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1호][편집회의] 제 81차 편집회의 사진

제 81차 편집회의의 열띤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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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신간안내] 『문화/과학』 83호

83호를 발간하며

만약 중고등 교육과정 교과목 중 ‘페미니즘’ 혹은 ‘젠더학’ 같은 게 생긴다면, 그 교과서에 2015년 여름은 분명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될 게다. 그 교과서가 미국 것이라면, 해당 지면에는 환호하는 시민들의 모습과 함께 ‘동성결혼 합법화’라는 전기적(轉機的) 사건이 서술되겠지만, ‘헬조선’이라는 별칭을 가진 남한의 것이라면 사정은 매우 다르다. 그 역사는 ‘여성혐오의 시대’ 혹은 ‘역풍(backlash)의 시대’라는 장 제목 하에 유명 연예인과 칼럼니스트의 여성혐오 발언, 온라인공간에서 촉발된 여성혐오적 신조어들, 퀴어퍼레이드에 반대한다며 도로에 드러눕는 일부 개신교도들, 줄이어 고발되는 남성 진보인사들의 데이트폭력, 메르스갤러리와 미러링(mirroring),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 여성을 성기로 환유하는 랩 가사가 특정 음악의 관행으로 일컬어지는 사태, 성추행을 거듭해도 처벌되지 않는 교수와 정치인들, OECD 가입국가 중 수위를 기록한다는 여성대상 강력범죄율 같은 세목들로 꼼꼼하게 채워질 것이다.

물론 가까운 시일 내에 그런 과목들이 생길 것 같지 않고, ‘국사’ 교과서에서라면 더더욱 이런 일들이 ‘(대문자)역사 서술’의 대상으로 언급될 리 없으니 이 모든 생각은 그저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이 골몰하는 주제들이 한갓 ‘추문’이나 ‘스캔들’로 치부돼온 유구한 역사를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스트들이 기획‧참여한 각종 매체들의 ‘여성혐오’ 혹은 ‘페미니즘’ 특집 및 단행본들이 이례적으로 쏟아진 최근의 현상은 어쩌면 ‘절규’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이 사태를 제대로 의미화하지 않을 것이기에, 누군가는 ‘지금-여기’를 기록하여 인식과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긴급함과 절박함이야말로 이들로 하여금 그토록 열렬히 말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다시’ 페미니즘을 생각하자는 제안은 지루한 성 대결의 반복이나, 모든 사태를 생물학적 성(性)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쯤으로 간주돼서는 곤란하다. 아니, 페미니즘은 그런 것과 무관하다. 페미니즘은 언제나 누군가에게는 이념이자 운동, 혹은 존재방식 그 자체를 결정‧지탱하는 인식론이었으며, 급격히 보수화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폐색과 퇴행을 막기 위한 유력한 가능성이자 대안적 패러다임이기도 하다. 『문화과학』 83호의 특집을 ‘페미니즘 2.0’으로 정한 것도, 그 ‘탐험’ 혹은 ‘모험’에 가까운 성찰과 실천에 기꺼이 동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페미니즘’ 자체가 혐오나 희화화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만큼 극도로 폐색된 담론지형 내에서 우리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컨대, 우리가 상상한 ‘페미니즘 2.0’의 언어는 이런 것이었다. 눈앞의 혐오와 폭력에 붙들려 ‘계몽’과 ‘(반)비판’만으로 에너지를 소진하거나 퇴행하지 않을 것, 페미니즘을 부분운동으로 국한‧고립시키는 기왕의 오해와 거리를 두면서 페미니즘 논의를 일신 혹은 (재)활성화시킬 것, 페미니즘의 역사성과 정치적 가능성을 급진화할 것, 페미니즘을 둘러싼 국내 안팎의 현상과 담론, 이론과 실천들을 두루 다룰 것, 현재 페미니즘 지형에 상관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여러 흐름의 참여적 가능성 및 그 조건으로서의 미디어환경을 고민할 것. 요컨대, 우리는 ‘페미니즘 2.0’이 기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유지‧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흐름을 일으킬 수 있는 ‘확장과 전환, 참여와 가능성’의 이름이기를 바랐다. 물론, 페미니즘의 이런 노력은 한 번도 멈춘 적 없기에, ‘페미니즘 2.0’은 기실 ‘페미니즘 54978.0’쯤으로 읽혀도 무방하다.

그런데 ‘페미니즘 2.0’을 이렇게나 많은 조건과 단서들을 충족시켜야만 하는 ‘완전체’로 상상한다면, 발화할 용기는 좀처럼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문화이론전문지’라는 『문화과학』의 확고한 정체성도 때로는 방해가 된다. 이번에는 아직 이론화되지 않은, 혹은 이론화를 거부하는 페미니즘의 역동(dynamics)을 포착하는 게 더 시급했다. ‘페미니즘 2.0’ 기획이 완전무결한 이론에의 강박을 버리고 ‘질문’과 ‘감행’의 언어이기를 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하여 『문화과학』 83호 ‘페미니즘 2.0’ 특집은 페미니즘의 여러 부면을 고유의 관점에 따라 조망‧분석한 네 편의 글들로 구성됐다. 이 기획의 총론으로 읽혀도 좋을 손희정의 「페미니즘 리부트―한국영화를 통해 보는 포스트-페미니즘, 그리고 그 이후」는 2015년을 ‘페미니즘이 리부트(reboot)된 획시기적 시간’으로 과감하게 규정하며, 기존 페미니즘과 ‘포스트-페미니즘’ 간의 접속과 단절의 문제를 다룬다. 이 글에서 ‘포스트-페미니즘’이란, ‘페미니즘은 이미 성취됐다’라는 성급한 진단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투항함으로써 오히려 반페미니즘적 효과를 촉발하는 일련의 경향을 가리키는데, 그것이 기존 페미니즘으로부터의 수혜를 통해서 가능했다는 점은 논자에게 ‘가능성’이자 ‘한계’로 읽힌 듯하다. 여성캐릭터의 범람과 소멸, 소비자로서의 ‘여성관객’이 지니는 정치적 가능성과 신자유주의적 여성성 등 이 글에서 제시하는 1990~2010년대 한국영화(사)의 주요 화두들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독해된 문제적 징후들이다. 무엇보다 오늘날 페미니즘이 “신자유주의적 소외와 파편화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는 우려 섞인 통찰은 이 글에서 가장 섬세한 음미를 요청하는 대목이다.

