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3호][칼럼] 세월호 이후, 국가란 무엇인가(최철웅)

세월호 이후, 국가란 무엇인가

 

최철웅(중앙대 문화연구학과 박사수료)

 

 

세월호 참사가 벌어지고 네 달여가 훌쩍 지났다. 아직도 10명의 실종자가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진상규명을 위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난항을 지속하고 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가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6일간의 단식을 불사하는 동안에도 여야 지도부는 상대 진영으로 책임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답답한 마음에 대통령을 찾아간 유가족들은 청와대 앞 한데서 비닐을 덮고 노숙하는 신세가 됐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과 민의를 대변하는 여야 국회의원 그 누구도 책임지고 진상을 밝히겠다는 대답을 내놓지 않자 시민들의 동조단식이 줄을 잇고 있다. 사태를 책임지고 수습해야 할 정부가 뒤로 멀찍이 물러서면서 유가족만이 전면에 나서는 형국이 되었고, 급기야 ‘질린다, 그만하라’며 유가족들을 비난하고 모욕하는 여론마저 횡행하고 있다.

불과 4개월 전, 모든 국민이 간절한 마음으로 실종자들의 생환을 빌고 유가족들의 비통한 심정을 위로할 때, 이윤만을 좇는 선박업체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기관들을 거세게 질타할 때, 수개월이 지나 유가족들이 이처럼 버려지고 내몰릴 것이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대통령 이하 그간 쌓인 우리사회의 ‘적폐’를 해소하는 반성과 점검의 계기로 삼자던 다짐들은 지난 재·보궐선거가 끝나면서 함께 사그라진 것일까. 정부 여당은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한 절차(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 부여)에 한사코 반대하고, 보수단체와 일부 시민들은 유가족들의 요구가 사법체계와 헌정질서를 뒤흔든다며 겁박하고 있다. 결국 저들은 세월호 참사가 우연한 ‘사고’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유가족과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가 우리사회에 근본적인  단절을 도입했으며, 그 이전의 질서와 시스템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엔 일부 언론이 조장하는 것과 같이 해묵은 보수-진보 갈등을 넘어서는 매우 근본적인 대립,즉 이토록 무능한 국가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둘러싼 환원불가능한 정치적 간극이 놓여 있다.

 

무능한 국가와 책임지지 않는 권력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가 목격한 것은 자본과 국가권력이 결탁하여 촘촘하게 얽힌 비위와 부패, 탐욕과 무능의 결정체였다. 국가는 규제완화를 통해 민간 해운업체가 선박안전을 무시한 채 이윤을 챙길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줬고, 선박의 안전검사 및 운항허가를 담당한 것 역시 국가에 의해 권한을 위임받은 민간조직들이었다. 이들 민간조직은 공적인 업무를 위임받았지만 사실상 선사들의 이익단체에 불과했고, 따라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감독 활동을 수행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민간조직들의 임원 자리를 관련부처의 고위관료 출신자들이 차지하는 등, 국가기관과 민간조직은 인적으로 긴밀하게 결탁되어 있었다. 인명구조를 담당하는 해경 또한 구조 업무를 일찌감치 민간업체에 위임하고 있었고, 구조경험이나 장비가 없다며 무능을 자백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배가 침몰한 이후로 기이할 정도로 무능한 괴물 같은 시스템과 마주쳐야만 했다. 숱한 정부기관과 민간조직들이 사태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지만, 그 누구도 결코 책임을 떠맡지 않았다. 분명 일정한 규칙과 위계적인 명령 구조에 따라 작동하는 시스템이었지만, 아무리 조직의 상부구조를 따라 올라가도 명령의 주체는 찾을 수 없었다. 다들 자신은 주어진 규칙을 적용하고 명령을 실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이런 이유로 실종자 가족들은 최고책임자를 찾아가 해명을 요구하고,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최고책임자 또한 공허한 약속만을 남긴 채 몇 달 뒤 다시 찾아가니 차갑게 얼굴을 돌릴 따름이었다.     이 익명적이고 무책임한 권력의 시스템은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데에는 철저하게 무능했지만, 절대적인 기능부전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명령과 규칙의 체계를 작동시킴으로써 누군가에게 권력과 특혜를 주는 기능은 정상적으로 수행되었고, 마치 그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안전과 공공의 복리를 위해 주권을 위임했던 국가가 지배와 이윤추구의 수단으로 기능할 뿐이라면, 우리가 계속해서 국가를 신뢰하고 권한을 부여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하여 세월호 참사는 시민의 안전과 복리를 위해 존재하는 국가라는 환상과 믿음이 붕괴된 자리에 급진적인 인민주권의 상상력을 소환하고 있다. 이것이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싸고 정부여당과 보수단체가 물러설 수 없는 저지선을 구축하는 이유일 터다.

 

‘세월호 특별법’의 정치학

 

세월호 유가족과 대한변호사협회가 함께 작성한 ‘세월호 특별법’의 취지는 책임자 처벌보다 진상규명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다. 이는 세월호 참사가 특정 개인이나 기관의 문제가 아니라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누구보다 유가족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특정 개인이나 기관을 수사할 목적이라면 특검제도의 도입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특정 사안의 수사에 초점을 맞추는 특검제도만으로는 구조적 병폐를 진단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는 광범위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유가족들의 입장이다. 오히려 철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특정기관이나 개인에 책임을 전가하고 수사를 종결할 위험마저 상존한다.

