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8호][칼럼]개인의 정체성과 폭력(김정한)

개인의 정체성과 폭력

 

김정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 연구교수)

 

정치적 장의 약화와 폭력의 증가

 

이슬람과 서구의 갈등과 전쟁이라는 ‘문명의 충돌’을 성급하게 말하기 전에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슬람도 서구도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과 서구 내부의 균열,모순, 차이가 존재하고, 그것은 계급적, 인종적, 종교적이기도 하며 성적 차이와 지적 차이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샤를리 에브도 테러 사건이 함의하는 것은 단지 표현의 자유라는 쟁점에 국한될 수 없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 개인의 정체성이 어떤 증오 및 폭력과도 결합하지 않도록 하는 정치적 장의 약화 내지 붕괴이다.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시대에 국민국가의 합법적 폭력, 자본주의의 초과착취, 그리고 개인의 정체성을 직접적인 공격 대상으로 삼는 상징적 폭력은 더욱 만연해져 있고, 이와 같은 구조적 폭력들을 완화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정치적 장치들은 점차 해체되어왔다. 이것이 국민국가의 위기, 민주주의의 후퇴, 차별과 배제의 확산 등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증오와 폭력을 감축할 수 있는 정치적 장이 적절히 작동하지 않을 때 미셸 비비오르카가 명명하듯이 “폭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치적 의미를 상실한 정치이하적(infrapolitical) 폭력의 증가이다. 어떤 정치적 의미나 효력이 없는 폭력들, 예컨대 무기판매,마약거래, 인신매매 등이 특정한 조직이나 집단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자행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정치를 초월한 가치들을 위한 정치상위적(metapolitical) 폭력의 전면화이다.세속적인 정치를 넘어서는 종교, 이데올로기, 도덕 등의 이름으로 일상적인 폭력과 테러가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정치이하적인 의미-부재의 폭력과 정치상위적인 의미-과잉의 폭력은 서로 융합하는 경향을 갖는다. “폭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르면, 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정치상위적 폭력에 해당할 것이지만, 또한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경제적 이익이라는 정치이하적 폭력의 성격도 간과될 수는 없다.

 

정체성의 위기는 폭력과 어떻게 결합하는가

 

  하지만 종교적 신념에 따라서 타인에 대한 테러를 행사하고, 동시에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파괴적인 테러를 표출하는 근원에는 왜 개인들이 그와 같은 선택을 하는가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개인의 사적인 이력이나 어떤 정신적 증상으로 환원시키기에 앞서,개인의 정체성(identity)을 위기로 몰아넣는 제도들의 붕괴를 사유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정체성은 그 자체로 관개체적(transindividual)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온전히 스스로, 고립적으로 구성하는 정체성이란 것은 없다.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화(identification)에 관여하는 그/녀의 소속과 결속에는 네 가지 차원이 있다. 첫째 일차적인 소속으로써 선택의 여지가 없는 가족, 둘째 직업이나 종교와 같은 선택의 가능성이 있는 매개적 제도들, 셋째 헤게모니적인 공동체로서 국민, 넷째 국민을 넘어서는 지평으로서 상상적이면서 상징적인 보편적 존재(인류, 인간, 세계시민 등)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정체화의 차원들이 혼합되어 붕괴할 때, 예를 들어 가족과 국민이 혼합됨으로써 국가의 안보를 지키고 국민적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족을 보호하고 혈통을 보존해야 한다는 강박적 담론이 형성될 때 나타나는 것이 파시즘이며 그에 대한 개인들의 헌신이다. 샤를리 에브도 사건은 개인의 정체화에서 이슬람 종교라는 매개적 제도가 우위에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지만, 또한 무엇보다 가족과 집단의 생명(또는 생계)이라는 차원과 특히 국민적 정체성의 상실이라는 차원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고 여겨진다.

