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9호][칼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서동진(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이 사태에 연루된 자들을 에워싼 괴담에 가까운 추문들은, 주의해 듣자면 민망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쓰레기더미에서 집어올린 작은 오물의 단편을 꺼내 이것이 당신의 것이 맞느냐 다그칠 때, 우리는 일제히 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은 곧 입술을 달싹일 증인들의 낯이다. 그들은 초조한 죄책감과 부산한 수치심에 쫓겨 어떤 낯을 지을 것이다. 낯빛은 헤아릴 길 없는 그 혹은 그녀의 내면적인 도덕을 비춘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의 낯빛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줄 아는 ‘포커페이스’는 악인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연민을 잃은 채 위악한 미소를 짓는 표정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였다. 그만큼 우리는 얼굴이란 표면에 깊은 윤리적 믿음을 부여한다.

어쩌면 이 모두는 어디까지나 좋았던 옛날의 일이다. 거짓말탐지기처럼 부지불식간에 얼굴을 채우는 내면적 윤리의 색조는, 이제 사라졌거나 소멸하였다. 조금 젠체하는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얼굴은 이제 대자적인 것이 아니라 대타적인 것이 되었다. 얼굴의 표정은 자신이 자신과 맺는 윤리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지표가 아니라 타인에게 어떻게 자신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하는지를 뽐내는 거울이 되었다. 우리는 타인의 낯을 읽고 그가 누구인지를 짐작하는 데 한참을 애써야 한다. 청문회장에 불려나온 이들은, 특히나 재벌 총수들은 소문에 따르자면 한참 동안 예행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그런 연습을 통해 조련된 표정을 지켜본다. 심란한 척, 비통한 척, 안타까운 척.

어느 날 느닷없이 악마처럼 변신하여 주변의 동료나 상사, 급우와 교사들을 살해한 살인마들에 대한 소식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그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고 그의 얼굴 표정에서 그런 조짐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친근한 이웃이었고 다정한 친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가슴에 도사린 악마를 꺼내 보이지 않은 사악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오늘날 수많은 마음의 과학자들이 능청스레 보급한 병명(病名) 중 하나처럼 분노조절장애에 빠진 측은한 병리적 인물이었던 걸까. 그렇지만 감정노동의 지독함을 고발하는 수많은 비명들이 말하는 것처럼, 삶의 쓰라림은 쾌활하고 명랑한 낯빛을 통해 감금되도록 선고받은 지 오래다.

환한 미소는 오늘날 누구나 명심하고 준수할 윤리적 행동방침 가운데 하나 아닌가. 긍정적인 삶의 자세, 적극적인 팀워크에 참여하는 태도는 어떤 불편과 불화의 기색도 금지한다. 역량평가와 성과평가라는 눈금은 얼굴의 표정을 정조준한다. 더불어 낯빛은 마음의 유리창이 아니라 마음의 벽이 되어버린다. 얼굴은 비위를 맞추고 타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고통스런 노역의 장소가 되었다. 가짜 명랑함과 낙천성으로 얼굴을 마비시키며, 마음을 다스리고 분노를 조절하며 최적의 분량만큼 화를 배출하도록 가르치고 배우도록 다그치는 세계는 미친 세계이다. 분노한 자들이 수백만이나 모였던 주말 광장. 거기도 역시 웃음과 배려는 불문율이 된다. 파탄 난 정치를 만회하려는 시민의 시위는 거듭 질서 있는 축제로 치장된다. 굳이 축제라면 축제란 것의 알맹이일 카오스 상태는 빠진 김빠진 축제. 분노하고 항의하는 자들의 거대한 군집 속에서도 환하고 명랑한 낯을 짓고 마주해야 한다는 충고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던 건, 나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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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9호][칼럼] 가르침의 질서와 해방된 주체 (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가르침의 질서와 해방된 주체

권명아(동아대 국문과 교수)

한국 근대사에서 국민의 95%가 어떤 사태에 대해 ‘공감’이나 ‘합의’를 한 사례는 거의 없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5%로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국민의 95%가 ‘지지 거부’에 공감했다는 의미다. 무엇에 의해 촉발되었든 이러한 거대한 폭발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의 귀결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우리는 이 의미를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사실 이미 우리는 역사적 순간들,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정치적 사건의 한가운데 있다.

민중총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민중총궐기는 그 자체로 낡은 반복이 아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시공간을 연다. 그래서 민중총궐기는 그것이 무엇을 이뤄냈느냐가 아니라 ‘궐기’ 그 자체로 해방적이다. 또한 오늘날의 민중총궐기는 같은 공간에 참여하지 않아도 실시간 생중계로 먼 곳까지 전송된다. 전송된 궐기에 동참하면서 궐기의 해방감도 널리 퍼진다. 해방감은 전염력을 갖고 비물질적 마주침을 통해서도 퍼져 나간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각축전을 벌이는 이 ‘성토 공간’에서 낡은 반복과 단절하는 흐름이 바로 ‘해방’의 자리를 펼쳐낸다.