근현대 동아시아 젠더(사) 연구자인 류진희의 「‘무기 없는 민족’의 여성이라는 거울―해방 전후 탈/식민 남성성과 여성혐오를 단서로 하여」는 ‘여성혐오와 군사주의’라는 주제의 역사성을 추적한다.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식의 언사나, 최근 부상하는 남성성이 군사독재시절의 그것이라는 점은 애당초 (탈)식민과 건국의 과정에서 여성이 타자화돼온 역사와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것이 이 글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이다. ‘문약(文弱)’과 ‘문청(文靑)’은 식민과 냉전의 동아시아적 전개과정에서 (탈)식민 남성 스스로 제출한 트라우마적 자기표상이었다는 통찰과, ‘모던 걸’ 혹은 ‘국치랑(國恥娘)’이라는 여성혐오적 호명을 통해 여성을 ‘식민화’와 ‘반건국’의 표상으로 고정시키려 했다는 분석은 오늘날의 여성혐오에 각인된 역사적 (무)의식이 무엇인지 짐작케 한다. 여성혐오의 숨겨진 역사적 계기와 결절들을 탐색한 이 글의 문제의식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심화에 따른 남성의 패배의식’만을 여성혐오의 근본원인으로 지적해온 기왕의 논의를 일신하는 데에 중요한 참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전 세계적 퀴어이슈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지속해온 한주희의 「퀴어정치와 퀴어지정학」은 한국과 미국에서 전개된 (안티)퀴어운동의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정치적‧문화적 양상을 추적한 이채로운 글이다. 이 글은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주도한 한인 이민자 커뮤니티의 동성애혐오운동이 지닌 정치적 함의를 섬세하게 읽어냄으로써 디아스포라 정치, 입법투쟁의 의의와 한계, 초국가적 군사주의를 공유하는 한국과 미국의 지정학적 프레임, ‘포용과 융합’이 아닌 ‘거부와 변환’의 정치 등을 퀴어정치의 중요한 변수로 도입하여 고려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비단 미국의 퀴어정치 담론지형 내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우파와 충돌하면서 성장해온 한국 퀴어정치의 곤경과 전망을 사유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리라고 판단된다.

페미니즘 진영에서 제출된 정치경제학 비판을 재독해한 정정훈의 「페미니즘 이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다시 생각한다―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의 전화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페미니스트 자본주의 분석을 읽기」는 페미니즘과 맑스주의의 주제를 분리적으로 사고하는 오래된 통념을 뒤집기 위한 비판적 시도다. 이 글은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이 근본적으로 맑스주의의 근본논리인 잉여가치론과 재생산노동에 대한 비판적이고도 급진적인 해석이라는 점을 마리아 미즈, 실비아 페데리치, 캐서린 문과 이진경의 논의를 경유해 요령 있게 정리해낸다. 위계화된 성적 분할과 여성의 탈역량화(depowerment)야말로 “자본주의체제 자체의 재생산을 떠받치는 은폐된 근간”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페미니즘 정치경제학 비판의 핵심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달과정이 기실 기지촌성매매나 기생관광업, 농촌 하층여성의 노동력 동원 등 성별 권력관계에 근거한 여성노동의 은폐와 가치절하에 의해 가능했다는 점은 이를 단적으로 증명하는 의미심장한 사례일 것이다.

‘문화현실분석’ 역시 ‘페미니즘 2.0’ 특집의 연장으로, 최근의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된 현상 및 담론, 텍스트들을 분석한 다섯 편의 글을 실었다. 2015년 5월에 열린 제17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오픈토크 후기인 조혜영의 「낙인, 선언 그리고 반사―“#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는 최근 트위터에서 벌어진 ‘페미니스트 선언’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다룬다. 페미니스트 선언의 개인적 동기와 역사적 함의 및 그 정치적 가능성을 두루 살피면서도, 소셜미디어가 진정한 ‘광장’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 ‘선언의 선명성’을 위해 강요되는 문제의식의 단소화 등은 계속 생각해봐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듯하다.

근현대 대중서사의 젠더정치를 연구해온 조서연은 「‘진짜 사나이’와 ‘여자군인’, 신자유주의시대의 젠더화된 군사주의―MBC 예능 <진짜 사나이-여군 특집>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대중미디어의 ‘여군 재현’에 잠복해 있는 군사주의와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논리의 조우를 포착해낸다. 특히 <진짜 사나이―여군 특집>이 “병역이라는 ‘의무’의 도덕화” 논리를 그대로 체현하면서도 정작 ‘왜 총을 들어야 하는지’, ‘군사훈련을 통해 획득되리라고 예상되는 가치는 왜 필요한지’ 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묻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초남성적 공간에서의 여성재현’은 필연적으로 젠더의 수행적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는 지적은 깊이 새길 만하다.