따라서 유가족들은 충분한 조사기간과 수사권한을 포함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바로 이 하나의 요구,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보장해달라는 요구가 정부여당과 유가족 간에 팽팽한 쟁점을 형성 중이다. 세월호 참사의 배경에는 해경과 해양수산부를 포함해 수많은 정부기관이 얽혀 있다. 구조 과정에서의 미흡한 대처를 고려할 때 국정 최고책임자인 대통령과 청와대 또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에 유가족들은 총체적인 진상규명과 성역 없는 수사를 위해 국가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수사권이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악의적인 루머와 달리, 유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막대한 경제적 보상도 애도의 눈물도 아니다. 오직 재발방지를 위해 진상규명에 필요한 법의 제정과 법률에 의거한 공정한 수사를 요청하고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보여준 차분한 냉철함은 오히려 지켜보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들은 슬픔과 절망에 잠겨 우울증에 빠진 수동적 피해자도 아니고, 걷잡을 수 없는 원한과 분노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정념을 분출하는 광적인 유가족도 아니다. 유가족들은 슬픔과 분노를 끌어안은 채,미래의 아이들과 다른 부모들이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길 바라며 재발방지를 위한 정치적 요구를 조직하고 있다. 김영오 씨의 목숨을 건 단식이 비단 연민이 아닌 숭고함과 연대감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런 이유이리라. 이제 유가족들은 전능한 지도자의 자비와 결단을 구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을 찾는 것이 아니다. 행정수반이자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대통령의 역할에 충실할 것을 엄중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기성질서의 수호자들이 ‘세월호 특볍법’ 제정을 두고 헌정체제를 뒤흔든다며 날뛰는 데에는 나름 충분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최고위 공무원일 뿐인 대통령에게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가치를 부여하고 정념을 투사하는 이들에게는 성역 없는 수사의 원칙이 지도자를 겨냥한 정치적 음모로 비춰진다. 그리하여 유가족들의 정당한 요구에 대해 진정성의 잣대를 들이밀고 끊임없는 분탕질로 ‘세월호 특별법’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희석하려 든다. ‘세월호 특별법’의 취지는 단지 권력자의 얼굴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민의 안녕과 공공성 회복을 위해 구조적 시스템을 개혁하자는 것이다. 국가는 고유한 본질을 지닌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며, 인민의 의지에 따라 사회적 기초 위에 구축된 제도적 시스템일 뿐이다. 그것은 세월호 참사를 통해 목도했듯 인민의 통제를 벗어날 때 스스로 자립적인 실체로 군림하는 괴물이 된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은 이처럼 전도된 권력관계를 바로세우는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경희대원보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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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3호][연구자료] 콘텐츠산업의 융합 양상과 정책과제(기본연구 2013-02)

[기본연구 2013-02]  콘텐츠산업의 융합 양상과 정책과제 _이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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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발췌-

 

정보통신기술 및 인프라에 기반을 둔 정보화시대를 지나 기술과 산업 간의 창조적 결합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융합혁명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최근 기존산업의 성장정체 현상 극복 노력, 기술 발전과 개방형 혁신 확산, 소비자 욕구 다양화 등으로 산업융합은 가속화 되고 있습니다. 또한 융합의 경향이 이종 기술․산업간 융합을 거쳐 인문․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융합으로 발전하면서 21세기 세계경제의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에 세계 주요국들은 미래 국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문학적 요소(문화예술․인문학)와 과학기술적 요소의 융합연구, 융합 상품과 서비스 창출에 대한 다양한 시도 지원 등을 통해 융합의 시대에 대응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최근 기존의 기업 및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던 다양한 융합 시도들을 국가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법제도 개선, 범부처 차원의 정책적 지원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새 정부 출범과 함께 창조경제시대를 구현하기 위한 방안으로 창조와 융합이 강조되고 있어 융합 정책은 더욱 다양하게 추진될 것입니다. 특히 콘텐츠산업은 인문학적 요소와 과학기술 요소 융합의 총체로써 창조경제시대를 견인하는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이에 본 연구는 콘텐츠산업의 융합 양상을 분석하고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 속에서 콘텐츠산업의 융합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정책방향을 제시하였습니다. 본 연구가 융합정책의 효과를 높이고 콘텐츠산업이 창조경제를 견인하는 핵심 산업으로 성장하는데 기여하기를 소망합니다.
2013년 6월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원 장 박 광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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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3호][79호 안내] 문화/과학 79호 신간 안내(편집위원회)

 

