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1호][칼럼] ‘쿡방’이란 무엇인가(문강형준)

‘쿡방’이란 무엇인가 (문강형준)

 

 

1.

 

예전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먹을 것은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다. 길을 걸어 다니면서 음식을 먹으면 ‘복 달아 난다’고 꾸중을 들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지 않는 상황에서 나 혼자 뭔가를 먹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혹시 음식을 먹게 되더라도 소리 없이 안 먹는 것처럼 먹는 게 하나의 배려였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드라마, 예능, 교양을 막론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며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공중파와 케이블 방송을 타고 전국에 방영되고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열광한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이용자들은 자기 앞에 차려져 있는 음식 사진을 찍어 올리고, 개인 인터넷방송 BJ들은 유저들의 요구에 따라 카메라 앞에서 음식을 먹고,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영화 등에서 연예인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 ‘캡쳐’ 되어 인터넷을 떠돈다. 소위 ‘먹방’ 열풍이다.

지금 유행하는 ‘쿡방’은 ‘먹방’의 변주다. 먹방이 음식을 먹는 상황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면, 쿡방은 그 음식을 만드는 상황에 집중한다. 포맷은 단순하다. ‘셰프’라 불리는 요리사가 등장하여 음식을 만들고, 카메라가 그 과정을 샅샅이 보여주고, 만든 음식을 함께 먹으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먹방은 여전히 등장하지만 현재의 대세는 쿡방이다. 먹방에서 쿡방으로 이동한 셈이지만, 많은 쿡방이 먹방까지 포괄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요리하기와 먹기’를 핵심요소로 하여 최근 1-2년 새 교양-엔터테인먼트 방송 전체의 우세종이 되어버린 이 포맷의 흥행을 ‘쿡방’ 현상이라고 통칭해도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2.

 

쿡방 현상에서 우선 특기할 것은 그것이 ‘쿡’이라기보다는 ‘방’이라는 점, 곧 쿡방의 핵심은 실제로 요리를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요리하는 모습이 ‘방송’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쿡방의 핵심 감각은 음식을 맛보는 미각이나 음식 냄새가 나는 후각이 아니라 음식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보는 감각, 즉 시각이다. 쿡방의 난립을 비판하며 그것을 ‘음식 포르노’(food porn)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포르노그래피가 진짜 섹스가 아니라 성적 감각의 최대화를 위해 마련된 진부한 상업적 서사이자 오직 시각으로만 가능한 장르이듯, 쿡방 역시 그렇다. 포르노그래피와 에로스의 차이를 말해보는 건 어떨까. 포르노그래피가 시각의 자극을 통한 이윤창출인데 반해, 에로스는 오감 전체를 통해 정신과 육체가 사랑을 느끼는 데 있다. 포르노그래피가 성욕을 돋우기 위해 진부한 ‘스투디움’(studium)으로 가득 찬 ‘콘텐츠’라면, 그래서 아무리 기를 써도 사실은 안전하고 평균적이라면, 에로스는 가만히 있고 싶어 하는 나를 찌르고, 위험하게 하는 ‘푼크툼’(punctum)이다. 포르노그래피의 모든 성관계가 깨끗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지듯, 쿡방 역시 그렇다. 그곳의 음식에는 대개 실패가 없으며, 언제나 먹음직스럽고, 예쁘게 포장되어 있다. 에로스가 상대방과의 위태로운 감정의 교차이자 일상의 ‘찌질함’까지도 포함하는 진실의 영역이듯, 실제의 요리 역시 그렇다. 아름다운 요리에는 지저분한 음식 찌꺼기가 남고, 땀 흘리는 노동이 동반된다. 쿡방에는 깔끔하게 포장된 아름다움만 있고, 찌꺼기도 노동도 보이지 않는다. 미디어 기사들이 진부하게 분석하듯 쿡방은 직접 밥을 해먹고 요리를 해먹는 이들을 창출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앉아서 즐거워하며 혹은 기계적으로 텔레비전 모니터를 바라보는 시청자들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하나의 ‘방송 포맷’에 불과하다. 쿡방과 같은 계열에 있는 것은 화가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방송이나 가수가 되기 위해 오디션에 참가한 이들의 노래를 보여주는 방송이다.

 

3.