‘커밍아웃’을 매개로 동성애(자)의 재현과 가시화의 문제를 다룬 김경태의 「벽장 밖으로 나온 동성애자들, 브라운관에 갇히다」와 서동민의 「‘동성애자 친구’가 범람하는 시대에 나는 왜 커밍아웃하지 못하는가」는 함께 읽히면 더욱 좋겠다. 김경태가 TV드라마의 동성애 재현을 매개로 ‘사회순응적 커밍아웃’으로 인해 휘발되는 커밍아웃의 정치성을 문제 삼는다면, 서동민은 그럼에도 여전히 ‘가시성’에 천착함으로써 존재를 증명해야만 하는 성소수자의 곤경을 역설한다.

최근 범람하는 ‘쿡방’의 소구력과 문화정치적 함의를 분석한 류웅재의 「쿡방의 정치경제학―주체의 자기통치의 관점에서」는 ‘쿡방’이 기존 힐링 및 자기계발 문화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삶정치’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쿡방’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사회에서 개인의 정서를 위무하고 삶의 안정성에 천착하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음식’을 둘러싼 생산양식과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될 때에야 보다 유의미한 문화적 콘텐츠로 기능할 수 있으리라는 제언이다.

 

이번 83호의 또 다른 ‘기획’에서는 최근 문학장을 비롯한 지식인 공론장 전반의 쇄신에 대한 논의로 확장되고 있는 ‘신경숙 표절논란’을 다뤘다. 이와 관련해 문화연대는 <최근의 표절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신경숙 표절사태와 한국문학의 미래>라는 제하에 두 차례의 긴급토론회를 한국작가회의와 함께 개최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첫 번째 토론회에서 발표됐던 세 편의 글을 수정‧보완해 실었다. 이명원의 「신경숙의 표절의혹을 둘러싸고―사실, 진실, 맥락의 문제」, 오창은의 「베껴쓰기, 혹은 필사(筆寫)의 파국―신경숙 표절사건과 한국문학의 폐쇄성 비판」, 심보선의 「생태계로서의 문학 VS 시스템으로서의 문학」이 그것이다. 이명원과 오창은이 각각 ‘돈과 패거리권력’ 혹은 ‘출판상업주의와 문학권력의 폐쇄성’을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으로 지적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면, 심보선은 이번 일을 계기 삼아 ‘한국문학의 신격화’와 ‘비평만능주의’를 탈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경숙 표절논란’에는 이밖에도 많은 논점들이 잠복해 있을 테지만, 일단 이번 호의 논의는 이렇게 출발시킨다. 독자들의 생산적인 제언을 기대한다.

이번 크로스서평 코너에서는 『맑스와 마음의 정치학』(심광현)과 『예술인간의 탄생』(조정환)이라는 두 책의 저자에게 교차서평을 부탁해 실었다. 조정환은 심광현의 저작을 ‘현재의 자본주의적 주권체제를 극복하고 코뮌적 ‘생태문화사회’라는 새로운 사회로 이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진지한 지적 시도’로 읽으면서도, ‘비환원주의적 시차적 접근법’, ‘코뮤니즘’ 개념의 이해, ‘마음의 정치’로의 귀결 등에 대해서는 비판적 의견을 개진한다. 반면, 심광현은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적 발전으로부터 ‘새로운 인간상(다중-예술가)’을 이끌어내려는 조정환의 시도에 공감하면서도, ‘예술인간의 탄생’이라는 명제의 추출과정, ‘금욕주의적 자기배려’가 대중의 ‘삶미학’으로서 가지는 타당성, ‘이미지노동’ 개념의 이해 등에 의문을 제기한다. ‘크로스서평’이라는 이 특별한 시도를 통해 독자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저작을 탐독해온 두 저자의 공통 관심사는 물론, 첨예한 입장 차이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세월호참사 500일을 전후한 지금, 세월호참사 1주기에 『금요일엔 돌아오렴』 ‧ 『세월호를 기록하다』 ‧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라는 세 권의 책을 매개로 제12회 북클럽에서 오간 말들을 읽는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다. ‘기록, 애도, (무)책임, 연대, 국가‧사회‧언론, 머무름과 나아감’ 등의 키워드들을 벌써 500일 넘게 되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뼈아프다. 특히 “상황이 바뀌면 자기가 있는 곳에서 떠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한국사회는 ‘이민사회’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후지이 다케시의 말이 인상 깊다. 우리는 내년에 또 광화문광장에 모여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동아시아문화연구’ 코너에는 박자영 편집위원의 번역으로 지난해에 발표된 왕후이(汪暉) 교수의 「두 종류의 신빈민과 그들의 미래―계급정치의 쇠락과 재형성, 신빈민의 존엄의 정치」를 수록했다. 논자는 21세기 중국에 새롭게 출현한 도시의 뉴 푸어와 ‘농민공(農民工)’이라고 불렸던 비정규노동자를 각각 ‘신빈민’과 ‘신노동자’로 지칭한다. 이 두 집단의 출현배경과 상호관계에 대한 분석을 통해 노동자국가의 실패와 대표성의 문제를 구명하는 이 글은 “새로운 평등정치”를 사유하는 모든 이들에게 중요한 참조가 될 것이다.

‘이론의 재구성’ 코너에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면역적 민주주의」를 김상운 선생의 번역 및 「면역, 공동체, 민주주의 :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라는 해제와 함께 소개한다. 면역과 공동체, 민주주의의 문제를 통어하는 에스포지토의 사유는 최근 메르스 사태로 촉발된 바이러스와 면역체계, 의료생명과 정치의 관계를 사유하는 데 유력한 이론적 지반이 될 것이다.

끝으로, ‘공간성, 육체성, 정동’ 등의 키워드들을 중심으로 한국 문학 및 영화를 연구해온 박현선 선생이 본지 편집위원으로 합류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박현선 선생의 폭넓은 관심사와 날카로운 문제의식 덕분에 더욱 깊고 풍요로워질 『문화과학』을 기대해본다.