당연하게도 이 95%의 힘과 흐름은 단일한 동기나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누군가는 정치공학에 결국 패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한다. 이미 이번주를 기점으로 보수 언론은 방향을 틀었고, 정치공학은 공공연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적 순간을 정치적 공학으로 봉쇄하고 사건적인 마주침이 낡고 오래된 패거리 연합으로 다시 분화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반복이다. 그런 반복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니 그 반복에 대해 실망하거나 환멸을 품을 필요가 없다.

“야동까지 나와야 되겠냐!”며 겁박하는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인터뷰에 “야동 공유합시다!”라며 줄줄이 달린 댓글은 이 낡은 반복의 세계를 연장하고 지속시킨다. 바로 그런 이유로 신나서 야동을 공유하자며 댓글을 다는 쾌감은 억압과 종속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 아니다. 사상 유례가 없이 열린 성토 공간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에 대해 여성혐오, 소수자혐오를 반복하지 말라는 요구가 드세다. 이는 혁명의 매뉴얼이나 ‘착한 궐기’를 규율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이 요구야말로 유례없이 열린 이 성토 공간이 종속과 굴종, 노예화와 침묵을 강요하는 낡은 세계의 질서와 단절하고 다른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해방에의 요구다.

국가권력 비판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 여성혐오나 소수자혐오를 문제시하는 게 사소하거나, 목표를 향한 총력전의 힘을 분산하는 일이라는 비판도 많다. 이런 비판은 ‘혁명을 잘 모르는 초심자’를 지도하는 경험자 선배의 가르침의 형식을 종종 취한다. 소수자혐오와는 전혀 다르지만, 이 혁명적 흐름의 향방을 ‘원로의 가르침’으로 가닥을 잡으려는 언론의 추이도 해방의 요구를 가르침의 질서로 복귀시킬 우려가 있다.

잘 알려진 민중 시(가요)의 구절인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는 해방의 길이 가르침의 질서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크 랑시에르는 누구나 가진 해방의 의지가 가르침의 질서에 지배되고 그것이 마치 진보의 논리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비판했다. 가르침의 질서에 복속되지 않는 해방의 실천은 ‘해방된 자가 해방한다’라는 표현에 함축된다. ‘성토 공간’에서 낡은 반복을 끊자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치의 요구를 ‘사소한’ 일로 간주하는 건 바로 이런 가르침의 질서다. 낡은 반복을 끊자. 그것이 바로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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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9호] 문화과학 88호 신간안내

문화과학 88호 <난민과 이웃>

특집 주제 소개

난민(難民, refugees)은 현대정치의 위기와 연결되어 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배제와 포섭’ 그리고 ‘배제하면서 동시에 포섭’하는 메커니즘을 통해 통치성이 작동한다고 했다. 이것은 생명정치이기도 하고 근대정치의 실현 양상이기도 하다. 최근, 난민이 유럽의 위기가 고조되는 정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에 따르면, 2015년말 2,13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들은 국민국가 내부의 내전, 정치적 폭력, 인권침해, 환경적 요인 등으로 자신의 터전을 버려야만 했다. 난민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내부로부터의 배제가 전지구적 배제로 확산되고, 이것이 ‘버려진 존재로서의 난민이 근대 보편주의의 위기’로 이어지는 상황으로 연결되고 있다.
한국적 상황에 비춰볼 때, 난민은 민족국가의 형성과 민족국가의 위기라는 근대성 문제로 이어졌다. 지금도 한국사회는 ‘난민’에 대한 접근은 완고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2012년 난민법이 제정되었고, 2013년 7월 1일 난민법을 시행하고 있다. 난민법에 의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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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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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8호] 계간 <문화/과학> 87호 발간 독평회

계간 <문화/과학> 87호 발간 독평회

데이터사회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일시: 2016년 9월 29일 (목)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 서울문화재단 대학로연습실

(서울시 종로구 동숭길117 한석빌딩 1층)

 

주최: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프로그램

 

사회자

김성일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발제자

◾ 데이터사회의 형성과 대항장치의 기획

이광석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 나 자신의 데이터가 되다 : 디지털 자기기록 활동과 데이터 주체

김상민 (서울대학교 강사)

◾ 협력과 공생을 위한 디지털 인문학

임태훈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 발제 후 독자들과의 토론 및 대화의 시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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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8호][행사안내] 계간<문화/과학> 제17회 북클럽 『소리의 정치: 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제국의 관객』(이화진, 현실문화, 2016)

<문화/과학> 제17회 북클럽

『소리의 정치: 식민지 조선의 극장과 제국의 관객』(이화진, 현실문화, 2016)

일시: 2016년 10월 19일 (수) 오후 7시 – 오후 9시

장소: 서울특별시 NPO지원센터 주다(교육장)

<패널>

저자

  • 이화진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HK연구교수)

토론

  • 전우형 (건국대 상허교양대학 교수)
  • 이기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사회

  • 천정환 (성균관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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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8호] 문화과학 87호 신간안내

 

87호 <데이터사회> 소개

 

[개요]

● 87호 특집 <데이터사회>를 통해 다섯 명의 필자가 소셜웹 시대 이후에 등장한 신종 데이터사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기술, 과연 오늘 이 시대를 데이터사회로 볼 수 있는지 개념 정의와 함께 데이터사회의 특징적 국면을 비판적으로 묘사!

