에서의 지성이란 인물들로 하여금 주관주의의 유혹을 차단하고, 인물과 상황을 구체화하고 객관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단편 양식에서 등장인물은 작가를 향해 정서적으로 동일시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러나 역시 소설은 ‘나’가 아닌 ‘타자’를 부각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내적 상황은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외적 상황 전체를 음미할 공간을 여는 데에 읽기의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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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빼앗긴 극장에도 봄은 오는가? (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세상읽기] 빼앗긴 극장에도 봄은 오는가?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주 광화문 블랙텐트에는 두 개의 의미 있는 공연이 있었다. 하나는 이윤택 연출의 연희단 거리패의 ‘씻금’ 공연이고 다른 하나는 정월 대보름맞이 ‘얼쑤, 탄핵하세!’ 국악공연이다. ‘씻금’은 진도 씻김굿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극으로 이런저런 사연으로 진도 앞바다에 몸을 던진 망자들의 혼을 달래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천을 떠돌던 망자들이 각자의 원혼을 씻고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려할 즈음, 저 멀리서 울부짖는 아이들의 통곡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은 세월호 어린 희생자들을 위한 애도의 시간이기에 충분하다. 공연을 마치고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하얀 천을 들고 배우들과 관객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나아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넋을 달랬다. 당초 원작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씻김의 예식은 광화문 광장 블랙텐트였기에 더 깊은 공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주 토요일 퇴진행동 본부의 본 집회를 마치고, 저녁 8시부터 블랙텐트에서 있었던 ‘얼쑤, 탄핵하세!’ 국악공연 역시 감동의 무대로 연주자와 관객들이 하나가 되는 자리였다. 특히 공연의 맨 마지막 순서로 나온 ‘앙상블 시나위’의 격정적인 연주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국악공연을 선사했다. 알다시피 ‘앙상블 시나위’는 2015년 11월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예정된 ‘소월산천’ 공연을 한 문화 관료의 어처구니없는 검열로 인해 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소월산천’ 공연에서 연극적인 요소가 극장 특성상 맞지 않아 삭제를 요청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소월산천’ 공연을 함께 만들었던 박근형 연출가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풍자한 ‘개구리’라는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앙상블 시나위는 블랙텐트에서 평소처럼 격정적으로 연주했고, 말미에는 이 팀의 검열에 분노하여 1인 시위를 벌인 안무가 정영두와 함께 즉흥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모든 공연의 감동은 모순적이게도 블랙리스트 덕분이다. 광화문 캠핑촌에 블랙텐트라는 극장이 들어서고 나서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공연들이 무대에 올려 졌고, 모든 공연은 매진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검열 사태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 세월호 유가족들이 직접 만든 연극, 그리고 우리 시대의 재난의 아픔으로 각인시켜준 마임공연과 영화상영, 시낭송, 국악공연까지 블랙텐트는 검열로 빼앗긴 극장을 대신해서 예술인들의 정겨운 유배지이자 창작의 수용소가 되었다. 비록 시설은 열악하지만, 열정은 충만하다. 발은 시립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그럴듯한 대접은 못 받지만, 검열은 없다. 오직 예술가로서 자기 주권과 관객의 감동적인 환호만 있을 뿐이다.

박근혜 탄핵을 향한 촛불의 리듬은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를 뚫고 봄을 맞이하려 한다. 2월에는 탄핵되길 희망했지만, 국면 상 3월 초를 기다려야 한다. 아니 그 이상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블랙텐트는 그날까지 광장에서 수많은 예술인들과 관객들을 만날 것이다. 빼앗긴 극장에도 봄은 오는가? 아마도 올 것이다. 최소한 물리적으로 계절의 순환 원리에 따라 따스한 봄은 올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의 봄’도 올 것이다. 사악한 통치자는 탄핵당할 것이고, 감옥에 갈 것이며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위한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야 한다.

