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5호][신간안내]게임 이펙트 _행복한 뇌를 만드는 게임의 문화심리학 _이매진 컨스트 51 이동연 지음 | 이매진 | 2014년 11월 21일

 

게임 이펙트 _행복한 뇌를 만드는 게임의 문화심리학 _이매진 컨스트 51 이동연 지음 | 이매진 | 2014년 11월 2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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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하는 아이들의 뇌는 행복하다!

누구나 게임을 하지만 아무도 게임을 모르는 게임 문화 전쟁의 시대

게임을 두려워하는 사회는 열정과 몰입의 감성 중독을 셧다운할까

놀이하는 인간의 행복한 뇌를 만드는 게임의 문화심리학을 찾아

 

 

게임이라는 암 덩어리는 단두대로? ― 게임 하는 사회에서 왜 게임 죽이기가 반복될까

집, 버스, 지하철, 학교, 교회, 절, 비행기, 화장실. 이 모든 곳에서 남녀노소가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바로 게임이다. 게임은 이제 특별한 오락이 아니라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일상이 됐다. 엄마 주머니를 뒤져 50원짜리 동전을 들고 오락실로 달려가던 아이는 어느덧 스마트폰으로 하트를 날리며 우리 아이의 행복한 미래만 고민하는 부모가 됐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게임 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그런 게임이 지금 ‘셧다운’되고 있다. 알코올, 도박, 약물에 더해 ‘4대 중독’으로 분류돼 ‘창조경제’를 위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위기에 몰렸다.

《게임 이펙트》는 강제적 게임 셧다운제를 도입한 뒤 논란이 된 게임 규제에 관한 논의를 정리하고 게임을 둘러싼 한국 사회의 논쟁을 다른 방식으로 고민한 결과물이다. 게임이 한국 사회에 미치는 효과에는 부정적 요소와 긍정적 요소가 모두 있다. 문제는 공부 대 게임, 산업 대 문화, 경제 대 교육 등 게임을 둘러싼 여러 이분법 속에서 부정적 요소만 일방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은 게임중독법을 둘러싼 논란을 포함해 게임 규제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고 게임의 사회 심리, 게임과 뇌과학에 관한 다른 견해, 게임이 창의적 교육과 문화 활동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소개하려는 어느 문화 연구자의 고군분투기다.

 

게임은 놀이다 ― 게임 문화 전쟁과 게임의 문화심리학

1장 ‘게임하는 사회’는 어느 순간 우리들은 늘 다양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일깨운 뒤, 우울증 극복, 친구 사귀기, 학습에 도움을 받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게임 디자이너 제인 맥고니갈의 주장을 살펴본다. 또한 게임은 한 사회의 거울이자 더 나은 삶을 위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2장 ‘게임포비아’는 게임을 두려워하는 사회 심리의 연원을 살핀다. 두려움과 혐오감이라는 두 공포 사이에서 게임은 놀이가 아니라 척결해야 할 악이 됐다. 국가, 정치, 종교의 삼각 동맹이 개입된 게임포비아의 발생 원리를 짚은 뒤 그 사회 심리적 특성을 살피고, 포비아를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 관리 장치로서 셧다운제의 의미를 점검한다.

3장 ‘‘게임 죽이기’의 사회 심리’는 정부와 이른바 시민단체가 총동원돼 게임 중독에 맞서 감행하는 게임 죽이기라는 마녀사냥의 심리적 근거를 알아봤다. 국가의 통치주의, 시민사회의 보수주의, 기독교의 본질주의가 뒤얽힌 게임 죽이기의 사회 심리는 사회적 신경증, 반복되는 히스테리, 오이디푸스화하는 편집증, 콘텐츠 조울증를 특징으로 한다.

4장 ‘게임은 뇌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정신의학계에서 게임중독법을 지지하는 논리가 잘못됐다고 반박한다. 게임이 뇌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를 보여주는 연구가 부정적 효과를 강변하는 연구 못지않게 많은데, 대표적으로 뇌과학자 다핀 바벨리에와 게임 비평가 톰 채트필드의 견해를 살펴본다. 또한 게임이 개인의 정신 건강과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는 의미에서 게임 중독은 제3의 중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감성 중독’으로 새롭게 정의된다.

5장 ‘게임 이펙트와 문화 전쟁’은 1997년 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된 이래 만화, 영화, 게임 등 대중문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을 ‘문화 전쟁’의 맥락에서 살펴본 뒤, 게임 혐오론자들이 지금 벌이고 있는 문화 전쟁의 의미를 살펴본다. 또한 게임을 모방해 폭력이 일어난다는 ‘게임 모방론’이 아니라 게임이 사회적 폭력이라는 현실에 조응하고 폭력적인 현실을 성찰하게 해준다는‘게임 반영론’이 더 타당하다고 알려준다.

6장 ‘행복권과 수면권 사이’는 새로운 규제 장치로서 강제적 게임 셧다운제에 관련된 논의가 펼쳐진 과정을 살펴보고, 이 제도가 시간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공포심을 유발하는 관리 장치이며 수면권이라는 청소년 보호 논리로 덧칠해 청소년의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고 비판한다.