● 제4산업혁명의 기술적 핵심을 관통하는 빅데이터 혹은 데이터 과잉의 시대를 맞아, 글로벌 대중의 무수한 ‘데이터 부스러기’의 배설을 매개해 새롭게 재규정되는 동시대의 (플랫폼) 자본, 통치 권력, 신체, 노동, 물신성, 디지털인문학 교육의 문제들을 다룬 5편의 <데이터사회>

 

특집 논의 수록! 

● 기획 <데이터 인권과 저항>은 데이터사회의 성장을 주도하는 자본과 통치 권력의 데이터 오·남용에 대한 대항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예비 작업, 특히 데이터사회 저항의 기획과 호혜와 협력의 가능성 논의!

● 문화현실분석에서는 신종 예술장르로서 ‘데이터아트’, 거대과학과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관계, 테러방지법 ‘이후’ 현실, 연극을 통해 본 예술 검열의 문제를 다룬 문화비평 글들을 수록!

● 제16회 북클럽에서는 최원 편집위원의 신간 『라캉 또는 알튀세르』에서 보이는 정치철학적 쟁점에 대한 토론 내용 수록!

● <근대성 연구>는 근대 도시 재해의 대표적인 형태, ‘교통사고’에 대한 밀도 있는 논의 수록!

● 이론의 재구성에는 데리다부터 네그리에 이르기까지 서구 정치철학의 부흥을 이끌었던 학자들을 분류하고, 이들로부터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탐구하는 브루노 보스틸스 번역글 수록!

특집 주제 <데이터사회> 소개

오늘날 ‘초연결사회’란 말이 우리 사회의 기술 국면을 지칭하는 공식어가 되어 간다. ‘한계비용제로사회’와 같은 디지털혁신 예찬론 또한 역시 우리의 미래를 지칭하는 신생어 대열에 합류했다. 그 외에도 ‘빅데이터사회’, ‘스마트지식사회’ 등 유사 유행어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아쉽게도 물질세계의 표상 질서의 변화와 기술력에 기댄 신조어들은 대체로 그것이 가져오는 내적 논리나 모순 기제를 함축하지 못하고 현실을 그럴 듯하게 포장한 채 굳어져 쓰인다. 이 공식어들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실제 무엇을 의미할지 그것의 구체적 맥락은 무엇일지 모른 채 말이다. 이들 기술과잉의 언어들이 대체로 놓치는 것은, 미래에 계속해 짊어져야 할 것들, 배제되는 것들 혹은 악화일로에 있는 것들에 관한 무심함과 공백들이다. 우리네 사회 현실의 질곡을 떠올리면 이런 기술적 개념의 말잔치들이 구름 위 선문답으로 보인다. 오히려 핵심은 자본주의 기술이 어떻게 현실의 골 사이사이 스며들고 박히면서 일상의 일부가 되는 과정에 대한 물음이 존재해야 한다.

『문화/과학』의 이번 <데이터사회> 특집은 바로 동시대 기술과잉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수행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다. 최근에 이러저러하게 명명되는 ‘OO기술사회’들의 여러 판본들의 바탕이 되는 ‘데이터’ 개념을 끌어와 이를 오늘날 사회 변화의 포괄적 함축어로 쓰려하고 있다. <데이터사회> 특집을 통해 저자들은 데이터 기술의 ‘포스트’적 국면, 특히 인간들 역사와 생의 기억들이 첨단의 기술적 저장장치에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이제까지 사피엔스 인류가 만들어낸 기록의 양보다 매일 매일의 일상 데이터들이 이를 능가하는 데이터 생산과 기억 저장 과정의 거대한 시대 변화를 주목한다. 예컨대, 오늘의 데이터과잉 국면에서 현대적 주체가 어떤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지, 데이터 저장 기계들이 어떻게 권력의 장치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 깊게 각인된 자본과 권력의 기제와 형식과 어떻게 마주치는지를 살필 것이다.

현대 자본의 욕망으로 촉발된 데이터 혁명은 그로부터 배태된 사회 모순이 씨줄날줄로 얽혀 있다. 기술에 깊게 박혀있는 한 사회의 모순에 기초해서 근미래 대항의 논리를 살필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문화/과학> 편집위원들은 이렇게 데이터 기반의 새로운 삶의 조건이 우리에게 미치는 사회 존재론적 상황을 해석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데이터사회’를 특집으로 잡았다. 즉 새로이 구성되는 데이터 기술의 내적 속성과 효과를 과대포장하지 않으면서, 후기자본주의 권력이 구성하는 정보생체 기계들의 습격에 대항하려는 자율 주체들의 비판적 역능과 지혜를 찾는 데 목적을 둔다. 이번 특집이 첨단 기술로 매개되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음험한 기획을 탐험하려는 독자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었으면 싶다.

