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9호][칼럼]사랑과 환멸의 대중탕_권명아

[야! 한국사회] 사랑과 환멸의 대중탕

 

권명아(동아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한국 사회의 미래와 대중 정치에 대한 환멸이 담론 공간을 강하게 채우고 있다. 1960년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에 담긴 다소 영웅적인 어조는 환멸에 대한 단절의 태도이기도 했다. 2015년 “껍데기는 가라”는 ‘이놈도 저놈도 마찬가지’인 세상에 대한 환멸이 되었다. 세상이 다 거기서 거기라고 여기는 것은 자신의 앎을 절대화하는 지적 오만이다.

환멸(disillusion)은 말 그대로 이전에 가졌던 환상이 깨지면서 촉발된다. 환멸은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세계를 보는 거울이 깨진 데서 비롯된다. 거울이 깨지자 세상도 깨져버린다. 환멸 속에서 ‘나’에게 세계는 끝장난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끝장은 ‘나’와 ‘나’를 지탱하던 거울의 끝장이다. 그래서 환멸이야말로, 끝장난 ‘나’와 단호하게 이별하고, 다른 세계를 만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알림 신호이다. 그러나 막상 오늘날 환멸은 ‘나’가 아닌 ‘끝장난 대중’에게로 향한다. ‘나’는 환멸 속에서 더욱 고매하게 빛난다.

에스엔에스가 진보 정치를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이 환멸로 이어진 것도 이미 오래된 이야기이다. 대중이나 대중 미디어에 대한 환멸은 실상 지금까지 대중의 흐름을 파악해온 방법론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근대적인 학문 방법론이 ‘대중’의 흐름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한계에 봉착했다는 점은 많은 학자가 지적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경우 대중의 흐름은 훨씬 더 복잡하고 유동적이다.

이른바 대중 네트워크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한국은 어느 사회보다도 사회 기저에 강력한 네트워크 힘이 흐르고 있다. 사실 한국 사회의 기저에 흐르는 대중 네트워크를 전체로 조망하는 연구는 아직 없다. 가장 오래된 상호부조 형식이라 할 ‘계’의 경우도 식민통치와 군사독재를 거치며 대중 동원의 도구가 되거나, ‘퇴폐풍조’로 전락했다. 한국의 특이한 대중 네트워크의 하나는 대중목욕탕인데, 이는 가장 고전적인 ‘풀뿌리’ 네트워크라 할 만하다. 풀뿌리 네트워크라는 의미는 ‘민중적’이라는 의미보다는 지배적인 흐름이 변해도 한국 사회의 기저를 단단하게 동여매고 있는 흐름이라는 뜻에 가깝다. 대중목욕탕은 모든 정보가 모였다가 나가는 중계점이고, 모든 담화와 정보는 ‘생활적’이다. 드라마 선택에서 투표 후보자 선택까지 다양한 판단 지점에 이러한 생활적인 정보와 담화는 주요한 변수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대중목욕탕은 상품 정보에서 인물평까지 다양한 평판을 구성하고 생산하는 ‘뒷말’ 공간이다.

  대중목욕탕은 누구나 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이지만, 독특한 내적 친밀성을 기반으로 관계가 형성된다. 모두가 잘 아는 공간이지만, 실상 논리적 파악이 힘들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막상 그 네트워크의 일원이 되는 건 쉽지 않다. 이 네트워크는 최근 들어 에스엔에스로 이어지면서 이른바 친구와 동료들만의 단체 방의 형태로도 변형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문적 연구 대상으로서 대중목욕탕은 에스엔에스와 비교하면 접근도 어렵고 내밀한 관계 형성을 통한 정보 수집에도 한계가 있다.

한국 사회에는 이런 식의 풀뿌리 네트워크가 강해서 흐름의 변화는 여기서 비롯된다. 풀뿌리 네트워크 자체가 본래 진보적이거나 보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국 사회는 보수나 진보의 이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잠재성을 가졌다. 대중 네트워크의 흐름을 연구하는 건 이제 시작 단계이다. 대중목욕탕 네트워크 하나만 연구하고 조사하려 해도 누군가의 인생 전부를 걸어야 할 정도의 시간과 애정이 필요하다. 환멸은 그런 시간과 사랑을 소모하고 잠재성을 잠식해버린다. 환멸에 머무는 한 기저를 관통하는 흐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겨레 칼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1044.html, 2015. 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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