 

사실 국민국가는 일차적 정체성(계급, 지역, 언어, 종교, 가족, 성적 정체성)을 이차적 정체성(국민-시민적 정체성)으로 전환하고 포섭함으로써 자신의 민족-국민적 헤게모니를 구성한다.일차적 정체성을 이차적 정체성으로 통합하는 과정은, 한편으로는 일차적 정체성에 기초한 다양한 개인성들을 억압, 해체, 배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차적 동일성에 입각하여 정상적 규범과 규칙을 규율화함으로써 일차적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상징적 폭력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런 해체와 재구성의 효과로 개인은 국민-시민이라는 정체성을 정립하고 ‘비정상적’이지 않은, ‘정상적인’ 태도와 행위를 내면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이차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일차적 정체성들간의 경쟁과 갈등을 조정하는 국민국가의 헤게모니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개인의 정체성은 일의적으로 고착되거나(예컨대 전체주의), 다양하게 유동하게 된다(예컨대 포스트모더니즘). 이를테면 하나의 정체성에 붙들려 있는 개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의 정치적‧사회적 역할만을 고집할 것이며, 반면에 하나의 정체성에서 다른 정체성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개인은 어떤 정치적‧사회적 역할도 떠맡지 못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 고립되어 자기-파괴적이 되거나, 자신이 소속될 만한 보상적인 공동체(때로는 종교적이거나 인종적인)에 휘말리기 쉽다. 바로 이 지점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증오를 이상화하는 폭력과 결합한다.

 

폭력의 해법: 정치적 장의 가능성 사유하기

 

  ‘고착된 정체성’의 위험에 대해서는 아마르티아 센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는데, 그는 한 개인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들(아시아인, 인도인, 경제학자, 남성, 이성애자 등등) 가운데 단 하나의 분류 범주에 따라 독보적인 정체성을 추출해내서 그 단일한 정체성 속으로 개인들을 밀어 넣을 때 폭력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에 대한 센의 해법은 수많은 정체성들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이성적 추론, 의지적 선택과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반면에 ‘유동하는 정체성’의 위험에 대해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는데, 그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며 자신을 새롭게 계발하고 재창조하는 계속적인 변신이라는 것은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작동 논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한 지젝의 해법은 체제 작동을 정지시키는 반자본주의적이고 공산주의적인 계급투쟁이다.

 

하지만 개인의 이성과 의지를 강조하거나 구조적 체제 변혁을 요청하는 이와 같은 해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매개적 제도들의 재확립과, 무엇보다도 일차적 정체성과 이차적 정체성의 관계를 조율하는 공동체(반드시 국민국가는 아닐지라도)의 복원이라는 과제가 제기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지하드주의자들의 네트워크에 의한 이슬람의 악용에 대해─세계 곳곳과 유럽 자체에서 주요 희생자들이 무슬림들임을 잊지 말자─신학적 비판과 궁극적으로는 종교의 ‘상식’의 개혁 말고는 달리 응답할 수가 없다. 이것이 신자들의 눈에 지하드주의자를 사기로 보이게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테러리즘의 치명적인 틀에 사로잡혀 옴짝달싹하지 못할 것이다.”(‘월간 오늘 보다’, 2015년 2월호, 42쪽) 말하자면, 이슬람 내부의 갈등과 위계, 모순과 차이를 드러내는 내재적 비판이 또한 필수적이며,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이슬람과 서구 모두의 공통된 문명을 재창안하는 새로운 문명화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내가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희생당한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연대의 표현이다. 이와 같은 구호의 여러 변주들은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한국사회에서도 그동안 수차례 반복되어왔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또 다른 비극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이제는 타자의 희생과 고통에 대처하는 ‘내가 여기 있어요’라는 윤리의 한계에 대해서도 다시 성찰해볼 필요가 있다. 지젝이 말하듯이 “격정에 가득 차서 ‘우리는 모두 무젤만들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역겨운 일”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샤를리다”라거나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논쟁은, 오늘날 증오와 폭력을 제어하는 정치의 장이 어떻게 다시 가능할 수 있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사유로 전환되어야 한다.

 

 

(『대학원신문』317,http://gspress.cauon.net/news/articleView.html?idxno=21042. 20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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