문화/과학 79호 신간 안내

안녕하세요? 계간『문화/과학』 편집위원회입니다. 국내 유일의 문화이론 계간지『문화/과학』79호가 발간되었습니다.관련하여 보도 자료를 보내드립니다. 79호의 특집 주제는 <416 재난의 시간>입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우리에게 국가와 사회란 무엇인가를 근본적으로 사고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어떤 재난보다도 세월호 재난은 재난을 관리하는 국가의 통치술과 애도의 진정성, 인간의 의미, 공동체의 존재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합니다. 분명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지고, 재난의 실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416 재난의 시간은 지속될 것입니다. 특집 원고는 416 재난의 시간을 바라바보는 4가지 키워드, 즉 ’통치’, ‘애도’, ‘인간’, ‘공동체’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계간『문화/과학』79호 특집주제 이외에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국가의 인문학 정책과 인문학 대중화의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두 편의 글을 기획 란에 실었고, 문화현실 분석에서는 조정래의 『정글만리』를 화두로 중국의 국가적 성격을 분석한 글을 포함하여 재난사회를 재현한 웹툰과 후쿠시마와 원전 고리의 시각이미지 및 JTBC 세월호 참사보도 등을 집중 분석하였고, ‘동아시아 문화연구’에는 영화텍스트 분석을 통해 기억과 역사 그리고 재현의 문제를 분석한 다이진화의 글, ‘이론의 재구성’에는 공산주의를 놓고 벌인 알랭 바디우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논쟁을 정리한 글을 실었다. 시기적절한 특집 주제와 다양한 읽을거리가 가득 담겨 있는 계간 『문화/과학』 79호에 후원 독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독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을 전합니다. 신임 편집위원으로 김영선 선생이 79호부터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과로사회』의 저자기이도 한 김영선 편집위원은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노동과 여가 사회학을 연구하고 있는 소장 학자이십니다.앞으로 큰 활약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문화/과학』은 80호를 기점으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새로운 편집위원 체제로 10권 째 만들어지게 되는 이번 80호는 대안사회라는 주제로 한국사회의 미래를 조망하는 자리가 될 것이며, 80호를 기념하는 별도의 특별호도 준비 중에 있습니다. 매월 발간되는 뉴스레터도 더욱 충실하게 만들어 독자들과 한발 더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독자들의 많은 후원과 격려를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원고 목차

 

특집 416 재난의 시간

 

「재난의 통치, 통치의 재난」 —————————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계간 <문화/과학> 편집인)

「세월호 참사의 충격과 애도의 정치」—————- 정원옥(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역사가 될 수 없는 이야기의 묵시(黙示)」——— 노명우(아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재난, 그리고 절규의 공동체」————————– 이종찬(중앙대학교 영문학과 박사 수료)

 

기획 동요하는 인문학

 

「’인문복지’를 넘어서 ’인문주체’ 되기」————— 오창은(중앙대학교 교양학부대학 교수)

「’대중 인문학’을 발명해야 한다」———————– 최은혜(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제8회 『문화/과학』 북클럽 :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김현미(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저자)

임동근(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토론)

정원옥(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 사회)

 

문화현실분석

 

「재난 서사와 개인의 불안」———————————박범기(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석사과정)

「방송사의 세월호 참사보도」——————————-윤태진(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후쿠시마, 고리」————————————————조선령(부산대학교 예술문화영상학과 교수)

「DDP, 도시의 비정체성과 비공공성의 표상」——————— 박은선(리슨투더시티 디렉터)

「’대국굴기’의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임춘성(목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시아 문화연구

 

「역사와 기억 그리고 재현의 정치」———————————–다이진화(베이징대학 중문학부 교수)

 

이론의 재구성

 

「공산주의라는 쟁점- 바디우와 발리바르」————————— 최원(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 연구단 HK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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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3호][칼럼] 여유로워야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다(김영선)

〈일생활균형재단〉 [칼럼] 여유로워야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김영선(한국학중앙연구원, culmin@hanmail.net)

 

1.

새로운 무언가를 할 수 있으려면 일단 여유로워야(freedom from) 한다. 그래야 상상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고 보다 자기충족적인 삶을 꾸릴 수 있다. “여가란 상징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 주고,어떤 경우에는 그런 상징의 세계를 만들어 내기도 하는 자유”라며 “그것은 사회구조적인 규범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이자 “상상력, 아이디어, 환상, 그림, 사랑 등이 있는 놀이의 자유”라고 말한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너(Victor Turner)의 설명은 눈여겨 볼만하다. 여기서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라는 말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가족-사회 관계를 대상화하고, 나아가 지역공동체와 사회전체를 성찰하게 하는 여유를 준다는 의미다. 무언가를 ‘할’ 자유(freedom to)가 주어지는 가운데 자기충족적인 삶에 대한 열망과 그 열망을 피어나게 하는 실천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2.

“밥 먹고, 빨래하고, 잠자고, 일하는 시간 외에 아무런 여가시간을 갖지 못함으로써 보고 듣는 것이 없으니 점점 바보스러워져 회사로부터 더욱더 괄시당합니다.” 매일 12시간 노동을 했던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이 1970년대 후반 8시간제를 주장하며 말한 이야기다. 한 세기를 건너뛴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달라졌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3.

