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8호][칼럼]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 (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

오혜진 (문화연구자)

여자들이 ‘말하고 설치고 생각해서’ 문제라니, 여성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들에 더 눈길이 간다. 드라마 <굿와이프>에서 ‘변호사’라는 김혜경(전도연)의 직업은 거대하고 교활한 남성연대 앞에서 가장 조리 있는 언어로 구현된 정의를 재현하는 데 맞춤이었다. 하숙집 주인부터 우연히 잡아탄 택시의 기사까지 모조리 여성인 드라마 <청춘시대>의 소녀들이 욕망을 드러내는 유력한 방식 또한 수다·고백·기도였다. 이 많은 여자들이 떼로 나와 ‘신데렐라 놀이’가 아니라 진짜 ‘자기 얘기’를 하다니, 좋은 징조다.

한데 두 작품이 남긴 여운은 묘했다. 예컨대 <굿와이프>에서 김혜경은 이태준(유지태)과 쇼윈도부부로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떠나기보다 부도덕한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이용해 자신의 커리어를 도모하겠다는 그녀의 선택은 꽤 낯설었다. 1990년대였다면 이 드라마는 김혜경이 집을 나오고 이태준에게 “꺼져”라고 말한 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2016년의 여성 성장 서사는 남성사회의 룰에 과잉 적응하는 길을 택했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깔끔히 떨친,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다.

한편 <청춘시대>의 엔딩은 ‘칙릿’답게 주인공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와 심리적 안정을 부여했다. 아버지를 죽인 은재(박혜수)는 죄책감을 덜었으며, 죽을 뻔한 사고와 원조교제를 경험한 이나(류화영)는 디자이너에 도전한다. 동생 병구완과 채무, 과도한 노동과 성추행 등 수난 일색이던 진명(한예리)에게조차 한 달간의 여행 기회가 선사됐다. 물론 이는 일시적 봉합에 불과하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평범’과 ‘정상’을 자부하던 예은(한승연)에게만큼은 아주 작은 판타지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늘 상승을 꿈꾸던 예은은 이별 폭력을 겪은 후, 불현듯 찾아오는 정신적 외상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진 ‘동화적’ 결말에 비하면 예은의 서사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기괴할 정도다.

2010년대 여성청년 서사가 한 줌의 판타지 없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결론을 선호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간 여성 서사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이 ‘낭만적·동화적’이라는 지적임을 떠올릴 때, 최근의 여성청년 서사들이 ‘도전’이나 ‘미래’를 그리는 데 인색한 것은 이해된다. 짱돌을 들기엔 늦었고, 자아해방을 외치며 집 나간 여자들의 선언은 ‘실패’했으며, 섣부른 연대나 자매애를 말하기엔 현실이 너무 극악하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도, 매니페스토도 허용되지 않는 오늘날 여성청년 서사에 남은 것은 현실의 남루에 대한 핍진한 묘사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여성 인물들이 온갖 각성과 계몽의 드라마를 겪으면서도 결국 영악하거나 무기력한 채로 남는 이유일지 모른다. 판타지와 함께 삭제된 것은 ‘비전’을 상상하고 재현할 기회인 것이다.

이제 21세기의 여성 서사는 어디로 나아갈까. 그것이 재현할 대상은 현재의 10~30대,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유연화를 겪고, ‘세월호’라는 집단기억을 간직하며, ‘역차별’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여성혐오의 시대를 통과한 세대다. 이들의 미래를 뻔한 기성체제의 자장으로 귀속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감히 ‘판타지’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허무맹랑한 몽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여자들의 이야기’에 판타지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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