그런데 블랙텐트에는 정말 봄이 올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박근혜 탄핵이 인용되면 블랙텐트는 아마도 광화문 광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광화문 캠핑촌의 텐트와 각종 작품들과 시설도 서서히 정리될 것이다. 만일 기각되면 블랙텐트는 저항의 시간을 연장하며 존속될 것이다. 블랙텐트에 봄이 오려면 블랙텐트는 소멸되어야 한다. 빼앗긴 극장에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블랙텐트를 정리하고 본래의 극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최선의 길일까? 아니다. 빼앗긴 극장에도, 그래서 애써 만든 블랙텐트에도 진정 봄이 오려면, 광화문 광장에 블랙텐트가 영구적으로 존치되었으면 한다. 블랙리스트의 참혹한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광화문 블랙텐트는 탄핵과 탄핵 이후에도 그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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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문 후보님, 초대합니다.” (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문 후보님, 초대합니다.”

오혜진(문화연구자)

    좀 쉬라는 방학이지만, 최근 국문학계에는 작은 ‘파란’이 일어나 학계 안팎의 사람들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번 겨울에 특별히 기획한 학술행사들이 각계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유례없이 흥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에서 개최한 ‘반동의 시대와 ‘성전쟁’’ 포럼에는 무려 250여명의 청중이 모였고, 13일부터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가 서울시청년허브에서 열흘간 진행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강좌에는 매일 근 100명의 수강생이 열띠게 참여하고 있다. 어찌 된 일일까?

두 행사의 이례적인 선전은 우선, 기존 학술대회 및 강좌의 주제와 형식을 넘어서고자 한 데 있다. ‘반동의 시대와 ‘성전쟁’’ 포럼은 그간 학계에서 ‘여성적 주제’라며 부분적으로 취급하거나 ‘가십’이라고 사소화해온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를 현재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안과 결부시켜 광범위한 대중의제로 이끌어냈다. 이 포럼에서는 신예 연구자들의 시각으로 최근 온라인게임의 ‘여성 대상화’, 페미니즘 서적 붐, 박근혜 ‘여성/대통령’ 창출에 깃든 아시아적 독재와 젠더, 힐러리를 매개로 한 글로컬 페미니즘, 욕망과 폭력의 영역을 오가는 미성년 섹슈얼리티, 여성을 섹슈얼리티로 환원하는 것을 ‘미학적인 것’으로 승인해온 한국문학 전통, 한국문학장에서 젊은 페미니스트 독자들이 새롭게 펼치는 문화정치 등을 다뤘다.

당연히 질의응답 시간의 분위기도 확 바뀌었다. 평소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마이크를 놓지 않던 (남성) 권위자들의 훈화말씀이 사라진 대신, 최근의 현안과 쟁점을 민첩하게 장악하고 있는 젊은 시민들의 예리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현장에서 채 답을 내지 못한 이 토론은 현재 온·오프라인에서 계속 진행 중이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강좌의 흥행도 놀랍다. 이 강좌가 내세운 것이 ‘페미니즘 문학사’가 아니라 ‘페미니스트 시각’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강좌의 목표는 기존의 제도화된 여성문학사의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최근 리부트된 페미니즘적 정동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의 외연과 내포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이 강좌가 노린 바다. 방법은 두 가지다. 기존에 제출된 페미니즘적 연구와 비평의 재맥락화, 그리고 ‘페미니즘 문학사’의 ‘버전 업’을 위한 새로운 주제와 방법론, 텍스트들의 (재)발견. 무엇보다 그걸 여성 연구자와 비평가들만의 고립된 숙제로서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확장된 젊은 여성 지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 시도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기획이 현재 표절과 문학권력, 성폭력 사태 등에서 보듯, 새롭게 갱신된 민주적 감수성으로부터 가장 낙후된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는 한국문학장의 역동적 변화와 관계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쓰라린 ‘여성 대통령’ 시대를 거쳐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대선 후보조차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형국이니, 이제 정말 때가 왔다. 서로 다른 경험과 입장과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젊은 연구자들과 독자들이 만들어내는 이 ‘페미니즘 스펙트럼’이 한국 지식문화장의 뉴웨이브를 비추는 다채로운 빛이 되길 기대해본다. 그러니 일단 이번주 평일 저녁 7시30분, 서울시청년허브로 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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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3시 STOP!’ 캠페인의 메시지 (손희정)

