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5호][칼럼]‘갑질’의 저편(문강형준)

‘갑질’의 저편

(본 글은 한겨레 크리틱에  12월 20일 공개된 글임)

문강형준

 

올해의 키워드 중 하나는 단연코 ‘갑질’일 것이다. 한 주 동안 미디어를 도배하디시피 한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소위 ‘땅콩리턴’ 사건은 ‘갑질’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직원에게 폭언을 퍼붓는 서울시향 대표, 반복적으로 학생을 성추행하고도 사표만 내면 그만인 교수, 술집 종업원을 폭행하고도 돈이 많기에 당당한 어떤 주식투자 귀재에 관한 뉴스들은 한국사회에 만연한 ‘갑질’의 다양성과 깊이를 보여준다.

흔히 ‘갑질’은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의 전유물로 재현되지만 ‘갑질’은 말 그대로 어디에나 있다.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갑이며 을이다. 갑은 어느 순간 을이 되고, 을은 어느 순간 갑이 된다. 이처럼 갑과 을은 변함없는 본질이 아니라 내가 자리해 있는 위치의 상대성, 곧 ‘관계’의 문제다. 위치가 바뀌면 갑을관계는 순간적으로 전복된다. <코미디빅리그>의 ‘갑과 을’이라는 코너는 이 위치의 상대성을 보여주며 웃음을 유발한다.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에서 엄격한 피아노 선생 에리카는 학생들의 실력을 냉정히 평가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갑이지만, 제자인 클레머의 유혹에 굴복해 ‘선생’에서 ‘여자’의 위치로 가는 순간 을이 된다. 이 둘 사이의 권력관계가 어떤 식의 폭력을 동반하는지를 보라. 일등석의 조현아는 갑이었지만 포토라인 앞의 조현아는 을이고,일등석의 사무장은 을이었지만 뉴스 프로그램 속의 사무장은 갑이다. 한바탕 소동 후, 회사에 복귀할 조현아와 사무장은 다시 기존의 갑을관계 속에 놓이게 될 것이다. 한국인이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민감한 것, 어떻게든 그 위치를 높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어떻게든 서울 쪽으로, 재벌 쪽으로, 권력 쪽으로 위치할 때, 내가 갑이 될 가능성은 높아진다.

민주주의는 이 갑을관계의 위치성을 영구적으로 전복하는 것, 없애는 것이다. 민중이 왕의 목을 치고, 대중이 무능한 정부를 갈아치우며,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에 참여하고, 학생이 선생과 동등하게 토론하고,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대접을 받고, 이주자가 정주민과 같은 권리를 누리며,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 것이 ‘민주주의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기존의 갑을관계가 전복되거나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제도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 곧 ‘문화’이고 오직 그럴 때만 비로소 그 이름에 값할 수 있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성립’될 수 있지만, 문화로서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며, 언제나 요원하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인간의 속성 때문에 그렇고, 이윤과 효율을 제일원칙으로 삼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평등을 제일원칙으로 삼는 민주주의적 관계를 용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극단적 갑을관계가 효율성의 지표이자 권력의 표상이 되어 있는 현재의 반민주주의적 문화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권력은 권력대로 대중은 대중대로 변화무쌍한 갑을관계 속에서 어떤 식으로든 쾌락을 누리며 살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한 ‘을’에 위치해 있는 이들, 반민주주의적이고 극자본주의적인 환경 속에서 쓰레기처럼 폐기되어 있는 이들의 분노다. 그들이 무기를 들고 불특정 다수를 향한 복수를 시행하는 순간, 곧 ‘갑’이 되는 순간, 우리 모두는 이유도 모른 채 완벽한 ‘을’로 변모한다. 농촌총각, 중국동포, 이주노동자라는 영원한 을을 떠올려보라. 이들에게는 자신을 대변할 조직도, 올라갈 크레인도 없다. 이미 조짐을 보이는 이 끔찍한 폭력의 도래는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암흑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다. 이에 비하면 조현아는 스펙터클이자 이벤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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