장시간 노동은 “가족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까지 박탈”한다. 여유가 있어야 접촉을 하고 관계를 만들고 공감을 하고 사랑할 수 있을텐데, 장시간 노동은 접촉을 차단하고 관계를 단절시키고 공감 능력까지 퇴화시킨다. 일본 국립여성교육회관이 2006년 조사한 ‘가정교육에 관한 국제비교’에 따르면, 한국의 아빠들이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2.8시간으로 이는 조사대상국 가운데 꼴찌에 해당한다. OECD 사회정책국이 2011년 발표한 국가별 ‘시간사용(time use)’ 보고서를 보면, 한국 남성이 노동에 들이는 시간은 최고인 반면, 돌봄에 들이는 시간은 최저였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만화 『미생』에 나오는 오과장의 아이들에게 아빠는 사실상 부재하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한 제주도 여행에서 오과장이 확인한 것은 오직 ‘아이들과의 묘한 유격’, ‘묘하게 핀트가 안 맞는 대화’, ‘막상 말을 나눠보니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공감 부재의 모습은 장시간 노동에 휩싸인 여느 대한민국 직장인의 씁쓸함을 잘 대변해준다. 이와 상통하는 내용은 미디어의 인터뷰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오전 6시 30분까지 공사현장으로 출근하고 퇴근 후 9~11시에야 집에 도착하는 콘크리트 타설용 펌프카 운전사(38살)는 “8살 딸이 자고 있을 때 출근하고 퇴근하니, 딸과 대화를 거의 못한다”고 하소연한다(오마이뉴스, 2011. 7. 21). 너무 늦은 퇴근은 아이와 놀고 싶은 기대와 놀이 관계를 차단한다. 아이와 애착 관계를 형성할 시간은 부족하고 단지 아이의 잠자는 얼굴만 보면서 곯아떨어지는 꼴이다. “아빠는 잠자는 아빠야!”, “엄마 얼굴은 보고 그릴 수 있는데 아빠 얼굴은 보고 그릴 수 없어!”라는 아이의 이야기는 장시간 노동으로 뒤틀릴 수밖에 없는 부모-자식 간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얼마전 인구보건복지협회가 내놓은 ‘저출산 인식 설문조사’ 결과도 마찬가지다. 남성이 아이 돌보기가 어려운 이유에 대해서 응답자들은 ’아이와 노는 방법을 몰라서’(29.7%), ‘아이와 소통이 되지 않아서’(20.7%)로 답했다. 아이와의 접점을 찾는 훈련이 안 되다보니 ‘서로 너무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노동과 가족의 관계를 연구해 온 조지메이슨대 교수 안젤라 해터리(Angela Hattery, 2001)의 지적처럼, 장시간 노동은 ‘아빠의 부재’로 이어지고 외부모육아(single parenting)와 유사한 ‘홀로’ 육아(solo parenting)로 내몬다. 여기에 ‘균형’(work-life balance)은 성립되기 어렵고 그것은 영원히 미끄러지는 수사에 불과하다. 이렇게 시간 박탈은 접촉 부재-관계 단절-공감 상실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고착시킨다. 장시간 노동은 가족 관계를 건강한 방식으로 이끄는데도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4.

여가를 역사적으로 연구해 온 아이오와대 교수 벤자민 허니컷(Benjamin Kline Hunnicutt)의 켈로그의 6시간제 연구는 앞서 이야기한 여가의 본래적 의미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사례다. 당시 노동자들은 새롭게 확보한 여가시간에 “산책하고 책을 읽고 텃밭을 가꾸고 무언가를 배우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고 글을 쓰고 감상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즐기고 좋은 이웃이 되고 이야기하고 새를 관찰하는 일들을 그 활동 자체를 위해 할 수 있었다. … 누구는 클럽에 적극 참여했고 또 다른 사람은 교회에서 어떤 이는 노인 클럽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 벌을 쳤고 곁다리로 목재용 나무도 키우는 이도 있었다.”는 기록들은 직장 일과 집안 일 모두에서 ‘벗어나’(freedom from) 무언가를 ‘할’ 자유(freedom to)의 확장을 보여준다. 우리는 위 사례를 통해 자유시간 확보가 전제되는 가운데 보다 주체적인 삶에 대한 열망과 여가다운 여가 실천이 뒤따른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최근 주간연속2교대 이후의 변화도 제한적이나마 위 사례와 상통할 것이다. 2013년3월 이후 현대자동차에서 46년 만에 밤샘 노동이 사라졌다. 이후 노동자들의 일과 삶의 변화를 추적하는 연구들이 보고되고 있는데, 요약하면 ① 크게는 수면건강이 좋아졌다. 그리고 ② TV 등의 소극적 여가활동에서 여행 및 스포츠 등의 야외 활동이 증가했고, ③ 개인적인 휴식 위주에서 가족 및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여가활동이 늘어났으며, ④ 여가생활의 여부에 대한 고민(존재론)에서 어떻게 여가생활을 할 것인가(방법론)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했다. 또한 ⑤ 일의 스트레스가 가족에 침투되는 정도가 감소했다. 주간연속2교대 이후의 변화 또한 자유시간의 사회적 의미를 엿볼 수 있는 지점이다. 물론 여가에 대한 높아진 열망과 늘어난 여가활동을 보다 주체적으로 구성해내기 위한 여가문화 프로그램이 수반되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다. 아래 인터뷰 내용을 길게 인용해 보자.

