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9호]정정훈 편집위원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 정정훈의 『인권과 인권들』에 대한 심사평

 

최원(건국대학교 HK 연구교수)

 

 

2015년도 일곡 유인호 학술상의 명예를 거머쥔 정정훈의 『인권과 인권들』은 현재 한국에 나와 있는 인권에 대한 정치철학적 저서 가운데 이론적인 면에서 봤을 때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심오한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이론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권에 기초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다양한 사회․정치적 실천들, 곧 ‘인권운동’의 급진적이면서도 동시에 실효성 있는 새로운 양태를 찾아내기 위한 구체적인 고민을 전개하는 매우 보기 드문 역작이다.

 

이 저서는 인권 담론이 현재 처해있는 ‘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서(1장), 프랑스 대혁명(또는 그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권 운동의 장구한 역사 및 인권 개념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의 역사를 믿을 수 없이 해박한 지식과 함께 독창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있으며(2, 3, 4장), 현재 인권운동을 다시 한 번 급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점에 착목하여 우리의 논의와 실천을 재조직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까지 제시하는(5, 6장) 눈부신 성과를 달성하고 있다.

 

저자는 어떻게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우리는 그 이유를 이 책의 감동적인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에서 정정훈은, ‘제주도에 놀러간다’는 기대에 차서 별 생각 없이 참여했던 2008년 ‘제주인권회의’가 인권에 대한 자신의 소박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 후로 어떻게 자신을 점점 더 인권에 대한 고민 속으로 몰고 갔는지를 회고하고 있는데, 그는 정작 자신을 변화시켰던 것은 그 회의에서 토론된 내용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만난 인권활동가들이었다는 고백을 한다. 인권활동가들의 지난한 활동 및 투쟁과의 이 우발적이지만 지속된 마주침이야말로 그를 변화시킨 바로 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맑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는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 계급의 외부로부터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수입’ 또는 ‘주입’되는 사상이라고 말했던 칼 카우츠키에 반대하여, 그것은 우연한 계기에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노동자 계급의 편에 가담한 지식인이 노동자 계급에 의해 교육받으면서 전적으로 노동자 계급 안에서 발전시킨, 노동자 계급 자신의 사상이며, 이때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지식인의 상이야말로 안토니오 그람시가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불렀던 것의 핵심을 이룬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어디 이것이 노동자 운동 또는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랴?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현장에서 육체를 맞  부딪치며 투쟁하고 그들에 의해 교육받으면서 인권에 대한 이론을 이토록 훌륭하게 발전시킨 정정훈이야말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권운동의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인권과 인권들』에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드물고도 어려운, 고귀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론과 (대중운동으로서의) 인권운동의 융합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정훈이 인권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 가져다주는 핵심적인 이론적 혁신은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하에서 내적이거나 또는 외적인 방식으로 배제되어, 강력한 시큐리티-통치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다수의 빈민대중이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다기보다는 (최근 묵시록적인 SF물에 등장하곤 하는) ‘좀비’의 형상을 띠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권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매우 곤란한 질문을 어떤 주저함도 없이 정면으로 묻고 대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사상을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했던 에드문드 버크 뿐 아니라, 아렌트,아감벤, 바디우, 지젝 등과 같이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인 입장에서 버크의 어떤 코드를 은밀하게 재전유하고 있는 다양한 인권비판가들은 인권은 ‘정치적인 것’과 본래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권리란 ‘정치적 존재’가 아닌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는다고 가정되는 권리를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생명으로서의 인간 또는 심지어 동물로서의 인간이 갖는 ‘생존’에 대한 권리를 가리키거나 또는 기껏해야 비교적 안락한 물질생활(의식주)을 영위할 권리를 가리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오히려 단순한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자 애쓰는 모든 불이익과 고통을 감내하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불사하면서 어떤 이상적이고 진리적인 가치를 추구하거나 그러한 가치가 구현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주체로서 떨쳐나설 때에 출현하는 차원이다. 요컨대 정치적인 것은 이들에 따르면 인권의 대척점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의사-초월적, 비-동물적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정훈은, (1789년 이전에 시작되어 1871년 파리코뮌까지 지속된)장기적인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인권의 담론이 결코 그러한 생존 또는 안락함에 대한 집착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인간성’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자신을 인간으로 선언하고 그렇게 인정받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담론이었다는 것을 이론의 여지없는 방식으로 논증해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권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 권리―곧 신이나 자연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부여해준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 이하의 인간’ 또는 ‘비인간’이 자신을 (그 누구하고도 평등한) ‘인간’으로 선언하고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함으로써 쟁취하는 권리이다.

