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1호][칼럼] 시스템 고장과 봉기(권명아)

[야! 한국사회] 시스템 고장과 봉기

 

권명아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화가 강한 일본에서 시위는 ‘최고 민폐’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깍쟁이’로 유명한 교토 사람들이 시내 번화가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박수를 치며 흥분하는 모습이야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화이다. 지난 목요일 교토의 동네 데모 현장이다. 삼사십 명 정도 모인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시위였지만, 거리 시민들의 호응과 함성에 시위대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경험해본 적이 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시위에 참가한 일본 친구들은 “난생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몇 해 동안 ‘동네 인문 공동체’를 만나러 일본에도 자주 가고는 했다. 어렵게 만난 동네 문화운동가나 활동가들은 변화의 활력이 넘치는 한국을 부러워하곤 했다. 게다가 ‘3·11 사태’ 이후, 일본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층 건물에 내걸린 전광판에서 번쩍이던 ‘부흥’, ‘지역 살리기’ 같은 정부의 메시지는 너무 건전해서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때만 해도 일본이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헬조선’이라는 한탄이 그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시위, 변화의 열정’ 같은 말은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 말로 치부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낙관적인 말을 하는 것도 기성세대의 시대착오적 발상인 것 같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면서 어두운 심연에서 예상치 못하게 출현하는 변화의 힘과 그 가능성에 좀 더 기대를 품게 된다. 물론 현재 일본 사회에서 출현한 힘들이 곧 소멸하거나, 일본 사회 전체를 바꿀 정도의 역량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어떤 봉기의 힘도 사회 전체를 통째로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다만 변화를 향한 힘들이 사회의 흐름을 바꾸고, 그렇게 바꾼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역량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힘들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내놓은 대답 중 하나는 ‘3·11’의 경험이다. ‘3·11’ 이후의 반원전 시위가 오늘날의 반전 시위로 이어졌음은 분명하다. 일본 비평가 히로세 준은 고장 난 채 정지되어 정상화가 불가능한 원전 시스템을 봉기의 전형적 이미지로 분석한 바 있다. 시스템이 정지된 뒤, 일본은 불바다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 혼란과 공포 속에서 ‘부흥’과 같은 총동원 시대가 다시 도래할 가능성이 커졌고, ‘정상국가’라는 이른바 ‘정상화’ 논리 역시 여기서 돌출할 여지를 얻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부흥과 정상화가 아닌, 정상화를 거부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시스템이 멈춘 악몽과 같은 경험 끝에, 일본의 많은 이들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원전 사고 경험 이후 시스템의 정상화(원전 재가동) 대신, 시스템 정지(원전 반대)를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력도 모자라 ‘노오오오오오오력’을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헬조선에서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전망에 휩싸인 한국 사회에서 변화의 힘은 과연 어떤 식의 ‘시스템 정지’를 통해 도래할 것인가? 일본의 동네 인문 공동체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모두가 정상적인 삶을 꿈꾸며 과로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던 시절에 그렇게 살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 그들의 선택 속에 바로 변화의 잠재성은 이미 있었던 게 아닐지. ‘시스템 고장’은 환멸만이 아니라 봉기의 힘을 촉발한다. ‘헬조선’이라고 예외이랴.

 

(한겨레 2015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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