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끝에서: 예술인 없는 예술인복지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1
기조발제
예술인증명절차와
긴급복지지원사업의 문제점
장지연(예술인소셜유니온 정책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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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끝에서: 예술인 없는 예술인복지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1
기조발제
예술인증명절차와
긴급복지지원사업의 문제점
장지연(예술인소셜유니온 정책위원)
[7월 대안문화정책포럼]
도시 문화예술공간의 공공성의 위기
2015년 7월 17일(금) 10:30 ~ / 가톨릭청년회간 <다리> 3층 바실리오홀
공동주최 : 문화연대, 수원공공미술관 이름바로잡기 시민네트워크(수미네)
문화연대 연대활동 소식
1. 콜트콜텍 수요문화제 <강정, 콜트콜텍 그리고 평화의 노래>
-일정: 7/29(수) 저녁 7시 30분, 홍대 클럽빵
-라인업: 김그앙+앙상상, 투스토리, 제8극장
2. 광화문 세월호광장 공간 ‘스튜디오 416’ 상설 전시 <망각에 저항하기>
-일정: 8/2(일)까지
서울시 문화영향평가제도,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일시: 2015.7.16. 목 14:00~16:30
장소: 시민청 바스락홀
주최: 서울연구원, 문화사회연구소
인문학의 위기와 대안지식공간의 가능성
최철웅(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
인문학은 위기에 처했는가, 아니면 열풍의 대상인가? 상반된 현실 인식을 보여주는 이러한 물음은 오늘날 인문학이 처한 모순적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먼저 대학으로 눈을 돌리면 인문학의 위기는 자명한 듯 보인다. 대학 구조조정의 일차적인 대상이 인문계열 학과들인 데서 알 수 있듯 학문으로서 인문학의 지위는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오늘날 인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취업시장에서 배제되고 소외될 운명임을 뜻한다.
그러나 대학 바깥을 둘러보면 인문학은 그 어느 때보다 제 존재와 필요성을 과시하는 듯도 보인다. 정부와 기업이 앞 다투어 인문학적 통찰과 감성을 강조하고, 백화점, 문화센터, 공공기관 등지에서는 인문학 강좌가 성행을 이루고 있다.
바야흐로 ‘인문학의 대중화’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그렇다면 이는 인문학이 전문가들의 전유물이기를 그치고 대중들 곁으로 한층 다가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닐까? 인문학의 위기는 도태되어 마땅한 인문‘학과’와 인문‘학자’들의 볼멘소리 아닌가?
우리가 인문학이라는 말로 비단 분과학문(문·사·철)만이 아니라 삶의 기예이자 교양을 아우르는 폭넓은 지식과 실천을 지칭하고자 한다면, 이런 반문은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인문학이 새로운 시대적 요청(산업적 필요에서부터 학문적 쇄신에 이르기까지)에 부응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화에 젖어있다는 비판 또한 나름 수긍할 만한 여지가 없지 않다.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우리가 아쉬워 할 이유가 무엇이랴?
그러나 인문학의 위기를 인문학자들의 엘리트주의와 특권이 해체되고 지적 평등이 실현되는 지식의 민주화 과정으로 이해하기엔 어딘가 개운치 않은 구석이 있다. 분과학문으로서의 인문학과 교양으로서의 인문학을 대비시키는 이런 유의 인식은 은연중에 인문학의 또 다른 면모를 무대에서 지우고 있다. 바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비판적 사유의 원천으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도구로서 인문학의 가능성이다. 오늘날 진정 위기에 처한 것은 특정 인문학과 따위가 아니라 ‘비판의 정신’ 그 자체이다.
대학이 인문학을 추방하려는 것은 단지 취업률이 낮아서가 아니다. 일부 구성원들이 인문학의 이름으로 대학 구조조정과 기업화에 공연히 저항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기업이 나서서 인문학을 대중화하는 것은 비판적 사유가 거세된 인문학이 오히려 지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인문학의 부족이나 쇠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인문학의 변형’이다.
