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9호][칼럼] 가르침의 질서와 해방된 주체 (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가르침의 질서와 해방된 주체

권명아(동아대 국문과 교수)

한국 근대사에서 국민의 95%가 어떤 사태에 대해 ‘공감’이나 ‘합의’를 한 사례는 거의 없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5%로 떨어졌다는 것은 사실상 국민의 95%가 ‘지지 거부’에 공감했다는 의미다. 무엇에 의해 촉발되었든 이러한 거대한 폭발은 역사적 사건이다. 이 사건의 귀결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든 우리는 이 의미를 축소시켜서는 안 된다. 사실 이미 우리는 역사적 순간들,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는 정치적 사건의 한가운데 있다.

민중총궐기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민중총궐기는 그 자체로 낡은 반복이 아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시공간을 연다. 그래서 민중총궐기는 그것이 무엇을 이뤄냈느냐가 아니라 ‘궐기’ 그 자체로 해방적이다. 또한 오늘날의 민중총궐기는 같은 공간에 참여하지 않아도 실시간 생중계로 먼 곳까지 전송된다. 전송된 궐기에 동참하면서 궐기의 해방감도 널리 퍼진다. 해방감은 전염력을 갖고 비물질적 마주침을 통해서도 퍼져 나간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각축전을 벌이는 이 ‘성토 공간’에서 낡은 반복과 단절하는 흐름이 바로 ‘해방’의 자리를 펼쳐낸다.

당연하게도 이 95%의 힘과 흐름은 단일한 동기나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제 누군가는 정치공학에 결국 패할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한다. 이미 이번주를 기점으로 보수 언론은 방향을 틀었고, 정치공학은 공공연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혁명적 순간을 정치적 공학으로 봉쇄하고 사건적인 마주침이 낡고 오래된 패거리 연합으로 다시 분화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한 반복이다. 그런 반복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니 그 반복에 대해 실망하거나 환멸을 품을 필요가 없다.

“야동까지 나와야 되겠냐!”며 겁박하는 전 새누리당 국회의원 인터뷰에 “야동 공유합시다!”라며 줄줄이 달린 댓글은 이 낡은 반복의 세계를 연장하고 지속시킨다. 바로 그런 이유로 신나서 야동을 공유하자며 댓글을 다는 쾌감은 억압과 종속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 아니다. 사상 유례가 없이 열린 성토 공간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들에 대해 여성혐오, 소수자혐오를 반복하지 말라는 요구가 드세다. 이는 혁명의 매뉴얼이나 ‘착한 궐기’를 규율하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가 아니다. 이 요구야말로 유례없이 열린 이 성토 공간이 종속과 굴종, 노예화와 침묵을 강요하는 낡은 세계의 질서와 단절하고 다른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해방에의 요구다.

국가권력 비판이라는 거대한 목표 앞에 여성혐오나 소수자혐오를 문제시하는 게 사소하거나, 목표를 향한 총력전의 힘을 분산하는 일이라는 비판도 많다. 이런 비판은 ‘혁명을 잘 모르는 초심자’를 지도하는 경험자 선배의 가르침의 형식을 종종 취한다. 소수자혐오와는 전혀 다르지만, 이 혁명적 흐름의 향방을 ‘원로의 가르침’으로 가닥을 잡으려는 언론의 추이도 해방의 요구를 가르침의 질서로 복귀시킬 우려가 있다.

잘 알려진 민중 시(가요)의 구절인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 하지 않았네”는 해방의 길이 가르침의 질서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자크 랑시에르는 누구나 가진 해방의 의지가 가르침의 질서에 지배되고 그것이 마치 진보의 논리처럼 여겨지는 상황을 비판했다. 가르침의 질서에 복속되지 않는 해방의 실천은 ‘해방된 자가 해방한다’라는 표현에 함축된다. ‘성토 공간’에서 낡은 반복을 끊자는 페미니즘과 소수자 정치의 요구를 ‘사소한’ 일로 간주하는 건 바로 이런 가르침의 질서다. 낡은 반복을 끊자. 그것이 바로 해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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