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8호][칼럼]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 (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판타지’가 필요한 이유

오혜진 (문화연구자)

여자들이 ‘말하고 설치고 생각해서’ 문제라니, 여성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야기들에 더 눈길이 간다. 드라마 <굿와이프>에서 ‘변호사’라는 김혜경(전도연)의 직업은 거대하고 교활한 남성연대 앞에서 가장 조리 있는 언어로 구현된 정의를 재현하는 데 맞춤이었다. 하숙집 주인부터 우연히 잡아탄 택시의 기사까지 모조리 여성인 드라마 <청춘시대>의 소녀들이 욕망을 드러내는 유력한 방식 또한 수다·고백·기도였다. 이 많은 여자들이 떼로 나와 ‘신데렐라 놀이’가 아니라 진짜 ‘자기 얘기’를 하다니, 좋은 징조다.

한데 두 작품이 남긴 여운은 묘했다. 예컨대 <굿와이프>에서 김혜경은 이태준(유지태)과 쇼윈도부부로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떠나기보다 부도덕한 남편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를 이용해 자신의 커리어를 도모하겠다는 그녀의 선택은 꽤 낯설었다. 1990년대였다면 이 드라마는 김혜경이 집을 나오고 이태준에게 “꺼져”라고 말한 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2016년의 여성 성장 서사는 남성사회의 룰에 과잉 적응하는 길을 택했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를 깔끔히 떨친,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다.

한편 <청춘시대>의 엔딩은 ‘칙릿’답게 주인공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와 심리적 안정을 부여했다. 아버지를 죽인 은재(박혜수)는 죄책감을 덜었으며, 죽을 뻔한 사고와 원조교제를 경험한 이나(류화영)는 디자이너에 도전한다. 동생 병구완과 채무, 과도한 노동과 성추행 등 수난 일색이던 진명(한예리)에게조차 한 달간의 여행 기회가 선사됐다. 물론 이는 일시적 봉합에 불과하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평범’과 ‘정상’을 자부하던 예은(한승연)에게만큼은 아주 작은 판타지도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늘 상승을 꿈꾸던 예은은 이별 폭력을 겪은 후, 불현듯 찾아오는 정신적 외상에 속절없이 무너진다. 다른 인물들에게 주어진 ‘동화적’ 결말에 비하면 예은의 서사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기괴할 정도다.

2010년대 여성청년 서사가 한 줌의 판타지 없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타산적인 결론을 선호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간 여성 서사에 대한 가장 손쉬운 비판이 ‘낭만적·동화적’이라는 지적임을 떠올릴 때, 최근의 여성청년 서사들이 ‘도전’이나 ‘미래’를 그리는 데 인색한 것은 이해된다. 짱돌을 들기엔 늦었고, 자아해방을 외치며 집 나간 여자들의 선언은 ‘실패’했으며, 섣부른 연대나 자매애를 말하기엔 현실이 너무 극악하다. 그리하여 유토피아도, 매니페스토도 허용되지 않는 오늘날 여성청년 서사에 남은 것은 현실의 남루에 대한 핍진한 묘사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여성 인물들이 온갖 각성과 계몽의 드라마를 겪으면서도 결국 영악하거나 무기력한 채로 남는 이유일지 모른다. 판타지와 함께 삭제된 것은 ‘비전’을 상상하고 재현할 기회인 것이다.

이제 21세기의 여성 서사는 어디로 나아갈까. 그것이 재현할 대상은 현재의 10~30대, 즉 신자유주의 시대의 노동유연화를 겪고, ‘세월호’라는 집단기억을 간직하며, ‘역차별’이라는 말이 횡행하는 여성혐오의 시대를 통과한 세대다. 이들의 미래를 뻔한 기성체제의 자장으로 귀속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감히 ‘판타지’에 도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허무맹랑한 몽상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 다시 한번, ‘여자들의 이야기’에 판타지를 허하라….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 18호][칼럼] 남자들이여, 더 가까이 오라 (손희정)

[경향신문] 기고문

[청춘직설] 남자들이여, 더 가까이 오라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남자에 대해 생각할 때가 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자는 인간으로, 여자는 그 인간에 대한 결핍이자 타자로 여겨왔다. 이제 우리는 ‘보편 인간’으로 상상된 남자가 아니라, 성별을 가진 존재, 성화된 존재로서의 남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인 폭력과 차별은 남자만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다뤄온 사유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 한계야말로 남자인 당신을 옥죄고 있는 굴레다.

남자만을 인간으로 생각한다니, 무슨 말일까? 리우 올림픽 중계 ‘막말 대잔치’를 떠올려보자. “여성 선수가 저렇게 쇠로 된 장비를 다루는 걸 보니 인상적”(펜싱), “살결이 야들야들하다”(유도), “○○○ 선수 착하고 활도 잘 쏘니까 일등 신붓감”(양궁). 이런 리스트는 끝도 없다. 여성은 운동선수로서의 자질보다는 그의 성별이나 외모, 사회적 관계 안에서 평가받고 묘사된다. 남자 경기에서 이런 예는 드물다. 이는 남자 선수는 ‘선수’에, 여자 선수는 ‘여자’에 방점을 찍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드러낸다. 남자는 ‘보편’이 되고, 여자는 ‘여자’가 된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그런데 남성이 인간으로서 대표성을 띠는 순간, 남성 내부의 차이는 지워져 버린다. 예컨대 남성들 사이의 계급차는 ‘인간 내부의 차이’가 되지 ‘남성 내부의 차이’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차별당하듯 남성은 남성으로서 차별받는다.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은 같은 지위를 누리지 않으며, 따라서 같은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은 ‘인간으로서 동등하다’라는 환상에 빠져 근본적인 모순과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여성 교환’을 통해 획득된다.

근대 초창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는 기존에 이미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가부장제에 올라타면서 그 힘을 더욱 견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부르주아 남성은 노동자 남성에게 ‘여자와 결혼할 법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동등한 (남성) 인간’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여성과 가족 구성권을 선물하면서 노동자를 길들인 것이다. 한국 여성혐오의 한 근간으로 지적되는 ‘식민지 남성성’이 작동하는 방식도 유사했다. 일본제국은 ‘내선일체’의 감각을 주기 위해 일본 여성과 조선 남성의 결혼을 과도하게 홍보했다.

여성의 교환을 통해 만들어진 남성 간 ‘평등’이란 허구다. 내가 여성을 소유하고 사회적 소수자 위에 군림한다고 해서 세계에 군림하는 ‘어떤 남자’들과 동등한 관계가 될 리 만무하다. ‘이건희’와 미래가 불안한 남성 청년은 같지 않다. 다만 ‘같을 수 있다’고 상상될 뿐이다. 이때 여자는 일종의 트로피로 ‘이건희’와 ‘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와 연애하지 않는 여자, 결혼하지 않는 여자는 ‘김치녀’가 된다. 하지만 불평등을 만드는 건 ‘헬조선’이라는 계급사회이지 당신과 연애하지 않는 ‘그 여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을 더 열악한 지위에 있는 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진정한 싸움을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노예의 삶이다.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무슨 소용인가? 대답은 명백하다. 바로 당신의 해방을 위해 페미니즘은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 및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벨 훅스)이다. 우리가 남성을 성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나면 남성 간의 차이가 드러나고, 그 차이로부터 성차별을 당해 온 남성 역사가 발견된다. 역차별이 아니다. 당신은 기득권 남성들로부터 이미 성차별을 당해왔다.내부자들>이라는 영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남성연대’는 ‘이미 충분히 가진 내부자들’의 것이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어떤 남자들은 채팅방에서 여자 동기들의 외모를 품평하며 낄낄거리거나, 온라인으로 몰카를 공유하면서 ‘남성연대’라는 안전망을 가졌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왜곡된 연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아무런 실질적인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싸워야 할 대상은 떨어지지도 않을 ‘콩고물’에 대한 판타지를 주입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축적해가는 기득권 남성들이자 그 남성들에게 힘을 주는 가부장제라는 구조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하다. 아니, 그건 이 망가진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체성이다. 벨 훅스의 말을 당신에게 전한다. “더 가까이 오라. 페미니즘이 당신의 삶과 우리 모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지켜보라. 더 가까이 오라. 와서 페미니즘 운동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직접 살펴보라. 더 가까이 오라. 그러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임을.”