프로젝트 수주형 인문학의 범람
지난 10여 년간 대학에서 설 자리를 잃은 인문학은 대중을 찾아 점차 대학 밖으로 진출해왔다. 그 첫 번째 흐름이 수유+너머나 다중지성의 정원 등 비판적 연구자들 중심으로 자생적인 대안지식공간들이 출현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흐름은 정부와 지자체, 기업이 직접 시민들에게 인문학 관련 강좌를 제공하고 지원하는 각종 사업들의 확산이었다.
한때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전자의 영역은 급속히 축소되는 한편, 후자는 안정적인 재정적 조건과 공간을 바탕으로 갈수록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 최근 경향은 사실상 후자가 전자의 영역을 침식해 들어가고 있는데, 양자의 경계를 분명히 인식하는 이들에게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정부가 주도하는 인문학 강좌 사업의 경우 예산을 지원하고 민간단체에 운영과 기획을 위임하는 형태가 주를 이룬다. 여기서 비판적 연구자들은 정책수립과 기획 과정에 전문가로 참여하거나, 집단을 이루어 프로젝트 사업에 공모하기도 한다.
대학 바깥으로 나간 비판적 연구자/집단들은 사회 전반적으로 비판적 학문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대부분 자체적인 재생산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결국 정부와 지자체가 지원하는 각종 프로젝트 사업을 통해 조직을 유지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가까스로 활동을 이어가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최근에는 협동조합을 결성해 자체적인 조합비로 운영비를 충당하려는 시도들도 행해지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를 내며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연구재단의 프로젝트 수주집단으로 전락한 대학(원)이 싫어 대학 바깥으로 탈주한 비판적 연구자들이 다시 정부지원 프로젝트에 의존해 조직과 생계를 유지해가는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국가와 자본의 지원을 받더라도 커리큘럼 구성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면 비판적 인문학을 대중들에게 전파하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현실적으로 충족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국연구재단의 학술지원 사업은 물론이거니와 문화예술 관련 지원 사업들도 심사 과정에서 정부의 정체성과 방향성이 크게 반영된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녹색관련 사업이, 박근혜 정부에서는 문화융성과 창조경제 관련 사업이, 박원순의 서울시에서는 사회적 경제와 마을 만들기 사업이 우대받곤 하는 것이다. 국가와 자본이 지원하는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사회취약계층을 위한 복지 및 자활수단으로서의 인문학(미혼모·탈북 청소년·교도소 수감자·노인들을 위한 인문학 등)이거나, 중산층을 위한 한가로운 교양 내지 자기계발로서의 인문학(시민들을 위한 고전 읽기·힐링으로서의 인문학·외국어 배우기 등)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인권, 노동, 페미니즘, 과학기술 등 사회에 대한 거시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길러줄 주제들은 명시적으로 배제되거나, 지원자들의 자기검열에 의해 우회된다. 심도 깊은 이론적 논의와 치밀한 사유를 훈련하기보다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보급하는 데 그치고 마는 것이다.
