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2호][행사리뷰]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김현미 저 북클럽 참관기(이종찬)

집을 떠났으나 이주(移住)할 수도 귀향할 수도 없는 유민(流民)들

이종찬 _중앙대 영문학 박사수료, 웹진 <문화 다> 편집동인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 말하자면 ‘출가’(出家)한다. 그런데 일순 난감해진다. ‘출가’라는 단어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쩐지 그 속에서 ‘(되)돌아옴’의 계기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떠남. 떠나는 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떠나온 곳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원천적으로 되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떠남 말이다. 그렇게 우리를 주목하게 만드는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는 이 의미심장한 문장은 현재 이 땅에 거주 중인 수많은 이주자(migrant)들이 실제로 처해 있는 현실로 어느새 우리의 시선을 이끈다.

 

노동 이주자나 결혼 이주자와 같은 한국 내 다양한 이주자들 중에서 결코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의 고향을 떠나와서는 타국인 한국에서의 삶에서 배척당하고 그러한 현실에 절망하곤 하는데, 그렇다고 다시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조차 여의치 않게 돼버린 상황에서 말하자면 양쪽 사이에 ‘끼인 존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실제로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단적으로 그들의 고향에서 그에게 “힘들면 돌아와”라는 말을 해줄 수가 없는 참담한 상황. 이와는 달리 대한민국 국민(國民)인 우리는 이토록 글로벌한 세계적 상황 속에서 타국으로 손쉽게 떠나고 또 손쉽게 돌아올 수 있다. 떠남과 돌아옴은 우리에게 일종의 표리 관계로서 하나의 의미론적 짝패(‘떠남-돌아옴’이라는 한 쌍)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인지되는 것이다. 현대적 판본의 아파르트헤이트.

 

이번으로 여덟 번째를 맞는 ‘문화과학’ 북클럽 모임의 장소는 홍대 ‘프리포트’였다. 이주민문화예술센터 ‘프리포트’ 말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혹은 의도였는지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의미심장한 장소 선정이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이주자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이들을 세밀하게 현장 기록한 『우리는 모두 집을 떠난다』의 저자 김현미는 자신의 인류학자로서의 정체성을 부각시키며 좌담회의 말문을 열었다. 그는 연구자로서 무엇보다 현장의 ‘팩트’들에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87년 체제’를 지나 소위 포스트 철학 담론이 한국 사상계에 당도한 이후 너도 나도 언어의 해체적 속성에 몰두한 나머지 정작 언어가 가리키고자 하는 현실의 실제 상황은 괄호쳐버리고, 그에 따라 연구의 수준이 실제 현상과는 유리된 채 언어의 의미론적 유희 차원에 갇혀버린 일련의 연구 경향에 대한 비판으로 들렸다.

 

개인적으로도 이주자 문제와 관련하여 ‘현장’의 중요성을 실감케 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언젠가 내가 지면으로 접했던 어느 농촌 다문화가정의 실제 이야기였다. 동남아 어느 나라 출신의 결혼 이주자 엄마를 둔, 그러나 오래 못 가 집에서 도망나간 혹은 도망 나갈 수밖에 없었을 엄마를 둔 아이의 이야기. 녀석의 별명은 ‘웃기만 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울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어찌 된 일인지 통 울지를 않고 내내 웃기만 해서 또래 친구들로부터 ‘장애아’(‘애자’)로 놀림을 받았다던 아이. 보육과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 아이는 감정조절에 심각한 장애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를 곁에서 지켜보고 안타까워하던 한 공부방 선생님이 ‘엄마가 다시 돌아와 아빠한테 혼나고 맞아서 힘들어하는데 그때도 엄마 앞에서 계속 웃기만 할 거냐’고 묻자 그제서야 아이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는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처음 마주하게 되었을 때의 충격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현장의 구체는 이론의 추상을 훨씬 상회해버리고 만다. 적어도 우리의 현실감각을 거뜬히 초과해버리고 마는 복잡다단한 이주자 문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말이다.

 

일견 기발해보이지만 씁쓸하기 그지없는 분류법 하나가 좌담회 중간에 언급됐다. ‘글로벌’과 ‘다문화’의 구체적 용례와 관련한 것이었는데, 가령 미국인과 결혼한 한국인의 경우 우리는 그것을 ‘글로벌’ 가정이라 부르지만 동남아인과 결혼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문화’ 가정이 되어버리고야 만다는 교묘한 배제와 차별의 분류법이 그것이다. 그렇게 ‘다문화’라는 용어는 오늘날 이 땅에서 극도로 지저분해지고 오염되어 버렸다. 양자(‘글로벌’과 ‘다문화’)를 그처럼 확연히 갈라쳐버리는 기묘한 언어감각 자체도 충분히 문제적으로 보이지만, 무엇보다 그와 같은 언어감각을 보유한 이의 무의식을 인내심을 발휘하여 베버식의 이해(verstehen)의 방법론적 태도를 빌어와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려 하니 급기야 무기력의 감정이 온몸을 휩쓸어 버리고야 만다. ‘다름’의 문제를 ‘차별’(discrimination) 대신 ‘차이’(difference)의 문제설정 안에서 바라보려 하는 섬세한 윤리적 정치적 감수성이 태부족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힘겹게 전개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전선(戰線)을 생각해본다. 생각나는 대로 열거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투쟁의 장소가 떠오른다. ’밀양‘, ’강정‘, ’쌍차‘, ’삼성전자서비스‘ 그리고 ‘세월호’라는 이름의 힘겹지만 숭고한 전선들. 그러나 어쩐지 말끔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는 보다 더 연성화(軟性化)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열사의 민주주의’ 프레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은 작금의 상황에서 조금 더 밀고 나아가 ‘작고 사소한 것들의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전선의 추가를 통해서 말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누구나 핸드폰 하나 정도는 별 무리 없이 개통할 수 있을 정도의 민주주의. 어제 일본에서 연구조사차 날아온 나의 재일조선인 친구는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 주민등록번호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휴대전화를 개통시키기까지 인천공항에서 두 시간이 넘도록 발품을 팔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녀야 했다. 그의 푸념을 전해 듣고 난 뒤, 이런 정도의 민주주의라니, 좀 서글퍼졌다.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들이 먹고, 학교에 가고, 병원에 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티의 한 평범한 소녀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계속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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