경향신문 칼럼

[청춘직설]‘3시 STOP!’ 캠페인의 메시지

손희정(문화평론가)

    2016년 10월24일 오후 2시38분. 여성 수천명이 아이슬란드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남성에 비해 평균 14~18% 적은 임금을 받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임금격차로 보자면 여성들은 매일 2시38분 이후부터는 공짜로 일하고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이어서 11월7일 오후 4시34분에는 프랑스 여성들이 손에서 일을 내려놓았다. 성별임금격차 15.5%를 기준으로 봤을 때, 여성들은 이날, 이 시간부터 연말까지 무급 노동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항변이었다. ‘이퀄 페이 데이(Equal Pay Day·동일임금의 날)’로 불리는 이 시위는 같은 해 11월10일 영국으로도 이어졌다. 이뿐 아니다. 호주의 한 대학 여성 모임은 ‘페미니스트 주간’을 맞아 임금격차분을 반영하여 남성에게는 컵케이크를 더 비싸게 파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며 우리는 왜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국이야말로 성별임금격차 38%,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 아닌가? 그런데 며칠 전, 3월8일 여성의 날을 앞두고 한국 여성 노동계에서 조기 퇴근 시위 ‘3시 STOP!’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최 측에서는 집회와 행진을 예고했고, 거리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는 각자의 자리에서 ‘3시 알람 맞추기, 3시 되면 회의하다 멍 때리기, 괜히 탕비실 가기’ 등 태업으로 동참할 것을 제안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남녀 성별 간 노동의 질과 조건의 차는 심각하다. 원인에 대한 분석은 분분한데, 크게는 다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남녀 사이에 능력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의 유독 높은 임금격차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는 명백하게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신광영은 한국 노동시장에서는 동일한 조건에서 여성 임금이 남성에 비해 30% 정도 낮게 나타나며, 이 가운데 50% 이상이 차별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고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직접적인 성차별은 많이 사라졌다고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노동은 남성 노동에 비해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여성 노동의 결과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가를 받으며, 인사고과 불이익 등 남성중심적인 노동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간접적인 차별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경력단절 등의 성별화된 문제는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한국의 노동정책은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 지금까지의 성인지적 노동정책은 ‘여성노동정책’으로 바로 치환되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박근혜 정부의 ‘일·가정 양립정책’이었다. 사적 영역인 ‘가정’과 공적 영역인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둘 다를 책임지기를 사회적으로 요구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일자리를 양산하고, 여성을 ‘과로사 권하는 사회’로 내몰았다. 한 가지도 인간적으로 수행하기 힘든 사회에서의 일·가정 양립은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3시 STOP!’ 조기 퇴근 캠페인이 던지고자 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 노동시장에서의 남녀 차별은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입지를 남성의 입지로까지 끌어올린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의 드라마틱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서야 가능해진다.

이제 노동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야 한다. 매일 야근하고, 회식에 시달리며, 무한히 경쟁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일이라는 판타지는 깨져야 한다. 공과 사, 남성과 여성 등으로 나뉘어 있는 분리의 벽을 깨고 노동 성격 전반을 바꿔내야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것의 핵심은 남녀 노동자 공히 적용되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대선 정국에서 공론화되기 시작한 ‘남성 육아 휴직’은 노동 시간 단축의 한 예다. 우리는 저출산 패러다임의 외부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국, 노동자 보편의 삶의 질을 바꾸는 것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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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굿즈 (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굿즈

서동진(계원예술대교수)