87호 주요 원고 소개

▶ 특집: <데이터사회>

이광석 「데이터 사회의 형성과 대항장치의 기획 」

이광석의 글은 이번 특집의 문제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글로, 오늘 이 시대를 ‘데이터사회’로 규정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데이터과잉 혹은 빅데이터의 새로운 조건을 언급한다. 먼저 달라진 것은 많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내뿜는 매일의 감정과 정서의 흐름 데이터, 그리고 인간의 생체 리듬을 데이터로 전환해 양산하는 오늘날 현실이다. 또 하나는, 알고리즘이다. 이는 데이터를 분석하는 명령어 프로그램이자 데이터 쓰나미를 영리하게 분석하는 자동 기계이다. 그는 이들 데이터와 이를 분석하는 알고리즘 장치들이 오늘날 자본과 권력에 여하한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는 데 신통치 수단이자 생산력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에서 누리꾼 데이터 활동의 플랫폼 독점이나 데이터과잉에 기댄 신종 통치 행위에 맞서 동시대 시민 자율의 중요한 대항 기획들을 제시한다. 예컨대, 데이터 수집 관행의 규제, 데이터 폭로와 정보공개에 기댄 핵티비즘의 확산, 데이터 알고리즘의 작동 원리 파악, 데이터 사유화에 맞선 시민 데이터의 공통 자산화, 그리고, 호혜적 가치를 배양하는 대안 기술 패러다임을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김상민 「나 자신의 데이터가 되다 : 디지털 자기-기록 활동과 데이터 주체」

김상민은 ‘자기-기록’(self-tracking)이란 개념을 갖고 데이터와 생체기계의 결합 양상을 밀도있게 그려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기-기록 혹은 자기-추적이란 것을 디지털 웨어러블 장비 등을 통해 건강과 생체 리듬의 데이터를 측정하고 기록하고 분석해 신체에 피드백을 전달하는 활동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자기-기록이 대단히 자발적인 과정으로 이뤄지며, 신체의 기록은 마치 자동화 공정과 흡사하게 신체로부터 데이터 배출이 매순간 이뤄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무엇보다 그는 그렇게 배출된 신체 데이터 기록의 행방에 대해 어느 누구도 별로 아는 것이 없다는 데 자기-기록의 ‘권력’과 ‘통제’ 문제가 발생한다고 본다.

김동원 「플랫폼 담론과 플랫폼 자본 : 삶정치 노동의 확장」

김동원은 플랫폼과 노동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과 마찬가지로 담론 수준에서도 기존 비즈니스와 다른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지닌다고 본다. 즉 그가 보기에 담론으로서의 플랫폼은 겉보기에 기술적 “개방, 중립, 평등, 그리고 진보의 키워드”들을 내세우나 기실 통제와 차별을 은폐하는 담론 효과를 만들어낸다고 본다. 다른 한편 자본으로서의 플랫폼은 “이용자/소비자에 대한 통제와 함께 콘텐츠 공급자에 대한 통제를 통해 아윤을 창출”하는 브로커 역할을 주로 한다. 이어서 그는 플랫폼을 경유하는 노동의 문제에서 이용자 데이터 노동 통제의 문제뿐만 아니라, 플랫폼 그 자체를 지탱하는 수많은 데이터 큐레이터, 알고리즘 개발자, 어뷰징 기사 작성 노동자, 메커니컬 터크 노동자 등 플랫폼에 고용된 다수의 하층 좀비 노동자군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성일 「산업사회와 데이터사회에서 작동하는 물신주의」

김성일은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물신주의의 고전적 문제를 재해석하고, 이를 데이터사회에서 어떻게 새롭게 확장할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는 물신주의 개념을 “외양을 실재로 오인하는 구조적 과정”과 이의 비판적 통찰에 유의미하다고 말한다. 그는 이를 ‘데이터 물신주의’ 개념으로 한 번 더 확장해 쓰면서, 데이터사회 속에서 물신주의가 자본주의적 표상, 주체 구성, 그리고 육체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핀다. 먼저 표상과 관련해선, 그는 새롭게 테크놀로지가 전면에 부각되면서 기술 그 자체가 메시지가 되고 이미지 데이터로 구성되는 새로운 물신주의의 질서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주체 구성과 관련해선, 데이터사회에서는 새롭게 얼마나 ‘사이보그 치장’을 하는 데 따라 신종 포스트휴먼 주체의 소비 능력과 계급적 차이가 갈라진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육체와 관련해서 물신주의는 가상 육체와 헬스케어로 관리되는 신체의 미래를 구상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오늘날 이와 같은 데이터 물신주의의 구조적 과정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데이터 권력의 치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할 것을 요청한다.

