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8호][칼럼] 남자들이여, 더 가까이 오라 (손희정)

[경향신문] 기고문

[청춘직설] 남자들이여, 더 가까이 오라

손희정 (연세대 젠더연구소)

남자에 대해 생각할 때가 왔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자는 인간으로, 여자는 그 인간에 대한 결핍이자 타자로 여겨왔다. 이제 우리는 ‘보편 인간’으로 상상된 남자가 아니라, 성별을 가진 존재, 성화된 존재로서의 남자에 대해 적극적으로 말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적인 폭력과 차별은 남자만을 보편적인 인간으로 다뤄온 사유의 한계 속에서 등장한다. 그리고 그 한계야말로 남자인 당신을 옥죄고 있는 굴레다.

남자만을 인간으로 생각한다니, 무슨 말일까? 리우 올림픽 중계 ‘막말 대잔치’를 떠올려보자. “여성 선수가 저렇게 쇠로 된 장비를 다루는 걸 보니 인상적”(펜싱), “살결이 야들야들하다”(유도), “○○○ 선수 착하고 활도 잘 쏘니까 일등 신붓감”(양궁). 이런 리스트는 끝도 없다. 여성은 운동선수로서의 자질보다는 그의 성별이나 외모, 사회적 관계 안에서 평가받고 묘사된다. 남자 경기에서 이런 예는 드물다. 이는 남자 선수는 ‘선수’에, 여자 선수는 ‘여자’에 방점을 찍는 우리 사회의 성차별을 드러낸다. 남자는 ‘보편’이 되고, 여자는 ‘여자’가 된다는 말은 이런 의미다.

그런데 남성이 인간으로서 대표성을 띠는 순간, 남성 내부의 차이는 지워져 버린다. 예컨대 남성들 사이의 계급차는 ‘인간 내부의 차이’가 되지 ‘남성 내부의 차이’로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사회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 차별당하듯 남성은 남성으로서 차별받는다.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은 같은 지위를 누리지 않으며, 따라서 같은 권력을 행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성은 ‘인간으로서 동등하다’라는 환상에 빠져 근본적인 모순과 대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여성 교환’을 통해 획득된다.

근대 초창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는 기존에 이미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던 가부장제에 올라타면서 그 힘을 더욱 견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부르주아 남성은 노동자 남성에게 ‘여자와 결혼할 법적 권리’를 부여함으로써 ‘동등한 (남성) 인간’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여성과 가족 구성권을 선물하면서 노동자를 길들인 것이다. 한국 여성혐오의 한 근간으로 지적되는 ‘식민지 남성성’이 작동하는 방식도 유사했다. 일본제국은 ‘내선일체’의 감각을 주기 위해 일본 여성과 조선 남성의 결혼을 과도하게 홍보했다.

여성의 교환을 통해 만들어진 남성 간 ‘평등’이란 허구다. 내가 여성을 소유하고 사회적 소수자 위에 군림한다고 해서 세계에 군림하는 ‘어떤 남자’들과 동등한 관계가 될 리 만무하다. ‘이건희’와 미래가 불안한 남성 청년은 같지 않다. 다만 ‘같을 수 있다’고 상상될 뿐이다. 이때 여자는 일종의 트로피로 ‘이건희’와 ‘나’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와 연애하지 않는 여자, 결혼하지 않는 여자는 ‘김치녀’가 된다. 하지만 불평등을 만드는 건 ‘헬조선’이라는 계급사회이지 당신과 연애하지 않는 ‘그 여자’가 아니다. 나의 불행을 더 열악한 지위에 있는 자의 탓으로 돌리면서 진정한 싸움을 회피하는 것이야말로 노예의 삶이다.

남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무슨 소용인가? 대답은 명백하다. 바로 당신의 해방을 위해 페미니즘은 필요하다.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 및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벨 훅스)이다. 우리가 남성을 성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나면 남성 간의 차이가 드러나고, 그 차이로부터 성차별을 당해 온 남성 역사가 발견된다. 역차별이 아니다. 당신은 기득권 남성들로부터 이미 성차별을 당해왔다.내부자들>이라는 영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남성연대’는 ‘이미 충분히 가진 내부자들’의 것이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어떤 남자들은 채팅방에서 여자 동기들의 외모를 품평하며 낄낄거리거나, 온라인으로 몰카를 공유하면서 ‘남성연대’라는 안전망을 가졌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왜곡된 연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로부터 아무런 실질적인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이 싸워야 할 대상은 떨어지지도 않을 ‘콩고물’에 대한 판타지를 주입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을 축적해가는 기득권 남성들이자 그 남성들에게 힘을 주는 가부장제라는 구조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가능하다. 아니, 그건 이 망가진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정체성이다. 벨 훅스의 말을 당신에게 전한다. “더 가까이 오라. 페미니즘이 당신의 삶과 우리 모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어떤 변화를 일으키는지 지켜보라. 더 가까이 오라. 와서 페미니즘 운동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직접 살펴보라. 더 가까이 오라. 그러면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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