카테고리: 알림 | Comments Off

[뉴스레터 18호][칼럼] 선물하는 법을 잊은 세계 (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선물하는 법을 잊은 세계

서동진(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한가위가 코밑이다. 동네 마트엘 가면 입구부터 점령한 추석선물세트가 빼곡하다. 올 추석 선물로는 한우보다 건강식품이 더 인기가 높다는 둥, 택배회사들은 늘어난 주문 때문에 비명을 지른다는 둥 법석이다. 그리고 역시 잊지 않고 김영란법이 등장한다. 공직자가 직무관련성 없는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 도덕률이 잘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공직자가 사적 이해에 휘둘려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는 전연 틀릴 게 없다. 그럼에도 김영란법이 그저 청렴한 공직자 기강을 보장하려는 조처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찜찜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가 미국에 머물며 쓴 에세이 모음집인 <미니마 모랄리아>를 읽다 보면 선물에 관한 신랄한 비평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선물 행위는 받는 사람의 기쁨을 상상하는 기쁨”이며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가면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 즉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바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없음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가 이제 선물하는 이보다 대가성 금품이라는 뇌물을 주는 이들이 더 많은 세태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힐난하는 것은 외려 선물가게이다. 그는 선물용 상품의 목록을 마련하고 이를 뻔뻔스레 진열하고 판매하는 것이 끔찍하다고 말한다. 그가 걸핏하면 써먹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을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선물가게의 선물의 효력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다시 살아나 부활절을 전후한 미국의 어느 월마트에 들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짐작이 간다.

뇌물은 타락한 선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기부와 쌍벽을 이룬다. 오늘날 비참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미덥고 평화로운 수단으로 칭송받는 것은 단연 기부다. 기부는 고통받는 자들이 어떻게 좋은 세상을 수립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대신, 그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하는 고통받는 사물처럼 여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긴급한 구호품일 뿐이라는 생각은 그들이 연루된 세계를 감추기에 나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세상을 만드는 자들로서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더욱 나쁘다. 기부는 선물을 주는 자에게 이미 준비된 칭찬 한마디를 남겨줄 뿐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공인된 선행을 했다는 가벼운 인정이다.

기부가 나쁜 선물이라면 뇌물은 최악의 선물일 것이다. 그것은 사물이 가진 능력을 완벽히 제거한다. 마음으로는 모두 하지 못하는 것,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선물은 동원된다. 더 친절하고 더 잘 대해주고 더 마음을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엄청난 일이라도 일어난 듯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때 나의 따뜻한 내면을 사물의 온기가 떠맡게 된다. 선물을 줄 때 나는 내면의 한 조각을 슬그머니 들춰내는 것이다. 그것이 선물이라는 사물의 능력일 것이다. 뇌물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뇌물은 직접 말하는 대신 에둘러 뒤를 잘 봐달라는 요구를 전한다. 그것은 사물이 가진 온전한 능력을 박탈한다. 사물의 뒤는 사라진다. 뇌물이 되지 않기 위해 선물은 3만원인지 5만원인지 하는 가격 심사를 받아야 한다. 김영란법은 선물과 뇌물의 차이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선물이 사라진 세계를 얼핏 보여준다.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 18호][칼럼] ‘망국병’과 여성 혐오(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세상 읽기] ‘망국병’과 여성 혐오 

권명아(동아대 국문과 교수)

 

옛날 신문에는 광복절과 삼일절에 “정조 삼팔선이 무너진다!”, “망국병 퇴폐풍조, 여성의 풍기문란” 같은 특집 기사가 자주 실렸다. “정조 삼팔선이 무너진다!”는 광복 30주년 특집 기사 제목이다. 여성의 ‘정조 문제’는 ‘호국’과 ‘망국’의 표상이 되었고 성적 퇴폐나 문란은 사회 위기의 대표 징후로 여겨졌다. 국가와 사회의 ‘정상성’은 여성 신체에 대한 성적 표상과 결합하여 그 의미나 가치가 만들어졌다. 성적 차이와 무관해 보이는 이런 개념들은 실은 성차에 근거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 모든 개념과 가치는 젠더와 무관하지 않다.

광복절이나 삼일절은 망국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국가의 미래와 사회의 초석을 논하는 기념과 의례의 날이다. 여성의 정조 문란과 퇴폐를 망국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허영녀’의 개념 없음을 한탄하는 건 이런 의례에 항상 동반되었다. 지배 엘리트들이 모여서 정조 삼팔선이 무너진다며 분노하고 좌절하고 망국의 한을 곱씹는 모습은 희극적이다 못해 슬프다. 냉전 한국의 남성성은 거대질서에는 무기력한 대신 그 좌절을 내부의 소수자에게 폭력적으로 전가하는 방식으로 형성되었다.

열강이 지배하는 국제 관계 속에서 국가 주권을 세우지도 못하고, 새로운 사회에 대한 다른 전망도 상상력도 상실한 냉전 한국의 통치성은 거세된 남성성을 통해 지탱되었다. 거세된 남성성은 다른 사회에 대한 이념과 상상력이 부재한 자리를 피지배 집단에 대한 폭력적 통제와 규율로 대체하면서 냉전의 통치성을 정당화했다. 무기력한 폭군이라는 이중적인 얼굴을 지닌 냉전 남성성은 국경일마다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여자 패기’를 반복하면서 강화되었다. 고질적인 여성 혐오의 역사적 원천은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망국이나 사회 위기라는 개념이 여성 신체를 매개로 의미가 만들어졌기에 여성 혐오가 작동할 때 단지 성차의 문제(여성이라서)만이 아니라, 망국적 문제나 사회적 문제라는 다른 차원이 여성 혐오에 결부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 혐오에 근거하여 실제의 성차를 지닌 존재를 공격하고 차별 선동이 이뤄질 때 이들은 대체로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혹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이념과 가치를 내세우거나 자기 정당화의 근거로 삼는다.

올해 광복절에도 어김없이 광복 기념 ‘여자 패기’는 이어졌다. 역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 대통령의 광복절 기념 축사에 대한 공분은 여성 연예인 티파니 두드려 패기로 전가되기도 했다. 대통령이라는 ‘거대권력’에 맞서지 못하는 무기력과 좌절이 만만한 다른 내부자를 찾아 공격적으로 이동하고 증오를 이전시키는 방식은 냉전 남성성이 기생하는 여성 혐오를 반복한다. 다른 한편 박근혜 대통령 집권 이후 정권 비판과 여성 혐오적인 풍자가 뒤섞이면서 권력 비판의 이름으로 여성 혐오가 정당화되고 있다. 냉전 남성성과 여성 혐오의 연계는 대안 이념이 부재한 보수파의 통치전략과 연결되는 경향이 강했으나, 이제 이 대열에 진보진영도 합류하게 되었다. ‘민주화 이후’의 진보진영이 냉전기 보수 집단의 통치성의 근간인 여성 혐오를 반복하는 건 흥미롭다.

국가와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나 새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과 대안적 이념이 부재한 채 만만한 대상을 향한 조롱과 풍자, 씹기의 쾌락으로 무기력을 정당화하는 여성 혐오의 역사는 무한 반복되고 있다. 한국사의 ‘유구한 여성 혐오 전통’을 살펴볼 때 ‘허영녀와 김치녀의 망국병’을 한탄하고 공격하며 무능을 정당화하는 여성 혐오 생산자들이야말로 ‘망국’의 원천이었다. 광복 71주년을 맞이하여 역사를 살펴볼 때 무엇보다 명확한 역사적 진실은 여성 혐오가 ‘망국’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17호
















카테고리: 알림 | Comments Off

[뉴스레터 17호] 리쓰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요시다 히로시 교수 “언어와 인종을 뛰어넘는 게임의 보편적 가능성에 주목”(김일림)

 
 

리쓰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요시다 히로시 교수

 

“언어와 인종을 뛰어넘는

게임의 보편적 가능성에 주목”

 

김일림 (<문화/과학> 편집위원)

한국 미학계가 10여년을 준비해온 제20차 세계미학자대회(ICA: International Congress of Aesthetics)가 2016년 7월25일부터 29일까지 서울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미학과 대중문화(Aesthetics and Mass Culture)’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대회에는 세계 각국에서 450여명의 연구자가 참가하여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처음 열리는 세계미학자대회다. 세계미학자대회는 3년에 한 번 열리는 국제 미학계의 대표적인 행사로, 각 국은 이 행사를 유치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이번 행사에는 각 국 참가자의 논문 발표 이외에도, 노엘 캐럴(미국 뉴욕시립대), 군터 게바우어(독일 베를린자유대), 사사키 겐이치(일본 도쿄대), 가오지안핑(중국 사회과학원), 비토리오 훼슬레(미국 노터데임대) 교수 등의 특별 강연이 있었다.

