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4호][칼럼]폭행이라는 범죄(권경우)

폭행이라는 범죄

 

권경우(문화사회연구소 소장)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혼자 식당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탓인지 넓은 홀에는 한 명의 손님도 없었다. 벽에 걸린 커다란 TV에서는 톤이 높은 아나운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단순히 그 꽥꽥거리는 소리가 거슬려 뉴스채널로 돌렸다. 마침 현장을 연결하는 생중계를 할 참이었는데, 영화배우 김부선씨가 경찰서에 출두하는 장면이었다. 그곳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질문을 쏟아냈고 김부선씨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했다.김씨는 자신이 언론으로부터 이렇게까지 큰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알다시피 김부선씨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관리비 문제를 파헤치다가 일부 주민들과 충돌해 폭행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됐다. 언론에서는 연일 김부선씨 사건을 대서특필했으며 급기야 폭행사건 피의자로 출두하는 것을 현장 생중계로 보여준 것이다. 전 국회의장의 캐디 성추행 사건을 비롯한 더 중요한 사안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사건의 핵심은 폭행이 아니라 아파트 관리비 비리 문제였음에도 이미 언론의 프레임은 ‘김부선씨 폭행’으로 귀결돼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의 폭행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유가족이 야당 정치인과 함께 밥과 술을 마셨고 대리운전 기사와의 시비로 인한 폭행으로 경찰 조사와 함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피해자들을 찾아가 사과하고 언론 앞에서 공개적으로 사과의 메시지를 전했다. 이 사건이 보도된 것을 살펴보면 일부 언론에서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심각하고 비중 있게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중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인가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세월호 참사와 특별법, 유가족대책위 등이 많은 이들의 관심사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사실은 정작 세월호 참사와 특별법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언론이 유독 유가족의 폭행 사건을 집중 보도했다는 점이다.

위의 두 사건은 오늘날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사건은 사회적·정치적 맥락에 따른 프레임에 따라 새롭게 구성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와 의미는 중요하지 않으며 얼마나 대중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만 남는다. 그렇다 보니 정작 일상에서 잘못된 관행이나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환호를 받지 못한다. 지금 언론은 세월호 참사라는 국가책임의 문제는 지나치면서 단순 폭행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오랜 세월에 걸친 조직적인 아파트 관리비 문제는 적당히 다루면서 김부선씨의 폭행 사건을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세월호 유가족은 자식이나 가족을 잃은 슬픔과 연민의 대상이면서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는 주체다. 그 중심에는 희생자 혹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언론에서 폭행 사건을 부각시키면서 순식간에 유가족에게 ‘가해자’의 정체성을 덧씌워졌다. 본래 그들이 유지하고 있던 정체성이 상실되면서 대중과 여론의 인식이 달라지게 된 것이다. 보수언론이 노린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일관된 모습으로 보여줬던 정체성은 한 순간의 실수로 무너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정체성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무너져야 할 부분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그들의 폭행 사건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김부선씨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 대마초 비범죄화 캠페인을 벌였고 종종 자신의 입장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대중을 ‘당황’하게 만들었던 이력의 소유자로서 김부선씨는 누군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는 누구보다 우리 안의 폭력과 억압을 혐오하는 배우였다. 신인 여배우의 자살 사건 당시에도 여자 연예인의 성상납의 실체를 폭로함으로써 자신의 소신을 밝힌 바 있다.경제적 궁핍함 역시 자존심을 지킨 결과였다. 그는 자연인으로서의 모습과 배우로서의 삶이 일치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아파트 관리비 문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주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모른다. 왜곡과 분열의 시선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인간에 대한 공감과 사랑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조롱과 모욕만 남았다. 이제 선과 악, 옳고 그름의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좀 더 복잡한 시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은 냉소와 비난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새로운 대안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교수신문>. 2014.10.7. http://m.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9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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