 

예전에도 ‘요리 프로그램’은 텔레비전에 고정적으로 편성되었다. 주로 아침 방송에서 ‘요리 연구가’들이 나와 사회자의 보조로 조용히 음식을 만들고, 영양을 설명하는 그런 프로그램들은 언제나 있었다. 지금의 쿡방은 과거의 요리 프로그램과 다르다. ‘요리 연구가’라는 아마추어적인 명칭은(그것은 ‘종이접기 연구가’ 혹은 ‘분재 연구가’ 등을 연상시킨다) 이제 ‘셰프’(chef)라는 전문가적 명칭으로 바뀌었다. 요리 연구가가 대체로 40-60대의 여성이었다면, 셰프는 대개 30-40대의 젊은 남성이다.

‘요리 연구가’에서 ‘셰프’로의 변화는 전통적이고 한국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더 이국적이고 서구적이고 고급스러운 것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명칭의 변화는 기실 한국의 다른 문화들에서의 변화와 궤를 같이 한다. 예컨대, 아이돌 가수의 이름은 어떤가. ‘김시스터즈’, ‘소방차’,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나인뮤지스’, ‘슈퍼주니어’, ‘원더걸스’로의 변화. 혹은 ‘대한주택공사’와 ‘한국도로공사’에서 ‘LH공사’와 ‘ex’로의 변화. 혹은 ‘럭키금성’과 ‘선경’에서 ‘LG’와 ‘SK’로의 변화. 무엇보다도 아파트 이름의 변화가 독보적이다. ‘우성아파트’나 ‘일신아파트’에서 ‘롯데 캐슬’이나 ‘마포 오벨리스크’, ‘대우 트럼프타워’로의 변화. 더 크고, 더 높고, 더 서구적이며 고급스러운 것에 대한 갈구가 여기에 있다. 머리를 곱게 말아 올리고 시어머니로부터 요리를 ‘전수’받았던 어머니 같은 중년의 ‘요리 연구가’는 이제 최신 헤어스타일에 멋진 의상을 입고 마치 마술을 하듯 소금을 뿌려대는 ‘셰프’로 바뀌었다. 셰프들이 대개 프랑스나 이탈리아, 미국의 유명 요리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인 것은 이러한 변화와 맞물려 있다(당연히 우리는 여기에서 ‘국내 박사’를 제치고 대학에 자리 잡는 ‘외국 박사’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셰프들 중 ‘강레오’나 ‘에드워드 권’ 같은 이름이 보이는 것도 그래서 자연스럽다. ‘요리 연구가’들이 주로 종가에 머물러 있었던 것과 달리 방송에 출연해 이름을 알린 셀러브리티 ‘셰프’들은 이미 자신의 이름을 딴 레스토랑 체인을 가지고 있는 ‘사업가’이다. 쿡방에서의 인기는 자신이 책임질 수도 없는 가공식품들의 모델료, 나아가 레스토랑 매출로 이어진다. ‘요리 연구가’에서 ‘셰프’로 변하면서 우리는 요리를 고급스러운 ‘디시’(dish)로 보게 되었고, 그만큼 요리는 예술이자 지식-비즈니스 영역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요리 연구가’에서 ‘셰프’로의 변화는 요리를 둘러싼 한국 대중문화의 성적 분할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자’ 요리 연구가에서 ‘남자’ 셰프로의 변화는 일견 음식 만들기라는 가사노동의 영역에 남성들이 진입하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여성가족부와 통계청의 ‘2015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 조사에 따르면 2014년 현재 한국 여성이 음식준비와 청소, 세탁 등에 쓴 시간(‘가정관리 시간’)은 하루 2시간 27분으로 31분인 남성보다 1시간 56분 많았다. 여성의 가정관리 시간은 2009년에 비해 불과 2분 줄어들었고 같은 기간 남성의 가정관리 시간은 ‘무려’ 2분이 증가했다. 한국에 비해 캐나다는 남성의 가정관리 시간이 2시간 10분(2010년 조사), 호주는 1시간 55분(2006년), 영국은 1시간 40분(2005년), 미국은 1시간 36분(2013년) 등 모두 1시간 30분을 넘는다. 한국 남성의 가정관리 시간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중 최하위권이다. 요리를 포함한 가사노동에 쏟는 평균적 한국 남성의 시간과 텔레비전에서 음식을 만들며 종횡무진하는 남성 셰프들 및 남성 연예인들의 난립 간의 격차는 현실과 이미지의 격차다. 요리하는 남성은 여전히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일종의 가상이다. 이 가상은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의 주된 시청자들인 여성들이 갈구하는 욕망이기도 하다.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이라는 신조어가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리하는 남성의 이미지는 가사노동에 힘쓰지 않는 현실 속 배우자의 이미지와 반대편에 놓인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에 ‘섹시’하며, 현실을 넘어선 곳에 있는 욕망이기에 ‘섹시’하다. 그것은 가사노동을 남성과 함께 분담하길 원하는 여성들의 간접적 아우성이다. 방송 속의 섹시한 가상은 즐기기에는 좋을지 모르나, 다시, 현실의 성별화된 노동을 상기시킨다. 쿡방이 만들어내는 요리하는 남성 이미지는 실제 일상의 가사노동을 거의 책임지다시피 하는 여성의 노동을 지운다. 그것은 일회적이고 스쳐지나가기에 ‘섹시’하다. 섹시하지 않은 노동은 여성들의 몫이다. 여전히 서민 주택가의 ‘김밥천국’과 뼈 해장국집을 비롯한 대부분의 음식점 주방은 ‘아줌마’들로 채워져 있으며 이 ‘아줌마’들 중 다수는 조선족이다. ‘차줌마’는 이 ‘아줌마’들을 대체할 수 없다. ‘요리’를 만드는 쿡방은 ‘음식’을 만드는 현실의 여성노동을 화려하게 가린다.