프로젝트 수주형 인문학들이 인문학 고유의 비판성과 정치성을 탈각시키는 것은 단지 내용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 형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주로 강좌 형식을 취하는 인문학 사업들은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니라 서비스 제공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통해 학습이 이루어진다. 소비자들은 굳이 강사의 권위를 존중할 필요가 없으며, 언제든 자유로이 학습과정에서 이탈할 수 있다. 강사들 또한 엄한 스승이라기보다 친근한 조언자로서 다가간다. 피교육자가 기존의 인식론적 한계를 뛰어넘고 새로운 주체성으로 이행하는 가르침과 배움의 과정은 교육자의 지적 권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장기간에 걸친 훈련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전적으로 스승에 대한 전이 관계가 형성되지 않으면 교육의 효과가 발생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신분석을 받으러 간 피상담자가 정신분석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어디 한번 나를 분석해봐”라는 태도를 취한다면 상담의 효과는 발생할 수 없을 것이다. 나아가 진정한 교육의 과정은 피교육자가 교육자에게 배울 뿐만 아니라,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는 변증법적 계기를 포함한다. 그러나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가 아니라 서비스를 제공하고 소비하는 관계에선 이 과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대안지식공간으로서 대학의 붕괴와 탈환
물론 국가와 자본이 제공하는 인문학 교육이 급진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보급하길 바라는 것은 애초에 무리한 요구일지 모른다. 대중들은 고단하고 무의미한 일상 속에서 헬스장에 나가 육체적 에너지를 재충전하듯 문화센터에 들러 정신적 재충전을 취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탈정치화된 교양과 자기계발로서의 인문학은 단지 대학 바깥의 특수한 영역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인문학 자체의 변형을 의미한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대학 내에서도 인문학은 각 전공영역에서 밀려나 ‘교양대학’으로 묶이는 추세이며, 아예 정규 커리큘럼에서 제외해 독서프로그램 등으로 대체하려는 움직임마저 일고 있다. 국가와 기업은 인문학의 의미 자체를 교양 내지 자기계발의 수단으로 탈정치화하는 담론투쟁을 벌이고 있으며, 대학 내 비판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의 조건들을 하나씩 제거해가는 중이다. 그 결과 비판적 사유와 담론에 목마른 일군의 학생들이 대학 바깥의 대안지식공간을 찾아가거나, 각종 인문학 강좌들을 기웃거리고 마는 것이다.
1980~90년대에 대학이 비판적 사유의 주된 생산과 유통의 공간일 수 있었던 것은 대학이 제공하는 정규 교육과정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 자생적이고 독립적인 지적 교류의 형식과 조건들을 만들어갔기 때문이다. 선후배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학회와 세미나의 형식들, 직접 생산해낸 대안적 커리큘럼과 담론, 학습과 실천을 일치시켜 나아가려는 운동의 흐름들이 있었다.
그러한 조건들은 학생운동의 몰락과 대학의 신자유주의적 변형에 의해 하나둘 파괴되었고, 탈정치화한 대학사회에서 비판적 사유는 심지어 불쾌하고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대학가에 팽배한 탈정치적 태도에 따르면 ‘비판’은 정치적 행위이고, 정치는 불순한 것이며, 불순한 것은 박멸되어야 한다. 비판적 태도는 아무런 대안도 없이 대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비생산적 행위이고, 기껏해야 경쟁에서 도태된 자들의 불만표출이거나 우리를 분열시키려는 외부세력의 음모이다. 현 질서에 대한 비판 없이 대안적 사회에 대한 상을 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때, 비판적 사유 자체를 거부하는 이러한 반-정치적 태도에 지배당하는 한 대안지식공간은 물론 대안사회에 대한 최소한의 상상력도 들어설 자리는 없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인문학의 위기가 있다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불모성의 위기에 다름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학은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지배의 공간이자 공유자원을 착취하는 기계로 기능하고 있다. 우리는 애초에 시민과 학생들의 것이어야 할 대학의 공간과 자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유하고 탈환해야 한다. 대안적 지식과 삶의 교류의 장으로서 대학공간은 여전히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투쟁의 전장이자, 대안사회 건설을 위해 우리가 활용해야 할 긴요한 무기고가 아닐 수 없다.
대학 바깥의 대안지식교육운동은 대학이나 지역의 자원을 전략적으로 공유·활용하면서 국가와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최대한 지켜가는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저항의 거점들을 하나둘 만들어내고, 이데올로기화한 지식과 담론을 급진화하고, 해방적 주체성을 길러내야 할 것이다.
월간 『오늘보다』, 2015년 7월 제6호
http://www.todayboda.net/article/6750
<문화/과학>에서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손희정, 오혜진 편집위원이 커리큘럼을 짜주었고, 7월 18일(토)에 1주차 세미나를 진행하였습니다. 2주차 세미나는 8월 8일(토) 오후 2시 문화연대 사무실에서 진행됩니다. 관심 있는 편집위원들과 후원독자 여러분의 많은 참여 기다립니다.