 

여느 때보다도 뜨겁게 불탔던 2015년 여름이 이렇게 지나간다. 돌아오는 가을에는 ‘폭력’과 ‘혐오’ 대신 ‘성찰’과 ‘연대’라는 새로운 주체화의 열정이 만발하기를. 제발.

 

2015년 8월 서울에서

편집위원 오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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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칼럼] ‘쿡방’이란 무엇인가(문강형준)

‘쿡방’이란 무엇인가 (문강형준)

 

 

1.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먹을 것은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길을 걸어 다니면서 음식을 먹으면 ‘복 달아 난다’고 꾸중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뭔가를 먹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혹시 음식을 먹게 되더라도 소리 없이 안 먹는 것처럼 먹는 게 하나의 배려였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드라마, 예능, 교양을 막론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며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을 타고 전국에 방영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열광한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이용자들은 자기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고, 개인 인터넷방송 BJ들은 유저들의 요구에 따라 카메라 앞에서 음식을 먹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영화 등에서 연예인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캡쳐’ 되어 인터넷을 떠돈다. 소위 ‘먹방’ 열풍이다.

지금 유행하는 ‘쿡방’은 ‘먹방’의 변주다. 먹방이 음식을 먹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쿡방은 그 음식을 만드는 상황에 집중한다. 포맷은 단순하다. ‘셰프’라 불리는 요리사가 등장하여 음식을 만들고, 카메라가 그 과정을 샅샅이 보여주고, 만든 음식을 함께 먹으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먹방은 여전히 등장하지만 현재의 대세는 쿡방이다. 먹방에서 쿡방으로 이동한 셈이지만, 많은 쿡방이 먹방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요리하기와 먹기’를 핵심요소로 하여 최근 1-2년 새 교양-엔터테인먼트 방송 전체의 우세종이 되어버린 이 포맷의 흥행을 ‘쿡방’ 현상이라고 통칭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2.

 

쿡방 현상에서 우선 특기할 것은 그것이 ‘쿡’이라기보다는 ‘방’이라는 점, 곧 쿡방의 핵심은 실제로 요리를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요리하는 모습이 ‘방송’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쿡방의 핵심 감각은 음식을 맛보는 미각이나 음식 냄새가 나는 후각이 아니라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는 감각, 즉 시각이다. 쿡방의 난립을 비판하며 그것을 ‘음식 포르노’(food porn)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포르노그래피가 진짜 섹스가 아니라 성적 감각의 최대화를 위해 마련된 진부한 상업적 서사이자 오직 시각으로만 가능한 장르이듯, 쿡방 역시 그렇다. 포르노그래피와 에로스의 차이를 말해보는 건 어떨까. 포르노그래피가 시각의 자극을 통한 이윤창출인데 반해, 에로스는 오감 전체를 통해 정신과 육체가 사랑을 느끼는 데 있다. 포르노그래피가 성욕을 돋우기 위해 진부한 ‘스투디움’(studium)으로 가득 찬 ‘콘텐츠’라면, 그래서 아무리 기를 써도 사실은 안전하고 평균적이라면, 에로스는 가만히 있고 싶어 하는 나를 찌르고, 위험하게 하는 ‘푼크툼’(punctum)이다. 포르노그래피의 모든 성관계가 깨끗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지듯, 쿡방 역시 그렇다. 그곳의 음식에는 대개 실패가 없으며, 언제나 먹음직스럽고,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 에로스가 상대방과의 위태로운 감정의 교차이자 일상의 ‘찌질함’까지도 포함하는 진실의 영역이듯, 실제의 요리 역시 그렇다. 아름다운 요리에는 지저분한 음식 찌꺼기가 남고, 땀 흘리는 노동이 동반된다. 쿡방에는 깔끔하게 포장된 아름다움만 있고, 찌꺼기도 노동도 보이지 않는다. 미디어 기사들이 진부하게 분석하듯 쿡방은 직접 밥을 해먹고 요리를 해먹는 이들을 창출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앉아서 즐거워하며 혹은 기계적으로 텔레비전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하나의 ‘방송 포맷’에 불과하다. 쿡방과 같은 계열에 있는 것은 화가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송이나 가수가 되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한 이들의 노래를 보여주는 방송이다.

 

3.

 

예전에도 ‘요리 프로그램’은 텔레비전에 고정적으로 편성되었다. 주로 아침 방송에서 ‘요리 연구가’들이 나와 사회자의 보조로 조용히 음식을 만들고, 영양을 설명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은 언제나 있었다. 지금의 쿡방은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과 다르다. ‘요리 연구가’라는 아마추어적인 명칭은(그것은 ‘종이접기 연구가’ 혹은 ‘분재 연구가’ 등을 연상시킨다) 이제 ‘셰프’(chef)라는 전문가적 명칭으로 바뀌었다. 요리 연구가가 대체로 40-60대의 여성이었다면, 셰프는 대개 30-40대의 젊은 남성이다.