    나이 먹은 탓인가. 걸핏하면 심화가 치밀어 오른다. 눈이 침침하고, 자고 나면 흰 머리가 희끗하고, 매일 다르게 눈 밑이 처지는 꼴을 봐서는 분명 짜증을 달고 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도 그런 나이에 따른 짜증인지 모를 일이다. 걸음을 했댔자 찾는 책도 없어 걸음을 마다하던 서점엘 우연히 들렀다, 그만 또 짜증이 났다. 사달의 원인은 서점 입구에 자리한 가판대 때문이었다. 거기엔 서로 다른 장정과 표지를 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처음 책이 나올 때의 표지를 복원한 판본부터 그간 이런저런 곳에서 낸 갖은 모양의 책들이 주르르 낯을 내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아닌 같은 내용의 여러 권의 책이 함께 자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책이랄 것도 없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건 책이 아니라 수집할 물건이거나 가방 속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민 ‘간지’ 나는 소지품 정도일 것이다. 명품 시계나 값진 헤드폰은 어쩐지 천박해 뵈지만, 시집은 주인의 안목이나 취향을 자랑스레 내비치는 표지일지 모른다. 이렇게 더 이상 책이 아니게 된 책을 가리킬 적절한 말을 찾자면, 그건 아마도 시쳇말로 ‘굿즈’일 것이다. 책이 정신도, 지식도, 관념도, 감정도, 이념도, 뭐랄 것 없는, 그저 탐나는 물건으로 변신하였을 때, 오늘날 사람들이 굿즈란 말로 암시하려는 것과 맞아떨어질 것이다.

책이 멋있어지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근사하고 품위있게 가죽 장정된 책을 소장하던, 먼 옛날 유럽 부르주아들처럼 우리라고 아름다운 책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상품이면서 상품 아닌 듯이 존립했던 책의 운명을 생각하면, 굿즈가 된 책은, 어딘지 가지 않아야 할 세계에 발을 디딘 듯한 쓰린 기분을 자아낸다. 굿즈로서의 책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세계를 증언하는 얼룩일 것이다. 물론 책이 한 번도 상품이 아닌 적은 없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데 선수인 출판사와 출판기획자도 있고 그들은 시장에서 어떤 책을 원하는지 점쟁이처럼 예언할 것이다. 책은 가격이 매겨진 채 팔려나가고 수완 좋은 저자들은 두둑한 인세와 보너스를 챙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책은 상품이면서도 또한 상품이라고 우길 수만도 없는 상품이었다. 가격이 얼마이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건 어떤 표지로 꾸며졌건 어느 서점에서 산 것이건 책은 마치 그것이 전하는 생각과 이야기로 인해 그런 상품적 가치를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무엇의 화신인 듯 여겨지곤 했기 때문이다.

옷이니 액세서리니 따위를 파는 유명 상점이나 소문난 카페, 식당의 한구석에서 마주하는 책들은 잔인한 냉소를 머금고 있다. 그것은 말과 글이란 것이 세상을 드러내고 밝히며, 나아가 그것을 부정하는 몸짓을 자아내는 데 별 역할을 못함을 슬며시 증언한다. 솜씨 좋게 추출한 커피와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과자 조각을 우물대며 집어든 카프카 소설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테리어 소품이거나 문화적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동원된 작은 징표이거나,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값으로 쇼핑의 욕망을 채워줄 물건일 것이다. 모든 글과 말은 모종의 이념을 비춘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온 내게, 이런 세상은 낯설고 무섭다. 그래서 부아가 치밀고 억울한 기분이 들고, 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진짜 화가 나는 것은 그를 통해 치를 대가이다. 그 대가란 다른 세상이 도래할 가능성이다. 책이 굿즈가 되었을 때, 다른 세상은 저 멀리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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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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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 문화과학 89호 신간안내

 

◼ 89호 특집 <블랙리스트>: 이명박-박근혜 보수 정권의 좌파 문화예술계 청산과 예술인 블랙리스트와 예술검열의 실체 및 예술인들의 저항의 의미를 5인의 필자가 분석!