[1주차] 낸시 홈스트롬 편,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 유강은 역, 메이데이, 2012. 3/4/5부
[2주차] 이진경, 『서비스 이코노미』, 나병철 역, 소명출판, 2015.
[3주차]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최재인 역, 갈무리, 2014.
[4주차]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 역, 갈무리, 2011.
[5주차] J.K 깁슨-그레엄, 『그 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이현재 외 역, 알트, 2013.
[6주차] 피터 커스터스, 『자본은 여성을 어떻게 이용하는가?』, 박소현 외 역, 그린비, 2015.
[7주차] 게일 러빈, 『일탈』, 임옥희 외, 현실문화, 근간.
[8주차] 낸시 프레이저, 『포츈스 오브 페미니즘』, 임옥희, 근간.
제13회 계간 <문화과학> 북클럽
서비스 이코노미: 한국의 군사주의·성 노동·이주노동
(이진경 저, 나병철 역, 소명출판, 2015)
2015년 8월 13일(목) 늦은 7시.
장소: 추후 공지(미정)
사회: 문강형준(문화평론가)
저자: 이진경(캘리포니아 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 문학학과 교수)
토론: 이혜령(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정정훈(수유너머N)
<인사이드 아웃>이 뒤집지 않는 것
문강형준
피트 닥터 감독의 애니매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제목 그대로 ’안팎을 뒤집어’ 보여준다. 여기서 뒤집혀지는 ’안’은 인간의 뇌, 정확히는 뇌에 위치한 감정들이다. 영화는 라일리라는 11살 소녀의 삶과 그녀의 뇌 속에 있는 의인화된 감정들(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골자는 라일리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감정들 간의 상호작용 혹은 권력투쟁으로, ‘기쁨’과’슬픔’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행복만이 제일이라고 믿는 기쁨은 슬픔을 통제하려고 애쓰고, 슬픔은 쉽게 감정을 변모시키는 자신의 능력을 뻗치며 거기서 벗어난다. 갈등 끝에 기쁨은 슬픔에 푹 젖으면 기쁨이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노랑(기쁨)과 파랑(슬픔)이 손을 잡음으로써 녹색의 감정이 탄생하는 장면은 이 깨달음을 나타낸다.
픽사를 비롯한 디즈니 애니매이션은 오늘날 가치의 변화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소수자,약자, 소외된 자를 보듬으면서 상생을 추구하는 것이 강자의 도덕임을 조용히 설파한다. 빙봉의’희생’이 기쁨을 탈출시키는 것이나 무서운 피에로의 기억이 제 때에 라일리를 깨우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잊혀지는 기억들, 잊고싶은 기억들도 나름의 긍정적 역할을 한다. 이 깨달음은 영화에서 성장서사로 그려진다. 11살에서 12살이 되며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게 된 라일리의 성장과 그녀의 뇌 속, 슬픔을 껴안는 기쁨의 성장은 하나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 도덕적 성장은 정치학자 웬디 브라운이 말하는 ‘관용’을 환기시킨다.서구제국의 통치전략인 관용은 화합과 동반이라는 제국의 문화적 가치에 동조하는 이들에게만 베풀어지는 도덕이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근본주의자, 테러리스트로 호명되어 제거대상이 된다. 제국이 관용을 채택하는 이유는 근본주의자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에는 이슬람국가나 북한 같이 서구 글로벌 질서에 저항하는 근본주의자가 없다. 기쁨을 제외한 슬픔, 버럭, 소심, 까칠은 모두가 ‘부정적’인 데도 이들은 서로를 돕는다. 큰 힘을 가진 슬픔이나 버럭도 근본주의자라기보다는 기쁨의 인정을 갈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관용의 글로벌 질서란 이런 모습 아닐까.