대중문화 연구자로서 세계미학자대회에 참가한 김일림 편집위원이, 이 대회를 찾은 일본 리쓰메이칸대학교(立命館大学)의 요시다 히로시(吉田寛) 교수를 만났다. 요시다 히로시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인 게임 연구자로, 리쓰메이칸대학교 내에 게임연구센터를 만든 창립 멤버다.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는 일본 대학에 설치된 최초이자 유일한 게임연구센터로서, 2011년 창설 이래 패미컴을 개발한 우에무라 마사유키(上村雅之)가 센터장을 맡고 있다. 명실공히 세계와 일본을 잇는 게임 연구의 거점이다.

2016년 7월25일부터 29일까지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제20차 세계미학자대회 포스터.
ⓒ 2016. International Congress of Aesthetics 2016.

요시다 히로시 교수는 이른바 ‘패미컴 세대’. 그에게 게임이 친구이자 일상인 것은 당연하다. 요즘 주목 받는 ‘게이미피케이션’에 관한 발언도 일찍부터 해온 인물이다. 사실 그는 음악 미학자로 먼저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관련 저서를 적지 않게 출판했고 유수의 상도 수상했다. 그런 그가 클래식 음악에서 게임으로 연구 대상을 넓힌 것은 그러나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미 중학 시절에는 열혈 축구 소년, 고교 때에는 연극 청년으로 활약한 전력이 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모든 주제에 대응이 가능한 연구자”, “정말 우수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과연 담백하고 편견 없이 모두와 마주한다. 대회 기간 중 자신을 찾아온 한국의 고교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열린 자세와 호기심으로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다가서는 사람이었다.

그가 <문화/과학>에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2016년 11월 <문화/과학> 주최로 서울과 부산에서 각각 열리는 한중일 국제 컨퍼런스 ‘동아시아 권역의 디지털 부족과 청년문화’ 및 ‘사회적 재난 이후 동아시아 청년 문화의 새로운 흐름’에 참여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15년 넘게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트레이시즈(トレイシーズ = Traces = 迹)> 1, 2호는 그와 <문화/과학>의 인연을 예언하는 상징이 되었다. <트레이시즈>는 2000년과 2001년 사이에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로 발행된 문화이론 및 번역을 위한 국제 학술지로, 한국에서는 문화과학사가 <흔적>이라는 제목으로 출판을 맡았다. <문화/과학>이 걸어온 ‘흔적’을 매개로 요시다 히로시 교수는 이방인에서 친구로 성큼 다가왔다.

이 글은 김일림 편집위원과 요시다 히로시 교수가 세계미학자대회 기간 중에 나눈 대담과, 이후 몇 번에 걸친 서면 인터뷰에 바탕해 있다. 두 사람은 일본의 게임업계와 게임연구 동향, 그리고 동아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든 질문에 그는 솔직하고 성실한 답변을 주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서 두 사람은 이 글을 준비했음을 밝힌다.

요시다 교수가 미학자를 꿈꾸는 명덕외고 1학년
이서현 군 외 2명의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일림: 재직 중이신 첨단종합학술연구과는 일본에서도 흔하지 않은 명칭입니다. 리쓰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는 어떤 곳인지요.

요시다: 리쓰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는 2003년 4월에 발족했습니다.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구별 없이 5년제로 운영되는 대학원이며, 아래에 학부가 없는 독립 연구과입니다. 한 학년의 정원은 30명으로, 전체 150명 이상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한국, 중국, 대만 등)와 구미(스페인, 캐나다, 스위스 등)에서도 많은 유학생(한 학년에 약 5명)이 와 있죠.

여타 대학원처럼 특정 학과목(discipline)을 베이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과 연구가 일체화된 ‘프로젝트형’으로 운영됩니다. 이 점은 첨단종합학술연구과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은 교수와 대등한 입장에 있는 연구 파트너로서, 학내 연구소 및 연구센터와도 연대해가면서 각자의 과제를 수행합니다.

첨단종합학술연구과에는 공공, 공생, 생명, 표상이라는 네 개의 영역이 있습니다. 각각의 영역에 약 세 명의 교수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저는 2008년 4월에 첨단종합학술연구과의 표상영역에 조교수로 임용되었고, 2015년 4월에 교수가 되어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항상 10명 가량의 학생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수업 자체보다 논문 지도와 연구회, 학회에 함께 참가하면서 조언과 지도를 할 기회가 많습니다. 지금까지 제 지도로 다섯 명 가량의 박사학위 취득자를 배출했습니다. 한국 유학생도 한 명 있지요. 박사학위 취득자는 대학과 연구기관, 미술관, 박물관 등에서 활약하고 있습니다.

첨단종합학술연구과는 영어로 ‘Graduate School of Core Ethics and Frontier Science’로 표기합니다. ‘Core Ethics’는 네 개 영역에 공통되는 ‘핵심으로서 윤리’를 의미합니다. 이 연구과에서는 매년 연구보고서를 겸한 학술잡지를 간행하고 있는데요. 그 제목도 <Core Ethics>입니다.

● 리쓰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홈페이지 http://www.r-gscefs.jp/

김일림: 선생님은 또한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에도 소속되어 있습니다.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를 소개해주십시오.

요시다: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Ritsumeikan Center for Game Studies)는 게임을 전문영역으로 하는 일본 최초의 학술적 기관으로, 2011년 4월에 설립되었습니다. 저는 창설 멤버 중 한 명입니다. 리쓰메이칸대학교에는 원래 게임을 (전공이 아니더라도) 연구대상으로 하는 교수와 연구자가 여러 학부와 대학원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대내적으로는 그런 학내 연구자들을 잇는 네트워크로서, 대외적으로는 리쓰메이칸의 게임연구 창구로서 센터를 만들었습니다. 현재는 다섯 개 학부 10명 이상의 교수가 소속되어 있습니다. 저 이외에도 법학부, 영상학부, 정책과학부, 정보이공학부 교수들이 있습니다. 닌텐도 어드바이저를 역임한 우에무라 마사유키(上村雅之) 영상학부 교수가 센터 개설 이래 센터장을 맡고 있습니다. 게임연구센터를 설립한 이후로 국내외의 많은 연구기관과 기업, 자치단체 등에서 문의가 오고 있습니다. 공동연구와 제휴를 하자는 의뢰를 받고 있지요.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에서는 1년에 5-6회의 정례 연구회를 개최하는 한편, ‘Replaying Japan’이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국제 컨퍼런스를 매년 한번, 캐나다와 독일의 대학과 공동으로 개최하고 있습니다. 2015년까지는 캐나다의 앨버타대학교와 리쓰메이칸대학교가 매년 번갈아 개최해왔는데, 2016년부터 독일의 라이프치히대학교가 참가해서 올해 처음으로 ‘Replaying Japan’이 유럽 대륙에서 개최됩니다.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에는 세계 각국(주로 유럽과 미국)에서 연구원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객원연구원으로 받은 연구자의 출신국은 핀란드, 캐나다, 헝가리, 오스트레일리아, 노르웨이, 미국, 프랑스 등입니다. 객원연구원이 되기 위해 특별히 정해진 응모방법은 없고, 센터와 소속 교수에게 직접 메일 등으로 연락을 주면 개별적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체재하기 위한 연구기금을 받고 온 분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사비로 일본에 와서 체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센터에는 일본의 디지털 게임을 주 대상으로 한 아카이브가 있습니다. 게임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뿐만이 아니라 잡지와 서적 등도 있습니다. 아카이브는 연구목적과 데이터베이스 작성을 위해 활용되는 한편, 박물관 전시를 위해 대여하기도 합니다. 또 문화청과 제휴해서 게임 데이터베이스 구축 프로젝트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 홈페이지 http://www.rcgs.jp/

● Replaying Japan 2016 홈페이지 http://home.uni-leipzig.de/jgames/replayingjapan2016/

패미컴을 만든 우에무라 마사유키를 구심점으로,
이 대학에 재직 중인 게임 연구자들은 뜻을 모아
2011년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를 만들었다.

김일림: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는 매우 흥미로운 곳이군요. 지금까지 한국에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제 선생님 개인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동안 음악 연구자로 활약해오셨는데요. 게임을 새로운 연구대상으로 삼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요시다: 게임은 어릴 적부터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 1990년대 초부터 (관심이 다른 대상으로 옮겨간 탓에, 또 새로운 게임에 매력을 느끼지 못 했던 까닭에) 오랫동안 게임에서 멀어져 있었죠.

게임에 관한 논문을 처음으로 쓴 건 2004년이었습니다. 다마미술대학교(多摩美術大学)의 친구가 편집하고 간행한 <issues>라는 미술잡지가 있었는데요. 거기에 게재하기 위해 게임 스크롤에 관한 논고를 썼습니다. <issues>는 모더니즘 미술비평의 흐름을 이어받은 잡지로, 독특하고 빼어난 형식분석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미술에는 무지하지만, 게임에는 미술의 형식분석을 응용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서 꼭 그 작업을 해보자고 생각했죠. 저처럼 유년기부터 TV게임을 가지고 놀면서 성장한 인간은 미디어 감각(스크린 속에서 운동과 공간을 파악하는 감각)도 게임에 의해 만들어졌을 게 틀림없다는 직관적인 가설을 검증하고 싶었습니다. 이게 동기였습니다.