 

‘좀비’가 빈민대중의 일반적 형상이 되어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인권의 담론이 다시 한 번 재발명되고 정치적으로 급진화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좀비는(먹기만 하는) 좀비로 남고자 할 때가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해 정치적으로 투쟁할 때에만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정정훈은 “인권은 단지 인간이라는 특권적 생명체의 생존의 유지를 위한 권리가 아니다 …… 동물화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위한 권리, 모든 정치적 삶의 형식을 잃어버린 단지 살아 있기만 한 자의 권리가 아니라 …… 정치적 주체화를 시도하는 자들의 권리”이며, 따라서 “인권의 정치란 무엇보다 바로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모색하는 정치”라고 말한다(190~91쪽). 인권의 정치는 인간의 정치가 아니라,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비인간의 인간-되기의 정치이자, 비인간으로 취급받던 자들이 인간의 범주에 스스로를 포함시킬 것을 강제함으로써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확장적으로 재규정하고 재발명하는 정치인 것이다.

 

하지만 정정훈은 인권의 정치에 대한 (이미 놀라운) 이러한 논의를 넘어서서 현재 인권의 정치를 다시 발본화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쟁점을 제기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사실 이 저서의 진정한 백미는 5장에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적으로 변질된(따라서 자본주의체제에 순응주의적으로 변질된) 도덕화된 인권 담론과 대결하기 위해서, ‘연합을 통한 개체들의 역량 확장’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준거하여 인권을 더 이상 ‘개인적인 권리’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개인적인 권리(transindividual right)’로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관개인적인 권리’란 단순히 ‘집단적 권리’ 또는 ‘집단의 권리’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이 권리의 담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갖는 권리 및 그것의 실효성은 오직 개인들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 속에서만 현실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어떤 개인이 갖는 개인성이란 그가 타인과 관계 맺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와만 관계할 때 가장 순수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허구적 신화를 발명해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오히려 그러한 ‘고립’은 개인의 실존의 파괴, 곧 ‘죽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개인성은 그가 타자(그것이 타인이든 자연 내의 또 다른 사물이든 간에)와 끊임없이 교통하는 가운데에서만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개인들 사이의 무한 경쟁을 조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 경쟁을 통해 개인을 자유화하기는커녕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성의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개인들의 자립성, 더 나아가 그들의 실존 그 자체를 파괴해 나가고 있다(끝도 없는 자살행렬이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인권의 정치가 다시 한 번 급진적인 해방의 정치로 출현하기 위해서는 권리의 관개인적 성격에 주목하고 연대 또는 연합의 새로운 형식들을 발명하는 실천을 반드시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정정훈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대문자) ‘인권’과 (소문자) ‘인권들’을 구분한다. 전자가 어떤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이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후자는 그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인권이 이러저러한 제한과 함께 구체적으로 제도화된 결과로 주어지는 실정적 권리들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권과 인권들, 이 양자의 변증법은 후자가 결코 전자를 온전히 실현할 수 없으며 전자는 항상 다시 후자의 제한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대립물의 상호전화의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전통적 맑스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유토피아주의가 꿈꾸었던 것과 같은) ‘정치의 종언’과 같은 것은 없으며, 정치란 (누구보다도 먼저 배제된 자들 자신의 실천에 의한) 질문 재개의 무한한 과정일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 심사평을 마치고자 한다. 정정훈은 자신의 저서에서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논의를 다루는 대목에서만 거의 유일하게 시민권의 문제를 짧게 논하고 있다. 하지만 ‘인권과 시민권이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 이 책에서 좀 더 분명하게 되었다면, (대문자) 인권과 (소문자) 인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나 인권의 탈도덕화 및(재)정치화의 길이라는 문제가 훨씬 더 명료하게 가공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분명히 ‘정치’는 무엇보다도 ‘시민’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 질문을 깊이 다룰 수 있었다면, (대문자) 인권을 (현실이 무한히 접근해 들어가야 할) ‘규제적 이념’보다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서의) 봉기적 시민권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권과 인권들』의 후속작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정정훈의 논의와 해명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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