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8호][칼럼] 사드, 한류, 청년 (이명원)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사드, 한류, 청년

이명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사드 배치 문제로 동아시아가 요동치고 있다. 예측할 수 없는 여러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이 높지만, 아시아 청년들의 소통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다.

강의실에서 제법 많은 유학생을 만나왔다. 구미의 유학생도 있었지만, 다수는 범중화권 학생들이었다. 중국은 물론 마카오와 홍콩 같은 일국양제의 이행과 혼돈을 겪고 있는 학생들. 중국과 미묘한 대타의식을 갖고 있는 타이완(대만) 학생들. 동북3성 출신의 조선족 학생들. 한국 내의 화교로 중국이나 타이완 정체성을 보존해온 학생들이 생각난다. 부친은 중국, 모친은 몽골 국적의 학생 등 그 범주는 생각 외로 다양했다.

그럼 이토록 다양한 범중화계 학생들은 어찌하여 한국의 대학에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게 되었는가. 직접 대화를 해보면 동기는 다양하지만, 한국에 대해 친밀성을 갖게 된 극적 계기 중 하나가 이른바 ‘한류’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살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국적이 상이한 학생들과 소통하기 위해 나는 간혹 이른바 고전 격에 해당하는 문학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말할 때가 있다. 중화권의 학생들에게는 한국에도 잘 알려진 루쉰의 <아큐정전>이나 <광인일기> 등을 소재로 이야기하곤 한다. 일본 학생들을 만나면 나쓰메 소세키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일단 학생들은 선생이 자신의 문화적 전통의 일부를 거론하는 것에는 호감을 표시하지만, 작품 자체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본 경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21세기 디지털 시대니까. 한국 학생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고전들을 읽어보지는 못했고 이름 정도만 알 뿐이다. 당연히 이런 한국 학생들에게 중국이나 타이완은 인식의 차원에서는 완전히 빈 공간이다. 홍콩이나 마카오의 특수상황은 이해할 수 없다.

반면, 동방신기나 배우 전지현, 멋진 아이돌 그룹이나 걸 그룹에 대해서는 유학생이나 한국 학생이나 적어도 5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정보와 친밀성을 확보하고 있다. 유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서 한류는 ‘문화적 공통어’와 유사하다. 비유컨대 공통문법인 것이다.

문학은 그런 사례가 있는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들이 실제로 읽었든 그렇지 않든, 국적이 다른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었다. 흔히 오해되듯 이것은 하루키 문학의 무국적성 때문이 아니다. 고도성장 이후 사회변동의 혼란을 경험하고 있는 청년들이,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메트로폴리스 안에서의 고독과 부조리 감정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로 중국 내 한류가 인위적으로 통제되는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 정부 뒤에서 뒷짐진 미국의 공세에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압박 카드라는 점에서는 이해되지만, 이것은 한국이나 중국 또는 아시아의 공존과 협력을 생각할 때 지혜로운 조처는 아니다.

나는 사드가 한국에 배치되지 않기를 바란다. 동시에 문화에 대한 국가 통제가 외교적 응징의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가령 일본에서의 ‘혐한류’의 편재화는 한국에 대한 위협이 아니라, 일본 사회의 전반적 퇴행을 심화시키는 데 오히려 일조했다.

한류는 한국의 대중문화에서 출발했지만, 이미 아시아의 청년들에게 문화적 공통어의 기능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 문화가 아니다. 한류는 청년들 입장에서는 네이션의 차이를 뛰어넘어 타자들과 극적으로 만나게 하는 친밀성과 개방성의 통로다. 아시아인들에게 루쉰의 문학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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