7장 ‘내가 게임중독법을 반대하는 열 가지 이유’는 잘못된 통계와 혼란스런 개념을 적용한 탓에 게임 중독의 정의를 오해하고 중독의 원인을 잘못 짚어 올바른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게임중독법의 문제를 살펴본다.

8장 ‘청소년 보호, 표현의 자유, 게임 규제’는 청소년 보호주의가 강제적 게임 셧다운제라는 새롭지만 낡아 빠진 사회적 관리 장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이며 게임을 덜하게 하는 효과도 거두지 못하는 규제 장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지나친 규제의 결과 게임 콘텐츠가 지니는 문화적이고 교육적인 가치라는 긍정적인 측면은 무시되고 표현의 자유와 청소년의 인권만 후퇴할 뿐 장기적인 문화적 돌봄은 점점 더 실현되기 어렵다고 비판한다.

9장 ‘청소년과 게임, 그 불편한 진실’은 2012년에 문화사회연구소가 한 청소년 게임 이용 실태 조사 결과를 소개하면서 청소년의 게임 이용에 관한 통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게임의 시간은 사춘기라는 질풍노도의 시간을 견디게 해주는 여가 활동이자 또래 문화이며, 폭력이 원인은 게임이 아니라 게임을 하게 만드는 상황에 있다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통해 쓸데없는 규제보다는 문화적 돌봄과 새로운 여가 문화가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0장 ‘게임과 학교’는 창의적 게임 교육의 사례를 살펴본 뒤 미디어 교육의 도구이자 하나의 문화로 게임을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감정의 시간을 지켜라 ―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임을 하기 위해

게임을 하는 시간이 행복하다면 게임 좀 더 하는 게 대수일까. 게임 하는 시간을 공부와 돈과 산업의 논리에 가두지 말고 감정과 문화와 교육의 매개로 활용하자는 게 바로 이 책이 주장하는 문화 가치론이다. 행복한 뇌를 만드는 게임 이펙트는 게임 문화 전쟁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의 즐거움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 여기에서.

 

 

|본문 속에서|

 

게임은 언제 어느 곳에서든 한다. 사람들은 집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정류장에서, 학교에서, 교회나 절에서, 비행기 안에서,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게임을 즐긴다. 특히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면 언제, 어느 때든지 게임을 즐길 수 있다. 게임은 이제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것이 됐다. 그렇다면 게임의 일상화는 스마트폰 시대만의 특징일까? 물론 아니다. 스마트폰 시대뿐 아니라 PCS 시대, 286컴퓨터 시대, 전자오락실 시대에도 게임은 대중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즐기는 문화 콘텐츠였다. ― 본문 12쪽

 

게임의 폭력성과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도 게임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게임의 폭력성에 대해 염려하는 사람들은 게임의 과도한 이용 때문에 청소년들이 훨씬 폭력적으로 변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게임의 폭력성이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심각하지 않으며, 게임은 단지 우리 사회의 폭력성을 반영할 뿐이라는 주장을 한다. 부모들은 대부분 게임이 아이들의 학습력을 떨어뜨리고, 공부하는 시간을 절대적으로 빼앗아간다고 말하지만, 문화 연구자들은 게임이 오히려 아이들의 학습력과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여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본문 14~15쪽

 

게임은 기본적으로 시간을 소비하는 놀이이다. 말하자면 일정한 시간의 소비가 보장될 때, 게임의 놀이가 성립될 수 있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게임을 둘러싼 갈등은 사실 게임 콘텐츠 자체보다는 게임을 즐기는 시간에서 비롯된다. 아이들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고, 부모는 공부에 지장을 줄 정도로 게임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 본문 24쪽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담론들이 유포되면서 게임포비아는 어느 순간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대상이 된다.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등 국가 기관은 청소년 보호를 앞세워 게임포비아를 확대 재생산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특히 게임이 연루된 반사회적 사건들이 미디어를 통해 과장되게 보도되고, 유사 사건의 재발 방지책을 강구해야 하는 국가는 게임의 강력한 규제를 요구하는 보수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 한국 사회에서 게임포비아의 유포, 확산에는 대체로 국가의 통치주의, 시민사회의 보수주의, 기독교의 본질주의가 개입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 이념의 삼각 동맹이 법과 제도를 통해 게임포비아를 정당한 사회적 가치로 둔갑시켜버린다. ― 본문 27쪽

 

게임을 새롭게 인식하려면 산업 콘텐츠와 문화 콘텐츠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게임을 즐기는 대중은 게임을 무형의 디지털 콘텐츠와 상품의 문화 콘텐츠로 구분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문화적 놀이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게임의 공학적 실체는 디지털 콘텐츠이고, 산업적 실체는 문화 콘텐츠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 실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게임의 문화적 가치이다. 게임은 문화이고 놀이이다. ― 본문 65~66쪽

 

