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9호][칼럼]존귀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_오혜진

존귀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오혜진(근현대문화연구자)

 

올봄에 읽은 한 소설이 남긴 강렬한 장면에 줄곧 사로잡혀 있다. 백화점 침구류 판매직원 여성인 ‘나’의 세계를 묘사한 황정은의 <복경>(<한국문학> 2015년 봄호)이다. 이 소설은 우선 우리가 익히 잘 안다고 생각하는 ‘서비스직의 감정노동’ 문제를 다룬다. 그 세계는 ‘고객과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착각하면 울게 되는 것은 나’뿐인 세계, ‘판매원과 계산원과 미화원과 조리사’가 서로 증오하는 세계다. 이 작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펼쳐지는 계급적 경험과 파토스를 날카롭게 그려내기로 유명한데, 이 작품도 기꺼이 그 평에 값한다.

최근 보도된 고객, 재벌가의 ‘갑질’과 ‘진상짓’을 깊이 의식했을 이 소설을 읽고, 나는 ‘갑질’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한 풍경을 떠올렸다. 처음 그 말이 미디어에 등장해 널리 회자됐을 때, 나는 그것이 지닌 대단히 효율적인 지시성에 놀랐다. 그리고 모종의 통쾌함(?)을 느꼈던 것도 고백해둔다. 그 말이 등장하기 전까지, 우리는 일상다반사로 겪는 고객, 상사 혹은 상부기관이 행하는 폭력과 부당행위의 세목을 나열하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언어를 낭비했던가. ‘갑질’이라는 신조어는 그런 수고로움을 없애 주었음은 물론, 그 ‘진상짓’에 함축된 권력관계를 간단히 드러냄으로써 ‘갑을관계’를 이 세계의 지배질서로서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그런데 이후 벌어진 상황은 내가 느낀 통쾌함을 다소 배반했다. 고용주와 자본가, 고객의 횡포에 대응하여 “좋은 건물주”나 ‘착한 갑’ 담론이 부상한 것이다. 게다가 ‘갑질’의 부당함을 탓하기보다, 무시당하지 않도록 내면의 강인함을 키워 저항하라는 도덕적 훈계도 등장했다. 진정 “존귀한 사람은 아무에게도 무시당하지 않는” 걸까? <복경> 작가라면 “존귀”, 그것은 “존나 귀하다는 의미입니까”라고 반문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냥 있는 것 자체로 존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선 인간에 속한 게 아니”라고.

‘갑질’이라는 말은 부당행위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할 뿐, 그 말이 전제하는 계급격차와 권력관계를 가능케 한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계급권력으로부터 촉발되는 부당행위에 이름을 부여해 그것을 실체화한 것이 ‘갑질’이라는 말의 공적이라면, 그 권력관계 자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자연화한 것은 한계다.

  종속관계를 정당화하거나 자연화하지 않는, 존귀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인간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복경>이 만들어낸 의미심장한 ‘전도’ 혹은 ‘뒤틀림’의 장면을 보자.이를테면 ‘화장실에 두고 온 내 핸드백 좀 주차장으로 들고 내려오라’는 고객의 전화에 ‘나’는 “직원은 고객용 화장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고객님”이라고 답하며 은밀하게 웃었다. 뭐라고 말할 수 없어 감질나지만 기쁜 웃음. 조소나 냉소가 아닌, 백화점의 고객접대 매뉴얼에 명시된 웃음은 더더욱 아닌 이 웃음을 서술자는 특별히 “웃늠”이라고 적어놓았다. 이 “미친년” 같은 ‘웃늠’을 웃는 순간, 한 치의 의심 없이 명백하게 ‘갑’인 ‘고객님’에게 판매직원이자 명백하게 ‘을’인 ‘나’는 잠깐이나마 익숙하지만 낯선, 그래서 기이하고 두려운 존재로 보였던 것이 분명하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복경> 나름의 항변이다.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2581.html, 2015.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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