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8호][칼럼]신자유주의 리얼리즘과 위기의 대학(최철웅)

신자유주의 리얼리즘과 위기의 대학

 

최철웅(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최근 몇 년간 캐나다와 칠레, 영국과 유럽 등지에서 등록금 인상과 학과통폐합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투쟁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있다. 2015년 한국의 대학가도 중앙대와 건국대가 앞장서 취업률이 낮은 인문예술계열 학과를 통폐합하려는 시도를 보이면서, 학교본부와 교수·학생들 간 대립이 격화되고 있다. 이는 구조조정 성과에 따라 지원금을 차등 지급하는 교육부의 방침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난 20여 년간 진행된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사회적 서비스를 상품화함으로써 사회적 권리를 개인적인 구매를 통해 해결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항구적인 위기의 온상으로 곧잘 지목되는 것이 연금 서비스와 대학이다. 국가의 재정지출을 줄이고, 자본을 위해 민간보험과 사교육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한편, 신자유주의적 자기책임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영역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공무원연금법개혁과 대학구조개혁이라는 명목으로 이 두 가지 절차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두 사안 모두 구조조정이 시급한 까닭으로 인구학적 요인들이 거론되나 이는 근거 없는 위협일 뿐이며, 대학의 경우 서울지역 대학의 전임교원 1인당 평균 학생 수는 31.6명으로 OECD 국가 평균인 15.6명의 두 배에 달한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 오히려 교육환경이 개선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셈이다. 사실상 현재 대학위기의 온상은 학벌체제로 인한 서울과 지역대학의 양극화와 교육환경 개선 없이 등록금 장사만 벌이는 사립대학들의 전횡에 있다. 따라서 올바른 개혁의 방향은 교육공공성을 강화하고, 학벌체제 타파와 지역 간 균형발전을 위해 대학의 자원을 분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부의 방침은 정반대로 소수의 경쟁력 높은 서울소재 대학에 자원을 더욱 집중시키고,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정책적 오류에 대해선 다소간의 합리적인 판단만으로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오히려 곱씹어 볼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학생들이 대대적인 투쟁이나 저항 없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점이다. 이를 위해선 20대의 정치적 주체성의 조건과 상황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리얼리즘

 