하지만 그 잡지는 휴간이 된 탓에 제 원고도 보류되었죠. 결국 그 원고는 수정을 거쳐서, 『다마미술대학 연구기요(多摩美術大学研究紀要)』 제22호(2007년)에 「TV 게임의 감성학을 향해서(テレビゲームの感性学に向けて)」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2003년부터 2007년까지 5년간 시간강사로서 다마미술대학교에서 미학과 음악학을 가르쳤습니다.

제가 2005년에 도쿄대학교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 미학예술학연구실에 제출한 박사논문의 제목은 『근대 독일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음악(近代ドイツの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と音楽)』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음악학자로서 대학에 취직하기를 희망했지만, 자리가 없어서 포기할 수 밖에 없었죠. 그 때 저에게 남겨진 것은 미학자로서의 길이었는데, 미학이라는 학문분야에는 그다지 장래가 없는 듯이 저에게는 보였습니다. 미학(에스테틱스)이란 본래 ‘감성의 학’입니다. 그런데 (적어도 일본에서는) 미학자는 미와 예술이라는 문제에만 몰두하고, 정작 중요한 감성은 소홀히 했지요. 그리고 어느새 감성 연구에 공학과 인지과학 분야가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미학자는 그 무리에 합류하지 못 하고 있었어요. 종종 공학자와 인지과학자는 (그리고 연구자 이외의 일반 분들도) 미학에 ‘감성의 학’을 기대하고 접근해왔지만, 미학자는 그에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많은 미학자는 그러한 필요성조차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나는 ‘예술과 미를 다루지 않는 에스테틱스’를 해보자고 생각해서, 그것을 미학이 아니라 ‘감성학’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감성학은 철학과 공학, 인지과학의 가교 역할을 하는 학문입니다. 감성학자로서 제가 집중해온 테마로는 오감(五感)과 공감각(共感覚),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착각(illusion) 등이 있습니다. 게임도 그 중 하나인데, 최근에는 게임 쪽 업무가 많이 주목 받는 탓에 게임 연구자로 불리는(또 저도 그렇게 자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를 창설한 2011년에는 문화청 미디어 예술제의 교토전도 개최되었는데, 제가 엔터테인먼트 부문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미디어 예술제의 지방 전시로는 처음으로 게임 기획을 했습니다. 이런 역할이 주어진 것도 제가 게임 연구로 옮겨간 배경에 있습니다.

근대미술 연구자 최재혁 박사와 요시다 히로시 교수가
게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일림: 최근 일본의 게임 연구 동향을 들려주십시오. 연구자가 늘고 있는지, 어느 분야에서 주로 연구자가 나오는지, 다른 나라와의 영향관계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또 게임업계 및 학계의 관계나 정부의 연구지원 상황은 어떤지요.

요시다: 일본에서 게임 연구자는 조금씩이지만 확실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본디지털게임학회(DiGRA JAPAN)에는 심리학, 공학, 경영학, 교육학, 정보과학, 인공지능연구 등의 분야에서 온 연구자가 모여있습니다. 크리에이터 출신 회원도 있으므로, 게임업계와의 관계도 밀접하고 우호적입니다.

또 게임에 관심을 갖는 인문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야의 연구자는 일본디지털게임학회 이외에도 독자적인 네트워크와 연구교류의 기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청의 ‘미디어 예술 데이터베이스’에는 만화, 애니메이션, 미디어 아트와 더불어 게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가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정부 예산은 게임 연구로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임이 ‘연구 프로젝트’로서 정부(문부과학성)에 충분히 인지되어 있는가를 묻는다면, 아직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단순히(쿨 재팬의 일환으로) 대외적으로 그럴 듯 해 보여서, 외화를 벌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내 자원(resource)이니까, 이런 안이한(그리고 실제로 잘 진행되지 않는) 의도로, 당분간 게임 연구에 예산이 돌아오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까요? 연구자와 연구기관도 그런 추세에 편승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입니다. 국가 전략과 기업의 이해에서 독립한 형태로, 학술계와 사회로부터의 요청에 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게임 연구는 학문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 상태로서는 아직 그 단계까지는 가지 않았습니다.

김일림: 다른 나라의 게임 연구 현황은 어떻게 보고 계신지요. 게임 연구가 특히 활발한 곳, 개성적인 연구가 돋보이는 곳이 어디라고 보시나요?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구자와 참고문헌 등을 알려주십시오.

요시다: 게임 연구를 주도해온 것은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와 같은 스칸디나비아의 나라들입니다. 덴마크의 예스퍼 율(Jesper Juul), 노르웨이의 에스펜 아세스(Espen Aarseth), 핀란드의 프란스 마이라(Frans Mäyrä) 등이 대표자입니다. 출발점이 유럽도 미국도 아닌 것이 이 분야의 재미있는 점입니다. 물론 현재는 꽤 글로벌하게 확산되었지만, 스칸디나비아의 강세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게임 연구가 시작된 것은 그들 나라가 예전부터 미디어와 정보기술 교육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라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한편 미국과 캐나다의 게임 연구자는 영화연구 출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마크 J. P. 울프(Mark J. P. Wolf)가 미국의 대표자입니다. 각 연구자들의 대표적인 저서는 아래와 같습니다.

● Espen J. Aarseth. Cybertext: Perspectives on Ergodic Literature. Baltimo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97.

● Mark J. P. Wolf (ed.). The Medium of the Video Game. Austin: University of Texas Press, 2001.

● Mark J. P. Wolf & Bernard Perron (eds.). The Video Game Theory Reader. New York & London: Routledge, 2003.

● Jesper Juul. Half-Real: Video Games between Real Rules and Fictional Worlds. Cambridge, Mass.: The MIT Press, 2005.

● Frans Mäyrä. An Introduction to Game Studies: Games in Culture. London: SAGE, 2008.

또 게임 연구에 국한되지 않은 경향입니다만, 스칸디나비아의 연구자들은 영어로 발표하고 출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문에 게임 연구의 주요 언어는 영어가 되어 왔습니다. 한편 프랑스와 독일 연구자는 (이것도 게임 연구에 한정된 게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저마다 모국어로 출판하고 있습니다. 일본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불어와 독일어 문헌도 가능한 한 훑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김일림: 게임을 중심으로 한 이공계와 인문계의 공동연구가 일본에서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요? 또한 기업, 정부, 대학의 공동 프로젝트도 있으리라고 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는지요.

요시다: 인문계와 이공계의 공동연구, 그리고 관산학 공동연구도 일본 게임 연구에서는 매우 일반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인문계와 이공계의 공동연구에 대해 말하자면,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버추얼 리얼리티(VR) 연구가 게임연구와 깊이 관계합니다. 이런 연구가 문과와 이과의 융합형입니다.

관산학 공동연구의 경우, 문화청의 ‘미디어 예술 정보거점·컨소시엄 구축사업’, ‘미디어 예술 디지털 아카이브 사업’ 등이 있습니다. 또 세가(SEGA)의 창업자인 나카야마 하야오(中山隼雄)가 ‘공익재단법인 나카야마 하야오 과학기술문화재단(公益財団法人 中山隼雄科学技術文化財団)’을 만들어서 게임 연구를 육성합니다. 저도 그 재단에서 연구조성사업을 수행한 적이 있는데, 게임연구를 지원하는 재단으로는 일본 최대입니다.

김일림: 선생님은 독일 음악과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관계를 연구해왔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 게임과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관계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요시다: 서구의 게임에 비해서 일본 게임은 몇 가지 점에서 ‘특수’하다고 일컬어져 왔습니다. 시장의 관점에서도 일본 게임은 서구에서는 그다지 팔리지 않고, 거꾸로 서구에서 대 히트한 게임도 일본에서는 그다지 팔리지 않는다(혹은 그런 경우가 많다)고 분석되어 왔지요. 일본 게임문화의 특수성을 정식화, 언어화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우선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 리얼리즘을 좋아하지 않고, 데포르메(caricaturize)된 그래픽스를 선호한다. 리얼한 3D 공간을 무대로 한 1인칭 슈팅게임(FPS: First Person Shooter)의 판매량이 서구에 비해 압도적으로 적다. 역으로 2D 공간에서 데포르메된 캐릭터가 움직이는 게임이 인기를 끌어서, JRPG라고 불리는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일본인 이외의 팬도 많다)

● 역할 수행 게임(RPG: Role Playing Game)에서는 플레이어의 자유도가 높은 게임보다 스토리(캐릭터의 역할)가 고정된 게임을 좋아한다.