‘요리 연구가’에서 ‘셰프’로의 변화는 전통적이고 한국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더 이국적이고 서구적이고 고급스러운 것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명칭의 변화는 기실 한국의 다른 문화들에서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예컨대, 아이돌 가수의 이름은 어떤가. ‘김시스터즈’, ‘소방차’,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나인뮤지스’, ‘슈퍼주니어’, ‘원더걸스’로의 변화. 혹은 ‘대한주택공사’와 ‘한국도로공사’에서 ‘LH공사’와 ‘ex’로의 변화. 혹은 ‘럭키금성’과 ‘선경’에서 ‘LG’와 ‘SK’로의 변화. 무엇보다도 아파트 이름의 변화가 독보적이다. ‘우성아파트’나 ‘일신아파트’에서 ‘롯데 캐슬’이나 ‘마포 오벨리스크’, ‘대우 트럼프타워’로의 변화. 더 크고, 더 높고, 더 서구적이며 고급스러운 것에 대한 갈구가 여기에 있다. 머리를 곱게 말아 올리고 시어머니로부터 요리를 ‘전수’받았던 어머니 같은 중년의 ‘요리 연구가’는 이제 최신 헤어스타일에 멋진 의상을 입고 마치 마술을 하듯 소금을 뿌려대는 ‘셰프’로 바뀌었다. 셰프들이 대개 프랑스나 이탈리아, 미국의 유명 요리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인 것은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있다(당연히 우리는 여기에서 ‘국내 박사’를 제치고 대학에 자리 잡는 ‘외국 박사’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셰프들 중 ‘강레오’나 ‘에드워드 권’ 같은 이름이 보이는 것도 그래서 자연스럽다. ‘요리 연구가’들이 주로 종가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달리 방송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셀러브리티 ‘셰프’들은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체인을 가지고 있는 ‘사업가’이다. 쿡방에서의 인기는 자신이 책임질 수도 없는 가공식품들의 모델료, 나아가 레스토랑 매출로 이어진다. ‘요리 연구가’에서 ‘셰프’로 변하면서 우리는 요리를 고급스러운 ‘디시’(dish)로 보게 되었고, 그만큼 요리는 예술이자 지식-비즈니스 영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요리 연구가’에서 ‘셰프’로의 변화는 요리를 둘러싼 한국 대중문화의 성적 분할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자’ 요리 연구가에서 ‘남자’ 셰프로의 변화는 일견 음식 만들기라는 가사노동의 영역에 남성들이 진입하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의 ‘2015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조사에 따르면 2014년 현재 한국 여성이 음식준비와 청소, 세탁 등에 쓴 시간(‘가정관리 시간’)은 하루 2시간 27분으로 31분인 남성보다 1시간 56분 많았다. 여성의 가정관리 시간은 2009년에 비해 불과 2분 줄어들었고 같은 기간 남성의 가정관리 시간은 ‘무려’ 2분이 증가했다. 한국에 비해 캐나다는 남성의 가정관리 시간이 2시간 10분(2010년 조사), 호주는 1시간 55분(2006년), 영국은 1시간 40분(2005년), 미국은 1시간 36분(2013년) 등 모두 1시간 30분을 넘는다. 한국 남성의 가정관리 시간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중 최하위권이다. 요리를 포함한 가사노동에 쏟는 평균적 한국 남성의 시간과 텔레비전에서 음식을 만들며 종횡무진하는 남성 셰프들 및 남성 연예인들의 난립 간의 격차는 현실과 이미지의 격차다. 요리하는 남성은 여전히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일종의 가상이다. 이 가상은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의 주된 시청자들인 여성들이 갈구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리하는 남성의 이미지는 가사노동에 힘쓰지 않는 현실 속 배우자의 이미지와 반대편에 놓인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섹시’하며, 현실을 넘어선 곳에 있는 욕망이기에 ‘섹시’하다. 그것은 가사노동을 남성과 함께 분담하길 원하는 여성들의 간접적 아우성이다. 방송 속의 섹시한 가상은 즐기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다시, 현실의 성별화된 노동을 상기시킨다. 쿡방이 만들어내는 요리하는 남성 이미지는 실제 일상의 가사노동을 거의 책임지다시피 하는 여성의 노동을 지운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스쳐지나가기에 ‘섹시’하다. 섹시하지 않은 노동은 여성들의 몫이다. 여전히 서민 주택가의 ‘김밥천국’과 뼈 해장국집을 비롯한 대부분의 음식점 주방은 ‘아줌마’들로 채워져 있으며 이 ‘아줌마’들 중 다수는 조선족이다. ‘차줌마’는 이 ‘아줌마’들을 대체할 수 없다. ‘요리’를 만드는 쿡방은 ‘음식’을 만드는 현실의 여성노동을 화려하게 가린다.

 

4.

 

물론 쿡방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셰프들인 것은 아니다. <삼시세끼>, <인간의 조건> 같은 한국적 ‘리얼 예능’ 프로그램이나 <마이리틀텔레비전> 같은 융합적 포맷의 예능 등에서 변형되는 쿡방의 경우, 출연자들은 정식 셰프들이 아니라 연예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셰프가 아닌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은 셰프가 출연하는 방송에서의 ‘디시’가 아니라 소위 ‘집밥’ 형태를 띤다. 예컨대 레스토랑 체인 사업가인 백종원의 <집밥 백선생>은 집에 있는 재료들을 사용해 어떻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가르치고, <삼시세끼>에서 농어촌에 간 연예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꾼 텃밭에서 얻은 재료들로 ‘삼시세끼’를 모두 만들어 먹는다. 셰프 아닌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은 셰프가 등장하는 쿡방이 만들어내는 전문가적 분위기와 고급스러움과 탁월한 장인적 기술에 대한 감탄 대신 생활인으로서의 공감을 자아내며 나아가 음식 만들기에 대한 참여를 유도한다. 이런 종류의 쿡방에서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브리콜라주’(bricolage)로서의 음식 만들기가 등장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리저리 섞어 뚝딱 뭔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셰프의 멋진 요리와는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나도 요리 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통해 주로 혼자 사는 싱글들의 요리 가이드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일상과 일상에서의 노동을 강조하는 이런 종류의 ‘생활 밀착형 쿡방’은,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아래서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노동사회를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OECD 최고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은, 자연히,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스스로를 ‘지식경제’라고 부르곤 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일터에서의 노동시간만이 ‘노동시간’이 아니며, 자본은 일터를 벗어난 공간과 노동시간을 벗어난 시간까지도 외국어 및 지식 학습, 자원봉사, 체력관리 등이라는 명목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사적 학습과 경험과 심지어 휴식시간까지도 모조리 흡수하여 ‘총체적’인 회사인간으로 만드는 이 ‘창조적’ 자본주의 속에서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시간, 곧 진정한 여가시간을 내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남성 노동자는 여성 배우자를 통해, 싱글 노동자는 외식을 통해 음식 만들기와 먹기의 시간을 해결하는 게 여전히 일반적인 현실이다. 생활 밀착형 쿡방은 이런 노동사회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그렇지 않다면, 쿡방이 이렇게 유행할 때 ‘동시에’ 배달앱 광고 역시 만개하고 있는 모순을 설명하기 힘들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판타지’적 속성을 가진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연에서 텃밭을 벗삼아 ‘삼시세끼’를 해먹기 힘든 상황에서 그려지는 <삼시세끼>의 일상, 곧 이미 지나가버린, 자연과 삶이 유기적으로 하나였던 과거의 재현은 최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삼시세끼>는 이상적이었고 바람직했던 과거를 재소환함으로써 생존경쟁의 노동사회에서 지칠대로 지친 노동자의 심신에 조그마한 안식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이 ‘서바이벌’ 형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힐링’의 형식 또한 필요해지는 것이다. 집밥을 만들고 맛있게 먹는 생활 밀착형 쿡방은 한국 대중문화가 광범위하게 만들어내는 ‘힐링으로서의 예능’의 최신 사례이다.