임태훈 「협력과 공생을 위한 디지털 인문학」

임태훈은 대학교육에 미친 디지털 국면의 부정적 파급력을 문제 삼는다. 궁극적으로 그는 신자유주의 대학 논리에 의해 떠밀린 소위 ‘디지털인문학’적 위상을 좀 더 호혜성과 공생의 급진적 가치들을 복원하는 학문으로 삼을 것을 요청한다. 그는 성과주의와 실용론에 포위된 대학과 디지털 인문학의 미래를 구출하기 위해서 그저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헛껍질만을 부여잡아서는 곤란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최근 교육부가 주도하고 각 대학들이 좀비처럼 미친 듯 몰리는 각종 산학협력 지원 사업(프라임)이나 인문역량 강화 사업(코어)의 사례들은, 연구 사업에 흘러드는 돈에 휘청거리는 현대 대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는 오늘날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혁신적 물성을, 탐욕과 경쟁의 시장 언어로 가져가기보다는 기존 인문학적 전통이 지닌 현실 변혁의 언어를 벼리고 다가올 문명사적 미래의 사회적 급진성을 극대화하는 데 중요한 기폭제로 삼을 것을 요청한다.

▶ <기획 > 데이터 인권과 저항

오병일 「데이터 시대의 정보 인권」

오병일은 한국 사회에서 국가 권력과 기업에 의해 데이터 감시가 얼마나 보편화된 관행이 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가권력에 의한 데이터 감시로는, 미 국가안보국의 국내외 시민들의 대량 감청과 한국의 정보/수사 기관의 정보 수집 및 사찰 등의 문제를 지적한다. 기업에 의한 데이터 감시로는, 온라인상의 소비자 ‘트래커(tracker)’, 알고리즘 감시, 빅데이터 산업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비식별 데이터 조치의 문제점 등을 조목조목 따지고 있다.

박승일 「사이버 망명, 저항 또는 이데올로기」 

박승일은 국가 권력의 감시와 검열에 반응하는 누리꾼들의 특유한 ‘사이버망명’ 고찰기를 내놓았다. 그는 그 사례로 2008년과 2014년 국내 정치 탄압에 반응했던 사이버망명의 기록을 들고 있다. 그는 이 둘의 구체적 사례 비교로부터 사이버망명의 저항성이란 단순한 온라인 거점의 단순 이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탄압에 항거하는 온라인 반역의 정치와 함께 결합됐을 때 그 의미가 확장한다고 본다.

오창은 「데이터 시대와 인문학의 전환」 

오창은의 글은 인문학적 고민 속에서 데이터사회의 질적 재구성을 꾀한다. 그는 오늘날 ‘빅데이터’란 이름으로 재구조화되는 세계를, 괴테 <파우스트> 속 실험실 인조인간, ‘호문쿨루스’와 유비한다. 그는 신을 닮고자 했고 신에게 도전했던 호문쿨루스처럼 데이터 권력은 담대하게 오늘날 그 역할을 대신하려 한다고 본다. 그는 데이터로 구성되는 신세계의 매끈한 풍요와 편리성의 논리보다는 데이터사회가 해결하지 못하는 삶의 의미와 존재의 탐구를 통해 ‘정신적 풍요’를 도모하는 새로운 문명의 지향점을 세울 것을 주장한다.

▶ <문화현실분석>

조선령 「데이터 아트」

이 글은 ‘데이터 아트’를 세계를 데이터로 간주하는 패러다임의 산물로 보고, 데이터와 예술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념의 만남을 여러 작품들을 통해 입체적으로 관찰한다.

전규찬 「반테러 입법화라는 글로벌 성좌의 (반)문화정치학」

이 글은 지난 3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테러방지법을 초국가적 관점에서 테러리즘을 수반하는 제국 시대 국가성격 변환의 결정적 기호, 징후로 읽어낸다.

김일림 「거대과학과 애니메이션 : 과학사 및 수학사의 관점으로 보는 3D CG 애니메이션의 의미」

이 글은 그동안 서로 다른 분야로 여겨져 온 거대과학과 애니메이션의 관계를 밝히고, 과학사와 수학사의 관점에서 3D CG 애니메이션의 발생사, 그리고 그 의미를 살핀다.