감성 중독은 약물과 같은 화학적, 생리학적 요인에 의해 뇌에 일정한 영향을 주는 물질 중독이나, 도박과 같은 반복적인 행위에 의해 내성이 생겨나는 행위 중독과는 다르게 문화 매체 혹은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면서 생겨나는 중독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약물이나 도박 중독과 다르게 게임 중독을 게임 ‘과몰입’이라는 용어로 대체하려는 이유도, 놀이를 즐기고자 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그 감성적 쾌락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본문 83~84쪽

 

게임을 즐기는 행위는 인간에게 즐거움을 주는 행위이다. 놀이에 대한 욕망은 인간 감정의 깊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다. 게임은 그래서 화학물질에 의거한 약물 중독이나 단순 반복에 의거한 행위 중독과는 다른 인간의 감성 부분을 자극한다. 게임의 몰입 감정은 약물이나 도박보다는 오히려 연인에 대한 로맨틱한 사랑이나 예술에 대한 강한 열정의 감정에 더 가깝다. 이것이 제3의 중독이라 부를 수 있는 감성 중독이다. ― 본문 85쪽

 

게임 반영론은 게임이 폭력과 무관하다는 관점이 아니라 게임이 사회적 폭력의 현실에 일정하게 조응한다는 관점이다. 게임 반영론은 게임과 폭력의 관계에서 상호 영향을 중시한다. 게임은 사회적 폭력의 원인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폭력적인 현실을 성찰하게 해주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 본문 107쪽

 

세월호 참사를 통해서 우리는 청소년들에게 무조건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 때로는 나쁜 복종을 거부할 수 있는, 스스로 사태를 인지하고 결정하는 역량의 강화야말로 청소년들의 미래를 위해 올바른 선택이다. 청소년들이 스스로 정하지도 않은 수면권이라는 논리로, 심야에 게임을 하고 안 하고 정도의 결정조차 청소년 스스로 내리지 못하게 한 채, 국가가 일방적으로 법으로 강제한다면, 청소년들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가 됐다. ― 본문 136~137쪽

 

우리 사회는 청소년 보호 문제를 항상 제도적 규율과 법적 강제력으로 해결하려 든다. 부모들도 자녀들의 일탈과 비행에 대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역할을 규율 제도와 사법 권력에 맡기려 든다. 마치 법과 제도가 만들어지면, 청소년들의 일탈과 비행이 쉽게 사라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감은 청소년 보호주의를 강화하고, 규율과 사법 장치의 강화를 정당화해주는 요소로 이용된다. …… 청소년보호법 제정 이후에 청소년들의 폭력, 비행, 자살의 비율이 줄어들기는커녕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다. 청소년 성범죄 역시 강력한 처벌 조항을 가지고 있는 아동청소년보호법이 제정된 후에도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 본문 167쪽

 

셧다운제는 중세 시대에 전염병을 관리하기 위해 병원이라는 장치를 만들고, 정신 질환자를 격리하기 위해 임상의학이라는 장치가 개발됐듯이, 청소년들을 건전하고 윤리적인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가 고안한 관리 장치이다. 청소년 보호론은 사회적 관리 장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며, 셧다운제는 청소년 보호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사회적 관리 장치이다. 결국 셧다운제는 청소년들에게 게임을 줄이기 위한 목적보다는 이 제도가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청소년 보호론을 강력히 주입하기 위해 고안해낸 규제 장치인 셈이다. ― 본문 205쪽

 

우리가 사춘기 시절에 방황하며 세운상가를 돌아다니거나 만화방에 가서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사춘기 청소년들은 게임을 한다. 그래서 사춘기 청소년들의 게임 이용은 생애 주기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정상적이다. 사춘기라는 감정의 시간과 그 감정의 불안감을 달래주는 게임의 시간은 상호 보완적일 수 있다. 게임의 시간은 감정의 시간을 조정해주는 완충 역할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모들은 게임의 시간이 감정의 시간을 지배하고, 나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게임의 시간이 감정의 시간의 원인이고, 감정의 시간은 게임의 시간의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게임의 시간은 자녀들의 생애 주기에서 자연스러운 순간이 아니라 마치 정지된 채 영원히 지속되는 악마의 시간인 셈이다. ― 본문 213쪽

 

오늘날 우리 청소년들에게 게임은 보편적인 문화이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게임을 하고 있고, 하루에 5시간 이상씩 하는 청소년들도 발견됐다. …… 실제 일상에서 게임이 차지하는 시간이 물리적인 양으로는 클 수 있으나, 게임을 하는 것 자체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갖는 행위라기보다 시간을 때우는 방편이었다. …… 청소년 자신은 자기 통제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일련의 규제와 정책에 대해서 이미 규제를 피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자신하며 제도를 ‘조롱’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청소년들이 밝히는 게임 중독의 해결 방법은 청소년들이 다른 여가 활동을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인 인프라인데, 이런 지원이 부족하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 본문 228~229쪽

 