● 미국의 게임업계는 영화업계와 관계가 깊지만, 일본의 게임 기업(닌텐도, 반다이, 남코)은 원래 완구 제조회사였다. 때문에 일본의 게임은 그래픽스보다 조작 감각과 인터랙션(촉감)을 중시한다. Wii 등이 전형적이다. 위에 언급한 ‘리얼리즘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도 ‘일본에서 게임은 정보기술이라기보다 (그 이전에) 장난감이었다’는 이유가 크다고 본다.

그러나 위 사항이 과연 ‘일본의 내셔널 아이덴티티’인지 여부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로서는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저는 ‘일본문화론’으로서 게임 연구를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게임에는 말과 인종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이해 가능성과 공감 가능성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부분이 재미있어서 감성학자로서 게임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만화와 애니메이션보다 스포츠나 요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나중에 깨달은 점인데, 음악과 게임에는 공통점이 많아서 음악학자로서의 경험이 예상 이상으로 도움이 됩니다.

현장탐방 차 방문한 모 캐릭터 숍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요시다 교수, 박현선 편집위원, 강신규 편집위원.

김일림: 일본 게임업계의 현황은 어떤지요? 정부의 지원이나 규제 정책, 업계의 동향 등을 들려주십시오.

요시다: 저는 업계 사정에 어두워서 바깥에서 본 인상이 되겠지만, 한국 등에 비하면 일본 정부는 게임에 무관심하고 전혀 간섭하지 않는, 즉 지원도 규제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과금제(課金制) 게임과 네트워크의 증대와 같은, 최근 게임 동향에 대응한 정부의 소비자보호와 청소년보호(범죄억제)에 대한 요청에, 일본 게임업계는 주체적이고 적절하게 대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업계 단체인 ‘컴퓨터엔터테인먼트협회(CESA)’와 ‘일본온라인게임협회(JOGA)’의 역할이 큽니다.

일본의 게임 기업은 (정보기술산업이 아니라 완구산업에 가까우므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세트로 개발하는 모델을 주축으로 했습니다. 콘솔 게임(가정용 게임기)이 강했던 겁니다. 한국이나 미국과 다르게 일본에서는 PC게임이 그렇게 보급되지 않은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타블렛PC로 게임을 다운로드해서 노는 것이 일반적이 되는 흐름 속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세트로 개발하는 모델’은 한계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델을 버렸을 때, 지금까지 ‘촉감’을 내세워 왔던 일본 게임 제작의 장점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시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과 타블렛PC는 게임 전용기로 개발된 게 아니므로 반응(response) 등의 성능이 떨어집니다. 스마트폰과 타블렛PC에 인스톨되는 게임은 조작도 단순하고 내용도 단조로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게임을 위한 기계를 일부러 구입할(시킬) 필요는 없지요. (이미 많은 이들이 기계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든 바로 게임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게임을 파는 쪽에서 보면 매우 매력적입니다. 게임 플랫폼으로서의 스마트폰과 타블렛PC를 앞에 두고, 닌텐도를 비롯한 게임 회사는 어려운 기로에 서 있습니다. ‘포켓몬 GO(Pokémon GO)’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테지요.

김일림: 몇 년 전부터 여러 신문에 게이미피케이션에 대한 글을 기고해오셨습니다. 한국에서도 요 몇 년 사이에 ‘게이미피케이션’에 관한 연구가 활발한데요. 일본의 연구 상황은 어떤지요. 주로 어떤 방향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나요?

요시다: 일본에서는 2012년에 ‘게이미피케이션’ 붐이 일어서, 이 단어가 제목에 들어간 서적이 많이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부터 ‘시리어스 게임’과 ‘에듀테인먼트’라는 말 아래, 교육과 직업훈련, 의료, 복지에 디지털 게임을 활용하려는 시도는 있었습니다. 재활 프로그램에 게임을 접목하는 연구도 규슈대학 등이 2009년부터 해왔습니다.

‘시리어스 게임’과 ‘게이미피케이션’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게이미피케이션(ゲーミフィケーション)』(도쿄: NHK출판, 2012)의 저자인 이노우에 아키토(井上明人)에 의하면 “시리어스 게임은 사회의 여러 문제를 게임 속으로 가지고 오는 것이지만, 게이미피케이션은 게임을 사회의 여러 장소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성용 화장실에 ‘과녁 스티커’를 붙이고, 그 과녁을 명중시키면 스티커 색이 변한다고 해봅시다. 그것만으로 화장실의 오물은 상당히 줄어듭니다. 스티커를 붙이는 것만으로 게임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게이미피케이션입니다. 이노우에 아키토는 게이미피케이션을 “보조선을 긋는 것”으로 정의합니다. 실용 목적으로 디지털 게임을 만드는 것만이 게이미피케이션이 아닙니다. 아주 약간의 장치와 고안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의 동기와 의미를 확 바꿉니다. 이 지점에 게이미케이션의 본질과 가능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일림: 한국 대학에는 최근 ‘문화콘텐츠학과’, ‘콘텐츠학과’라는 명칭 하에 문화산업에 관한 전문학과가 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 문화산업에 관한 교육과 정책을 대학이 수행하고 있는지요.

요시다: 일본에는 ‘콘텐츠 문화사학회’, ‘콘텐츠 투어리즘학회’가 있긴 하지만, 대학에 설치된 문화콘텐츠학과는 거의 들어본 적 없습니다. 한국이 진보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과는 전혀 다른 노선을 걷고 있는 것인지 여부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한편 리쓰메이칸대학교 영상학부에는 콘텐츠 산업을 전공으로 하는 교수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몇 명은 게임연구센터에도 소속되어 있는데요. ‘콘텐츠 산업’, ‘콘텐츠 경영’, ‘콘텐츠 마케팅’ 등과 같은 수업도 있습니다. 따라서 학과 명칭으로는 낯설어도, ‘콘텐츠학’을 가르치는 대학과 그것을 배우는 학생들은 일본에도 상당 수에 이르리라고 추정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에 있는 정보 관련과 미디어 관련학부가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리쓰메이칸대학교 영상학부 홈페이지 http://www.ritsumei.ac.jp/cias/

김일림: 이번 세계미학자대회에서 발표한 연구 내용을 간단히 소개해주십시오. 또 한국의 학계와 사회 전반에 대한 인상은 어땠는지 말씀해주세요.

요시다: 이번 세계미학자대회에서는 디지털 게임에서의 ‘죽음’에 관한 연구 발표를 했습니다. 죽음(하나의 생명 상실)과 게임오버(모든 생명의 상실)가 게임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출현하여 분리되어 왔는가, 각각의 게임 속에서 양자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플레이어의 경험(특히 몰입이 단절되는 사례로)으로서 어떻게 다른가 등에 관해 고찰했습니다.

게임 속의 죽음에 대해서 저는 얼마 전에 오쓰카 에이지(大塚英志)와 아즈마 히로키(東浩紀)의 논쟁을 재평가하는 논문 「게임에 있어서 죽음이란 무엇인가? ── ‘게임적 리얼리즘’ 문제 재고(ゲームにとって死とは何か?──「ゲーム的リアリズム」問題再訪)」를 썼습니다. 이번 발표는 그 후속편이었습니다.

한국은 16년만에 두 번째로 방문했습니다만, 일로 온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먼저 미학 분야에서는 이미 일본이 한국에 뒤처지고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미학을 연구하려는 한국인이 일본에 유학을 오는 일련의 흐름이 오래 전부터 있었지요.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는 미학이 축소되고 있습니다. 학위 취득 후 연구자로 취직할 수 있는 자리도 줄어들고 있고, 대학원생들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향은 철학을 포함해서 인문학 전체에 해당됩니다. 그 결과 미학 교수가 일곱 명 있는 서울대학교를, 규모 면에서 능가하는 일본의 대학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울대학교 미학과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교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어로 토론하고 학문하는 능력은 앞으로 더욱 요구될 터인데, 일본의 대학은 미학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이에 대응을 못 하고 있습니다. 세계미학자대회에 참가한 연구자로서, 미학에 한정해 말씀 드리면, 일본이 한국에 배워야 할 점이 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예전부터 인적 교류가 활발했기 때문에, 미학 분야에서도 앞으로 더 좋은 파트너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연구 프로젝트 “Pop-culture Studies
from the viewpoint of Aesthetics”의 일환으로
“What is the “Death” in Video Games?”를 발표하는 모습.

김일림: 선생님은 지금까지 주로 서양과 교류해왔습니다. 오는 11월에 열리는 <문화/과학> 주최의 국제 컨퍼런스에서는 ‘동아시아’라는 이름 하에 한국 및 중국 연구자들과 교류를 하게 되는데요. 선생님에게 ‘동아시아’의 의미는 무엇인지요.