김소연 「검열과 예술의 내상」

이 글은 지난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연극 검열 이후 전개된 여러 논쟁들과 검열에 대한 저항연극과 공연 등을 통해, 검열이 비단 예술계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공성의 위기이자 사회의 위기임을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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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8호][칼럼] 올림픽의 정치학 (최철웅)

[경희대원보] 기고문

올림픽의 정치학

최철웅(카톨릭대 강사)

기록적인 무더위와 함께 여름밤을 수놓았던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리우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은 남미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자, 최초로 난민 팀이 출전함으로써 지구촌 화합의 뜻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종합 8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예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4년여를 준비한 선수들의 땀과 열정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한여름 밤의 축제는 기나긴 열대야를 그나마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리우 올림픽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올림픽이 더 이상 맹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동원되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문화적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디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 경기와 관련뉴스로 도배되었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올림픽의 무게감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대체로 종합순위나 승부에 연연하기보다 경기 내용 자체와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이 더욱 화제가 되는 분위기다. 예컨대 ‘할 수 있다’ 신드롬을 낳은 펜싱 금메달리스트 박상영 선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이고, 그 축제에 맞춰 즐기려고 노력했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국가대표로서의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즐거움과 성취를 앞세운 이 말은 올림픽에 대한 변모한 관념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비로소 우리도 국제스포츠 경기를 통해 국위선양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서 벗어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체험으로서 세계인의 축제를 즐기는 단계로 한발 나아간 것일까.

출처 : Sergio Moraes / Reuters

올림픽의 역사와 정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즐기고 탐닉하는 문화적 축제로서의 올림픽은 지난 몇 십 년간 자연스레 정착된 흐름이지만, 올림픽이 그 자체 정치의 장소이자 여러 정치적 사건을 수반했던 역사를 되새기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언론을 위시해 지식인들의 담론장에서도 올림픽의 정치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비단 ‘3S(Sports, Sex, Screen) 정책’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국제스포츠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함의와 정치적 맥락에 대한 비판은 올림픽 역사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올림픽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고 순수하게 경기 자체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미디어의 효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신의 기술력과 예술적 실험을 결합한 개회식과 폐회식의 스펙터클을 위시해, 약 2주 간에 걸쳐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미지는 오직 경기장 내부의 모습뿐이다. 이 선택적 이미지들은 한편으로 지배계급은 물론 대중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는 순수한 열정과 경쟁의 드라마, 스포츠를 매개로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유토피아적 환상만이 상연된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물론 경기장 바깥의 사람들, 그리고 올림픽을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결탁과 같은 구조적 현실이다.

1896년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텡 남작은 올림픽 정신이 “승리보다 참가에, 성공보다 도전에” 의의를 두며, 이러한 원리는 무엇보다 “강하고 단호한, 무엇보다 더욱 신중하고 고결한 인간성의 건설”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러한 자유주의적 이상은 실제 올림픽의 역사에서 한 번도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완화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커지고 있다. 올림픽의 역사는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에 의해 늘 규정되어 왔는데, 제 1회 아테네 올림픽부터 이미 노동자와 여성이 배제된 올림픽이었다. 그리하여 1925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최초의 ‘노동자 올림픽Worker’s Olympiads’이 개최되기도 했다. ‘사회주의 노동자 스포츠 국제협회’에서 조직한 이 올림픽은 19개국에서 15만 여명이 참가해, 같은 해 3,00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제 8회 파리 올림픽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위시해 누구에게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고, 대중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국제적인 집단 운동들을 도입한 덕분이었다.

그 후로도 올림픽은 나치즘의 사례에서 보듯 집단적인 선전과 동원수단으로 활용되거나, 냉전 시기에 보듯 체제경쟁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20세기 내내 정치적 갈등의 중심이던 올림픽은 20세기 후반 들어 상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자본이 점차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공식 ‘파트너스’와 ‘스폰서’ 등의 명목으로 기업들과 계약을 맺는데, 리우 올림픽에서만 그렇게 해서 쓰인 금액이 약 12조 원 규모라고 한다. 미국의 NBC는 리우 올림픽에 대한 독점 중계권료로 IOC에 1조4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했으며, 이미 광고수입만으로 1조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들어 올림픽은 부동산 개발업체 및 그에 관련된 투자자본의 이익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전 세계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지역의 경제개발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기존 도심지의 재개발과 철거, 경기장과 도로 건설 등 대대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이제 올림픽 유치의 명시적인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자본이 주도하는 여느 도시개발이 그러하듯, 이러한 과정은 수많은 거주민을 폭력적으로 쫒아내고 지역공동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화합의 축제 또는 배제의 게임

브라질의 테메르 대통령 권한대행이 리우 올림픽 개회식 연설을 진행하는 동안 마라카낭 주 경기장을 가득 메운 브라질 관중들은 일제히 야유를 쏟아냈다. 테메르 권한대행은 정국 운영상의 과오에 더해 부패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브라질 시민들의 저항은 단지 테메르 권한대행에 대한 불만을 넘어, 리우 올림픽 자체를 향하고 있다. 올림픽 개최 전부터 올림픽 반대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그 주요 의제는 주택부족과 강제철거 문제에 맞춰졌다. 리우가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2009년 이래 경기장 및 관련시설 건설을 이유로 빈민계층의 거주지인 파벨라(favelas)에 대한 강제철거가 진행되었고, 7만 7천여 명의 주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파벨라의 고질적인 범죄문제에 반-올림픽 시위가 결합하면서 올림픽을 전후해 8만 5천명의 경찰들이 리우 시내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의 2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Jules Boykoff / Jacobin