 

“애들이 첨에는 싫어했어요. 귀찮아하더라고. … 집에 오면 항상 아빠가 있으니까. 컴퓨터도 마음대로 못 하고, TV도 맘대로 못 보고, … 살살 꼬셔서 이제 밖에 나가서 뭐도 하고 뭐도 하고 하면서 조금씩 관계가 좋아진 거죠. … 일 년 훨씬 지나보니까, 학교 갔다 와서 아빠가 없으면 전화를 해요. 오늘 어디 있는 거야? 전화를 해요. 좀, 당연히 가까운 관계인데,막, 그냥, 말뿐인 게 아니라 훨씬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이렇게 아이의 숨결을 느끼고 아내·남편의 고민을 이해할 시간부터 풍경을 둘러보며 빛깔을 모을 시간, 관계를 만들고 공감할 시간, 상상하며 감수성을 자극할 시간, 사랑하고 연대할 시간의 가능성은 장시간 노동과 거리두는 삶, 여유로운 삶 속에서 피어난다. 그 구체적인 형상 가운데 하나는 ‘일과 삶의 균형’ 프로그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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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2호 (201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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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호][안내]문화사회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세미나

 

문화사회연구소의 세미나

 

(사)문화사회연구소는 문화 속의 사회, 사회 속의 문화를 학제적으로 연구하면서 문화의 민주화와 사회의 문화화를 모색하는 연구기관입니다. 즉, 시민의 문화적 삶의 가치를 함양하고 정부 문화정책의 공공성을 강화하며 대중문화산업의 투명성을 확보할 담론 생산 및 실천을 전개하는 제3섹터의 문화연구자 집단입니다. 문화사회연구소에서는 현재 다양한 연구 모임들을 진행하고 있으며, <문화과학>의 편집위원들도 이 모임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1. 푸코연구(2013년 3월부터): 푸코 전작을 읽고 푸코에 대한 연구 단행본 발간을 목표로 진행하는 장기 세미나
2. 한국 문화운동의 계보학(2013년 6월부터): 한국 문화운동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한 단행본 발간을 목표로 진행하는 장기 프로젝트 세미나
3. 수잔 손택 비평론 강독(2014년 8월부터): 수잔 손택의 비평문들을 개괄하며 ‘비평적 에세이’가 갖추어야 할 최량의 전범을 확인해보는 세미나
세미나 문의: 이메일 cultures21@naver.com / 홈페이지 kcc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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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호][행사리뷰]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김현미 저 북클럽 참관기(이종찬)

집을 떠났으나 이주(移住)할 수도 귀향할 수도 없는 유민(流民)들

이종찬 _중앙대 영문학 박사수료, 웹진 <문화 다> 편집동인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말하자면 ‘출가’(出家)한다. 그런데 일순 난감해진다. ‘출가’라는 단어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쩐지 그 속에서 ‘(되)돌아옴’의 계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떠남. 떠나는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떠나온 곳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원천적으로 되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떠남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주목하게 만드는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는 이 의미심장한 문장은 현재 이 땅에 거주 중인 수많은 이주자(migrant)들이 실제로 처해 있는 현실로 어느새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노동 이주자나 결혼 이주자와 같은 한국 내 다양한 이주자들 중에서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와서는 타국인 한국에서의 삶에서 배척당하고 그러한 현실에 절망하곤 하는데, 그렇다고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조차 여의치 않게 돼버린 상황에서 말하자면 양쪽 사이에 ‘끼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실제로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단적으로 그들의 고향에서 그에게 “힘들면 돌아와”라는 말을 해줄 수가 없는 참담한 상황. 이와는 달리 대한민국 국민(國民)인 우리는 이토록 글로벌한 세계적 상황 속에서 타국으로 손쉽게 떠나고 또 손쉽게 돌아올 수 있다. 떠남과 돌아옴은 우리에게 일종의 표리 관계로서 하나의 의미론적 짝패(‘떠남-돌아옴’이라는 한 쌍)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인지되는 것이다. 현대적 판본의 아파르트헤이트.

 

이번으로 여덟 번째를 맞는 ‘문화과학’ 북클럽 모임의 장소는 홍대 ‘프리포트’였다. 이주민문화예술센터 ‘프리포트’ 말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의미심장한 장소 선정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이주자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이들을 세밀하게 현장 기록한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의 저자 김현미는 자신의 인류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며 좌담회의 말문을 열었다. 그는 연구자로서 무엇보다 현장의 ‘팩트’들에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87년 체제’를 지나 소위 포스트 철학 담론이 한국 사상계에 당도한 이후 너도 나도 언어의 해체적 속성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언어가 가리키고자 하는 현실의 실제 상황은 괄호쳐버리고, 그에 따라 연구의 수준이 실제 현상과는 유리된 채 언어의 의미론적 유희 차원에 갇혀버린 일련의 연구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들렸다.

