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4호][리뷰]문화과학 79호 특집 리뷰(최혁규)

재난의 시간을 이야기하기

『문화/과학』 79호 특집 “416 재난의 시간”을 읽고

 

최혁규 / 문화연대 활동가

 

세월호 참사가 어느새 200일을 앞두고 있다.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니 세월호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익숙해질만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아직까지도 그 감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며 ‘잊지 않겠다’라는 약속은 몸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세월호 가족들과 국민대책위원회는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고, 여러 시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월호를 추모하고 기억하고 있다.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세월호를 기억하는 행동을 하고 있고, 새로운 방식들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광화문 단식농성장 현장에서 직접행동으로 이뤄지기도 하고, ‘글쓰기’라는 행동으로도 이어지기도 한다. 글쓰기와 담론의 영역에서 여러 이론지와 비평지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세월호에 대해 고민하고 있고, 작가들은 함께 새월호에 대한 글들을 모아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리고 『문화/과학』은 문화적 관점에서 79호 특집으로 세월호를 다루고 있다.

 

『문화/과학』 79호의 특집은 “416 재난의 시간”이다. 이동연은 「재난의 통치, 통치의 재난」에서 글로벌 재난자본주의와 한국적인 재난의 특이성을 분석한다. 한국 재난자본주의는 자본과 국가와의 유착관계 속에서 인간을 배제하고, 이를 통해 재난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안전메커니즘이라는 통치술로 국민들을 훈육하고 통제한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재난 이후의 상황이 더 재난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국가의 통치 없는 통치술과 이에 저항할 수 있는 대안의 방식, 즉 주체들이 자기 권력을 갖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 직접행동을 제안한다. 정원옥은 「세월호 참사의 충격과 애도의 정치」에서 세월호 참사 이후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발로와 이를 동력으로 한 애도의 정치라는 관점에서 세월호 투쟁을 이야기한다. 위로부터의 애도의 정치가 국가가 공식적으로 추모하고 기억하고 기념하는 전략이라면, 아래로부터의 애도의 정치는 국가에 의한 애도의 정치에서 배제된 죽음들에 대해 호소하고 촉구하고 압박하는 다양한 실천전 행동이다. 또한 죽은 자에 대해 충실하게 수행되는 개인의 애도가 사회적 차원의 애도를 통해 확산될 때, 살아 있는 자들의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 있다. 세월호 참사의 모든 시민행동들은 이런 맥락에서 애도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어, 노명우는 「역사가 될 수 없는 이야기의 묵시」를 통해, 인간됨이 인류의 특수성이 아니라 인류가 추구해야 하는 목적임을 이야기하며 세월호라는 객관 불행이 기억되고 이야기로 재구성되고 이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의 관료체제는 구체적인 생명체로서의 세월호 희생자들의 얼굴을 지우고, 이를 수치화해서 추상적인 행정체계 안으로 강제 편입시킨다. 그렇게 하나의 ‘사건’이 되는 순간 개인들의 구체적인 ‘이야기’는 사라진다. 불행의 표현은 주관적일지라도 불행의 원인은 객관적이라는 점에서, 세월호는 객관-불행으로 기억되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종찬은 「재난, 그리고 절규의 공동체」에서 세월호라는 재난과 마주했을 때 타인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윤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인의 고통을, 즉 개별적 특수성의 차원의 문제를 어떻게 보편적인 계기로 읽어낼 수 있는지, 그리고 재난 이후 상호부조의 공동체는 어떻게 출현할 수 있을까? 세월호가 우리의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소리로는 전달되지 않는 타자의 ‘중얼거림’과 ‘절규’와 같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다.

 

이렇게 네 명의 필자들은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담론적 실천을 하고 또 다른 실천을 모색하고 있다. 각자가 다양한 층위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어서 하나로 묶어내는 게 쉽지는 않으나, 하지만 그들 모두 ‘세월호 이후 무엇을 써야 하는가, 혹은 무엇을 쓸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한 연구자 스스로가 ‘재난의 시간’을 어떻게 버텨냈는지에 대한 일종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지냥 지나칠 수 없는 시간의 층위가 있다. 바로 그것이 세월호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간이다. 몇 달 전 우리는 세월호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를 겪었다. 그리고 최근 광화문 광장의 세월호 농성장을 오가다 잠시 고개를 돌려보면 세월호에 반대하는 집회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세월호 농성장 맞은 편에서 “세월호 특별법 반대”라는 커다란 현수막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세월호 반대집회를 하고 있는 풍경들을 보면 분노보다는 씁쓸한 감정이 우선적으로 든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이 그들을 저렇게 행동하게 했는가’라는 물음이 꼬리를 문다. 세월호라는 재난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에는 그들의 이야기도 함께 되어야 한다. 그들은 ‘재난의 시간’을 어떻게 겪었을까? 그들은 왜 세월호에 반대하는가? 그들에게 세월호란 무엇인가? 그들을 배제하지 않고 끌어안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명확한 답을 얻기가 쉽지가 않은 질문들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다룰 수 없다. 하지만 재난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재난의 시간에 대한 행동도 그리고 이야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혹시 우리가 지나친 재난의 시간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싶다. 우리와 다른 시간을 보낸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그들의 재난의 시간은 어떻게 이야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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