실로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예능은 ‘힐링’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노동사회 속에서 할 수 없는 것, 그러나 하고 싶은 것들이 모조리 오늘날 예능의 소재로 차용된다. ‘친구들과 배낭 하나 매고 유럽으로 떠나기’(<꽃보다 할배>), ‘오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기’(<정글의 법칙>), ‘아이들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체험하기’(<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이 그렇다. 이러한 ‘힐링’ 예능은 ‘살벌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가 된다’는 ‘서바이벌’ 예능(<슈퍼스타 K>, <마스터 셰프 코리아>)의 쌍둥이 형제다. 여유와 열정, 공생와 승부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 이루는 이 쌍둥이는 모두를 생존경쟁과 각자도생의 법칙 속으로 강제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부모로 두고 있다.

셰프가 등장하는 쿡방과 셰프 아닌 연예인이 등장하는 쿡방 역시 쌍둥이로 볼 수 있다. <냉장고를 부탁해>, <마스터 셰프 코리아>, <한식대첩> 등 셰프가 중심이 된 쿡방은 기본적으로 열정과 승부의 서사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는 기술의 경쟁, 허세 부리기, 기싸움, 요리 테크닉, 최종 승부가 기본적인 서사의 요소를 이룬다. 모두가 노력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한 후 최고의 운과 실력을 가진 이가 승리해서 영광을 가져가는 이 ‘서바이벌’ 서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부당하고 불공평한 자신의 모순을 감추는 형식이다. <삼시세끼>, <집밥 백선생> 등 셰프가 아닌 연예인이 중심이 된 쿡방은 여유와 공생, 공감의 서사다. 함께 일하기, 지식을 함께 나누기, 뒤처진 이와 함께 가기,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공동으로 뭔가를 이루어가기 등의 서사요소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힐링’의 서사는 ‘서바이벌’ 서사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설파하지만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기능, 곧 동료, 친구, 가족 간의 우애와 사랑, 협동이 남아있는 이 사회는 ‘여전히 살만한 곳’임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서바이벌과 힐링의 서사가 같이 있어야만, 이들이 쌍둥이로 존재할 때라야만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는 체제의 모순을 가리면서 동시에 그 모순을 수용하며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자신의 핵심적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

 

5.

 

쿡방은 도대체 ‘무엇’인가? 쿡방은 그저 셰프나 연예인들이 나와 주어진 재료로 멋지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만들어 전시하고 이를 먹는 것을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 장르인가? 물론 그것도 하나의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표면적인 정의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한 쿡방이라면 ‘요리프로’라는 이름으로 예전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쿡방은 무엇인가? 오늘날 유행하는 쿡방은 한국사회의 욕망을 보여주는 문화적 형식이다. 앞서 얘기했듯, 우선 그것은 한국사회 대중이 공유하는 욕망, 곧 더 고급스럽고 서구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사회가 성적으로 분할되어 작동하는 방식, 곧 남성의 공적노동과 여성의 사적노동이라는 성별 노동분업의 현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 ‘섹시한 남성 셰프’라는 쿡방의 지배적 요소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보다 더 큰 차원에서, 쿡방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문화적 형식이기도 하다. 즉,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속에서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대중을 다그치면서 동시에 위무하는, 서바이벌과 힐링으로서의 문화적 서사인 것이다. 쿡방은 ‘음식’과 ‘요리’를 재현하지만 그것은 표층에 불과하다. ‘음식’과 ‘요리’라는 표층 아래 심층에는 ‘경쟁’과 ‘공생’이 존재한다. 쿡방이 진정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은 이러한 메시지를 ‘새롭게’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이 매개체는 계속 바뀐다. 때로는 ‘노래’, 때로는 ‘여행’, 때로는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음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무엇이 올 지 우리는 모르지만, ‘경쟁’과 ‘공생’이라는 이중의 메시지는 바뀌지 않을 공산이 크다.