 

4.

 

물론 쿡방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셰프들인 것은 아니다. <삼시세끼>, <인간의 조건> 같은 한국적 ‘리얼 예능’ 프로그램이나 <마이리틀텔레비전> 같은 융합적 포맷의 예능 등에서 변형되는 쿡방의 경우, 출연자들은 정식 셰프들이 아니라 연예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셰프가 아닌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은 셰프가 출연하는 방송에서의 ‘디시’가 아니라 소위 ‘집밥’ 형태를 띤다. 예컨대 레스토랑 체인 사업가인 백종원의 <집밥 백선생>은 집에 있는 재료들을 사용해 어떻게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음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가르치고, <삼시세끼>에서 농어촌에 간 연예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가꾼 텃밭에서 얻은 재료들로 ‘삼시세끼’를 모두 만들어 먹는다. 셰프 아닌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식은 셰프가 등장하는 쿡방이 만들어내는 전문가적 분위기와 고급스러움과 탁월한 장인적 기술에 대한 감탄 대신 생활인으로서의 공감을 자아내며 나아가 음식 만들기에 대한 참여를 유도한다. 이런 종류의 쿡방에서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브리콜라주’(bricolage)로서의 음식 만들기가 등장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이리저리 섞어 뚝딱 뭔가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셰프의 멋진 요리와는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나도 요리 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통해 주로 혼자 사는 싱글들의 요리 가이드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일상과 일상에서의 노동을 강조하는 이런 종류의 ‘생활 밀착형 쿡방’은,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아래서 점점 강도가 높아지는 노동사회를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OECD 최고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여가시간은, 자연히,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 스스로를 ‘지식경제’라고 부르곤 하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일터에서의 노동시간만이 ‘노동시간’이 아니며, 자본은 일터를 벗어난 공간과 노동시간을 벗어난 시간까지도 외국어 및 지식 학습, 자원봉사, 체력관리 등이라는 명목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의 사적 학습과 경험과 심지어 휴식시간까지도 모조리 흡수하여 ‘총체적’인 회사인간으로 만드는 이 ‘창조적’ 자본주의 속에서 자신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는 시간, 곧 진정한 여가시간을 내기란 그리 쉬운 게 아니다. 남성 노동자는 여성 배우자를 통해, 싱글 노동자는 외식을 통해 음식 만들기와 먹기의 시간을 해결하는 게 여전히 일반적인 현실이다. 생활 밀착형 쿡방은 이런 노동사회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다(그렇지 않다면, 쿡방이 이렇게 유행할 때 ‘동시에’ 배달앱 광고 역시 만개하고 있는 모순을 설명하기 힘들다). 심지어 어떤 면에서는 ‘판타지’적 속성을 가진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자연에서 텃밭을 벗삼아 ‘삼시세끼’를 해먹기 힘든 상황에서 그려지는 <삼시세끼>의 일상, 곧 이미 지나가버린, 자연과 삶이 유기적으로 하나였던 과거의 재현은 최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삼시세끼>는 이상적이었고 바람직했던 과거를 재소환함으로써 생존경쟁의 노동사회에서 지칠대로 지친 노동자의 심신에 조그마한 안식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현실이 ‘서바이벌’ 형식을 가지면 가질수록 ‘힐링’의 형식 또한 필요해지는 것이다. 집밥을 만들고 맛있게 먹는 생활 밀착형 쿡방은 한국 대중문화가 광범위하게 만들어내는 ‘힐링으로서의 예능’의 최신 사례이다.