기획 <광장의 정치와 시민혁명>: 광장에서의 촛불집회의 의미, 촛불민심을 외면하는 대의제 민주주의 정치의 한계 비판, 광화문 광장 예술인 캠핑촌의 노숙 체험기!

문화현실분석: 김소영 교수의 박근혜의 컬트적인 주술정치와 그 문화심리적 의미를 해부!

동아시아문화연구: 요시다 히로시 교수의 디지털 게임플레이에서 ‘타자’의 문제를 분석!

이론의 재구성: 현대예술의 노동과 상품의 문제에 대한 논쟁들 수록!


<목  차> 

특집: 블랙리스트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블랙리스트와 유신의 종말」

◾강정석(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장), 「블랙리스트와 예술검열 실태 분석: MB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천정환(성균관대학교 교수),「현대 한국 검열의 계보학: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검열과 문예진흥정책을 중심으로」

◾박소현(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박근혜 정부 문화융성정책의 실체와 문제점」

◾이원재(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 「블랙리스트 예술검열에 저항하는 예술운동의 실천과 전망」

 

기획: 광장의 정치와 시민혁명

◾김성일(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광장정치의 동학: 6월 항쟁에서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까지」

◾이광일(계간 <황해문화> 편집위원),  「그들이 대중을 다루는 아주 오래된 방식―촛불은 보수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넘을 수 있을까」

◾이두찬(문화연대 활동가), 「광장은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한다―광화문 캠핑촌에서 살아가기」

 

제18회 ‘북클럽’

◾『아주 친밀한 폭력: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정희진, 김은희, 양경언, 권명아)

 

인문장치의 발견

◾권명아(동아대학교 교수), 연구하는 활동가, 활동하는 연구자를 지향하는 작지만 튼튼한 연구소: <이주와 인권연구소>를 만나다

 

문화현실분석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주술적 근대와 미디어: 박정희라는 컬트, 박근혜라는 오컬트」

◾전규찬(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중층 게이트 열기, 읽기, 글쓰기」

◾안성민(문화연대 활동가), 「<2016 문화활동가대회>를 돌아보며」

 

근대성 연구

◾이기훈(연세대학교 교수),  「학교와 재난―한국 근대의 두 얼굴」

 

동아시아 문화연구

◾요시다 히로시(吉田 寛)(리츠메이칸대학교 교수), 「디지털 게임플레이와 ‘타자’에 대한 신뢰」

 

이론의 재구성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영화감독), 「빵이 없으면 예술을 먹어라! 현대 예술과 파생 파시즘」(번역: 김상민)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 뉴스쿨 미디어문화연구 교수), 「디지털 출처와 파생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번역:     김상민)

 

<특집: 블랙리스트>  

특집 주제선정의 취지와 배경:

    우리는 지금 사상 유례 없는 대통령 탄핵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2016년 10월경 대통령의 비선실세 최순실의 충격적인 국정 농단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시작된 촛불 혁명은 광장에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분노와 저항에 힘입어 대통령 하야 국면에서 탄핵 국면으로 이행했다. 2016년 12월 31일까지 광화문 광장을 포함해 전국에서 모인 천만 촛불 시민들은 그저 대통령의 즉각 퇴진과 탄핵만을 외치지 않았다. 그들은 차별 없는 세상, 비정규직 없는 세상, 사회적 재난이 없는 세상, 그리고 예술검열이 없는 세상을 위해 촛불을 들었다. 다시는 돈과 권력으로 배제되고 버림받는 사람들이 나오지 않도록, 통치자의 무능함과 사악함으로 세월호 재난과 같은 억울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더 이상 노동자가 잔인한 정리해고 때문에 거리에 내몰리지 않도록, 천만의 촛불은 정권교체, 정치교체를 넘어 완전한 국가와 사회 교체를 위해 광장으로 나서고 있다. 박근혜 탄핵은 결국 40년 넘게 한국사회를 억압했던 유신의 탄핵, 공안정치의 탄핵이다. 지금 탄핵의 국면이 박근혜 개인의 탄핵을 넘어서 부정부패, 정경유착, 보수-수구 정치의 탄핵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때, 유신의 공안정치를 재생산한 수구 세력들과 그 ‘도적패들’을 청산해야 한다.