 

개인적으로도 이주자 문제와 관련하여 ‘현장’의 중요성을 실감케 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언젠가 내가 지면으로 접했던 어느 농촌 다문화가정의 실제 이야기였다. 동남아 어느 나라 출신의 결혼 이주자 엄마를 둔, 그러나 오래 못 가 집에서 도망나간 혹은 도망 나갈 수밖에 없었을 엄마를 둔 아이의 이야기. 녀석의 별명은 ‘웃기만 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찌 된 일인지 통 울지를 않고 내내 웃기만 해서 또래 친구들로부터 ‘장애아’(‘애자’)로 놀림을 받았다던 아이. 보육과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 아이는 감정조절에 심각한 장애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를 곁에서 지켜보고 안타까워하던 한 공부방 선생님이 ‘엄마가 다시 돌아와 아빠한테 혼나고 맞아서 힘들어하는데 그때도 엄마 앞에서 계속 웃기만 할 거냐’고 묻자 그제서야 아이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는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현장의 구체는 이론의 추상을 훨씬 상회해버리고 만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감각을 거뜬히 초과해버리고 마는 복잡다단한 이주자 문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말이다.

 

일견 기발해보이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는 분류법 하나가 좌담회 중간에 언급됐다. ‘글로벌’과 ‘다문화’의 구체적 용례와 관련한 것이었는데, 가령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글로벌’ 가정이라 부르지만 동남아인과 결혼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문화’ 가정이 되어버리고야 만다는 교묘한 배제와 차별의 분류법이 그것이다. 그렇게 ‘다문화’라는 용어는 오늘날 이 땅에서 극도로 지저분해지고 오염되어 버렸다. 양자(‘글로벌’과 ‘다문화’)를 그처럼 확연히 갈라쳐버리는 기묘한 언어감각 자체도 충분히 문제적으로 보이지만, 무엇보다 그와 같은 언어감각을 보유한 이의 무의식을 인내심을 발휘하여 베버식의 이해(verstehen)의 방법론적 태도를 빌어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려 하니 급기야 무기력의 감정이 온몸을 휩쓸어 버리고야 만다. ‘다름’의 문제를 ‘차별’(discrimination) 대신 ‘차이’(difference)의 문제설정 안에서 바라보려 하는 섬세한 윤리적 정치적 감수성이 태부족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힘겹게 전개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전선(戰線)을 생각해본다.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투쟁의 장소가 떠오른다. ’밀양‘, ’강정‘, ’쌍차‘, ’삼성전자서비스‘ 그리고 ‘세월호’라는 이름의 힘겹지만 숭고한 전선들. 그러나 어쩐지 말끔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는 보다 더 연성화(軟性化)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열사의 민주주의’ 프레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작금의 상황에서 조금 더 밀고 나아가 ‘작고 사소한 것들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전선의 추가를 통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누구나 핸드폰 하나 정도는 별 무리 없이 개통할 수 있을 정도의 민주주의. 어제 일본에서 연구조사차 날아온 나의 재일조선인 친구는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휴대전화를 개통시키기까지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발품을 팔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야 했다. 그의 푸념을 전해 듣고 난 뒤, 이런 정도의 민주주의라니, 좀 서글퍼졌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이 먹고, 학교에 가고, 병원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티의 한 평범한 소녀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계속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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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호][행사]세월호의 역설과 국가개조 문제 -재난의 정치경제학과 국가개조의 본질

세월호의 역설과 국가개조 문제
-재난의 정치경제학과 국가개조의 본질

“미국 멕시코만 석유유출사건과 태풍 카트리나 참사, 유럽 람페두사 난민 참사,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고, 그리고 세월호 참사까지.
자본자유화가 확대되면서 사회복지 축소, 노동권 약화, 임금축소 등 사회적 삶이 재앙에 빠지는 것 뿐 아니라 사회적 규제가 풀어지면서 재해와 재난이 속출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개 대개조에 나서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박근혜 식 국가 대개조는 규제완화, 공공부문 민영화 등 국가가 담당해 온 기능의 상당부분을 시장으로 넘기는 시장융합형, 기업형 국가개조를 설파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현 정부가 추동하는 국가개조의 성격과 방향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공론장을 열어본다.”

일시: 2014. 7. 24(목) 오후 3시
장소: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12호
발제: 박근혜 정부의 역습, 기업국가 개조론의 진실 (강동진_참세상연구소(준))

보조발제:
-문화시스템 변화와 국가개조 (백원담_성공회대동아시아연구소)
-금융화시기 문화와 독점지대의 조직화 (신병현_홍익대)
-세월호 참사와 박근혜 정부의 민주주의 (배성인_교수노조)
토론:
-장귀연(경상대사회과학연구원)
-김철(사회공공연구원)
-송종운(참세상연구소(준))
-권경우(문화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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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호][칼럼]독서와 캠페인의 불편한 동거(권경우)

독서와 캠페인의 불편한 동거

 

권경우(문화평론가/nomad70@daum.net)

 

얼마 전 파주에 ‘지혜의 숲’이라는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50만권(현재 20만권 비치)이라는 엄청난 양의 책을 소장하고 있지만, 여느 도서관과 달리 사서나 도서검색시스템이 없다. 그 대신 책을 찾아주는 ‘권독사제도’가 있고, 누구나 자유롭게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이곳이 ‘도서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때 아닌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실험적인 도서관이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고, ‘책의 무덤’ 혹은 ‘종이 무덤’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 이도 있다.