많은 사람들은 게임이 산업적으로는 필요하지만 교육적으로는 해롭다는 이분법적 사고를 하고 있다. 게임 산업계도 게임 과몰입론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킬 때면 대체로 산업적으로 게임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규제를 반대한다는 입장을 반복한다. …… 교육계나 학부모 단체들은 게임 업계가 자신들의 비즈니스에만 혈안이 되어 청소년들을 망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이분법에서 한 가지 빠져 있는 점은 바로 게임이 문화라는 점이다. 산업 경제론과 교육 무용론 사이에 빠져 있는 제3의 의미가 바로 문화 가치론이다. ― 본문 254쪽

 

 

|지은이|

 

이동연 중앙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메타비평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과 교수로 있다. 문화사회연구소 소장,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 게임문화재단 이사를 거쳤고, 지금은 문화연대 공동집행위원장, 계간 《문화/과학》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문화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한국 문화 연구 3부작인 《문화부족의 사회》, 《문화자본의 시대》, 《대안문화의 형성》을 비롯해 《아시아문화연구를 상상하기》, 《예술교육을 넘어서》, 《전통예술의 미래》, 《아이돌》(엮음) 등 많은 책을 썼다.

 

 

|차례|

 

머리말

1장 게임하는 사회

2장 게임포비아 ― 누가 게임을 두려워하랴

3장 ‘게임 죽이기’의 사회 심리

4장 게임은 뇌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

5장 게임 이펙트와 문화 전쟁

6장 행복권과 수면권 사이 ― 강제적 게임 셧다운제에 관한 모든 것

7장 내가 게임중독법을 반대하는 열 가지 이유

8장 청소년 보호, 표현의 자유, 게임 규제

9장 청소년과 게임, 그 불편한 진실

10장 게임과 학교 ― 창의적 게임 교육의 사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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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5호][신간안내]『변증법의 낮잠: 적대와 정치』(서동진 (지은이) | 꾸리에 | 2014-12-15)

『변증법의 낮잠: 적대와 정치』
(서동진 (지은이) | 꾸리에 | 2014-12-15)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라는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에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에 매달리는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규명해냈던 사회학자 서동진은 이번에는 ‘정치의 죽음’이라는 말로 상징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과거 사회변혁의 주체였던 인민이 어떻게 자기이해에 충실한 시민들로 개별화되었으며 민주주의란 것 또한 부정(否定)을 부정하는 체제유지의 알리바이로 전락하였는지를 따지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제대로 해명되어보지 못한 경제와 정치의 변증법적 종합을 시도한다.

최악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무력한 허무주의와 최선의 세계에 살고 싶다는 초조한 능동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우리에게 그가 말하려는 변증법적 부정의 정치학은 무엇일까? 그는 브레히트를 빌려 ‘모순은 희망’이라고 말한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게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엇인가가 있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모순일 것이다.

오늘로 말하자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본주의적 적대이고 이 모순이 정치의 장소이다. 모순에서 희망을 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최선인 듯 보이는 세계와 최악인 듯 보이는 세계를 조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새로이 발명되는 수밖에는 없다. 이 책은 그러한 분투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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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5호][신간안내]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천정환 지음 | 마음산책 |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 천정환 지음 | 마음산책
잡지 창간사로 더듬는 현대사의 풍경 (경향신문_정원식 기자)

 

별 볼 일 없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영국 남자가 인기 절정의 할리우드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그린 영화 <노팅힐>은 남자(휴 그랜트)가 출국을 앞둔 여배우(줄리아 로버츠)의 기자회견장을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유명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남자는 자신이 잡지 ‘호스 앤드 하운드’(말과 사냥개)의 기자라고 소개한다. 발언 기회를 얻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잡지의 기자를 사칭한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웬 사냥 잡지 기자냐고 수군대는 이들은 있지만 누구도 그가 가짜라고 의심하진 않는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잡지가 있고 한정된 전문 영역만 다루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 지금 한국에선 ‘월간 축산’ ‘월간 양계’ ‘월간 배관기술’ ‘월간 버섯’ 같은 잡지들이 발행되고 있다.

잡지는 신문에 비해 적은 비용과 인력으로도 만들 수 있어 발행하기 쉽다. 발행인의 사정에 따라 주간, 월간, 계간, 반년간, 연간 등 발간 주기도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창간하기 쉽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의 요구와 분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객관성을 강조하는 신문에 비해 만드는 이들의 주관을 강력하게 투영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 점에서 잡지의 역사를 살피는 것은 잡지라는 매체에 새겨진 각 시대의 지적·문화적 풍경을 들여다보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은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가 1945년 이후 출간된 한국 잡지 123개의 창간사를 검토한 책이다. 왜 창간사인가? 잡지 창간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잡지를 중심으로 앎과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산물이라면, 창간 주체들의 이 같은 방향성이 집약돼 있는 것이 바로 창간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1945년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를 10년 단위로 끊어 해당 시기를 대표할 만한 창간사들의 전문을 싣고 시대적 맥락을 덧붙였다.