박근혜 통치 권력의 역사적 유산인 “유신 공안정치”의 실체를 가장 분명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 것이 바로 “블랙리스트”이다. 『문화/과학』이 89호 특집 주제로 “블랙리스트”를 정한 것은 단지 문화이론 전문지로서 책임 때문만은 아니다. 더욱이 이 심각한 문제를 문화예술계만의 문제로 재론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블랙리스트에 주목하는 것은 이 언표가 역사적 유신 정치의 징표이자 그 종말을 가장 함축적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는 비단 예술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신의 공안정치가 지금까지 지속되는 동안 노동자, 농민, 빈민, 학술연구자, 진보적 정당 정치인의 신체에 낙인찍은 인장이다. 지금 탄핵 국면에서 우리가 상대할 것은 형식적인 정권교체만이 아니라 우리를 낙인찍은 블랙리스트 유신정치 그 자체이다.

소문만 무성했던 블랙리스트 실체가 세상에 공개되면서 예술인들은 분노했지만, 한편으로 명예로웠다. 블랙리스트는 배제의 낙인이자 양심의 훈장이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사태로 인해 예술가들은 오랜만에 광장에 모였고, 연대하고, 투쟁했다. 그리고 김기춘, 조윤선을 비롯해 블랙리스트를 지시, 작성, 전달, 실행한 박근혜의 수족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광화문 광장에 텐트를 치고 노숙 농성한 예술인들은 탄핵국면의 최전선에서 광장을 지키고 저항의 시간을 지속시켰다. 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그 저항은 새로운 사회로 이행하기 위한 혁명기의 진지전인 셈이다.

 

<특집글 소개>

이동연, 「블랙리스트와 유신의 종말」

이 글은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인식론적으로 규명하는 글이다. 그는 블랙리스트가 박근혜 통치의 본질을 보여주는 언표라는 점에서 하나의 기호체계이며, 현실의 텍스트 안에서 스스로 의미작용을 가진다고 말한다. 이는 블랙리스트가 “감시가 필요한 위험인물들의 명단”이라는 사전적 정의를 넘어서 박근혜 통치의 위기의식을 드러내는 심리적 언어이자, 탄핵 국면에 개입하는 정치적 언표라는 점을 강조한다. 필자는 블랙리스트가 형성되는 시간의 계열과 블랙리스트의 전달체계를 분석하면서 역사적 히스테리의 산물인 블랙리스트가 역설적이게도 유신의 종말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강정석, 「블랙리스트와 예술검열 실태 분석: MB정부에서 박근혜 정부까지」

이 글은 보수정권 10년간 예술검열 사례들을 통시적으로 분석한다. 그는 “블랙리스트가 ‘보수우익 세력의 영구집권 로드맵’이라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황폐화시킨 문화예술의 살풍경의 기억을 다시금 소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현재의 ‘블랙리스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보수 우익세력의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좌파 척결 전략’의 전모를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는 “문화예술계 공공성 강화작업”이란 말로 대신했고, 이는 이명박 정부 당시에 좌파예술가 척결을 ‘문화권력 균형화전략’이라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필자는 마지막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이론을 언급하면서 이러한 가치중립적인 듯한 관료주의의 언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나려는 ‘악의 사회성’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천정환, 「현대 한국 검열의 계보학 : 박정희 정권 시기의 검열과 문예진흥정책을 중심으로」