우선 이러한 논란이 등장한 배경에는 ‘도서관’에 대한 일종의 믿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어떤 공간인지, 도서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천차만별이지만, 학교교육이나 공공도서관이나 지역도서관 등을 통해 형성된 ‘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관념은 존재한다. 이러한 논란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비판적 논의를 통해 도서관의 개념과 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풍성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도서관의 존재 이유는 책에서 비롯된다. 책은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그 자체의 존재 의의를 갖는다. 그렇다 보니 특정 사회에서 책을 매개로 하는 다양한 공간과 실천, 즉 서점이나 도서관, 출판사, 독자와 독서행위 등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오늘날 종이책과 전자책이 공존하고 있고 전통적 독서행위를 넘어 다양한 읽을거리로서의 텍스트가 넘쳐나는 시대에, 독서행위로서의 실천은 분명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과 관련한 일종의 신화들이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그 중 하나는 책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과 정보, 즐거움을 얻는 도구로서의 책읽기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이다. 그 과정에서 책을 읽는 것으로서 독서행위는 점점 대중의 일상과 거리가 먼 행위가 되고, 마치 사라지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의무로서의 실천이 되고 만다.

책읽기를 권장하고 소비하는 방식은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독후감쓰기 대회가 가장 대표적이고, 그 외에도 정부기관 등의 독서증진캠페인이나 공공도서관에서 많이 전개하고 있는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시민들의 플래시몹 방식인 ‘책읽는 지하철’ 캠페인 등이 있다. 이러한 활동의 배경에는 독서행위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독서 증진을 위한 비슷한 노력은 다양한 공간과 주체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그러한 과정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고 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프로그램의 취지나 운영 방식에 있어서는 좀 더 면밀한 점검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2000년대 중반에 ‘지하철문고’라는 것이 있었다. 지하철역에 ‘독서마당’이라는 공간을 만들었지만, 부족한 도서뿐만 아니라 이용하는 시민들의 부주의 등을 원인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대부분 기증을 받아 운영하다 보니 양질의 도서가 구비되지 않을뿐더러 일단 책을 빌려간 이들이 반납을 하지 않으면서 문고가 텅텅 비게 된 것이다.

문제는 실패의 원인을 찾는 방식이다. 대부분 ‘시민의식 실종’으로 결론짓는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이라면 누구라도 자유롭게 책을 대출하고 반납하는 ‘자율’에 기초했지만, 실제로는 그게 잘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문제인지는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운영 방식과 같은 환경이나 시스템의 문제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다. 도서관에서 대출서비스를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누구나 연체라는 것을 경험한다. 물론 그 이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 게으름이나 귀찮음이 작용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도서관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연체일수에 따른 연체료를 부과하거나 일정기간 대출정지라는 일종의 패널티를 준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연체를 한다. 하물며 아무런 제재가 없는 ‘지하철문고’는 오죽할까? 빌려갈 때는 반납을 결심했겠지만 어느 순간 잊고 만다. 다시 기억날 수 있지만 다시 급한 일에 밀리고 만다. 결국 ‘지하철문고’의 실패는 시민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문고 운영의 시스템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즉 지하철문고만 만들어놓고 시민들의 양심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좀 더 체계적으로 준비하고 운영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사례는 많다. 물론 ‘북크로싱’ 운동처럼 책을 돌려읽는 등 나름 성공적인 사례도 적지 않다. 하지만 무작정 독서문화나 독서증진 캠페인이라는 이름으로 전개하고 그 실패 원인을 시민의식에서 찾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정류장이나 벤치에 책을 비치하는 것도 일종의 독서캠페인에 해당되는데, 어떤 취지와 시스템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평가와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민의 양심에 기댄 캠페인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이고 체계적인 도서관 시스템에 예산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절실하다. 정작 예산을 감축할 때는 가장 먼저 도서관처럼 힘이 없는 분야부터 삭감하면서 마치 모든 정부기관과 지자체를 비롯한 모든 사회가 독서증진을 갈망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위해 도서관 역시 좀 더 적극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특강과 강좌 등을 유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채워나가는 것을 지양할 필요가 있다. 도서관은 좀 더 지역사회와 어울리는 독자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대중의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획을 생산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은 책의 신화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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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호][행사리뷰]한국문화연구학회 라운드테이블 OO사회 열풍에 대한 메타담론 (김영선)

OO사회 열풍에 대한 메타담론을 마련한 자리?
문화정치의 방식은 무엇인지에 대한 메타논의는 부재한 시간!

 

김영선 _서울과학종합대학원 연구교수, <문화/과학> 편집위원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나? 지금 여기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나? 역사적으로 반복되어온 질문이다. 그런데 이삼 년 새 어떤 사회인가를 질문하는 책들의 빈도가 부쩍 늘었다.

 

학벌사회, 위험사회, 하류사회, 승자독식사회, 부동산 계급사회, 희망 격차사회, 주거 신분사회, 불안증폭사회, 대출 권하는 사회(2011년 이전), 영어 계급사회, 피로사회, 신 없는 사회, 감시사회, 무연사회, 루머사회, 약탈적 금융사회, 위험 증폭 사회, 팔꿈치 사회, 허기사회, 과로 사회,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 아파트 한국사회, 자기 절제 사회, 속삭이는 사회, 잉여사회, 절벽사회, 격차사회, 부품사회, 탈감정사회, 단속사회, 투명사회, 분노사회, 감성사회, 탈성장사회, 그리고 사회를 말하는 사회까지! OO사회로 작명된 책들이다.