요시다: 제가 지금까지 주로 서구의 연구자들과 교류해온 것은 때마침 그런 기회가 있었기 때문이지, 특별히 제가 선호해서 교류해온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성격이라서 흥미로운 제안이 오면 어디라도 달려가고, 누구와도 함께 합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저에게 특별한 장소입니다. 가깝고도 먼 장소지요. 언어의 장벽과 서구에 편중된 전통 때문에 일본인 학자가 좀처럼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과 같이 그곳에 이미 발을 들여놓은 이들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 또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 등이 해온 다언어(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잡지 <트레이시즈>도 동아시아의 새로운 시대를 구상하는, 어렵지만(실제 2호에서 끝났지요) 귀중한 도전이었습니다. 저도 한국과 중국의 연구자들과 교류하면서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이 가능할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한편 저에게는 한국과 중국에서 온 친구들과 동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수로서 유학생도 많이 지도해왔습니다. 제가 리쓰메이칸대학교에 부임해서 처음 박사논문을 지도한 것도 한국 유학생이었습니다. 한국 순정만화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생이었지요. 현재는 게임 연구에 뜻을 둔 한국과 중국의 학생들이 저에게 모여들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동아시아에서 온 유학생들이, 일본어와 영어뿐 아니라 모국어(한국어와 중국어)로도 연구성과를 발표할 기회를 갖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장차 일본에서 배운 것을 살려서, 동아시아를 거점으로 글로벌하게 활약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김일림: <트레이시즈>는 <문화/과학>과 선생님을 연결해주는 끈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과학>의 전·현직 편집위원들 모두 이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활동과 연구 계획을 들려주세요.

요시다: 일본어로 게임 연구서를 쓰는 것이 연구자로서 당면한 최대의 목표입니다. 에스테틱스(감성학)는 게임 연구에서는 ‘플레이어 경험의 분석’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통해 게임 디자인론이나 게임산업론과는 또 다른 각도에서, 게임의 매력과 본질에 다가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또 교수로서는 학생의 장래 진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도 게임 연구를 어떻게 일본 아카데미즘과 사회에 정착시키고 확산시킬 것인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학계뿐 아니라 기업과 소비자의 요구도 이해하고 파악하고 싶습니다.

<문화/과학>을 계기로 최근 한국과의 인연이 단숨에 깊어졌는데요. 새롭게 생긴 한국의 동료들과 앞으로 함께 무엇을 할지, 지금 몹시 두근거립니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하면, 학문에서도 게임 문화에서도 역시 납득할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의외로 여겨지는 차이점도 있습니다. 공통점과 차이점 모두가 흥미롭습니다.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관해서도 앞으로 더 공부하고 싶습니다.

김일림: 긴 시간 고맙습니다. 11월의 <문화/과학> 국제 컨퍼런스에서 뵙겠습니다.

 

세계미학자대회에서 만난
<문화/과학> 편집위원들과 요시다 히로시 교수. 왼쪽부터
김일림 편집위원, 요시다 히로시 교수, 강신규 편집위원.

 

이 글은 <문화/과학> 뉴스레터 독자들에게 한국을 방문한 해외 연구자를 소개하고자 하는 소박한 의도에서 기획되었다. 그런데 대담을 진행할수록 질문 하는 쪽도, 답변 하는 쪽도 매우 신중하고 진지해졌다. 이 글 또한 훗날 ‘흔적’이 될 터이기 때문이다. 번역어 선택까지 포함해서 김일림 편집위원과 요시다 히로시 교수는 이 대담에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했다. 15년전 발행된 <흔적>이 오늘의 주인공과 <문화/과학>의 거리를 한달음에 좁혀주었듯, 이 글도 우연히 어떤 시공을 잇는 ‘흔적’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두 사람은 오랜 대담을 마무리했다.


 

 

 

● 요시다 히로시 (吉田寛, Hiroshi YOSHIDA)

리쓰메이칸대학교 대학원 첨단종합학술연구과 교수. 리쓰메이칸대학교 게임연구센터 교수. 도쿄대학교 대학원 인문사회계 연구과 미학예술학연구과 박사. 런던대학교 골드스미스대학 객원연구원 역임. 내셔널 아이덴티티와 청각문화의 관계를 연구해온 음악학자. 최근에는 감성과 미디어의 관점에서 게임으로 연구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2015년 저서 『절대음악의 미학과 분열하는 ‘독일’ : 19세기』로 산토리 학예상 및 일본독일학회 장려상(학회 유일의 학술상 명칭) 수상. 단독 저서로 『바그너의 ‘독일’』, 『‘음악의 나라 독일’의 신화와 그 기원』, 『민요의 발견과 독일의 ‘변모’』, 『절대음악의 미학과 분열하는 ‘독일’』 이 있으며, 역서로는 『아도르노 음악 미디어 논집』 등이 있다. 아울러 공저 및 편저로는 『건축 키워드』, 『바그너 사전』, 『Edificare returns』, 『연극학의 키워드』, 『오페라학의 지평』, 『특별공개기획: After Metahistory-Hayden White 교수의 포스트모더니즘 강의』, 『게임화하는 세계-컴퓨터 게임의 기호론』, 『어린이 백서 2013』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한슬리크의 ‘자율적’ 음악미학 재고-『음악적으로 아름다운 것에 관하여』의 성립과 개정 과정을 중심으로」, 「청중이란 무엇인가-한슬리크의 음악비평과 공공적 연주회 활동」, 「근대 올림픽 경기에 있어서 예술경기 고찰-예술과 스포츠의 공존가능성을 둘러싸고」, 「왜 지금 비디오 게임 연구인가-글로벌리제이션과 감각 변용의 관점에서」, 「규제와 자유의 변증법으로서의 게임-‘규칙의 감옥’에서 어떻게 자유가 가능한가?」, 「‘노화’하는 게임문화」, 「얼터너티브한 교육의 장으로서의 미술관」, 「비디오 게임에 있어서의 ‘리얼한 공간’이란 무엇인가?-‘제3의 차원’의 표현기법을 중심으로」, 「TV 게임의 감성학을 향해서」,「음악사상사로 보는 독일 내셔널 아이덴티티」,「독일어 옹호운동과 독일어 오페라의 성립」, 「모놀로그로서의 연주에서 다이얼로그 공간으로-20세기 음악사에 있어서의 공간의 문제」, 「근대 독일 사회의 이상적 모델로서의 심포니」, 「독일 음악사의 ‘나침반’으로서의 교향악」, 「공명하는 건축」 외 다수.

일본 음악학회, (일본)미학회, (일본)표상문화론학회, 국제미학연맹 회원.

연구목록 열람: http://d.hatena.ne.jp/aesthetica/about

논문 다운로드: https://ritsumei.academia.edu/HiroshiYoshida

첫 저서 『바그너의 ‘독일’-초(超)정치와 내셔널 아이덴티티의 행방
(ヴァーグナーの「ドイツ」
―超政治と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のゆくえ)』
(도쿄: 青弓社, 2009). ⓒ 2009. 青弓社.

‘음악의 나라 독일’의 계보학 첫 번째 시리즈
『‘음악의 나라 독일’의 신화와 그 기원-르네상스에서 18세기
(“音楽の国ドイツ”の神話とその起源―ルネサンスから十八世紀)』
(도쿄: 青弓社, 2013). ⓒ 2013. 青弓社.

‘음악의 나라 독일’의 계보학 두 번째 시리즈 『민요의 발견과
‘독일’의 변모: 18세기(民謡の発見と〈ドイツ〉の変貌: 十八世紀)』
(도쿄: 青弓社, 2013). ⓒ 2013. 青弓社.

산토리 학예상을 수상한 ‘음악의 나라 독일’의 계보학
세 번째 시리즈 『절대음악의 미학과 분열하는 ‘독일’ : 19세기
(絶対音楽の美学と分裂する〈ドイツ〉: 十九世紀)』
(도쿄: 青弓社, 2015). ⓒ 2015. 青弓社.

공저 『게임화하는 세계-컴퓨터 게임의 기호론
(ゲーム化する世界: コンピュータゲームの記号論)』
(도쿄: 新曜社, 2013). ⓒ 2013. 新曜社.

 

 

 

ⓒ 2016. ILLIM KIM•Hiroshi YOSHIDA All rights reserved.