이 글은 한국문화에서 검열의 내재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그는 “검열을 빼고는 한국의 지성사도, 근대 문예사나 독서 문화사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하면서 “1987년 이후의 민주화 이전까지 한국 문학ㆍ예술사는 노예의 언어와 몸짓”으로 이어졌고, 1987년 민주화 체제 이후에도 “검열 그 자체는 중단된 적 없다”고 말한다. 박근혜 정권의 검열과 ‘문화융성’은 “유신시대의 탄압+문예진흥 정책에 그 원형이 있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문화에 대한 반달리즘적인 파괴와 냉전적 금압, 그리고 진흥/융성이라는 모순된 정책은 ‘코드’에 맞는 문화예술에만 금전적 지원을 함으로써 이뤄진 선별/배제의 과정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박소현, 「박근혜 정부 문화융성정책의 실체와 문제점」

이 글은 블랙리스트의 텅빈 기호이자 허무한 짝패인 박근혜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의 본질을 다룬다. 필자가 보기에 문화융성이란 개념은 “법정기구인 인수위원회의 활동 결과에는 없었던 돌연변이 용어이자 개념이고, 대통령 취임사에서 다분히 즉흥적으로 출현한 조어였다.” 문화융성은 박근혜와 비선실세가 만들어낸 유신의 문화정치를 연상케 하는 언어로서, 통치자의 “정책적 결정”을 압축한 말이다. 공무원들은 이 정책적 결정이란 통치자의 명령을 빌미로 자신들의 반문화적 행정 결정을 정당화하려는 관료적 태도를 드러낸 것이 문화융성정책의 핵심적인 문제점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필자는 “문화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문화행정 조직의 쇄신은 국민을 애초부터 배제하고 있는 ‘정책적 결정’의 관행과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문화정책 영역에서의 블랙박스를 없애는 데에서 시작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원재, 「블랙리스트 예술검열에 저항하는 예술운동의 실천과 전망」

이 글은 블랙리스트와 탄핵 국면에서 예술가들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제안한다. ‘광화문 캠핑촌’이 조성된 다음 날,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들의 새로운 이름으로 ‘박근혜 퇴진과 시민정부 구성을 위한 예술행동위원회’를 제안한 것도 박근혜 퇴진과 비선실세와 문화 부역자의 처벌을 넘어서 “좀 더 급진적이고 지속적인 예술행동을 제안”하기 위함이다. 블랙리스트 문화예술인 예술행동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예술검열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전면화 했고, ‘광화문 캠핑촌’ 활동은 “공유지(commons)로서의 예술행동”을 둘러싼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 주었으며, 정치를 둘러싼 새로운 상상력과 관계성을 만들어 냈고, 연대의 가치를 확장하였다. 필자는 블랙리스트 사태를 계기로 예술행동이 좀 더 급진적이게 되려면, “공유지로서의 예술운동을 확장하기 위한 더 많은 상상력과 토론”, “다양한 주체들 사이의 협력을 통해 예술운동 네트워크 구축 및 커뮤니티의 활성화”, “현장 예술운동의 사회적 가치를 확대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역문화, 생활예술, 문화교육 영역과의 소통과 협력”, “다양한 사회운동과 연대할 수 있는 예술운동의 흐름 생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기획: ‘광장의 정치와 시민혁명’>

김성일,  「광장정치의 동학: 6월항쟁에서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까지」

이 글은 최순실-박근혜 게이트로 분출된 촛불집회의 성격과 의미를 기존의 사회운동과 연계시켜 살펴보고 있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은 추도와 애도를 넘어 촛불집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시원(始原)이며, 대중의 광장정치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를 외치는 다중의 촛불집회를 거쳐, 2016년에는 박근혜 탄핵을 외치는 정동적 주체의 투쟁으로 이행”했다고 본다. 2008년 다중에게는 “존재의 새로움과 낙관적 전망이 투사되었다면, 2016년 촛불에게는 굴곡진 삶의 주름이 깊게 페인 존재의 고단함과 분노가 투영되었다”고 말한다. 대중의 유동적 잠재성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이광일,  「그들이 대중을 다루는 아주 오래된 방식-촛불은 보수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넘을 수 있을까」