쿡방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지배적 의미요소인 이 ‘경쟁’과 ‘공생’이라는 메시지는 자본주의 체제 속 대중문화가 수행하는 ‘관리’(management) 기능과 연관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파편화된 개인들과 소비를 통해서만 가능한 삶을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은 언제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삶이 앞으로 계속 될지, 왜 이렇게 삶이 허무한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한지, 왜 언제나 경제는 위기인지, 왜 정치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지 등. 이러한 불안은 잠재적이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언제나 폭발하여 정치적 힘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 자본주의 체제의 대중문화는 이 불안을 어떻게든 관리해야만 한다. 이 불안의 관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대중이 가지는 이 불안을 만들어낸 체제의 위대성을 문화적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 불안을 해소할 판타지를 문화적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경쟁’이 전자라면, ‘공생’은 후자다. ‘경쟁’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가 정당한 방식으로 승리하여 보상받는 이야기를 본다. 이러한 이야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원적 불공평성, 곧 착취라는 요소를 가리며, 연줄과 족벌(cronyism)이 지배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한 모습 역시 가린다. ‘공생’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각자도생과 생존경쟁의 현실 저편의 이상향을 본다. 전형적인 판타지 형식을 가진 이 ‘공생’의 서사는 자본주의 체제가 불가능하게 만든 모든 인간적이며 아름다운 것들이 마치 지금 존재하는 것 같은 환상을 제공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대중문화는 ‘경쟁’과 ‘공생’의 서사를 놀라운 방식으로 배치하고, 그 안에서 멋진 인물들과 감동적인 스토리들을 끌어냄으로써 대중이 품고 있는 불안을 ‘관리’한다. 이 불안은 매일매일 편성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매일매일 일시적으로 진정된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고유한 이 ‘불안’은 자본주의 체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불안이 있는 한, 자연히,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동경도 함께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해 먹고, 친구들과 음식을 먹고 나누고, 자연에서 삼시세끼를 해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요리의 기술을 연마해 놀라운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 등은 모두 우리가 가지고 있으며 가질 수밖에 없는 ‘동경’이다. 이 동경의 본질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 우애와 사랑과 여유가 넘치는 삶에 대한 갈망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는 불안을 관리하지만 결코 더 나은 삶과 사회에 대한 이 원초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그리고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을 제거할 수는 없다.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는 쿡방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관리를 목격하지만, 동시에 이 유토피아적 갈망도 함께 포착할 수 있다. 음식이란 결국 나눠먹을 때 가장 맛있는 법이고, 요리란 사랑하는 이에게 해줄 때 가장 신나는 법이다. 쿡방은 이러한 공동체적 삶의 진리를 재현하면서, 동시에 음식과 요리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사회에 사는 이들의 불안을 위무하여 진정시킨다. 쿡방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속 한국인들의 근원적 불안과 원초적 동경이 버무려져 끓어 넘치는 냄비 같은 것이다.

 

 

(반년간지 <쓺>, 2015년 가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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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행사]제13회 문화과학 북클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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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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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동정]

편집위원 동정

 

문강형준

- 동정:

(1) 수유너머N 화요토론회에서 발표: 제목 “(포스트)아포칼립스적 전환: 파국론을 위한 메모들”

(2) ‘재난포럼’ 정림건축재단+문강형준 공동 기획; 2015.10.13~12.15까지 열림; 10월 20일에 “재난과 함께 살기” 발표

- 신간 안내: 테리 이글턴 저, <비평가의 임무> 문강형준 번역(민음사, 2015), 10월 16일 출간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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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동정]김대성 편집위원 <데모:북 demo:book>(2회)

<데모:북 demo:book>(2회)

 

- 함께 만날 책 : 고아영 외 10명, <<출판, 노동, 목소리>>, 숨쉬는책공장, 2015.

- 시간 : 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오후 7시~9시

- 장소 : 수영 지하철 역사 내 문화매개공간 <쌈>

- 서평/강좌 진행 : 김대성(로컬데모, 문학평론가)

- 참가비 : 5,000원(전액 <로컬데모> 운영비로 사용됩니다)

- 주최/주관 : <로컬데모>

- 문의 : loculdemo@gmail.com / 010-8502-구사육칠

https://www.facebook.com/loculdemo

http://loculdemo.tistory.com

<데모:북 demo:book> 2회는 보이지 않는 노동의 목소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스스로를 제외한 모든 노동을 이야기하지만, 스스로의 노동에는 입을 다물게” 되어버린 ‘출판 노동자’들의 다양한 자기 목소리를 진솔하게 담고 있는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외 10인, 숨쉬는책공장, 2015)를 함께 읽습니다. 지역에선 아직 ‘출판 노동’이라는 개념조차 정착되지 못한 형편이지만 그럼에도 이곳에서 매해 수백권이 넘는 책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그 책을 함께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누구인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기억되기도 전에 잊혀진 이들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하고 있는 이들은 비단 출판 노동자들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지역의 수많은 문화 기획자들과 예술가들의 작업 또한 극소수만이 주목을 받을 뿐 대부분의 작업과 활동은 쉽게 지워집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과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출판 노동자들의 자기 목소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 노동’을 해오고 있지만 삭제되고 망실된 우리 주변의 노동자인 문화 ∙ 예술인들의 목소리 또한 환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데모:북> 2회는 수영 지하철 역사 내에 있는 문화매개공간 <쌈>에서 진행합니다. 지역의 출판 노동자들을 초대하여 현장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자리도 마련할 예정입니다. 책과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모쪼록 자리하셔서 더 많은 목소리를 내어주셨으면 합니다. 더 많은 목소리를 발견하고 발명할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데모:북 demo:book>이란?

