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7호][칼럼] 잃어버린 투사를 찾아서(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잃어버린 투사를 찾아서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언제부터인가 근절해야 할 악 가운데 폭력이 챔피언 타이틀을 차지하고 말았다. 국가폭력에서부터 가정폭력과 학교폭력, 성폭력에 이르기까지 어느 곳에서나 폭력은 낱낱이 색출하고 징벌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폭력은 모든 곳에서 악 중의 악의 자리에 등극하였다. 그런 탓일까. 나는 신문이나 인터넷을 뒤질 때마다 폭력에 삼켜진 세계의 심연 속에 갇힌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인다. 하지만 폭력이 그만치 절대적으로 투명한 악으로서 규탄받아야 할까. 나는 예상할 수 있는 저항과 거부를 무릅쓰고 이를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잠깐 숨을 고르며 말하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폭력이란 평온하고 쾌적한 삶을 망치고 파괴하는 어떤 난폭한 혼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두들겨 패고 술에 취한 동료를 겁탈하는 것을 과연 폭력이라 볼 수 있을지 진지하게 따져보자는 말이라면 그것은 당연 미친 짓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폭력이란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때 인기있던 말을 빌리자면 담론 같은 것에 가깝다. 담론은 현실을 이해하는 틀로 작용하는 것, 즉 우리의 생각을 구성하는 힘이다. 그러나 이는 담론이 가리키는 것의 반쪽일 뿐이다. 그것은 현실 역시 자신의 구미에 맞도록 탈바꿈시킨다. 담론이 성공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내 눈에는 그게 그렇게 보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탓이다.
폭력 담론이 잘나가는 것은 그런 논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사태는 얼추 이렇게 펼쳐진다. 그렇다, 그건 정말 나쁘다. 이는 그것이 무엇보다 폭력적이기 때문이다. 그 논리를 좇을 때 역사를 반성하는 방식도 기우뚱해진다. 우리에겐 군사독재라는 끔찍한 역사가 있다. 그것을 어떻게 기억하여야 할 것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맨 먼저 시야에 떠오르는 것은 학살과 고문, 검열 같은 폭력이다. 그리고 우리는 국가폭력이라는 꽤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 뒤에 숨어 역사를 송두리째 수챗구멍 속으로 쓸어 보낸다. 마치 그 모든 폭력이 분단과 냉전,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른 발전이라는 폭력 아닌 폭력의 일부라는 점을 모른 채 말이다.
하긴 우리는 노동자를 필요한 만큼 쓰고 자르는 것은 글로벌 경쟁 원리에 따르는 합리적 행동인 반면 인격적 굴욕을 가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비합리적 폭력의 분출이라고 비난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근로비자 없이 저임금, 과로, 재해에 시달려야 하는 노동자에게는 어떤 폭력도 찾지 못하면서 외국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비하하는 발언은 인종혐오를 보여주는 극단적 폭력으로 저주하는 세계는 실로 이상한 곳이다. 폭력이 아닌 한 모든 것은 합리적이면서도 선한 반면 폭력은 어떤 변명도 허락되지 않는 순수한 악이라 규탄하는 것. 이것이 오늘의 으뜸가는 윤리적 계율이다.
이는 슬픈 일이다. 파시즘에 저항한 파르티잔은 폭력적이었다. 군사독재에 맞서 화염병을 던진 학생과 노동자도 폭력적이었다. 아니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한 모든 시도는 폭력적이었다. 그럼 은근슬쩍 폭력을 비호하는 알리바이를 들이대자는 거냐고? 당연히 아니다. 폭력을 거부할 생각이면 면죄된 폭력인 자연화된 폭력, 구조적인 폭력을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갑질하는 자의 역겨운 폭력보다 이윤을 위해 타산적으로 처신하는 자의 몸짓을 폭력의 주인으로 고발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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