 

 

카테고리: 알림 | 태그: , , , , , , , , , | 1개의 댓글

[뉴스레터 17호][칼럼] 게임 셧다운제 폐지 – 찬성(이동연)

[서울경제 기고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게임 셧다운제 폐지 – 찬성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심야 시간에 청소년의 게임 이용을 강제로 막는 셧다운제가 부모에게 선택권을 주는 방향으로 완화되면서 ‘셧다운제 폐지’ 논란이 재점화하고 있다. 지난달 문화체육관광부는 게임 산업의 대표적 규제로 꼽히던 ‘인터넷 게임 시간 이용제한 규제(셧다운제)’를 풀어 부모 등 친권자가 요청할 경우 심야 시간(자정~오전6시)에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부모선택제’ 도입 계획을 발표했다. 게임 업계 등은 부모선택제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셧다운제 완전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폐지 찬성 측은 셧다운제가 실질적으로 청소년의 게임 이용 시간을 줄이지 못하고 있으며 게임 및 문화 콘텐츠 산업만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반대 측은 게임이 중독성이 높은 만큼 청소년의 건강과 수면시간을 보장하기 위해 셧다운제가 필요하다고 반박하고 있다. 양측의 견해를 싣는다.
지난달 사회관계 장관회의에서 ‘게임문화진흥계획’의 일환으로 강제적 게임셧다운제를 완화하는 정책이 발표됐다. 현행 청소년보호법은 자정에서 오전6시까지 16세 이하 청소년의 게임 이용을 강제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이번 규제 완화 조치의 골자는 부모가 동의하면 선택적으로 게임을 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데 있다. 얼핏 보면 부모의 선택이 중요해졌으니 게임셧다운제의 강제적 규제가 완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자정에 자녀의 게임 이용을 통 크게 허용해줄 부모가 얼마나 있을까. 강제적 셧다운제가 부모선택제로 전환된다고 해 게임 규제 정책의 기본 틀이 크게 변화할 것 같지는 않다. 전 세계에 유일무이한 게임셧다운제가 폐지되지 않는 한 정부의 게임 규제 정책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에 머물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셧다운제는 왜 폐지돼야 할까.
첫째, 무엇보다 셧다운제는 청소년의 문화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 현행 셧다운제는 청소년이 게임을 할 기본 권리를 강제적으로 차단하고 게임으로 스스로 놀이의 즐거움을 추구할 권리를 박탈한다. 물론 이번 조치로 부모의 선택 권한이 주어졌지만 청소년이 게임을 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부여한 것은 아니다. 청소년의 문화 권리와 부모의 자녀 관리 의사가 공존하려면 차라리 셧다운제를 폐지하고 부모의 선택으로 자녀의 게임 이용을 차단하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셧다운제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청소년이 밤에 충분히 수면을 취해야 하는데 게임이 청소년의 수면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한다. 청소년의 수면권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게임만이 아니라 입시를 위해 새벽까지 공부하는 것을 금하는 소위 ‘수능셧다운제’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청소년의 수면권은 기본적으로 당사자가 잠을 잘지 안 잘지를 결정하는 권리이지 무조건 밤에는 자야 한다는 강제적 권리가 아니다. 둘째, 셧다운제는 실효성이 거의 없다. 강제적 셧다운제 도입을 지지한 여성가족부와 보수적 시민단체는 이 제도가 시행되면 청소년의 게임 이용이 현저히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효과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지난 2014년 산업연구원의 ‘문화산업 글로벌 경쟁력 제고 방안’ 보고서에 따르면 셧다운제가 도입된 후 청소년의 하루 게임 이용 시간이 16~20분 정도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 수치는 통계적으로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셧다운제가 시행돼도 16세 이하 청소년이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로 인증하고 이용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 셧다운제가 시행되자 게임 업계는 청소년 이용 게임 개발을 줄이고 청소년은 부모의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해 청소년 이용 불가 게임을 더 많이 이용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셋째, 셧다운제는 강력한 게임 규제로 국가가 사회를 관리하려는 장치로 기능한다. 셧다운제와 같이 놀이 시간을 강제적으로 차단하는 정책은 국가가 청소년을 학업과 노동의 주체로 관리하겠다는 발상이다. 더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청소년의 게임 이용 여부와 관계없이 이 법이 주는 상징적 통제 효과가 강력하다는 점이다. 이는 개인의 문화적 권리와 취미생활을 법으로 통제하겠다는 국가의 통제 의지를 아주 당연시하고 있다. 극히 실효성이 낮은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청소년 보호의 논리를 넘어 개인의 자유로운 온라인 활동을 통제하려는 국가 사회관리 통제술의 연장선에 있다. 넷째, 게임의 산업적·문화적 활성화에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강제적 셧다운제는 게임콘텐츠에 대한 과도한 중복 규제로 최근 게임콘텐츠와 관련한 각종 규제법 발의안과 함께 게임 산업계의 균형 있는 발전을 저해하는 강한 규제 장치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1년 말부터 지금까지 게임 산업이 셧다운제로 대략 1조1,600억원의 매출 감소를 보였다고 한다. 또 게임의 문화적·예술적 가치들이 강제적 셧다운제로 평가절하됨으로써 창의적 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부정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물론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은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숙제다. 그러나 원인이 게임 자체에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규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5월 건국대 산학협력단이 게임 과몰입에 빠진 청소년 2,000명을 2년간 장기 관찰한 결과 게임 과몰입의 근본 원인은 게임 자체에 있기보다 청소년이 받는 사회적 스트레스에 있다고 발표했다. 무리한 법적 규제보다 청소년에게 더 많은 문화적 놀 거리를 제공하고 입시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이 게임 과몰입을 막는 실질적 대안이지 않을까.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 17호][칼럼] 잃어버린 투사를 찾아서(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잃어버린 투사를 찾아서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언제부터인가 근절해야 할 악 가운데 폭력이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고 말았다. 국가폭력에서부터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서나 폭력은 낱낱이 색출하고 징벌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폭력은 모든 곳에서 악 중의 악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런 탓일까. 나는 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질 때마다 폭력에 삼켜진 세계의 심연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폭력이 그만치 절대적으로 투명한 악으로서 규탄받아야 할까. 나는 예상할 수 있는 저항과 거부를 무릅쓰고 이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깐 숨을 고르며 말하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평온하고 쾌적한 삶을 망치고 파괴하는 어떤 난폭한 혼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두들겨 패고 술에 취한 동료를 겁탈하는 것을 과연 폭력이라 볼 수 있을지 진지하게 따져보자는 말이라면 그것은 당연 미친 짓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폭력이란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인기있던 말을 빌리자면 담론 같은 것에 가깝다. 담론은 현실을 이해하는 틀로 작용하는 것, 즉 우리의 생각을 구성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는 담론이 가리키는 것의 반쪽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 역시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탈바꿈시킨다. 담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내 눈에는 그게 그렇게 보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탓이다.
폭력 담론이 잘나가는 것은 그런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사태는 얼추 이렇게 펼쳐진다. 그렇다, 그건 정말 나쁘다. 이는 그것이 무엇보다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논리를 좇을 때 역사를 반성하는 방식도 기우뚱해진다. 우리에겐 군사독재라는 끔찍한 역사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여야 할 것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맨 먼저 시야에 떠오르는 것은 학살과 고문, 검열 같은 폭력이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폭력이라는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 뒤에 숨어 역사를 송두리째 수챗구멍 속으로 쓸어 보낸다. 마치 그 모든 폭력이 분단과 냉전,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른 발전이라는 폭력 아닌 폭력의 일부라는 점을 모른 채 말이다.
하긴 우리는 노동자를 필요한 만큼 쓰고 자르는 것은 글로벌 경쟁 원리에 따르는 합리적 행동인 반면 인격적 굴욕을 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비합리적 폭력의 분출이라고 비난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근로비자 없이 저임금, 과로, 재해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자에게는 어떤 폭력도 찾지 못하면서 외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비하하는 발언은 인종혐오를 보여주는 극단적 폭력으로 저주하는 세계는 실로 이상한 곳이다. 폭력이 아닌 한 모든 것은 합리적이면서도 선한 반면 폭력은 어떤 변명도 허락되지 않는 순수한 악이라 규탄하는 것. 이것이 오늘의 으뜸가는 윤리적 계율이다.
이는 슬픈 일이다. 파시즘에 저항한 파르티잔은 폭력적이었다. 군사독재에 맞서 화염병을 던진 학생과 노동자도 폭력적이었다. 아니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 모든 시도는 폭력적이었다. 그럼 은근슬쩍 폭력을 비호하는 알리바이를 들이대자는 거냐고? 당연히 아니다. 폭력을 거부할 생각이면 면죄된 폭력인 자연화된 폭력, 구조적인 폭력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갑질하는 자의 역겨운 폭력보다 이윤을 위해 타산적으로 처신하는 자의 몸짓을 폭력의 주인으로 고발하자는 것이다.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 17호][칼럼] 요산 김정한의 소설을 읽다가(이명원)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요산 김정한의 소설을 읽다가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어떻게 그 시절에 이런 작품이 쓰였나 하는 경탄이랄지 탄식이랄지에 조우하는 일이 종종 있다. 내게 요산 김정한의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1977)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이 작품은 몇몇 수기나 증언 등의 논픽션을 제외하자면, 한국문학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인(조선인)의 오키나와 체험을 조명하고 있다. 소설 속의 오키나와인들에 의해 발설되는 태평양전쟁 말기 강제연행된 조선인 위안부·징용 노동자 문제는 물론이거니와, 1970년대 외화벌이를 위해 오키나와의 파인애플 농장에 파송되었던 여성노동자들의 문제를 통해 요산은 식민주의와 냉전, 그리고 산업화의 문제를 밀도 있게 환기하고 있다.
이 소설의 도입부에서 작가를 연상시키는 서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문예평론가가 나를 평하기를 체험하지 않은 일은 잘 쓰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거니와, 사실 나는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는 자신이 없다.”
그렇다면 요산은 한국인(조선인)과 오키나와인의 만남을 어떻게 서사화할 수 있었는가. 체험하지도 않은 일을 말이다. 게다가 당시는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오키나와를 취재·조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공간적 배경 역시 오키나와 본도로부터도 태평양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도(離島)인 미나미다이토지마(南大東島)였는데 말이다.
물론, 오늘의 작가라면 인천에서 오키나와의 나하공항으로 이동한 후, 나하의 도마리항에서 미나미다이토지마로 운항하는 페리를 타고 현지에 도착, 그곳의 지형과 과거의 흔적들을 답사하고, 이 섬과 관련해 축적되어 있는 다양한 문헌자료를 검토할 수 있다. 또 현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구체화된 기억과 인상들을 직조해내는 방식으로 소설을 구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산이 이 소설을 쓰고 발표했던 당시는 해외여행 자유화 조처(1988)가 이루어지기 이전이어서, 단지 소설을 쓰겠다고 오키나와로 가는 일은 어려웠고, 특히 미나미다이토지마와 관련한 한국어 자료란 거의 희박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물론 요산이 일본어 문헌이나 신문을 참조했을 가능성은 배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소설을 썼단 말인가.
이 소설을 당시 냉전체제의 역사적 국면과 연결시켜 치밀하게 검토한 임성모 교수의 논문인 <월경하는 대중: 1970년대 한국 여성노동자의 오키나와 체험>을 읽어보면, 아마도 요산은 오키나와로의 계절노동자 파견과 관련된 한국의 신문기사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냉전기의 관제보도와 유사한 기사를 요산이 기계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니다. 오키나와의 일본 복귀(1972), 일본과 중국의 국교수립(1972)과 이에 따른 대만과의 단교, 오키나와 해양엑스포와 한국관의 개관(1975) 등의 보도를 비판적으로 참조하면서, 오키나와에 파송된 한국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상상력을 동원해 재구성했을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상해댁’과 같은 오키나와 거주 옛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형상화는 오키나와에 거주하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 등의 사례가 참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요산은 “그물을 가지고 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를 쓰는 문단 일각의 소설적 경향에 위화감을 표현했다. 요산 특유의 ‘비판적 상상력’이 없었다면, 이런 소설은 결코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요산은 상상력의 경험적·물질적 기반을 중시했다. 하나의 사건을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인식과 감각 속에서 조직화하는 그의 시각은 성숙한 리얼리즘이다.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