이 글은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혁을 외면하는 ‘수구-보수’ 주류 정치권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광장의 촛불이 지향하고자 하는 것은 “기존 ‘수구-보수 독점의 정치질서’를 단순 전도시킨 ‘보수-수구 독점의 정치질서’로의 교체”가 아닌 “정권교체를 넘어 ‘더 많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추동”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더불어민주당으로 대변되는 “보수 자유주의 야당은 그들의 역사적 지위와 역할에 대한 의문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던 1980년대 이후, 대중이 봉기했을 때, 마지막까지 그들과 함께 한 적이 없다.” 그 예시가 바로 문재인의 ‘더러운 잠’에 대한 끔찍한 언술과 안희정의 기만적인 ‘대연정’ 제안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광장의 촛불’이 ‘87년체제’와 ‘97년체제’를 넘을 수 있으려면, “‘촛불대중’의 정치적 상상력과 실천은 보수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수구 정치세력 사이의 진자운동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두찬,  「광장은 더 나은 사회를 상상한다-광화문 캠핑촌에서 살아가기」

이 글은 광화문 캠핑촌에서 예술가, 노동자들과 함께 노숙 농성한 100일 가까운 현장 체험을 담고 있다. 그의 체험기에서 광장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 항상 흥으로 가득 차 있고, 하루하루가 바쁘게 돌아간다. 그는 “우리가 추운 겨울날 시린 손으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이고 침낭 속에 들어가도 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에 노숙을 감행하는 건 단순히 박근혜를 끌어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캠핑촌 촌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위한 나라”, “사람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정부가 아니라 국민들이 서로를 돕는 혐오와 편 나눔이 없는 사회”, “죽어가면서도 미안하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사회가 아니라, 자살은 사회적 타살임을 인정하고 모든 불의한 죽음에 고통을 통감하는 사회”이다.

 

문화현실 분석 

김소영, 「주술적 근대와 미디어: 박정희라는 컬트, 박근혜라는 오컬트」

이 글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현 정치적 국면에서 1970년대 유신과 근대화의 시기에 박근혜 영애가 중심이 된 영상들을 통해 일종의 미디어 황홀경 속에서 형상화된 특별한 인물로서 박근혜를 분석한다. 군집한 대중들 속에서 스펙터클의 몰아경에 빠져있는 그녀의 시선과 응시, 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이후 정치계에 출현하면서 작동하는 연민과 공감의 정치에 대한 하이재킹, 누가 누구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지 불분명한 복화술과 코스프레가 결합된 복합적인 정체성을 통해 박근혜 현상의 주술적 기원을 되짚어 본다. 나아가 “박정희 딸, 박근혜는 아버지라는 정전의 팬톰”으로서 혹은 “유령”으로서 귀환하여 “이성 부재의 통치”라는 비상사태를 통해 수많은 폭력적 정책들을 문화융성과 창조경제라는 정동 정치로 부활시켜 내었음을 읽어낸다.

 

이론의 재구성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  「빵이 없으면 예술을 먹어라! 현대 예술과 파생 파시즘」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의 「디지털 출처와 파생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

베를린에 기반을 둔 영화감독이자 미디어예술가인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의  글 「빵이 없으면 예술을 먹어라! 현대 예술과 파생 파시즘」과 미국 더뉴스쿨(The New School)의 미디어‧문화연구 교수인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의 「디지털 출처와 파생상품으로서의 예술작품」을 김상민 편집위원이 번역했다. 슈타이얼은 현대 예술이 글로벌 금융자본의 위험회피를 위한 대안적인 통화로 작동하는 상황과 이와 동시에 소진된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시대 이후 속속 등장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파생 파시즘 현상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워크는 시각을 약간 달리하여 예술이 차라리 파생상품이라고 보면서 우리 시대에 예술은 희소성이 아니라 오히려 전자적 복제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가치를 발생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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