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8호][칼럼] 선물하는 법을 잊은 세계 (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선물하는 법을 잊은 세계

서동진(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한가위가 코밑이다. 동네 마트엘 가면 입구부터 점령한 추석선물세트가 빼곡하다. 올 추석 선물로는 한우보다 건강식품이 더 인기가 높다는 둥, 택배회사들은 늘어난 주문 때문에 비명을 지른다는 둥 법석이다. 그리고 역시 잊지 않고 김영란법이 등장한다. 공직자가 직무관련성 없는 금품이나 향응을 받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 도덕률이 잘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공직자가 사적 이해에 휘둘려 공적 업무를 수행하는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는 전연 틀릴 게 없다. 그럼에도 김영란법이 그저 청렴한 공직자 기강을 보장하려는 조처이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겠느냐는 찜찜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독일 철학자 아도르노가 미국에 머물며 쓴 에세이 모음집인 <미니마 모랄리아>를 읽다 보면 선물에 관한 신랄한 비평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선물 행위는 받는 사람의 기쁨을 상상하는 기쁨”이며 “자신의 길에서 빠져나와 시간을 써가면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 즉 타인을 주체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당연히 그가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은 바로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 모두 사라지고 없음을 고발하기 위함이다. 물론 그가 이제 선물하는 이보다 대가성 금품이라는 뇌물을 주는 이들이 더 많은 세태를 따지려는 것은 아니다. 그가 힐난하는 것은 외려 선물가게이다. 그는 선물용 상품의 목록을 마련하고 이를 뻔뻔스레 진열하고 판매하는 것이 끔찍하다고 말한다. 그가 걸핏하면 써먹는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을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 객체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선물가게의 선물의 효력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가 다시 살아나 부활절을 전후한 미국의 어느 월마트에 들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짐작이 간다.

뇌물은 타락한 선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기부와 쌍벽을 이룬다. 오늘날 비참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미덥고 평화로운 수단으로 칭송받는 것은 단연 기부다. 기부는 고통받는 자들이 어떻게 좋은 세상을 수립할 수 있을지를 상상하는 대신, 그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지 못하는 고통받는 사물처럼 여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긴급한 구호품일 뿐이라는 생각은 그들이 연루된 세계를 감추기에 나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음이 분명한 세상을 만드는 자들로서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점에서 더욱 나쁘다. 기부는 선물을 주는 자에게 이미 준비된 칭찬 한마디를 남겨줄 뿐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공인된 선행을 했다는 가벼운 인정이다.

기부가 나쁜 선물이라면 뇌물은 최악의 선물일 것이다. 그것은 사물이 가진 능력을 완벽히 제거한다. 마음으로는 모두 하지 못하는 것, 말로는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위해 선물은 동원된다. 더 친절하고 더 잘 대해주고 더 마음을 쓰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는 것을 말로 하는 것은 어쩐지 어색하다. 엄청난 일이라도 일어난 듯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때 나의 따뜻한 내면을 사물의 온기가 떠맡게 된다. 선물을 줄 때 나는 내면의 한 조각을 슬그머니 들춰내는 것이다. 그것이 선물이라는 사물의 능력일 것이다. 뇌물에게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뇌물은 직접 말하는 대신 에둘러 뒤를 잘 봐달라는 요구를 전한다. 그것은 사물이 가진 온전한 능력을 박탈한다. 사물의 뒤는 사라진다. 뇌물이 되지 않기 위해 선물은 3만원인지 5만원인지 하는 가격 심사를 받아야 한다. 김영란법은 선물과 뇌물의 차이를 알려주는 게 아니라 선물이 사라진 세계를 얼핏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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