[뉴스레터 17호][신간안내] 라깡 또는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난장, 2016)

[신간안내]

최원 편집위원의
<라깡 또는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난장, 2016)

목차

서 문

몇몇 특수용어에 대한 예비 설명

1. 욕망 그래프

2. 실재/상징/상상

3. 억압

 

제1장. 상징으로부터 떠나는가, 상징을 향해 떠나는가?: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비판

1. 알튀세르-라캉 논쟁에 대한 지젝의 해석

2. 사물과의 마주침

3. 욕망 그래프의 2층이라는 쟁점

4. 『세미나 5: 무의식의 형성』에서의 라캉의 이중 전선: 욕망 그래프 구축의 쟁점들

 

제2장. 후기 라캉

1. 후기 라캉은 언제 도착하는가?

2.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에 대하여: 아파니시스라는 질문

2.1. 소외 | 2.2. 분리 | 2.3. 사드에 대항해 칸트를

3. 『세미나 20: 앙코르』에서의 단절과 그 결과들

 

제3장. 알튀세르의 ‘실재’와 토픽이라는 질문

1. 정신분석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두 강의

2. 인셉션인가 호명인가?: 슬로베니아 학파, 버틀러, 알튀세르

3. 알튀세르의 ‘실재’와 유물론적 담론 이론을 위한 프로젝트

 

제4장. 결론: 해방과 시민공존

1. ‘이데올로기적 반역’이라는 질문

2.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1978년 논쟁: 국가 내부인가 외부인가?

3. 라캉 또는 알튀세르: 폭력에 대하여

3.1 라캉의 접근법 | 3.2 알튀세르의 접근법

 

부록. ‘정동 이론’ 비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의 쟁점을 중심으로

찾아보기

 

책소개(서문의 일부)

이 책은 2008~2011년 시카고 로욜라대학교 철학과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구조주의 논쟁』을 번역__보완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루이 알튀세르와 자크 라캉의 논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핵심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이론가들 사이에서 서로 어깨를 겨룬 이 두 사람의 이론적 수렴과 발산은 말 그대로 프로이트-맑스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국면을 규정했다. 1960년대 초 서로 동맹을 맺었을 때, 이들은 구조와 주체라는 질문을 공유하면서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사이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결정적인 일보를 내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동맹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라캉은 곧 자신의 세미나(1968~69년)에서 알튀세르를 공개적으로 실명 비판하고, 알튀세르는 1976년의 에세이(「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라캉의 이론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라캉의 전기를 쓴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알튀세르와 라캉의 입장 차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라캉은 알튀세르와 정반대로 나아갔다. 라캉이 상징적 기능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관념에 항상 새로운 애착을 보였다면, 알튀세르는 모든 친족적 상징성에서 탈출함으로써만 정초적 행위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라캉은 반대로 이런 탈출이 진정 논리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담론은 정신증에 의해 침범당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많은 독자들은 이 구절 앞에서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제시된 두 이론가의 이미지는 독자들이 보통 옳다고 믿는 것과 정반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알튀세르는 주체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불허한 고집스러운 구조주의자로 비쳐지는 반면, 라캉은 이런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진정한 비판가, 곧 ‘실재’의 환원 불가능한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질서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준 이론가로 비쳐진다.

물론 이런 독자들의 이해를 일반인들의 아무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1970)을 출판하자마자 곧바로 구조주의자 또는 기능주의자라고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런 비판이 마침내 그 이론적 무게와 토대를 확보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발표해 그 타당성을 나름대로 논증해보였을 때였는데, 지젝은 정확히 알튀세르와 라캉의 비교를 통해 이를 달성했다. 출판된 지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지젝의 저 책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학문 공동체들이 알튀세르와 라캉을 이해하는 방식을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이안 파커 같이 지젝에 동조하지 않는 비판가조차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타당하며 라캉 자신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다는 생각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렇다면 루디네스코는 단순히 실수를 범한 것일까? 그러나 훨씬 더 최근에 사토 요시유키는 루디네스코와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즉, 1960~7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진 주체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완고하게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것은 오히려 라캉이며 알튀세르, (후기)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의 이론화 작업은 모두 라캉의 이런 입장과 거리를 두기 위한 다양한 시도였다고 단언한 것이다. 사토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라캉의 이론은 상징적 구조에 대해 주체가 ‘절대적 수동성’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튀세르와 라캉에 대해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미지야말로 단순한 오해라고 여겨야 하는 것일까?

나는 정통 구조주의의 입장을 좀 더 완강하게 견지했던 것은 알튀세르가 아니라 라캉이라는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두 이론가의 이견뿐만 아니라 동의의 지점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구조주의라는 것 자체는 하나의 통일된 학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알튀세르와 라캉이 구조주의와 맺었던 관계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주체라는 범주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 놓으려 했던 한에서 그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구조주의자였다. 그들은 (주체의 능동성과 자율성까지 포함해) 주체의 범주를 단순하게 무효화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주체가 어떤 과정과 메커니즘을 통해, 구조에 특정한 방식으로 의존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자율적이라고 인지하는 존재로 구성되는지 검토했다. 이렇게 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분명히 윤곽 지은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알튀세르와 라캉이 각자의 이론화 작업에서 감행했던 상이한 선택지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카테고리: 알림 | 1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