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7호][칼럼] ‘다시 만난 세계’(손희정)

[경향신문 기고문]

[청춘직설] ‘다시 만난 세계’

손희정 (문화평론가)

지난 7월31일, 대학 내에 경찰병력 1600명이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학교의 독단적인 행정처리에 반대하면서 학교 측과 대치하고 있던 이화여대 학생들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 교수는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고? 4년 있다 졸업하는데?”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요즘 대학의 위치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스펙의 전당’에서 더 이상 학생들은 주체가 아니다. 그저 스펙을 구매하는 소비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을 잊은 대학이 학생을 일개 소비자로 취급한다 하더라도 학생들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문제가 되고 있는 ‘미래라이프’ 사업은 교육부가 진행하는 ‘평생교육 단과대학 지원사업’의 일환이다. 이화여대는 사업에 선정돼 정부로부터 35억원을 지원받기로 했다. 그런데 이름만 아름다운 이 사업은 지난 20여년간 지속된 대학 신자유주의화의 연장선상에 있다.
1990년대 이후 한국 정부의 대학정책은 고등교육이 공공재가 아니라 상품이라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리하여 ‘자유화’란 이름으로 대학은 기업화되었고, ‘자율화’란 명분으로 무한경쟁의 방법론이 도입됐다. 그 최전선에 정부에 의한 ‘대학 평가’와 ‘구조개혁’이 놓여 있다. 인구감소로 고등교육이 ‘사양산업’으로 접어들자 정부는 정원감축 및 지원금을 빌미로 대학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이에 발맞춰 학교 구성원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파행적으로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신자유주의화는 학문과 고등교육의 의미 자체를 시장주의로 재구성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구성원의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학 측의 소통단절은 필수요소가 된다. 지금 이화여대가 겪고 있는 진통 역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는 최경희 총장의 불통과 독단으로부터 기인했다는 평가다. 이 흐름을 이끌었던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은 “취업이 학문보다 우선하며, 취업을 중심으로 대학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밝힌 바 있다. 정부에 의한 대학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여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대학의 등장은 한편으로 대학을 취업학원으로 전락시켰다. 학부제와 상대평가는 학생자치를 무너뜨리는 기반이 되었고, ‘산학협동’이라는 이름 아래 지식과 사유는 시장의 부속물로 통합되었다. 비정규직 강사뿐 아니라 정규직 교수들의 ‘노동조건’ 역시 열악해졌으며, 이제 학위는 자격증에 불과하다.
‘미래라이프’ 단과대학에는 ‘뉴미디어 산업’과 ‘웰니스 산업’ 등의 전공이 신설될 예정이라는데, 이런 분야가 학위를 요하는 학제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은 대학 사회 내에 팽배한 ‘시장정서’ 안에서야 가능하다.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아니다”라는 말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시작이 어찌되었건 간에 학생들의 투쟁은 신자유주의 대학의 구조 자체에 저항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학생들의 싸움을 ‘학벌 이기주의’라고 낙인찍는 대학 측과 언론의 프레임은 교묘하다.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인 불편함에 즉각적으로 호소하고, ‘여학생들의 속물근성’을 돋보이게 하며, 진보진영으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지 역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송에 출연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힌 한 학생은 말한다.
“직장인이나 고졸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에는 동의한다. 다만 특별한 단과대를 신설해 학위를 수여하는 것에 의문이 있을 뿐이다. 그보다 본교에 이미 있는 평생교육원의 질을 높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사업은 4년제 졸업장이 있어야만 경력을 이어갈 수 있고 승진할 수 있는 사회의 비합리적 구조를 공고하게 만들고 학벌주의를 조장할 뿐이다.”
물론 학생들의 싸움이 ‘학벌 이기주의’로부터 시작되었고, 그로부터 추동력을 얻는 것일 수 있다. 사회의 꼴이 이러한데, 학생들에게만 급진성을 요구할 순 없다. 그러나 이화여대의 싸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하는 운동은 일종의 ‘사건’이다. 저항은 질문이고,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세계’를 꿈꾸게 하며, 꿈은 그것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학생들은 ‘중심 없는 다중’으로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통하고 모든 사안을 토론과 투표를 통해 결정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새로운 운동주체로서 이미 자신들의 투쟁 방법을 찾아가는 중이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경찰과 대치 중에 ‘투쟁가’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떼창’한 것은 그래서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야말로 그들은 세계를 다시 만나고 있다. 그렇게 다시 만나는 세계는 이전과 같은 세계일 수 없다. 그 싸움이 어디로 가든, 존경의 마음을 담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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