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5호][신간안내]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천정환 지음 | 마음산책 |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 천정환 지음 | 마음산책
잡지 창간사로 더듬는 현대사의 풍경 (경향신문_정원식 기자)

 

별 볼 일 없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는 평범한 영국 남자가 인기 절정의 할리우드 여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을 그린 영화 <노팅힐>은 남자(휴 그랜트)가 출국을 앞둔 여배우(줄리아 로버츠)의 기자회견장을 찾아가 사랑을 고백하는 유명한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남자는 자신이 잡지 ‘호스 앤드 하운드’(말과 사냥개)의 기자라고 소개한다. 발언 기회를 얻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잡지의 기자를 사칭한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웬 사냥 잡지 기자냐고 수군대는 이들은 있지만 누구도 그가 가짜라고 의심하진 않는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잡지가 있고 한정된 전문 영역만 다루는 것들도 많기 때문이다. 실제 지금 한국에선 ‘월간 축산’ ‘월간 양계’ ‘월간 배관기술’ ‘월간 버섯’ 같은 잡지들이 발행되고 있다.

잡지는 신문에 비해 적은 비용과 인력으로도 만들 수 있어 발행하기 쉽다. 발행인의 사정에 따라 주간, 월간, 계간, 반년간, 연간 등 발간 주기도 다양하게 정할 수 있다. 창간하기 쉽다는 것은 그만큼 시대의 요구와 분위기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객관성을 강조하는 신문에 비해 만드는 이들의 주관을 강력하게 투영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 점에서 잡지의 역사를 살피는 것은 잡지라는 매체에 새겨진 각 시대의 지적·문화적 풍경을 들여다보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은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가 1945년 이후 출간된 한국 잡지 123개의 창간사를 검토한 책이다. 왜 창간사인가? 잡지 창간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욕망, 자신의 생각을 퍼뜨리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잡지를 중심으로 앎과 삶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의 산물이라면, 창간 주체들의 이 같은 방향성이 집약돼 있는 것이 바로 창간사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1945년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를 10년 단위로 끊어 해당 시기를 대표할 만한 창간사들의 전문을 싣고 시대적 맥락을 덧붙였다.

 

한국인들에게 해방은 출간의 자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용지 부족이라는 물적 결핍 때문에 잡지 발간은 원활하지 못했다. 이 시기 주요 잡지들은 해방 공간의 특성 탓에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이를테면 김구를 창간호 표지에 내세운 ‘민성’(1945년 12월)은 좌우 대립이 본격화하던 시대 상황을 반영해 중도를 지향했다. 잡지 문화는 전쟁이 끝난 후 1950년대 중반부터 재건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출판 시장의 규모가 커지고 독서 대중의 역량이 커지면서 출판문화가 비로소 식민지 잔재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잡지의 하나인 ‘사상계’, 한국 최초의 계간지 ‘지성’, 1960년대까지 한국문단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현대문학’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한국 잡지는 지성과 오락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양분됐다. 그 이전까지 일간-월간으로 짜여져 있던 정기간행물 시장의 주도적 흐름이 주간-계간으로 변모하면서 이런 구도가 만들어졌다. 계간지에 지성의 대변지라는 이미지를 새겨넣은 것은 1966년 창간된 ‘창작과비평’이다. 지금 기준으로도 특출한 엘리트였던 20대 청년 백낙청은 창간사를 대신한 권두 논문에서 “새로운 창작과 비평을 위한 실험은 예술적 전위 정신과 더불어 역사적·사회적 소명의식, 그리고 너그러운 계몽적 정열을 갖추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문학 계간지가 문학을 거점으로 동시대 담론을 선도하는 지성의 전진 기지 구실을 해야 한다는 의지가 반영돼 있다. 그 대척점에는 1968년 창간된 주간지 ‘선데이 서울’이 있었다. 이 잡지는 “첫사랑의 맛을 되씹는 감미로운 화제, 된장찌개 냄새 풍기는 구수한 담론으로 메마른 삶을 기름지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넘치는 멋, 풍부한 화제, 감미로운 내용”을 담겠다고 선언했다. 저자는 그 ‘멋’의 실제 내용이 자수성가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성에 관한 이야기였다는 점에서 ‘선데이 서울’을 비롯한 대중 주간지들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대중의 욕망을 표현하며 동시에 대중에 대한 ‘욕망의 교육기관’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1970년대는 유신독재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현대적 잡지 문화가 꽃을 피운 시기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이 1976년 창간된 ‘뿌리깊은 나무’다. 한창기라는 르네상스적 재능이 창간한 이 잡지는 전면적인 가로쓰기, 순 한글문장과 어휘의 사용 등 파격적인 시도로 한국 잡지사를 ‘뿌리깊은 나무’ 이전과 이후로 나눴다. 한창기는 창간사에서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라고 믿습니다”라며 “이 나라의 자연과 생태와 대중문화를 가까이 살피려고 합니다”라고 썼다. 저자는 박정희 시기에 “국가가 채찍질해서 달리는 그만큼, 민중의 저항과 대중지성도 성장했다. 그런 시대정신에 부합했기 때문에 ‘뿌리깊은 나무’는 크게 공감을 얻고 잡지 문화를 바꿔놓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한다. 함석헌이 민중을 씨알에 비유하며 자신만의 사상적 게릴라전을 펼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큰 반향을 얻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1980년대 잡지 문화를 이해하는 열쇳말은 ‘저항’이다. ‘실천문학’을 필두로 신군부의 정치적 억압에 맞서기 위해 잡지와 단행본의 중간 형태를 취한 무크가 쏟아져 나왔다. 1985년 창간된 월간 ‘말’은 제호부터 상징적이다. 유신시절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송건호는 ‘말’ 창간사에서 “우리 시대 말다운 말의 회복을 위한 싸움이 결코 단순치 않음을 예감한다”며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거대한 암초와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정권에 대한 문화적 저항은 1980년대를 학술운동과 사회과학 잡지의 전성 시대로 만들었다. 1990년대는 문자문화의 마지막 전성 시대이자 ‘문화’의 시대였다. 1987년 이후 1993년까지 주간지는 226종에서 2236종으로 10배, 월간지는 1298종에서 3146종으로 3배가량 늘었다. ‘문화과학’ ‘이매진’ ‘상상’ ‘키노’ ‘씨네21’ 등 대중문화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잡지들이 쏟아져나왔다.

2000년 이후 잡지는 쇠락기를 거치고 있다. 저자는 시대가 바뀌더라도 “세계를 문자와 활자, 문학이란 행위로 포착하여 해석하고 변혁하려는 노력은 계속된다”며 그러한 노력을 담아내는 틀로서의 “잡지스러운 것”은 끝없이 모양을 바꾸면서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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