 

한국인들에게 해방은 출간의 자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지 부족이라는 물적 결핍 때문에 잡지 발간은 원활하지 못했다. 이 시기 주요 잡지들은 해방 공간의 특성 탓에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이를테면 김구를 창간호 표지에 내세운 ‘민성’(1945년 12월)은 좌우 대립이 본격화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해 중도를 지향했다. 잡지 문화는 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 중반부터 재건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출판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독서 대중의 역량이 커지면서 출판문화가 비로소 식민지 잔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잡지의 하나인 ‘사상계’, 한국 최초의 계간지 ‘지성’, 1960년대까지 한국문단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현대문학’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잡지는 지성과 오락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양분됐다. 그 이전까지 일간-월간으로 짜여져 있던 정기간행물 시장의 주도적 흐름이 주간-계간으로 변모하면서 이런 구도가 만들어졌다. 계간지에 지성의 대변지라는 이미지를 새겨넣은 것은 1966년 창간된 ‘창작과비평’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특출한 엘리트였던 20대 청년 백낙청은 창간사를 대신한 권두 논문에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을 위한 실험은 예술적 전위 정신과 더불어 역사적·사회적 소명의식, 그리고 너그러운 계몽적 정열을 갖추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문학 계간지가 문학을 거점으로 동시대 담론을 선도하는 지성의 전진 기지 구실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반영돼 있다. 그 대척점에는 1968년 창간된 주간지 ‘선데이 서울’이 있었다. 이 잡지는 “첫사랑의 맛을 되씹는 감미로운 화제, 된장찌개 냄새 풍기는 구수한 담론으로 메마른 삶을 기름지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넘치는 멋, 풍부한 화제, 감미로운 내용”을 담겠다고 선언했다. 저자는 그 ‘멋’의 실제 내용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성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대중 주간지들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대중의 욕망을 표현하며 동시에 대중에 대한 ‘욕망의 교육기관’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1970년대는 유신독재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현대적 잡지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1976년 창간된 ‘뿌리깊은 나무’다. 한창기라는 르네상스적 재능이 창간한 이 잡지는 전면적인 가로쓰기, 순 한글문장과 어휘의 사용 등 파격적인 시도로 한국 잡지사를 ‘뿌리깊은 나무’ 이전과 이후로 나눴다. 한창기는 창간사에서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라고 믿습니다”라며 “이 나라의 자연과 생태와 대중문화를 가까이 살피려고 합니다”라고 썼다. 저자는 박정희 시기에 “국가가 채찍질해서 달리는 그만큼, 민중의 저항과 대중지성도 성장했다. 그런 시대정신에 부합했기 때문에 ‘뿌리깊은 나무’는 크게 공감을 얻고 잡지 문화를 바꿔놓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함석헌이 민중을 씨알에 비유하며 자신만의 사상적 게릴라전을 펼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큰 반향을 얻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80년대 잡지 문화를 이해하는 열쇳말은 ‘저항’이다. ‘실천문학’을 필두로 신군부의 정치적 억압에 맞서기 위해 잡지와 단행본의 중간 형태를 취한 무크가 쏟아져 나왔다. 1985년 창간된 월간 ‘말’은 제호부터 상징적이다. 유신시절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송건호는 ‘말’ 창간사에서 “우리 시대 말다운 말의 회복을 위한 싸움이 결코 단순치 않음을 예감한다”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암초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권에 대한 문화적 저항은 1980년대를 학술운동과 사회과학 잡지의 전성 시대로 만들었다. 1990년대는 문자문화의 마지막 전성 시대이자 ‘문화’의 시대였다. 1987년 이후 1993년까지 주간지는 226종에서 2236종으로 10배, 월간지는 1298종에서 3146종으로 3배가량 늘었다. ‘문화과학’ ‘이매진’ ‘상상’ ‘키노’ ‘씨네21’ 등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잡지들이 쏟아져나왔다.

2000년 이후 잡지는 쇠락기를 거치고 있다. 저자는 시대가 바뀌더라도 “세계를 문자와 활자, 문학이란 행위로 포착하여 해석하고 변혁하려는 노력은 계속된다”며 그러한 노력을 담아내는 틀로서의 “잡지스러운 것”은 끝없이 모양을 바꾸면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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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5호][북클럽][후기]제10회 북클럽 후기

제10회 문화과학 북클럽이 열렸습니다

지난 11월 25일 열린 제10회 문화과학 북클럽에서는 『맑스와 마음의 정치학: 생산양식과 주체양식의 변증법』의 저자인 심광현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김성일 편집위원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최원 편집위원과 이동연 편집인이 토론자로 참여하였습니다. 맑스 사상의 현대적·문화적 재해석과 인지과학의 결합을 통해 자기변혁과 세계변혁을 일치시키는 전략과 실천, 새로운 주체 형성의 가능성을 모색한 심광현 선생님의 이론적 시도에 대해 최원 편집위원과 이동연 편집인의 날카로운 논평과 질문,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상세한 토론 내용은 『문화/과학』 80호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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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5호][동정]

이동연 동정

 