올림픽은 전 세계인들이 모이는 국제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언제나 ‘예외상태’를 허용한다. 그리하여 평소라면 주민들의 저항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대대적인 도시개발과 억압적인 치안활동이 용인되곤 한다. 경기장과 레저시설 등의 건설은 납세자의 돈으로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억압적인 치안활동은 정당성이 취약한 정권에게 대중통제의 기회를 부여한다. 리우의 경우 올림픽을 통해 재정지출을 대폭 늘려 경제침체를 벗어난다는 계획은 부자와 기업들을 위한 도시개발로 귀결되었고, 그로 인해 빈곤층 거주지에 대한 철거와 필수적인 서비스에 대한 재정지출의 축소를 동반했다. 지난 6월 4일 리우 국제공항에서 임금이 5개월 체불된 경찰들과 소방관이 “Welcome to Hell”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벌인 것은 이러한 사정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올림픽의 이상은 평화로운 세계와 사회적 통합, 인간의 존엄성 등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역사적으로 올림픽이 거주민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늘 그 반대였다. 전 세계 관광객들의 환상을 충족시킬 경기장과 주변 환경 조성을 위해 폭력적인 철거가 강제되고, 사회 내의 빈곤층과 노숙자들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올림픽 경관’을 위해 추방된다.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최초로 구성된 난민 선수팀이 열렬한 환영을 받는 가운데, 수많은 ‘내부 난민들’이 생성되었다는 사실만큼 이러한 모순을 잘 드러낸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의 한 저널리스트는 “파벨라의 전 거주민들이 2020년 도쿄 올림픽에는 난민팀으로 초청받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리가 올림픽을 통해 인간성의 진보를 발견하고 감동받는다면, 그것은 이러한 배제의 현실에 눈감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전 세계인의 평화와 화합의 장이라는 올림픽의 이념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규범적으로 표현하는가, 실제 벌어지고 있는 배제의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가. 올림픽으로 인해 배제되고 억압받는 이들이 꾸준히 생성되는 한, 이러한 질문은 결코 유예되거나 외면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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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8호][칼럼] 사드, 한류, 청년 (이명원)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사드, 한류, 청년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사드 배치 문제로 동아시아가 요동치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지만, 아시아 청년들의 소통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다.

강의실에서 제법 많은 유학생을 만나왔다. 구미의 유학생도 있었지만, 다수는 범중화권 학생들이었다. 중국은 물론 마카오와 홍콩 같은 일국양제의 이행과 혼돈을 겪고 있는 학생들. 중국과 미묘한 대타의식을 갖고 있는 타이완(대만) 학생들. 동북3성 출신의 조선족 학생들. 한국 내의 화교로 중국이나 타이완 정체성을 보존해온 학생들이 생각난다. 부친은 중국, 모친은 몽골 국적의 학생 등 그 범주는 생각 외로 다양했다.

그럼 이토록 다양한 범중화계 학생들은 어찌하여 한국의 대학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었는가. 직접 대화를 해보면 동기는 다양하지만, 한국에 대해 친밀성을 갖게 된 극적 계기 중 하나가 이른바 ‘한류’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살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국적이 상이한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나는 간혹 이른바 고전 격에 해당하는 문학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말할 때가 있다. 중화권의 학생들에게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루쉰의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등을 소재로 이야기하곤 한다. 일본 학생들을 만나면 나쓰메 소세키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단 학생들은 선생이 자신의 문화적 전통의 일부를 거론하는 것에는 호감을 표시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본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니까. 한국 학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고전들을 읽어보지는 못했고 이름 정도만 알 뿐이다. 당연히 이런 한국 학생들에게 중국이나 타이완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완전히 빈 공간이다. 홍콩이나 마카오의 특수상황은 이해할 수 없다.

반면, 동방신기나 배우 전지현, 멋진 아이돌 그룹이나 걸 그룹에 대해서는 유학생이나 한국 학생이나 적어도 5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정보와 친밀성을 확보하고 있다. 유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한류는 ‘문화적 공통어’와 유사하다. 비유컨대 공통문법인 것이다.

문학은 그런 사례가 있는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들이 실제로 읽었든 그렇지 않든, 국적이 다른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었다. 흔히 오해되듯 이것은 하루키 문학의 무국적성 때문이 아니다. 고도성장 이후 사회변동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청년들이,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메트로폴리스 안에서의 고독과 부조리 감정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로 중국 내 한류가 인위적으로 통제되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정부 뒤에서 뒷짐진 미국의 공세에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압박 카드라는 점에서는 이해되지만, 이것은 한국이나 중국 또는 아시아의 공존과 협력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조처는 아니다.

나는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문화에 대한 국가 통제가 외교적 응징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일본에서의 ‘혐한류’의 편재화는 한국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전반적 퇴행을 심화시키는 데 오히려 일조했다.

