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9호][칼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서동진(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이 사태에 연루된 자들을 에워싼 괴담에 가까운 추문들은, 주의해 듣자면 민망하고 역겹기까지 하다. 쓰레기더미에서 집어올린 작은 오물의 단편을 꺼내 이것이 당신의 것이 맞느냐 다그칠 때, 우리는 일제히 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은 곧 입술을 달싹일 증인들의 낯이다. 그들은 초조한 죄책감과 부산한 수치심에 쫓겨 어떤 낯을 지을 것이다. 낯빛은 헤아릴 길 없는 그 혹은 그녀의 내면적인 도덕을 비춘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의 낯빛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줄 아는 ‘포커페이스’는 악인에 가까운 것으로 치부되곤 했다. 연민을 잃은 채 위악한 미소를 짓는 표정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멀리하였다. 그만큼 우리는 얼굴이란 표면에 깊은 윤리적 믿음을 부여한다.

어쩌면 이 모두는 어디까지나 좋았던 옛날의 일이다. 거짓말탐지기처럼 부지불식간에 얼굴을 채우는 내면적 윤리의 색조는, 이제 사라졌거나 소멸하였다. 조금 젠체하는 철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얼굴은 이제 대자적인 것이 아니라 대타적인 것이 되었다. 얼굴의 표정은 자신이 자신과 맺는 윤리적인 관계를 드러내는 지표가 아니라 타인에게 어떻게 자신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하는지를 뽐내는 거울이 되었다. 우리는 타인의 낯을 읽고 그가 누구인지를 짐작하는 데 한참을 애써야 한다. 청문회장에 불려나온 이들은, 특히나 재벌 총수들은 소문에 따르자면 한참 동안 예행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그런 연습을 통해 조련된 표정을 지켜본다. 심란한 척, 비통한 척, 안타까운 척.

어느 날 느닷없이 악마처럼 변신하여 주변의 동료나 상사, 급우와 교사들을 살해한 살인마들에 대한 소식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무도 그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고 그의 얼굴 표정에서 그런 조짐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친근한 이웃이었고 다정한 친구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의 가슴에 도사린 악마를 꺼내 보이지 않은 사악한 인물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오늘날 수많은 마음의 과학자들이 능청스레 보급한 병명(病名) 중 하나처럼 분노조절장애에 빠진 측은한 병리적 인물이었던 걸까. 그렇지만 감정노동의 지독함을 고발하는 수많은 비명들이 말하는 것처럼, 삶의 쓰라림은 쾌활하고 명랑한 낯빛을 통해 감금되도록 선고받은 지 오래다.

환한 미소는 오늘날 누구나 명심하고 준수할 윤리적 행동방침 가운데 하나 아닌가. 긍정적인 삶의 자세, 적극적인 팀워크에 참여하는 태도는 어떤 불편과 불화의 기색도 금지한다. 역량평가와 성과평가라는 눈금은 얼굴의 표정을 정조준한다. 더불어 낯빛은 마음의 유리창이 아니라 마음의 벽이 되어버린다. 얼굴은 비위를 맞추고 타인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고통스런 노역의 장소가 되었다. 가짜 명랑함과 낙천성으로 얼굴을 마비시키며, 마음을 다스리고 분노를 조절하며 최적의 분량만큼 화를 배출하도록 가르치고 배우도록 다그치는 세계는 미친 세계이다. 분노한 자들이 수백만이나 모였던 주말 광장. 거기도 역시 웃음과 배려는 불문율이 된다. 파탄 난 정치를 만회하려는 시민의 시위는 거듭 질서 있는 축제로 치장된다. 굳이 축제라면 축제란 것의 알맹이일 카오스 상태는 빠진 김빠진 축제. 분노하고 항의하는 자들의 거대한 군집 속에서도 환하고 명랑한 낯을 짓고 마주해야 한다는 충고 앞에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던 건, 나뿐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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