11월 21일 <게임 이펙트: 뇌를 행복하게 하는 게임의 문화심리학>(이매진) 출간

11월 26일 포함공대에서 <케이팝의 미미크리와 문화자본의 논리> 초청강연

11월 27일 서울시 신청사 대회의실에서 개최한 서울문화재단 주최 <예술과 노동 국제심포지엄> 좌장으로 참석

12월 4일-8일: 아시아전자상가 비교연구 차 홍콩/중국 심천 출장

12월 12일: 제2회 세운포럼 <우리가 기억하는 세운상가, 우리가 꿈꾸는 세운상가> 좌장으로 참석

12월 13일: 인문학협동조합 주최 <세월호 이후 우리는>(장소 푸른역사 아카데미) 토론회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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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5호][칼럼]‘갑질’의 저편(문강형준)

‘갑질’의 저편

(본 글은 한겨레 크리틱에  12월 20일 공개된 글임)

문강형준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는 단연코 ‘갑질’일 것이다. 한 주 동안 미디어를 도배하디시피 한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소위 ‘땅콩리턴’ 사건은 ‘갑질’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직원에게 폭언을 퍼붓는 서울시향 대표, 반복적으로 학생을 성추행하고도 사표만 내면 그만인 교수, 술집 종업원을 폭행하고도 돈이 많기에 당당한 어떤 주식투자 귀재에 관한 뉴스들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갑질’의 다양성과 깊이를 보여준다.

흔히 ‘갑질’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재현되지만 ‘갑질’은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다.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갑이며 을이다. 갑은 어느 순간 을이 되고, 을은 어느 순간 갑이 된다. 이처럼 갑과 을은 변함없는 본질이 아니라 내가 자리해 있는 위치의 상대성, 곧 ‘관계’의 문제다. 위치가 바뀌면 갑을관계는 순간적으로 전복된다. <코미디빅리그>의 ‘갑과 을’이라는 코너는 이 위치의 상대성을 보여주며 웃음을 유발한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엄격한 피아노 선생 에리카는 학생들의 실력을 냉정히 평가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갑이지만, 제자인 클레머의 유혹에 굴복해 ‘선생’에서 ‘여자’의 위치로 가는 순간 을이 된다. 이 둘 사이의 권력관계가 어떤 식의 폭력을 동반하는지를 보라. 일등석의 조현아는 갑이었지만 포토라인 앞의 조현아는 을이고,일등석의 사무장은 을이었지만 뉴스 프로그램 속의 사무장은 갑이다. 한바탕 소동 후, 회사에 복귀할 조현아와 사무장은 다시 기존의 갑을관계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한국인이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민감한 것, 어떻게든 그 위치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떻게든 서울 쪽으로, 재벌 쪽으로, 권력 쪽으로 위치할 때, 내가 갑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민주주의는 이 갑을관계의 위치성을 영구적으로 전복하는 것, 없애는 것이다. 민중이 왕의 목을 치고, 대중이 무능한 정부를 갈아치우며,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고, 학생이 선생과 동등하게 토론하고,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고, 이주자가 정주민과 같은 권리를 누리며,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기존의 갑을관계가 전복되거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제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문화’이고 오직 그럴 때만 비로소 그 이름에 값할 수 있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있지만, 문화로서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며, 언제나 요원하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그렇고, 이윤과 효율을 제일원칙으로 삼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평등을 제일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적 관계를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극단적 갑을관계가 효율성의 지표이자 권력의 표상이 되어 있는 현재의 반민주주의적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권력은 권력대로 대중은 대중대로 변화무쌍한 갑을관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쾌락을 누리며 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한 ‘을’에 위치해 있는 이들, 반민주주의적이고 극자본주의적인 환경 속에서 쓰레기처럼 폐기되어 있는 이들의 분노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복수를 시행하는 순간, 곧 ‘갑’이 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유도 모른 채 완벽한 ‘을’로 변모한다. 농촌총각, 중국동포, 이주노동자라는 영원한 을을 떠올려보라. 이들에게는 자신을 대변할 조직도, 올라갈 크레인도 없다. 이미 조짐을 보이는 이 끔찍한 폭력의 도래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암흑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이에 비하면 조현아는 스펙터클이자 이벤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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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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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4호][칼럼]폭행이라는 범죄(권경우)

폭행이라는 범죄

 

권경우(문화사회연구소 소장)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혼자 식당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탓인지 넓은 홀에는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TV에서는 톤이 높은 아나운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그 꽥꽥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뉴스채널로 돌렸다. 마침 현장을 연결하는 생중계를 할 참이었는데,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경찰서에 출두하는 장면이었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질문을 쏟아냈고 김부선씨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했다.김씨는 자신이 언론으로부터 이렇게까지 큰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알다시피 김부선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관리비 문제를 파헤치다가 일부 주민들과 충돌해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됐다. 언론에서는 연일 김부선씨 사건을 대서특필했으며 급기야 폭행사건 피의자로 출두하는 것을 현장 생중계로 보여준 것이다. 전 국회의장의 캐디 성추행 사건을 비롯한 더 중요한 사안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사건의 핵심은 폭행이 아니라 아파트 관리비 비리 문제였음에도 이미 언론의 프레임은 ‘김부선씨 폭행’으로 귀결돼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폭행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유가족이 야당 정치인과 함께 밥과 술을 마셨고 대리운전 기사와의 시비로 인한 폭행으로 경찰 조사와 함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과하고 언론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사건이 보도된 것을 살펴보면 일부 언론에서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심각하고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중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특별법, 유가족대책위 등이 많은 이들의 관심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세월호 참사와 특별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언론이 유독 유가족의 폭행 사건을 집중 보도했다는 점이다.