 

OO사회에 대한 스토리의 시작은 자유기고가 노정태가 ‘2013년 올해의 책’을 결산하는 글(프레시안, “’혜민 스님’과 아파트를 지나, ‘꼰대’와 악수하다”, 2013. 12. 13)에서 출간부터 현재까지 그 영향력이 쭉 이어졌던 <피로사회>를 염두한 듯 “많은 저자와 편집자들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한국 사회를 ‘XX사회’라고 이름 붙이고자 했다”고 평가한데서 비롯한 걸로 기억한다.

 

한 알라딘 MD는 트위터에 2010년 이후 출간된 각종 사회 관련 책들을 언급하고(2014. 3. 5), 기사(시사IN, “무슨 ‘사회’가 이리 많나”, 2014. 3. 13.)를 통해 “장사치의 본능”으로 “OO사회 기획 이벤트”를 예시한 후, ‘한국사회를 읽는 몇 가지 시선들’이라는 총집합 이벤트를 마련하기도 했다(2014. 3. 25). 그리고 얼마 전 출간된 단행본(『사회를 말하는 사회』)은 OO사회로 작명한 단행본들을 서평 형식으로 묶었다. 일종의 다이제스트판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스란히 발가벗긴 세월호 참사는 OO사회에 대한 논의를 재점화했다. 방향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의 좌표를 다시 묻는! 물론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온 질문이지만 그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라는 다른 지반/시간에서의 새로운 질문들일 것이다.

 

한국문화연구학회[1]가 마련한 라운드테이블(OO사회 열풍: 메타담론과 성찰의 문화사회학) 또한 지난 얼마동안 회자된 OO사회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하고 나아가 ‘다른 지반/시간에서’ 출발한 것이라 본다. 그 가운데 라운드테이블은 단속사회의 저자 엄기호와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를 앉혔다.

 

 

엄기호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단속사회』는 단속이라는 말로 한국사회가 ‘사회가 아닌 상태에서의 사회’라는 역설을 드러내려는 시도였다고! 엄기호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편’을 강요하고 ‘곁’을 내치는 사회라고 진단하면서, 편만 남고 곁은 파괴된 상태에서의 삶의 형식을 ‘단속’이라는 말로 규정했다. 단속사회의 삶의 형식은 낯선 것과의 만남이 단절돼 동질성에 기반을 둔 빗장 건 사회(gated society)의 경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타자와의 접촉은 위험하다고 여기고 다른 것을 철저히 차단하는 그런 단속(斷續)이다. 동시에 스스로를 단도리하는 경향으로서의 단속(團束) 또한 눈에 띤다. 당연히 침묵과 순응이 지배적인 태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파편화되고 관계는 동질화되어 취향의 공동체만 남고 곁을 만드는 언어는 소멸해버린 사회! “이게 과연 사회인가”라는 모두에서의 반문은 지금 여기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불러야할지 곤혹스러워 하는 우리 모두의 고민과 맞닿았다.

 

김찬호는 모두에서 『모멸감』은 김우창의 『정치와 삶의 세계』란 책에서 ‘한국사회는 오만과 모멸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문장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메시지는 이러했다. 한국사회는 타인과의 관계를 권력이나 위계라는 프리즘으로 가늠하는 마음의 습관이 짙다고! 모멸의 구조는 일상의 개인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열등 집단을 범주화해 배제하는 문화, 그리고 극소수의 ‘잘난’ 자들만 환대하는 분위기 저변에도 관통한다. 모멸의 구조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모욕하면서! 이렇게 모멸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모멸감을 넘겨 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김찬호는 모멸을 만들어 내는 상황 그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지적한다. 우선 제도나 구조 차원에서 시공간적으로 구획된 차별의 비인격성을 거둬내는 작업 그리고 문화 차원에서 내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안전한’ 공간을 구축하는 작업 말이다.

 

“단속사회든 모멸사회든 문화연구의 입장에서 OO사회를 언급한 것은 ‘문화정치’의 가능성을 엿보기 위함”이라는 학회 주관자의 마지막 멘트는 지나는 길에 우연히 포스터를 보고 참석한 본인이 내심 기대한 질문이기도 했다. ‘이후의 사회’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문화연구는 ‘이후의 사회’를 어떻게 모색하는지! 새로운 삶의 양식을 모색하기 위한 개입의 방식은 무엇인지!

 

그러나 학회의 라운드테이블은 학회라는 틀거리 내에서 두 책에 대한 저작 의도와 얼거리를 소개하는 데 그쳤다. 내심 기대했던 OO사회‘들’에 대한 메타논의는 부재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라는 다른 지반/시간에서의 ‘이후 사회’에 대한 논의도 부재했다. 학회 주관자의 “문화정치”라는 마지막 멘트만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OO사회 ‘이후의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문화정치의 구체적 형상들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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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번 봄 정기 학술대회 주제는 “개입하는 문화연구, 시간과 노동을 묻다”로 중앙대학교에서 6월 27일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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