실로 한국사회의 거의 모든 예능은 ‘힐링’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노동사회 속에서 할 수 없는 것, 그러나 하고 싶은 것들이 모조리 오늘날 예능의 소재로 차용된다. ‘친구들과 배낭 하나 매고 유럽으로 떠나기’(<꽃보다 할배>), ‘오지에서 동료들과 함께 살아가기’(<정글의 법칙>), ‘아이들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체험하기’(<슈퍼맨이 돌아왔다>) 등이 그렇다. 이러한 ‘힐링’ 예능은 ‘살벌한 경쟁을 뚫고 살아남아 모든 것을 차지하는 승자가 된다’는 ‘서바이벌’ 예능(<슈퍼스타 K>, <마스터 셰프 코리아>)의 쌍둥이 형제다. 여유와 열정, 공생와 승부라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 이루는 이 쌍둥이는 모두를 생존경쟁과 각자도생의 법칙 속으로 강제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부모로 두고 있다.

셰프가 등장하는 쿡방과 셰프 아닌 연예인이 등장하는 쿡방 역시 쌍둥이로 볼 수 있다. <냉장고를 부탁해>, <마스터 셰프 코리아>, <한식대첩> 등 셰프가 중심이 된 쿡방은 기본적으로 열정과 승부의 서사다. 이러한 프로그램에서는 기술의 경쟁, 허세 부리기, 기싸움, 요리 테크닉, 최종 승부가 기본적인 서사의 요소를 이룬다. 모두가 노력해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한 후 최고의 운과 실력을 가진 이가 승리해서 영광을 가져가는 이 ‘서바이벌’ 서사는 자본주의 사회가 실제로는 부당하고 불공평한 자신의 모순을 감추는 형식이다. <삼시세끼>, <집밥 백선생> 등 셰프가 아닌 연예인이 중심이 된 쿡방은 여유와 공생, 공감의 서사다. 함께 일하기, 지식을 함께 나누기, 뒤처진 이와 함께 가기, 각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며 공동으로 뭔가를 이루어가기 등의 서사요소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힐링’의 서사는 ‘서바이벌’ 서사와는 완전히 다른 가치를 설파하지만 동일한 이데올로기적 기능, 곧 동료, 친구, 가족 간의 우애와 사랑, 협동이 남아있는 이 사회는 ‘여전히 살만한 곳’임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서바이벌과 힐링의 서사가 같이 있어야만, 이들이 쌍둥이로 존재할 때라야만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는 체제의 모순을 가리면서 동시에 그 모순을 수용하며 사는 것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자신의 핵심적 역할을 완수할 수 있다.

 

5.

 