위의 두 사건은 오늘날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사건은 사회적·정치적 맥락에 따른 프레임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와 의미는 중요하지 않으며 얼마나 대중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만 남는다. 그렇다 보니 정작 일상에서 잘못된 관행이나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환호를 받지 못한다. 지금 언론은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책임의 문제는 지나치면서 단순 폭행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오랜 세월에 걸친 조직적인 아파트 관리비 문제는 적당히 다루면서 김부선씨의 폭행 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세월호 유가족은 자식이나 가족을 잃은 슬픔과 연민의 대상이면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주체다. 그 중심에는 희생자 혹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언론에서 폭행 사건을 부각시키면서 순식간에 유가족에게 ‘가해자’의 정체성을 덧씌워졌다. 본래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정체성이 상실되면서 대중과 여론의 인식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보수언론이 노린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일관된 모습으로 보여줬던 정체성은 한 순간의 실수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너져야 할 부분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그들의 폭행 사건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김부선씨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대마초 비범죄화 캠페인을 벌였고 종종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대중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이력의 소유자로서 김부선씨는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누구보다 우리 안의 폭력과 억압을 혐오하는 배우였다. 신인 여배우의 자살 사건 당시에도 여자 연예인의 성상납의 실체를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소신을 밝힌 바 있다.경제적 궁핍함 역시 자존심을 지킨 결과였다. 그는 자연인으로서의 모습과 배우로서의 삶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파트 관리비 문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모른다. 왜곡과 분열의 시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인간에 대한 공감과 사랑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조롱과 모욕만 남았다. 이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좀 더 복잡한 시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냉소와 비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대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교수신문>. 2014.10.7. http://m.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9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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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4호][칼럼]홋카이도 대학과 안양교도소의 점심식사(오창은)

<칼럼> 마음으로 쓰는 편지

 

홋카이도 대학과 안양교도소의 점심식사

 

 

일본 북해도의 홋카이도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문학연구자들과 더불어 ‘식민주의와 문학’을 연구하기 위해 어렵게 떠난 답사여행이었습니다. 이 대학은 생물학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문대학입니다. 명성과 더불어 과거의 악명도 함께 지니고 있지요. 일본제국주의 시절, ‘인종학 연구’은 이 대학의 전신인 삿포로 농업학교였습니다. ‘식민주의 인종학’은 일본이 우월하기에 조선과 같은 열등한 민족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요.

나는 이 대학 후생관에 먹은 점심식사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한 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두 명의 일본 남학생들이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자기들끼리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일행 모두가 그 장면을 목격했지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찾을 수 없는 노골적인 비웃음을 그들의 얼굴에서 발견했으니까요. 일본 학생들의 무례함에 기분이 상했고,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어떤 모습이 그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와세다 대학 박사과정 유학생으로 우리 일행의 통역을 맡아주었던 곽형덕 선생이 그 상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본 사람들은 식사 때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카레와 같은 국물이 있는 덮밥류는 예외이지만, 어린아이를 제외하고는 모두 젓가락으로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때 숟가락을 사용해 밥을 먹고 있었지요. 그 모습을 처음 본 일본인 대학생들이 우리를 놀린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식사를 한다고요.

그 때의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점심식사로 뇌리에 남아있습니다. 홋카이도 대학 점심식사 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병 시절의 점심식사가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있었지요. 입소 첫날 점심식사 시간에 5분만에 식사를 끝내라고 조교가 다그쳤습니다. 그리고는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식사 종료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밥을 반도 먹지 못한 상태였기에,식판을 들고서 음식을 버리러가면서까지 허겁지겁 입에 밥을 밀어 넣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던 참혹했던 시절이었지요. 그 때의 모욕감 못지 않은 감정 상태를 홋카이도 대학에서 겪었기에 못내 개운치 않았습니다.

두 일본 학생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없는 사람의 경멸어린 시선을 맨 얼굴로 드러냈습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만이 우월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의 두 대학생은 숟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한국인들을 우스갯거리로 삼았지만, 자신들의 식사법만이 우월하다고 생각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얼마나 협소한 세상을 살고 있는가를 드러낸 셈이지요.

또 다른 점심식사에 대한 기억도 있습니다.

2008년 7월 14일, 안양교도소에서 먹었던 점심식사는 뜨거운 경험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벌써 6년 전의 일이지만, 그 때 함께 식사를 했던 안양교도소 조동주 교도관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늦게나마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 때 교도소에서 진행하는 평화인문학 강의를 하기 위해 강사들을 섭외하고, 프로그램을 짜고, 연락하는 업무를 맡아 분주했었습니다. 게다가, 첫 강의인 ‘마음을 다스리는 시읽기와 글쓰기’를 두차례에 걸쳐 제가 진행해야 했기에 무척 긴장한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조동주 교도관은 미리 안양교도소로 와서 함께 식사를 하자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당황스러운 제안이었지만, 왠지 거절하기 어려운 초대였습니다.