대학가의 구조조정에 대해 대학생들의 저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에 비치는 모습과 달리 대학 내부에서의 움직임이나 저항의 동력은 사실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학생운동 조직이 거의 사멸한 상황에서 소수의 학생들이 운동을 이끌어가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관심하다 못해 저항하는 학생들에게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더라도 신자유주의적 대학개편과 같은 구조적 원인을 지목하는 경우는 드물며, 대부분 절차적 민주주의와 소통에 대한 요구에 머물고 만다. 교육공공성 담론은 여전히 겉돌고 있으며, 대개 학과통폐합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하거나 막연히 인문학의 중요성을 설파할 뿐이다. 단적으로 말해 오늘날 대학생들 사이에서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고 정당한 현실로서 당연시되고 있다. 다만 ‘부수적 피해’를 낳기에 그 피해에 대한 구제를 요청할 뿐이다. 엘리트 지식인들의 상식과는 반대로 이들에게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냉정한 현실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적 현실주의’가 정치적 이상의 자리를 대체함에 따라 현 질서에 대한 저항은 불순한 정치적 의도를 지녔거나 몽상적인 태도로서 치부되고 있다. 『겟 리얼―이데올로기는 살아 있다』의 저자 일레인 글레이저의 표현을 빌자면 신자유주의는 ‘이데올로기 없음의 이데올로기’인 셈이다. 이 새로운 현실주의의 효과는 오늘날 대학가에 팽배한 ‘반정치 이데올로기’를 통해 매우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건 학내 여성운동이건 간에 대학에서 시도되는 일체의 운동에 대해 가해지는 일반적인 비난은 그것이 ‘정치적’이라는 것, 즉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그 운동의 배후에 한총련이나 민주노총 등 ‘외부세력’은 없는지, 통진당이나 노동당에 소속된 학생들이 포함되어 있진 않은지, ‘순수한’ 의도로 진행되는 움직임이 맞는지. 이들에게 현실은 경쟁이나 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같은 순수한 경제적 힘들이 작용하는 공간이며, 이러한 원리를 거부하거나 비판하는 일체의 시도는 ‘정치적’인 것으로 자연스러운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이 현실주의자들이 곧잘 표명하는 또 다른 우려는 ‘분열시키는’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이들은 학내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들이 결국 우리를 분열시키며, 경쟁자들을 이롭게 할 뿐이라고 경고한다. 평소에는 찾아볼 수 없던 상상의 공동체가 갑자기 출현하는 순간인데, 그 공동체가 내부의 구성원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공동체의 분열이 아니라 공동체가 경쟁에 뒤쳐져 그 피해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인 셈이다. 이들이 공동체 내의 피해자에게 허용하는 것은 특수한 이해의 추구까지이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경제인이므로, 학과폐지 등으로 인한 피해를 호소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보편적인 정치적 의제로 내세워선 안 된다. 보편성을 추구하는 정치는 곧 이데올로기이며, 이데올로기는 불순한 의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다른 사회적 사안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세월호유가족들은 피해자로서 고통을 호소하고 보상을 요구할 수 있으나, 그것을 보편적인 의제로 삼아 정의를 실현하려고 하는 순간 혐오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감히, 불순하게도 정치적 행위를 하려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 없음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그렇다면 이들은 정치적 중립성의 강박에 사로잡혀 전형적으로 속지 않으려다 속는 자들일까? 현실주의의 초점은 관념적인 ‘중립성’이나 ‘순수함’이 아니라 ‘현실’ 자체에 놓임을 잊지 말자. 사실상 현실주의자들은 기득권에 동일시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모든 정치적 당파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에 저항하는 당파성을 거부한다. 기득권의 비리나 부패, 정치적 당파성은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것이 곧 현실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득권자들과의 동일시를 통해 약자들을 혐오한다. 적자생존의 경쟁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약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처럼 실제로는 열악한 사회경제적 위치에 놓인 이들이 기득권자에게 동일시하는 것이 역설적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파시즘의 선례가 보여주듯 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놓인 상황에서 대안적이고 급진적인 정치운동이나 이데올로기가 부재할 때 대중들은 기득권에 쉽게 동일시하곤 한다.

따라서 더 나은 대학과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안적인 정치적 이념과 운동의 재구성이며, 그를 위해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 현실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 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좌파운동과 이론이 퇴조하면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기획은 철지난 유물처럼 취급되고 있다. 대학가 담론 어디에도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조차 찾아볼 수 없으며, ‘주체가 이데올로기를 통해 구성된다.’는 지난 시기의 상식 또한 생경한 것이 되어버렸다. 이데올로기 비판이 사라진 자리엔 탈정치화한 적나라한 ‘청춘의 민낯’을 폭로하거나 20대의 비참함과 곤궁을 안쓰럽게 묘사하는 인류학적·사회학적 탐구들이 들어섰다. 그러한 시도들은 어떤 좋은 의도로 기획되었건 20대의 주체성을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주어진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세대론’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과거 대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총체적이고 급진적인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대학에서의 의식화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 비판’의 계기를 거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반 학생회와 학회, 세미나 모임의 소멸로 대학에서 그러한 과정을 겪기란 점점 더 희귀한 경험이 되어버렸다. 당장 서울 시내 대학 중에 학내에서 페미니즘 세미나를 접할 수 있는 대학이 손에 꼽을 정도이다. 오늘날 20대들은 이데올로기 비판의 관점이나 대항 이데올로기를 습득하기도 전에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고 포섭되고 있다. 인문학의 위기나 대학의 위기를 넘어 이 자생적인 자기-교육의 위기야말로 우리가 시급하게 고민해야 할 과제이다.

 

(경희대 원보, 2015.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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