쿡방은 도대체 ‘무엇’인가? 쿡방은 그저 셰프나 연예인들이 나와 주어진 재료로 멋지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만들어 전시하고 이를 먹는 것을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 장르인가? 물론 그것도 하나의 정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표면적인 정의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러한 쿡방이라면 ‘요리프로’라는 이름으로 예전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다. 쿡방은 무엇인가? 오늘날 유행하는 쿡방은 한국사회의 욕망을 보여주는 문화적 형식이다. 앞서 얘기했듯, 우선 그것은 한국사회 대중이 공유하는 욕망, 곧 더 고급스럽고 서구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다. 다른 한 편으로는 한국사회가 성적으로 분할되어 작동하는 방식, 곧 남성의 공적노동과 여성의 사적노동이라는 성별 노동분업의 현실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감춘다. ‘섹시한 남성 셰프’라는 쿡방의 지배적 요소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보다 더 큰 차원에서, 쿡방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문화적 형식이기도 하다. 즉,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속에서 생존경쟁을 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대중을 다그치면서 동시에 위무하는, 서바이벌과 힐링으로서의 문화적 서사인 것이다. 쿡방은 ‘음식’과 ‘요리’를 재현하지만 그것은 표층에 불과하다. ‘음식’과 ‘요리’라는 표층 아래 심층에는 ‘경쟁’과 ‘공생’이 존재한다. 쿡방이 진정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은 이러한 메시지를 ‘새롭게’ 전달하기 위한 매개체일 뿐이다. 이 매개체는 계속 바뀐다. 때로는 ‘노래’, 때로는 ‘여행’, 때로는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때로는 ‘음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다음에 무엇이 올 지 우리는 모르지만, ‘경쟁’과 ‘공생’이라는 이중의 메시지는 바뀌지 않을 공산이 크다.

쿡방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지배적 의미요소인 이 ‘경쟁’과 ‘공생’이라는 메시지는 자본주의 체제 속 대중문화가 수행하는 ‘관리’(management) 기능과 연관된다. 자본주의 체제는 파편화된 개인들과 소비를 통해서만 가능한 삶을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대중은 언제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 삶이 앞으로 계속 될지, 왜 이렇게 삶이 허무한지, 왜 이렇게 힘들기만 한지, 왜 언제나 경제는 위기인지, 왜 정치는 내 삶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지 등. 이러한 불안은 잠재적이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 언제나 폭발하여 정치적 힘이 될 가능성을 가진다. 자본주의 체제의 대중문화는 이 불안을 어떻게든 관리해야만 한다. 이 불안의 관리는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대중이 가지는 이 불안을 만들어낸 체제의 위대성을 문화적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 다른 하나는 이 불안을 해소할 판타지를 문화적 방식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경쟁’이 전자라면, ‘공생’은 후자다. ‘경쟁’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이가 정당한 방식으로 승리하여 보상받는 이야기를 본다. 이러한 이야기는 자본주의 체제의 근원적 불공평성, 곧 착취라는 요소를 가리며, 연줄과 족벌(cronyism)이 지배하는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한 모습 역시 가린다. ‘공생’의 서사 속에서 우리는 각자도생과 생존경쟁의 현실 저편의 이상향을 본다. 전형적인 판타지 형식을 가진 이 ‘공생’의 서사는 자본주의 체제가 불가능하게 만든 모든 인간적이며 아름다운 것들이 마치 지금 존재하는 것 같은 환상을 제공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대중문화는 ‘경쟁’과 ‘공생’의 서사를 놀라운 방식으로 배치하고, 그 안에서 멋진 인물들과 감동적인 스토리들을 끌어냄으로써 대중이 품고 있는 불안을 ‘관리’한다. 이 불안은 매일매일 편성된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매일매일 일시적으로 진정된다.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고유한 이 ‘불안’은 자본주의 체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결코 완벽하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불안이 있는 한, 자연히,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동경도 함께 존재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해 먹고, 친구들과 음식을 먹고 나누고, 자연에서 삼시세끼를 해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요리의 기술을 연마해 놀라운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 등은 모두 우리가 가지고 있으며 가질 수밖에 없는 ‘동경’이다. 이 동경의 본질은 지금과는 다른 사회, 우애와 사랑과 여유가 넘치는 삶에 대한 갈망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대중문화는 불안을 관리하지만 결코 더 나은 삶과 사회에 대한 이 원초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그리고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인, 동경을 제거할 수는 없다. 다양한 이야기를 펼치는 쿡방에서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관리를 목격하지만, 동시에 이 유토피아적 갈망도 함께 포착할 수 있다. 음식이란 결국 나눠먹을 때 가장 맛있는 법이고, 요리란 사랑하는 이에게 해줄 때 가장 신나는 법이다. 쿡방은 이러한 공동체적 삶의 진리를 재현하면서, 동시에 음식과 요리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는 사회에 사는 이들의 불안을 위무하여 진정시킨다. 쿡방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 속 한국인들의 근원적 불안과 원초적 동경이 버무려져 끓어 넘치는 냄비 같은 것이다.

 

 

(반년간지 <쓺>, 2015년 가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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