아마 교도관들은 상상하기 힘들겁니다. 일반인들에게 교도소의 점심식사가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에 대해서요. 도대체 어떤 공간에서 식사를 할까 하는 호기심, 그 다음은 메뉴는 무엇일까 하는 기대감,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떤 분위기일까하는 궁금증이 어우려져 사람을 위축시킵니다.

모든 것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복잡한 정문 출입 절차를 거쳐 구내 식당에 들어섰을 때, 나도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으니까요. 너무도 익숙한 구내 식당의 모습이 그곳에 펼쳐 있었습니다. 정복과 사복을 입은 교도관들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일상적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상상했던 긴장감은 감지되지 않았지요. 나는 낯선 곳에서 식사한다는 것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익숙한 공간적 분위기와 식당메뉴, 그리고 자연스러운 대화들에 오히려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아, 이곳은 그냥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구나’, ‘특별한 곳이 아니라 격리된 곳일 뿐이구나’하는 깨달음 같은 것을 얻었습니다. 교도소야말로 진지한 인문학적 성찰의 공간인 셈었던 것이지요.

철학자 박이문 선생은 『통합의 인문학』에서 “인문학은 인간성을 이해하려는 학문인데 인간성에 대한 탐구와 이해는 결국 인간의 반성적 성찰의 표현”이라고 했습니다. 교도소야말로 인간이 자신을 깊이 반성하고 성찰하는 곳이겠지요. 그 성찰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문학작품들이고, 예술작품들이며, 역사적·종교적·철학적·인문학적 책들일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덧붙여 인문학은 ‘인간에 대해 묻는 학문’이라고 봅니다. 그것은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물음이면서,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인문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동주 교도관과 그 짧은 점심시간에 나눴던 대화야말로 진정 인문학적인 대화였습니다.

조동주 교도관은 제게 진지한 어조로 ‘우리나라 형사사법체제의 여러 문제’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교도소에서 수용자를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기획’하면서 부딪친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지요. 저는 교도관의 생활에 대한 충분한 사전 지식이 없었음에도 교도소내 구내식당의 분위기와 식사하는 교도관들의 모습으로 인해 너무 쉽게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교도관들의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다른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세상을 이해하는 것, 그 뜨거운 경험 때문에 2008년 7월 15일 안양교도소의 구내식당에서의 점심식사를 잊지 못합니다.

 

 

 

오창은  (중앙대 교양학부대학 교수, 문학평론가)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에 당선하여 글을 쓰고,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문학평론집 『비평의 모험』(2005)와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2011), 인문비평서 『절망의 인문학』(2013)을 간행했다.

 

<월간 교정> 2014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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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4호][연구자료]새로운 지역문화예술교육의 방향 및 제도개선 방안

지역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한 연계 토론회

새로운 지역문화예술교육의 방향 및 제도개선 방안

 

 

발제 1
지역문화예술교육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
- 당신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
강원재

 

“오, 나여! 오 생명이여! 수없이 던지는 이 의문!
믿음 없는 자들의 끝없는 행렬, 바보들로 넘쳐흐르는 도시
아름다움을 어디서 찾을까? 오, 나여, 오 생명이여!
대답.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것, 생명과 존재가 있다는 것
화려한 연극은 계속되고 너 또한 한 편의 시가 된다는 것”
1. 본질로부터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장소
인류의 삶은 사람, 자연, 기술, 그리고 교육이 얽히고 섥히며 이뤄져 왔고 앞으
로도 그러할 겁니다. 어원적으로 볼 때 자연은 본성으로서의 스스로 그러한 Natura
와 물질로서의 법칙으로 그러한Physis이고, 과학은 그림 그리고 시를 짓고 셈을 하
는 Ars, Techne, Mathesis 등이며, 사람은 땅의 생명으로서의 Humus와 소통하는 존
재인 人間Demos, 그리고 공유하는 民衆Populus이며, 교육은 끌어내는 Eduke와 자유
롭게 실천하는 Praxis입니다. 더 나아가 인간이 과학을 통한 자연과의 관계 맺음은
문화의 어원인 농사짓는 행위로서의 Cultura와 문명의 어원인 시민들의 삶이 이뤄
지는 장소로서의 Civitas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문화예술교육’을
논의함에 있어서 이러한 각각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문화’,
‘예술’, 그리고 ‘교육’을 하나의 측면만 바라보고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학자 조지딕키가 예술정의란 모름지기 모든 예술작품에 필요충분이 되는 속성에
대한 것이므로 제도적으로만 분류가 가능하다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예를 들어 제
도 안에서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예술가로 인정받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물로
서 감상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만이 예술작품의 필요충분한 속성이라는 거지요)
반면 아름다움, 감정, 재현, 표현, 우아함, 숭고함, 창조성 등 본질에 관한 것은
주관적인 평가적 속성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예술정의에 있어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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