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9호][칼럼]공동(空洞)의 문학(1)_김대성

공동(空洞)의 문학(1)

김 대 성(문학평론가)

 

 

텅 빈 건물을 지키는 관리인이 있다. 그가 하는 일이란 중단되었던 재개발이 시행될 때까지 건물을 텅 빈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거지 연립’이라 불리는 그 건물은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곳이 되었으나 관리인은 매일 밤 건물의 모든 문을 두드리고 열어본다. 이전부터 닫힌 뚜껑과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두려워해왔다는 관리인의 이력이 매일 밤 건물의 닫힌 문을 두드려 확인하는 이유인 것은 아니다. 밤마다 어김없이 불안한 예감에 휩싸이며 급기야 건물 어딘가에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비명 소리까지 듣는 관리인의 강박, 혹은 신경쇠약이 내겐 지금 이 순간에도 참혹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계를 은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는 건물에 상주하며 매일 밤 닫힌 문을 두드리고 열고 닫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은 텅 빈 세계에서 불침번을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안보윤의 소설 「안절부절 모기씨」(『비교적 안녕한 당신의 하루』, 2014)의 이 같은 서사축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제 기능을 잃어버린 텅 빈 건물을 바장이며 닫힌 곳을 두드리는 관리인의 행위가 ‘관(棺)’으로 기우는 세계를 ‘문(門)’의 상태로 유지하려는 애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쓸모를 잃어버린 텅 빈 건물이 죽음의 장소로 침몰하지 않도록 매일 밤 두드리는 일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곳이 단박에 다른 곳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 테지만 아무런 생산성이 없어보이는 그 무용의 행위의 반복이 명멸(明滅) 하고 있는 어떤 표지처럼 여겨진다. 명멸한다는 것은 불빛이 사그라들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아직 불빛이 꺼지지 않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곧 꺼진다는 것과 아직 꺼지지 않고 있다는 것, 명멸은 구조 요청을 닮아 있다.말하자면 명멸을 마주한다는 것은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의 자리에 서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없앨 수도 없고 기왕의 쓸모를 회복할 수도 없는 텅 빈 건물의 불침번을 서는 행위에서 나는 문학의 곤궁한 지위를 떠올리게 된다. 공동체(共同體)가 붕괴된 세계에서 텅 빈(空洞) 건물이 죽음의 장소로 침몰하지 않도록 깨우는 일. 텅 빈 세계에 불침번을 서는 것은 그곳에 아직 지켜야 할 무언가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이기도 하다. 당연히 그것은 쭉정이 같은 건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쓸모를 잃어버린 텅 빔은 죽음에 임박한 빈사(瀕死) 상태를 떠올리게 하지만 동시에 무너지고 불타 사라진 폐허 위에 개시된 영도(零度)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서둘러 묻게 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예감하며 텅 빈 건물을 깨우는 행위의 반복이 구조 요청에 대한 응답의 한 방식일 수 있을까. 지금, 이곳에서 체감하는 ‘세계의 침몰’이 더 이상 구조 요청에 응답하지 못/않는 상태라 바꿔 말할 수 있다면 구성원을 구조 하지 않는 시스템의 몰락에 한탄하거나 환멸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개별자들이 행하고 있는 구조 요청에 대한 다종한 응답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문학을 공동체(共同體)의 회복이 아닌 공동체(空洞體)라는 없던 관계망의 지평 위에 명멸하도록 놓아둘 때 종언이라는 선언에 기생하며 반복적으로 회귀하곤 하는 새로움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잠재된 에너지를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끝이면서 동시에 임박한 시작점이기도 한 ‘텅 빔’이라는 상태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개별자들의 공통된 영토인지도 모른다. 텅 빈 영토를 두드리며 지키고 있는 이들을 호명해보고 싶다. 빈틈없이 꽉 차 외부적인 그 무엇도 틈입할 수 없는 공동(共同)의 회복을 종착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공동(空洞)이라는 다른 시작점을 도약대로 삼을 수 있을까.

 

오늘의 한국 문학, 그 성(城)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 이들 중에 아무도 없는 건물의 문을 두드리는 관리인과 같은 이들이 있다. 텅 빈 건물에 머물며 매일 밤 ‘문’을 두드리는 것은 쓸모를 잃어버린 대상의 쓸모를 깨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문’이 ‘관’으로 침몰하는 것을 붙들어두는 이 행위로 상실되었던 문의 기능,그 잠재적인 역량이 지켜진다. 두드리는 행위는 그 맞은편에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희망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어떤 작가들에겐 ‘문학을 한다는 것’이 텅 빈 건물의 ‘문을 두드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기도 할 테다. 죽음(관)으로 기우는 세계를 두드려 문으로 깨우는 일. 두드려 깨우는 행위의 지속이 “응급상황에서 문을 부서뜨리는 데 쓰는 도끼”(레베카 솔닛, 『어둠 속의 희망』)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말해도 좋을까. 죽음으로 기울고 있는 세계에 불침번을 서는 일. 막힌 벽과 닫힌 문을 두드리는 무모함으로,그런 간절함으로 깨우는 일. 설사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해도, 죽음으로 기우는 것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고 해도, 그 일을 계속하는 것, 반복하는 것, 실패하는 것, 거듭 실패하는 것. 구조 요청에 대한 문학의 응답은 절망의 언어로 점철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절망한다는 것, 바라던 것(望)을 버리는 것(絶)은 역설적으로 직전까지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의 절망이 어제의 희망을 증명한다. 오늘도 절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기꺼이 그렇다고 답한다는 것은 내일의 절망 또한 수락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응답은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일이기도 하다. 절망하기로써의 희망하기. 텅 빈 건물에서 불침번을 서는 일 또한 그와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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