지역문화예술인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결성된 <로컬데모>에서 공개 서평 강좌 <데모:북demo:book>을 시작합니다. 현장과 현실에 접속할 수 있는 다종한 방법 중에 책을 경유해 한 자리에 모여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아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데모:북demo:book>은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항의나 요청의 기록들을 함께 더듬어 보고 이를 우리의 책으로 다시 써 봄으로써 봉쇄되고 묵살된 막힌 회로를 열기 위해 고안된 서평강좌입니다. <데모:북demo:book>은 그런 점에서 ‘데모’에 관한 책을 함께 읽는 것이면서 또 다른 데모를 위한 책으로 전환 하는 방식을 고안하고자 합니다. 누군가의 싸움의 기록을 우리들의 싸움을 위한 도구상자로, 그 책의 쓸모를 재발명하고 공유하여 우리가 놓여 있는 현장과 현실에서 전개될지 모르는 부정성들과 단단하게 마주할 수 있는 힘을 응집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Demo-Book>은 오늘의 현장과 현실의 무게를 정직하게 담고 있는 책을 함께 읽고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Demo-Book>의 필요와 요구는 <로컬데모>가 문제의식으로 갖추고 있는 지역문화 장 내에서의 부조리한 경험들을 단순히 특정한 지역이라는 한정된 시스템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조건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다양한 경험들과 문제의식들과 접속하여 확장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이러한 작고 소소하지만 생생한 만남을 통해서, 일상을 오염시키는 모욕과 혐오 그리고 굴종의 조건들을 당장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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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칼럼]‘고통의 이미지’와 ‘이미지의 고통’ (오혜진)

[2030 잠금해제] ‘고통의 이미지’와 ‘이미지의 고통’ (오혜진)

 

‘미국 지성계의 여왕’으로 불린 수잔 손택은 1993~1995년에 사라예보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전쟁 보도사진을 다룬 책 한 권을 썼다. <타인의 고통>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에서 그녀가 쓴 것은 모두를 울부짖게 만드는 사진의 ‘뜨거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진이란 그것을 보며 연민할 수 있는 이들의 알리바이일 수 있다는 것, 즉 사진의 ‘차가움’과 ‘우울함’에 대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가 잘 지적하듯, 우리에게는 이미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멀리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다. 아니, 스펙터클로만 현실을 인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의 이미지’는 범람하며, 그 이미지들은 각각의 고통을 그저 그런, 대동소이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걸 보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구경꾼, 겁쟁이, 관음증 환자가 된다.

 

그럼에도 터키 해안가로 떠내려온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을 담은 한 보도사진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뜨거운’ 사진이 됐다. ‘네이팜탄 피폭 소녀’를 찍은 후잉 콩 우트의 사진처럼 두고두고 회자될 이 사진은 유럽시민들에게 난민 인권의 중요성을 단번에 환기시켰고, 결국 난민 수용에 대한 전향적 조치를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유럽시민들로 하여금 난민들에게 담요와 음료수를 가져다주고, 자기 집을 개방하게까지 한 이 사진의 마법은 무엇일까. 손택은 말했다. 실제의 공포를 촬영한 이미지를 쳐다볼 때에는 충격과 더불어 ‘수치심’이 존재한다고. 그것을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 혹은 그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다고.

 

그런가 하면, 어떤 사진들은 여전히 ‘그토록 필사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지하철에서, 화장실에서, 학교와 영화관에서 여자들의 몸과 사생활을 몰래 찍은 그 사진들 말이다. 우습지만, 초소형카메라가 발명됐을 때 떠올린 것은 정보선진국들이 벌이는 은밀한 첩보전과 같은 세련된 스파이서사였다. 그런데 지금 넥타이핀 구멍보다 작고, 가격도 몇십만 원에 불과하다는 이 첨단의 카메라에 찍힌 것은 그저 무수한 여자들의 살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공상과학적 로망은 물론 일말의 에로티시즘조차 없다. 그것들은 한낱 개인의 정보력을 과시하고, 글 조회수를 올리며, 장당 몇십 원에 팔리기 위해 전시될 뿐이다. ‘몰카를 찍지 마세요’가 아니라 ‘몰카를 조심하세요’라며 피사체(피해자)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이 나라에서 ‘본다는 것’의 수치심을 묻는 일은 차라리 사치 같다. 하지만 묻자. 이것은 왜 ‘인권’의 문제 혹은 숙고해야 할 ‘타인의 고통’이 아니란 말인가.

 

다시 손택의 말. 그녀는 카메라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사진에 찍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도덕적 한계와 사회적 금기를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여권”이라고 썼다. 아마 그녀는 피사체의 공포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사진의 욕망과 윤리에 대해 암시하려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무방비상태로 닥쳐오는 수많은 ‘고통의 이미지’들과 ‘이미지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난민협약 가입국으로서 한국의 유명무실한 ‘난민법’의 실효화를 촉구하는 일, 그리고 ‘100만 회원’을 자랑한다는 불법 성인사이트 ‘소라넷’의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일.

 

(한겨레 2015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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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연구자료]제 3회 함께 서울 정기포럼 1~4

돌봄 부담과 시간갈등_엄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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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시간과 삶의 질_변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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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시간은 누구편인가_김종진

Download (PDF, 4.86MB)

 

 

예술가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_이동연

Download (PDF, 1.19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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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1호][연구자료]포럼L_비판인문학의 두 가지 쟁점 : 문학권력과 애도의 정치

제2회 비판과 대안을 위한 포럼L

비판인문학의 두 가지 쟁점

: 문학권력과 애도의 정치

 

2015년 8월 26일 수요일 오후 3시

서교예술실험센터(홍대앞)

 

 

사회 : 문강형준(문화평론가) 

제1발제

베껴쓰기, 혹은 필사의 파국

– 신경숙 표절 사건과 한국문학의 폐쇄성 비판

발제:오창은(중앙대학교 교수)

토론: 고봉준(문학평론가)

 

제2발제

국가폭력에 의한 의문사는 어떻게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죽음이 되었는가?

- 애도의 정치 관점에서

발제: 정원옥(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토론: 김정한(고려대학교 HK 연구교수)

 

○ 공동주최 : 계간 <문화과학>, 문화연대

○ 문의 : 문화연대 02.773.7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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