한류는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출발했지만, 이미 아시아의 청년들에게 문화적 공통어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다. 한류는 청년들 입장에서는 네이션의 차이를 뛰어넘어 타자들과 극적으로 만나게 하는 친밀성과 개방성의 통로다. 아시아인들에게 루쉰의 문학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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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8호][칼럼] 이데올로기 노이즈 (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문화비평]이데올로기 노이즈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주 수요일 청계광장에는 ‘국회개혁 1000만명 서명 목표달성 선포 및 헌법 청원 국민대회’라는 우익 연합 단체의 집회가 있었다. 비가 내린 탓에 광장 주변에 빼곡하게 깔아놓은 의자에는 거의 사람들이 앉지 않았지만 주변 빌딩 입구와 커피숍에는 우비를 쓴 노령의 참가자들로 북적거렸다.

제목만 보면 얼핏 진보 시민 단체의 집회처럼 보였지만, 이 집회를 주최한 단체는 ‘국회개혁 범국민연합’이라는 우익단체였다. 물론 이 단체가 우익단체라는 것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주변에 해병대 마크의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돌아다니는 데다, 무대의 중앙에는 대형 태극기가 펄럭인다. 대통령 박근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여소야대의 정치를 엎어버리고 싶어 했을까, 이들이 국회개혁을 위해 요구하는 구호들은 매우 격렬하고 노골적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우익단체들의 시위는 이제 더 이상 낯설지가 않은 풍경이다. 서울시청 앞, 청계광장, 동아일보 사옥 앞,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 등 서울 도심의 공공장소에는 어김없이 우익단체들의 장기집회가 자리 잡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광화문광장 농성장은 우익단체가 사방으로 포위한 듯해 마치 외로운 섬처럼 느껴질 정도다.

도심 속 시위와 농성의 주체 세력은 이제 우익단체로 넘어간 지 오래다. 이들의 집회는 대한민국의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개입하고 실력행사를 하고자 한다. 집회의 규모와 횟수, 타이밍, 그리고 동원된 물량 등을 감안하면 분명히 누군가의 사주와 후원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로 빈번하고 직설적이다.

도심을 지나치는 사람들에게 이들 우익단체들이 펼친 조악한 플래카드 속 구호와 무차별 소음은 정치적 표현을 떠나 심각한 시각적 청각적 공해를 생산한다. 거대한 스피커로 2시간 동안 감각을 마비시킨 지난 수요일 청계광장의 우익 집회 역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리고 집회장소 근처 동아일보 사옥 앞에는 다음과 같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사드 반대, 김정은 도우미 이적 행위”, “의를 위하여 목숨 바치겠습니다, 종북, 동성애, 세월호, 19대국회 척결”, “혈서 쓰며, 사드 반대 선동 폭행 소요 주동자들과 성주군수 체포하라”. 조악한 디자인의 플래카드에 태극기의 도상과 동성애 반대 문자가 평행을 이루는 서울 도심 속의 시각적 풍경은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논의하기에 앞서 참을 수 없는 소음과 시각적 공해로 시민들을 질식시킨다.

우익단체들의 잦고 공공연한 집회에 각인된 애국적 이데올로기적 행동들은 갈수록 과격해지고 합리적 논리를 상실하면서 하나의 괴물 같은 노이즈로 변형되고 말았다. 수백 명의 노인들이 군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채 도심을 활보하며 행인들에게 언성을 높이고, 적나라한 집단 구호로 도심을 장악하는 풍경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주장을 넘어서 혐오스러운 노이즈가 됐다.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과격한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들은 신경증에 가까운 소음을 생산한다. 이들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학보하기 위해 공공의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쏟아붓는다.

과잉된 정동의 가면을 쓴 이데올로기 노이즈는 과잉된 이데올로기 적대를 가장한다. 이데올로기 노이즈는 과잉된 언어, 주장, 행동, 스타일, 이미지의 형태로 분출되고, 공격적, 배타적, 일방적, 냉소적 성향으로 한국 사회의 갈등과 분열을 증폭시킨다.

이데올로기 노이즈의 형태는 내용적 층위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 진보와 보수,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여성과 남성, 냉전과 탈냉전의 적대관계를 재생산하는 양상을 띤다. 하지만 표현적 층위에서는 그 적대가 과잉된 감정의 분출로 인해 집단적 형태로 응축되면서, 감정이 이념을 압도하는 통제 불가능한 소음처럼 나타난다.

지금 우익은 ‘상상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신념의 공동체라기보다는 재벌과 권력의 비호 아래 자기 권한의 존재감을 과시하고, 사적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동원된 소음 공동체 같아 보인다. 우익단체들에게 전달된 당근은 더 큰 당근을 얻기 위해 더 큰 노이즈를 생산한다.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냉전 시절로 회귀시켜 사태를 분탕질하는 우익의 신경증적인 노이즈는 가부장주의, 애국주의라는 이펙터를 달고 도심을 무법천지를 만든다. 이제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우익의 이데올로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참을 수 없는 소음으로 퍼뜨리는 우익의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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