긍정과 부정이 힘을 합쳐 ’라일리’라는 주체를 조화롭게 운영하는 이 영화의 세계관은 그래서 샌프란시스코의 아이스하키장처럼 매끄럽기만 하다. 우리 모두가 몰두하는 스마트폰의 유리 화면과도 조응하는 이 매끄러움은, 그러나, 뭔가를 얼음장과 유리화면 아래로 묻어버린 매끄러움이다. 기쁨과 슬픔이 손을 잡고, 긍정과 부정이 협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조화가 ’긍정’을 위해서만 작용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기쁨을 유발할 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고, 버럭이 유용한 것은 그것이 유리창에 매달린 기쁨을 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 감정들은 라일리의 ’제대로 된’ 성장이라는 긍정에 봉사할 때 유의미한 것이다. 가출 직전에 라일리를 끝내 버스에서 내리게 만드는 이 힘, 신자유주의의 지식 IT 경제를 표상하는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한 벤처창업자(후에 앱개발로 백만장자가 될 수도 있을) 아빠에게 부담을 주지 않게 만드는 이 힘, 그리고 여기에 모든 감정들이 협력하는 영화의 서사는 쿠바를 받아들이면서 북한을 배제하는 미국과 그리스에게 기회를 주면서 강력히 구조조종하려는 유럽연합의 정책과 상통한다. 기존 체제에 근본주의적으로 저항하는 세력은 완전히 배제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는, 그리하여 기존 체제의 정치경제적 모순을 문화적 개방과 자유의 이미지로 덮어버리는 것. <인사이드 아웃>은 우리 내부를 뒤집어 보여주지만, 이것만은, 이러한 우리 시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만은 뒤집지 못한다.
(<한겨레> 크리틱 2015년 7월 25일자)
일곡 유인호 학술상 수상, 정정훈의 『인권과 인권들』에 대한 심사평
최원(건국대학교 HK 연구교수)
2015년도 일곡 유인호 학술상의 명예를 거머쥔 정정훈의 『인권과 인권들』은 현재 한국에 나와 있는 인권에 대한 정치철학적 저서 가운데 이론적인 면에서 봤을 때 가장 포괄적이며 가장 심오한 내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이론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인권에 기초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시도하는 다양한 사회․정치적 실천들, 곧 ‘인권운동’의 급진적이면서도 동시에 실효성 있는 새로운 양태를 찾아내기 위한 구체적인 고민을 전개하는 매우 보기 드문 역작이다.
이 저서는 인권 담론이 현재 처해있는 ‘위기’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서(1장), 프랑스 대혁명(또는 그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권 운동의 장구한 역사 및 인권 개념을 둘러싼 이론적 논쟁의 역사를 믿을 수 없이 해박한 지식과 함께 독창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하고 있으며(2, 3, 4장), 현재 인권운동을 다시 한 번 급진화하기 위해서는 어떤 지점에 착목하여 우리의 논의와 실천을 재조직할 필요가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까지 제시하는(5, 6장) 눈부신 성과를 달성하고 있다.
