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8호][칼럼] 올림픽의 정치학 (최철웅)

[경희대원보] 기고문

올림픽의 정치학

최철웅(카톨릭대 강사)

기록적인 무더위와 함께 여름밤을 수놓았던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리우 올림픽이 막을 내렸다. 이번 올림픽은 남미에서 최초로 개최된 올림픽이자, 최초로 난민 팀이 출전함으로써 지구촌 화합의 뜻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종합 8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나, 예년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4년여를 준비한 선수들의 땀과 열정의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어쨌거나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진 한여름 밤의 축제는 기나긴 열대야를 그나마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리우 올림픽을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올림픽이 더 이상 맹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이 동원되는 국가대항전이 아니라, 문화적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미디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올림픽 경기와 관련뉴스로 도배되었지만, 시민들이 느끼는 올림픽의 무게감은 예전 같지 않은 듯하다. 대체로 종합순위나 승부에 연연하기보다 경기 내용 자체와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이 더욱 화제가 되는 분위기다. 예컨대 ‘할 수 있다’ 신드롬을 낳은 펜싱 금메달리스트 박상영 선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이고, 그 축제에 맞춰 즐기려고 노력했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국가대표로서의 책임감이나 의무감이 아니라, 개인적인 즐거움과 성취를 앞세운 이 말은 올림픽에 대한 변모한 관념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이제 비로소 우리도 국제스포츠 경기를 통해 국위선양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데서 벗어나,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체험으로서 세계인의 축제를 즐기는 단계로 한발 나아간 것일까.

출처 : Sergio Moraes / Reuters

올림픽의 역사와 정치

개인적 취향에 따라 즐기고 탐닉하는 문화적 축제로서의 올림픽은 지난 몇 십 년간 자연스레 정착된 흐름이지만, 올림픽이 그 자체 정치의 장소이자 여러 정치적 사건을 수반했던 역사를 되새기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언론을 위시해 지식인들의 담론장에서도 올림픽의 정치성에 대한 언급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비단 ‘3S(Sports, Sex, Screen) 정책’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국제스포츠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함의와 정치적 맥락에 대한 비판은 올림픽 역사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가 올림픽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을 무시하고 순수하게 경기 자체에 몰두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미디어의 효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신의 기술력과 예술적 실험을 결합한 개회식과 폐회식의 스펙터클을 위시해, 약 2주 간에 걸쳐 우리에게 전달되는 이미지는 오직 경기장 내부의 모습뿐이다. 이 선택적 이미지들은 한편으로 지배계급은 물론 대중들이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들이기도 하다. 그 안에서는 순수한 열정과 경쟁의 드라마, 스포츠를 매개로 전 세계인이 하나가 되는 유토피아적 환상만이 상연된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물론 경기장 바깥의 사람들, 그리고 올림픽을 둘러싼 자본과 권력의 결탁과 같은 구조적 현실이다.

1896년 근대 올림픽을 창시한 쿠베르텡 남작은 올림픽 정신이 “승리보다 참가에, 성공보다 도전에” 의의를 두며, 이러한 원리는 무엇보다 “강하고 단호한, 무엇보다 더욱 신중하고 고결한 인간성의 건설”을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러한 자유주의적 이상은 실제 올림픽의 역사에서 한 번도 온전히 실현되지 않았으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완화되기는커녕 갈수록 더욱 커지고 있다. 올림픽의 역사는 당대의 정치적·사회적 맥락에 의해 늘 규정되어 왔는데, 제 1회 아테네 올림픽부터 이미 노동자와 여성이 배제된 올림픽이었다. 그리하여 1925년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최초의 ‘노동자 올림픽Worker’s Olympiads’이 개최되기도 했다. ‘사회주의 노동자 스포츠 국제협회’에서 조직한 이 올림픽은 19개국에서 15만 여명이 참가해, 같은 해 3,000여 명의 선수들이 출전한 제 8회 파리 올림픽에 비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남성과 여성, 어린이를 위시해 누구에게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하고, 대중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국제적인 집단 운동들을 도입한 덕분이었다.

