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7호][신간안내] 라깡 또는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난장, 2016)

[신간안내]

최원 편집위원의
<라깡 또는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적 반역과 반폭력의 정치를 위하여>(난장, 2016)

목차

서 문

몇몇 특수용어에 대한 예비 설명

1. 욕망 그래프

2. 실재/상징/상상

3. 억압

 

제1장. 상징으로부터 떠나는가, 상징을 향해 떠나는가?: 지젝의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비판

1. 알튀세르-라캉 논쟁에 대한 지젝의 해석

2. 사물과의 마주침

3. 욕망 그래프의 2층이라는 쟁점

4. 『세미나 5: 무의식의 형성』에서의 라캉의 이중 전선: 욕망 그래프 구축의 쟁점들

 

제2장. 후기 라캉

1. 후기 라캉은 언제 도착하는가?

2. 『세미나 11: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에 대하여: 아파니시스라는 질문

2.1. 소외 | 2.2. 분리 | 2.3. 사드에 대항해 칸트를

3. 『세미나 20: 앙코르』에서의 단절과 그 결과들

 

제3장. 알튀세르의 ‘실재’와 토픽이라는 질문

1. 정신분석학에 대한 알튀세르의 두 강의

2. 인셉션인가 호명인가?: 슬로베니아 학파, 버틀러, 알튀세르

3. 알튀세르의 ‘실재’와 유물론적 담론 이론을 위한 프로젝트

 

제4장. 결론: 해방과 시민공존

1. ‘이데올로기적 반역’이라는 질문

2.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1978년 논쟁: 국가 내부인가 외부인가?

3. 라캉 또는 알튀세르: 폭력에 대하여

3.1 라캉의 접근법 | 3.2 알튀세르의 접근법

 

부록. ‘정동 이론’ 비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과의 쟁점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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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서문의 일부)

이 책은 2008~2011년 시카고 로욜라대학교 철학과에서 쓴 박사학위 논문,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와 라캉의 구조주의 논쟁』을 번역__보완한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루이 알튀세르와 자크 라캉의 논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핵심 메커니즘을 고찰한다. 20세기 후반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이론가들 사이에서 서로 어깨를 겨룬 이 두 사람의 이론적 수렴과 발산은 말 그대로 프로이트-맑스주의 역사의 중요한 한 국면을 규정했다. 1960년대 초 서로 동맹을 맺었을 때, 이들은 구조와 주체라는 질문을 공유하면서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 사이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드는 결정적인 일보를 내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동맹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라캉은 곧 자신의 세미나(1968~69년)에서 알튀세르를 공개적으로 실명 비판하고, 알튀세르는 1976년의 에세이(「프로이트 박사의 발견」)에서 라캉의 이론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고 드러낸다.

라캉의 전기를 쓴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는 알튀세르와 라캉의 입장 차이를 이렇게 묘사한다. “라캉은 알튀세르와 정반대로 나아갔다. 라캉이 상징적 기능이라는 레비-스트로스의 관념에 항상 새로운 애착을 보였다면, 알튀세르는 모든 친족적 상징성에서 탈출함으로써만 정초적 행위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라캉은 반대로 이런 탈출이 진정 논리적 담론을 생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담론은 정신증에 의해 침범당할 것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많은 독자들은 이 구절 앞에서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제시된 두 이론가의 이미지는 독자들이 보통 옳다고 믿는 것과 정반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알튀세르는 주체가 지배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어떤 기회도 불허한 고집스러운 구조주의자로 비쳐지는 반면, 라캉은 이런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진정한 비판가, 곧 ‘실재’의 환원 불가능한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어떻게 주체가 상징적 질서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보여준 이론가로 비쳐진다.

물론 이런 독자들의 이해를 일반인들의 아무 근거 없는 믿음이라고 쉽게 무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1970)을 출판하자마자 곧바로 구조주의자 또는 기능주의자라고 비판받기 시작했다. 이런 비판이 마침내 그 이론적 무게와 토대를 확보한 것은 주지하다시피 슬라보예 지젝이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발표해 그 타당성을 나름대로 논증해보였을 때였는데, 지젝은 정확히 알튀세르와 라캉의 비교를 통해 이를 달성했다. 출판된 지 20년이 훨씬 넘었지만, 지젝의 저 책은 오늘날에도 다양한 학문 공동체들이 알튀세르와 라캉을 이해하는 방식을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이안 파커 같이 지젝에 동조하지 않는 비판가조차 알튀세르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타당하며 라캉 자신의 입장을 충실히 대변한다는 생각을 기꺼이 수용한다.

그렇다면 루디네스코는 단순히 실수를 범한 것일까? 그러나 훨씬 더 최근에 사토 요시유키는 루디네스코와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 즉, 1960~7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진 주체에 대한 논쟁에서 가장 완고하게 구조주의의 입장을 취했던 것은 오히려 라캉이며 알튀세르, (후기)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의 이론화 작업은 모두 라캉의 이런 입장과 거리를 두기 위한 다양한 시도였다고 단언한 것이다. 사토에 따르면, 전체적으로 라캉의 이론은 상징적 구조에 대해 주체가 ‘절대적 수동성’을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특징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알튀세르와 라캉에 대해 지금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미지야말로 단순한 오해라고 여겨야 하는 것일까?

나는 정통 구조주의의 입장을 좀 더 완강하게 견지했던 것은 알튀세르가 아니라 라캉이라는 관점에 동의하면서도, 이 두 이론가의 이견뿐만 아니라 동의의 지점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구조주의라는 것 자체는 하나의 통일된 학파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알튀세르와 라캉이 구조주의와 맺었던 관계도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주체라는 범주를 ‘구성하는 위치’에서 ‘구성되는 위치’로 옮겨 놓으려 했던 한에서 그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구조주의자였다. 그들은 (주체의 능동성과 자율성까지 포함해) 주체의 범주를 단순하게 무효화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설명’하려 했으며, 이를 위해 주체가 어떤 과정과 메커니즘을 통해, 구조에 특정한 방식으로 의존하면서도 여전히 스스로를 자율적이라고 인지하는 존재로 구성되는지 검토했다. 이렇게 그들의 공통 관심사를 분명히 윤곽 지은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알튀세르와 라캉이 각자의 이론화 작업에서 감행했던 상이한 선택지들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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