저자는 어떻게 이러한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우리는 그 이유를 이 책의 감동적인 서문에서 엿볼 수 있다. 거기에서 정정훈은, ‘제주도에 놀러간다’는 기대에 차서 별 생각 없이 참여했던 2008년 ‘제주인권회의’가 인권에 대한 자신의 소박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어떻게 뒤흔들어 놓았으며 그 후로 어떻게 자신을 점점 더 인권에 대한 고민 속으로 몰고 갔는지를 회고하고 있는데, 그는 정작 자신을 변화시켰던 것은 그 회의에서 토론된 내용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만난 인권활동가들이었다는 고백을 한다. 인권활동가들의 지난한 활동 및 투쟁과의 이 우발적이지만 지속된 마주침이야말로 그를 변화시킨 바로 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맑스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는 사회주의 사상은 노동자 계급의 외부로부터 부르주아 지식인에 의해 ‘수입’ 또는 ‘주입’되는 사상이라고 말했던 칼 카우츠키에 반대하여, 그것은 우연한 계기에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노동자 계급의 편에 가담한 지식인이 노동자 계급에 의해 교육받으면서 전적으로 노동자 계급 안에서 발전시킨, 노동자 계급 자신의 사상이며, 이때 이러한 작업을 행하는 지식인의 상이야말로 안토니오 그람시가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불렀던 것의 핵심을 이룬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어디 이것이 노동자 운동 또는 사회주의 운동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이랴? 인권활동가들과 함께 현장에서 육체를 맞 부딪치며 투쟁하고 그들에 의해 교육받으면서 인권에 대한 이론을 이토록 훌륭하게 발전시킨 정정훈이야말로 이러한 의미에서 인권운동의 ‘유기적 지식인’이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가 『인권과 인권들』에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이라는 드물고도 어려운, 고귀한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이론과 (대중운동으로서의) 인권운동의 융합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정훈이 인권에 대한 기존의 논의에 가져다주는 핵심적인 이론적 혁신은 어디에서 찾아질 수 있는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신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 하에서 내적이거나 또는 외적인 방식으로 배제되어, 강력한 시큐리티-통치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다수의 빈민대중이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다기보다는 (최근 묵시록적인 SF물에 등장하곤 하는) ‘좀비’의 형상을 띠고 있는 상황에서 ‘인간의 권리’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매우 곤란한 질문을 어떤 주저함도 없이 정면으로 묻고 대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사상을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했던 에드문드 버크 뿐 아니라, 아렌트,아감벤, 바디우, 지젝 등과 같이 진보적이거나 좌파적인 입장에서 버크의 어떤 코드를 은밀하게 재전유하고 있는 다양한 인권비판가들은 인권은 ‘정치적인 것’과 본래적으로 아무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의 권리란 ‘정치적 존재’가 아닌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는다고 가정되는 권리를 뜻하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한 생명으로서의 인간 또는 심지어 동물로서의 인간이 갖는 ‘생존’에 대한 권리를 가리키거나 또는 기껏해야 비교적 안락한 물질생활(의식주)을 영위할 권리를 가리킬 뿐이라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은 오히려 단순한 생명으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자 애쓰는 모든 불이익과 고통을 감내하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까지도 불사하면서 어떤 이상적이고 진리적인 가치를 추구하거나 그러한 가치가 구현되는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주체로서 떨쳐나설 때에 출현하는 차원이다. 요컨대 정치적인 것은 이들에 따르면 인권의 대척점에서 발견되는 인간의 의사-초월적, 비-동물적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대해 정정훈은, (1789년 이전에 시작되어 1871년 파리코뮌까지 지속된)장기적인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검토하면서 인권의 담론이 결코 그러한 생존 또는 안락함에 대한 집착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인간성’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이 자신을 인간으로 선언하고 그렇게 인정받기 위한 정치적 투쟁의 담론이었다는 것을 이론의 여지없는 방식으로 논증해 보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권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 권리―곧 신이나 자연이 태어날 때부터 인간에게 부여해준 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려야할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 이하의 인간’ 또는 ‘비인간’이 자신을 (그 누구하고도 평등한) ‘인간’으로 선언하고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함으로써 쟁취하는 권리이다.
‘좀비’가 빈민대중의 일반적 형상이 되어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체제 안에서 인권의 담론이 다시 한 번 재발명되고 정치적으로 급진화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좀비는(먹기만 하는) 좀비로 남고자 할 때가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해 정치적으로 투쟁할 때에만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 수 있고 그렇게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정정훈은 “인권은 단지 인간이라는 특권적 생명체의 생존의 유지를 위한 권리가 아니다 …… 동물화된 존재로서의 인간을 위한 권리, 모든 정치적 삶의 형식을 잃어버린 단지 살아 있기만 한 자의 권리가 아니라 …… 정치적 주체화를 시도하는 자들의 권리”이며, 따라서 “인권의 정치란 무엇보다 바로 권리를 박탈당한 자들의 정치적 주체화를 모색하는 정치”라고 말한다(190~91쪽). 인권의 정치는 인간의 정치가 아니라, (적어도 일차적으로는) 비인간의 인간-되기의 정치이자, 비인간으로 취급받던 자들이 인간의 범주에 스스로를 포함시킬 것을 강제함으로써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확장적으로 재규정하고 재발명하는 정치인 것이다.
