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1호][칼럼] 돌아온 앨리스는 반란의 꿈을 꾸는가?(손희정)

돌아온 앨리스는 반란의 꿈을 꾸는가? (손희정)

 

 

여자들이 돌아오고 있다. <차이나타운>(2014), <암살>(2015), <협녀>(2015)와 같은 상업영화에서 <위로공단>(2014)이나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2015)와 같은 다큐멘터리와 작은영화에 이르기까지, 최근 한국영화 이야기다. 한동안 한국영화에서 여성 캐릭터 기근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는 IMF 이후 가장 먼저 해고되고 노동력 유연화의 대상이 되었던 여성 노동자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었다. 생산의 장에서 내쫓겨 재생산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거나 더욱 열악한 노동 조건으로 내몰려야 했던 여성들은 사회적으로뿐만 아니라 재현의 장에서도 거세되었다. 그 때문에 1990년대 스크린을 활보했던 다양한 직업의 여성들은 2000년대에는 실종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녀들이 어쩐 일인지 되돌아 오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변화가 20-30대 여성들이 ‘다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관객, 특히 여성-관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이런 흐름은 몇 몇의 할리우드 영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 <겨울왕국>(2013), 그리고 <말레피선트>(2014)로 이어졌던 ‘디즈니 페미니즘’은 이런 분위기를 견인했다. 천만 관객을 넘긴 <겨울왕국>에서 여성들은 ‘착한 딸 콤플렉스’를 넘어서 드디어 ‘나 자신’이 되는 여성의 자아실현 스토리에 열광했다. 그리고 자매애를 ‘진정한 사랑’으로 해석함으로써 여성 간의 관계를 회복하려 했던 신선한 시도에 감동했다. 여성의 자기 찾기와 자아 실현, 여성 간의 관계 회복이라는 페미니즘의 전통적인 관심사는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이었다.

 

여기에 <헝거게임> 시리즈(2012-2015)와 <다이버전트> 시리즈(2014-) 같은 영어덜트 장르는 강인한 소녀 전사를 선보이면서, 이성애 로맨스나 신자유주의 소비문화의 화려한 스펙타클을 벗어난 ‘다른 여성의 재현’이 어떻게 관객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지 보여줬다. 특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는 드물게 진보적인 캐릭터인 ‘캐트니스 애버딘’(헝거게임)은 전통적인 젠더 재현을 비틀뿐만 아니라, 독재에 맞서 가족, 동료, 그리고 이웃의 생존을 위해 기꺼이 활을 집어들고 민중 봉기의 아이콘이 되면서 혁명의 상상력을 스크린으로 가져온다. 이런 다른 여성 캐릭터에 대한 요구는 2015년,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에서 폭발했다. 출산 기계로 전락한 여성들을 구출하면서 반란을 꿈꿨던 ‘퓨리오사’는 그가 도망쳐 온 곳으로 되돌아가 (역시나) 독재자인 가부장을 처단하고 여성영웅이 된다. 한 줌의 씨앗으로 세계의 파국을 넘어서려는 ‘퓨리오사’의 단단하게 쥔 두 주먹,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여성연대가 여성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렸다.

 

이와 함께 김혜수, 김고은의 <차이나타운>이 등장했고, <암살>과 <협녀>와 같은 대작 영화들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더불어 여성 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다룬 다큐 <위로공단>과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노동자의 고통과 피로함을 그리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가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미녀는 괴로워>(2006)나 <써니>(2011), <댄싱퀸>(2012) 같은 흥행작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들은 탈역사화된 공간에서 여성의 자아실현을 자기계발 및 소비문화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지극히 신자유주의적인 텍스트였다. 이 영화들이 그려내는 세계와 <차이나타운>, <위로공단>, 그리고 <앨리스>가 선보이는 세계 사이의 간극은 지금 스크린에 등장한 ‘다른 여성’의 모습이 어째서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전자의 영화들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판타지를 판매했다면, 후자의 영화들은 우리가 아무리 ‘헬조선’에서 규범에 복종하고 순종적으로 살면서 ‘노오오오력’한다고 해도 ‘피도 눈물도 없는 차이나타운’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간극을 우리 시대의 여성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목격하고 만 것이다.

 

한편으로, 위기의 시대를 타계하기 위해 남성들의 권위를 살려줘야 한다는 사회의 노골적인 요구에 합의했던 여성들은 이제 그런 남성 중심의 위기 탈출 전략이 아무런 ‘낙수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포스트-IMF의 담론은 남성을 먼저 위로하면 여성의 삶도 함께 나아질 것처럼 떠들어댔지만, 실제로 여성의 삶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기득권자였던 남성의 삶 역시 함께 무너지게 되었다. 남녀 공히 ‘노오오오오력’ 해봐야 포잡을 뛰어도 빚 없이는 집 한 채 구할 수 없는 ‘앨리스’일 수밖에 없는 세계를 사는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오피스>(2015)다. 성실하기만 할 뿐 능력도 빽도 없는 ‘김병국 과장’은 부당 해고를 당한 뒤 자살한다. 그리고 자신과 똑닮은 ‘인턴 이미례’의 몸에 빙의된다. 그러나 ‘김병국’과 ‘이미례’는 애초부터 서로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겹쳐져 있다. 만년 과장과 만년 인턴이 하나가 되어 직장 동료를 살해하는 이 공포물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묘사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앨리스’도 ‘김병국/이미례’도 갑과의 싸움이 아니라 치열한 ‘을 대 을’의 싸움을 전개하고 있다. 55년 전 여성 노동자의 삶을 그렸던 김기영의 <하녀>(1960)에선 ‘하녀’가 부르주아 가정을 박살낸다. 2010년에 임상수가 리메이크한 판본에서는 전도연이 연기한 ‘하녀’가 대한민국 1%인 이정재의 거실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저항했다. 하지만 2015년이 되어 우리 시대의 ‘하녀’인 ‘앨리스’는 갑은 건드리지도 못한 채 식물인간이 된 남편과 뒤늦은 신혼여행을 떠난다. 무엇과 싸워야 할지, 혹은 무엇과 싸울 수 있을지 보이지 않는 곳. 그곳이 우리들의 ‘차이나타운’이다.

 

그런 시대를 살기 때문일까? 섣부른 기대일 지도 모르지만, 이제 여성들은 다른 여성상을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크린으로 돌아오고 있는 앨리스들을 반기는 스크린 앞의 앨리스들은 갑의 세계를 뒤집어 엎 반란의 꿈을 꿀 수 있을까? 그 꿈을 구체적으로 꿔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2015년 10월 5일 가대학보)

이 글은 카테고리: 알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댓글은 닫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