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1호][칼럼]‘고통의 이미지’와 ‘이미지의 고통’ (오혜진)

[2030 잠금해제] ‘고통의 이미지’와 ‘이미지의 고통’ (오혜진)

 

‘미국 지성계의 여왕’으로 불린 수잔 손택은 1993~1995년에 사라예보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전쟁 보도사진을 다룬 책 한 권을 썼다. <타인의 고통>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책에서 그녀가 쓴 것은 모두를 울부짖게 만드는 사진의 ‘뜨거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진이란 그것을 보며 연민할 수 있는 이들의 알리바이일 수 있다는 것, 즉 사진의 ‘차가움’과 ‘우울함’에 대한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가 잘 지적하듯, 우리에게는 이미 사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멀리서)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수없이 많다. 아니, 스펙터클로만 현실을 인지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고통의 이미지’는 범람하며, 그 이미지들은 각각의 고통을 그저 그런, 대동소이한 것으로 만든다. 그리고 그걸 보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을 소비하는 구경꾼, 겁쟁이, 관음증 환자가 된다.

 

그럼에도 터키 해안가로 떠내려온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을 담은 한 보도사진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린 ‘뜨거운’ 사진이 됐다. ‘네이팜탄 피폭 소녀’를 찍은 후잉 콩 우트의 사진처럼 두고두고 회자될 이 사진은 유럽시민들에게 난민 인권의 중요성을 단번에 환기시켰고, 결국 난민 수용에 대한 전향적 조치를 이끌어내기까지 했다. 유럽시민들로 하여금 난민들에게 담요와 음료수를 가져다주고, 자기 집을 개방하게까지 한 이 사진의 마법은 무엇일까. 손택은 말했다. 실제의 공포를 촬영한 이미지를 쳐다볼 때에는 충격과 더불어 ‘수치심’이 존재한다고. 그것을 쳐다볼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사람은 그 고통을 격감시키려 뭔가를 할 수 있었던 사람, 혹은 그 고통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었던 사람밖에 없다고.

 

그런가 하면, 어떤 사진들은 여전히 ‘그토록 필사적으로 보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한다. 지하철에서, 화장실에서, 학교와 영화관에서 여자들의 몸과 사생활을 몰래 찍은 그 사진들 말이다. 우습지만, 초소형카메라가 발명됐을 때 떠올린 것은 정보선진국들이 벌이는 은밀한 첩보전과 같은 세련된 스파이서사였다. 그런데 지금 넥타이핀 구멍보다 작고, 가격도 몇십만 원에 불과하다는 이 첨단의 카메라에 찍힌 것은 그저 무수한 여자들의 살점이다. 여기에는 그 어떤 공상과학적 로망은 물론 일말의 에로티시즘조차 없다. 그것들은 한낱 개인의 정보력을 과시하고, 글 조회수를 올리며, 장당 몇십 원에 팔리기 위해 전시될 뿐이다. ‘몰카를 찍지 마세요’가 아니라 ‘몰카를 조심하세요’라며 피사체(피해자)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이 나라에서 ‘본다는 것’의 수치심을 묻는 일은 차라리 사치 같다. 하지만 묻자. 이것은 왜 ‘인권’의 문제 혹은 숙고해야 할 ‘타인의 고통’이 아니란 말인가.

 

다시 손택의 말. 그녀는 카메라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사진에 찍히는 사람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은 채, 도덕적 한계와 사회적 금기를 넘나들 수 있게 해주는 일종의 여권”이라고 썼다. 아마 그녀는 피사체의 공포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사진의 욕망과 윤리에 대해 암시하려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무방비상태로 닥쳐오는 수많은 ‘고통의 이미지’들과 ‘이미지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난민협약 가입국으로서 한국의 유명무실한 ‘난민법’의 실효화를 촉구하는 일, 그리고 ‘100만 회원’을 자랑한다는 불법 성인사이트 ‘소라넷’의 폐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일.

 

(한겨레 2015년 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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