하지만 정정훈은 인권의 정치에 대한 (이미 놀라운) 이러한 논의를 넘어서서 현재 인권의 정치를 다시 발본화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쟁점을 제기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사실 이 저서의 진정한 백미는 5장에 등장하는데, 거기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적으로 변질된(따라서 자본주의체제에 순응주의적으로 변질된) 도덕화된 인권 담론과 대결하기 위해서, ‘연합을 통한 개체들의 역량 확장’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에 준거하여 인권을 더 이상 ‘개인적인 권리’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개인적인 권리(transindividual right)’로 새롭게 규정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관개인적인 권리’란 단순히 ‘집단적 권리’ 또는 ‘집단의 권리’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이 권리의 담지자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갖는 권리 및 그것의 실효성은 오직 개인들이 서로에 대해 맺는 관계 속에서만 현실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어떤 개인이 갖는 개인성이란 그가 타인과 관계 맺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와만 관계할 때 가장 순수하게 규정될 수 있다는 허구적 신화를 발명해냈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오히려 그러한 ‘고립’은 개인의 실존의 파괴, 곧 ‘죽음’을 의미할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개인의 개인성은 그가 타자(그것이 타인이든 자연 내의 또 다른 사물이든 간에)와 끊임없이 교통하는 가운데에서만 현실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개인들 사이의 무한 경쟁을 조직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그 경쟁을 통해 개인을 자유화하기는커녕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성의 재생산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개인들의 자립성, 더 나아가 그들의 실존 그 자체를 파괴해 나가고 있다(끝도 없는 자살행렬이 보여주고 있듯이 말이다). 따라서 인권의 정치가 다시 한 번 급진적인 해방의 정치로 출현하기 위해서는 권리의 관개인적 성격에 주목하고 연대 또는 연합의 새로운 형식들을 발명하는 실천을 반드시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정정훈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대문자) ‘인권’과 (소문자) ‘인권들’을 구분한다. 전자가 어떤 실현 불가능한 이상적인 이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후자는 그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인권이 이러저러한 제한과 함께 구체적으로 제도화된 결과로 주어지는 실정적 권리들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인권과 인권들, 이 양자의 변증법은 후자가 결코 전자를 온전히 실현할 수 없으며 전자는 항상 다시 후자의 제한성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끊임없는 대립물의 상호전화의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는 바꿔 말하자면, (전통적 맑스주의를 포함한 다양한 유토피아주의가 꿈꾸었던 것과 같은) ‘정치의 종언’과 같은 것은 없으며, 정치란 (누구보다도 먼저 배제된 자들 자신의 실천에 의한) 질문 재개의 무한한 과정일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이 심사평을 마치고자 한다. 정정훈은 자신의 저서에서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 대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논의를 다루는 대목에서만 거의 유일하게 시민권의 문제를 짧게 논하고 있다. 하지만 ‘인권과 시민권이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명이 이 책에서 좀 더 분명하게 되었다면, (대문자) 인권과 (소문자) 인권들 사이의 관계의 문제나 인권의 탈도덕화 및(재)정치화의 길이라는 문제가 훨씬 더 명료하게 가공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분명히 ‘정치’는 무엇보다도 ‘시민’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이 질문을 깊이 다룰 수 있었다면, (대문자) 인권을 (현실이 무한히 접근해 들어가야 할) ‘규제적 이념’보다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서의) 봉기적 시민권의 문제로 바라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권과 인권들』의 후속작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정정훈의 논의와 해명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