그 후로도 올림픽은 나치즘의 사례에서 보듯 집단적인 선전과 동원수단으로 활용되거나, 냉전 시기에 보듯 체제경쟁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20세기 내내 정치적 갈등의 중심이던 올림픽은 20세기 후반 들어 상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자본이 점차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공식 ‘파트너스’와 ‘스폰서’ 등의 명목으로 기업들과 계약을 맺는데, 리우 올림픽에서만 그렇게 해서 쓰인 금액이 약 12조 원 규모라고 한다. 미국의 NBC는 리우 올림픽에 대한 독점 중계권료로 IOC에 1조4천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액수를 지불했으며, 이미 광고수입만으로 1조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들어 올림픽은 부동산 개발업체 및 그에 관련된 투자자본의 이익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전 세계의 관광객을 유치하여 지역의 경제개발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기존 도심지의 재개발과 철거, 경기장과 도로 건설 등 대대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이제 올림픽 유치의 명시적인 목적이 되었다. 그리고 자본이 주도하는 여느 도시개발이 그러하듯, 이러한 과정은 수많은 거주민을 폭력적으로 쫒아내고 지역공동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화합의 축제 또는 배제의 게임

브라질의 테메르 대통령 권한대행이 리우 올림픽 개회식 연설을 진행하는 동안 마라카낭 주 경기장을 가득 메운 브라질 관중들은 일제히 야유를 쏟아냈다. 테메르 권한대행은 정국 운영상의 과오에 더해 부패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브라질 시민들의 저항은 단지 테메르 권한대행에 대한 불만을 넘어, 리우 올림픽 자체를 향하고 있다. 올림픽 개최 전부터 올림픽 반대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그 주요 의제는 주택부족과 강제철거 문제에 맞춰졌다. 리우가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2009년 이래 경기장 및 관련시설 건설을 이유로 빈민계층의 거주지인 파벨라(favelas)에 대한 강제철거가 진행되었고, 7만 7천여 명의 주민들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 파벨라의 고질적인 범죄문제에 반-올림픽 시위가 결합하면서 올림픽을 전후해 8만 5천명의 경찰들이 리우 시내에 배치되었는데, 이는 2012년 런던 올림픽의 2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Jules Boykoff / Jacobin

올림픽은 전 세계인들이 모이는 국제적인 행사라는 점에서 언제나 ‘예외상태’를 허용한다. 그리하여 평소라면 주민들의 저항과 반발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대대적인 도시개발과 억압적인 치안활동이 용인되곤 한다. 경기장과 레저시설 등의 건설은 납세자의 돈으로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에 다름 아니며, 억압적인 치안활동은 정당성이 취약한 정권에게 대중통제의 기회를 부여한다. 리우의 경우 올림픽을 통해 재정지출을 대폭 늘려 경제침체를 벗어난다는 계획은 부자와 기업들을 위한 도시개발로 귀결되었고, 그로 인해 빈곤층 거주지에 대한 철거와 필수적인 서비스에 대한 재정지출의 축소를 동반했다. 지난 6월 4일 리우 국제공항에서 임금이 5개월 체불된 경찰들과 소방관이 “Welcome to Hell”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시위를 벌인 것은 이러한 사정을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올림픽의 이상은 평화로운 세계와 사회적 통합, 인간의 존엄성 등의 가치를 내세우지만, 역사적으로 올림픽이 거주민들에게 가져다 준 것은 늘 그 반대였다. 전 세계 관광객들의 환상을 충족시킬 경기장과 주변 환경 조성을 위해 폭력적인 철거가 강제되고, 사회 내의 빈곤층과 노숙자들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올림픽 경관’을 위해 추방된다. 이번 리우 올림픽에서 최초로 구성된 난민 선수팀이 열렬한 환영을 받는 가운데, 수많은 ‘내부 난민들’이 생성되었다는 사실만큼 이러한 모순을 잘 드러낸 경우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해 블룸버그의 한 저널리스트는 “파벨라의 전 거주민들이 2020년 도쿄 올림픽에는 난민팀으로 초청받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우리가 올림픽을 통해 인간성의 진보를 발견하고 감동받는다면, 그것은 이러한 배제의 현실에 눈감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전 세계인의 평화와 화합의 장이라는 올림픽의 이념은 유토피아적 이상을 규범적으로 표현하는가, 실제 벌어지고 있는 배제의 현실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하는가. 올림픽으로 인해 배제되고 억압받는 이들이 꾸준히 생성되는 한, 이러한 질문은 결코 유예되거나 외면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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