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과 전망-문화연대 주최 ‘신경숙 사태’ 2차 토론회 후기
천정환(문화과학 편집위원, 성균관대)
엉겁결에 토론회 발제(‘몰락의 윤리학’이 아닌 ‘공생의 유물론’으로 : 문학장과 지식인 공론장의 구조 변동을 위하여)를 맡은 덕분에 ‘한국 문학장’을 둘러싼 제도적ㆍ물질적 상황과, 특히 주체들의 해묵은 정념(감정)과 인정투쟁의 구조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이 논쟁 아닌 논쟁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더 많다.선정성을 내포한 보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만으로 사태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장의 미래를 전망하고 실천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동어반복과 평면적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1) 변곡점
어쩌면 우리는 한국 문학사의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이라 보인다.
분명 낡은 것은 수명을 다하고 새 대안이 나타나야 하는데 사실 아무도 준비가 안 돼 있다. 문제는 크고 복잡하며 해결의 전망은 어둡다. ‘문학판 바깥’이라 할 문화연대가 토론회를 조직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필요한 것은 기존의 문학권력 개념 또는 프레임을 업그레이드시켜, 다른 ‘문학’의 개념과 글쓰기, 다른 미디어전략과 독자들과의 관계- 문학 자본주의와 ‘사회적’ 경제를 상상하고 결합하는 다른 방식, 다른 창작의 주체들 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 문학문화의 새로운 ‘사회적 경제’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2) ‘주니어시스템’과 ’문학소녀’
40대 이상이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30대의 역량에 달려있다 보인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그들의 참여나 발언권은 원천적으로 제한돼 있거나, 힘이 없다. 잘 뭉치지도 못한다. 그들은 일단 ‘애들’로 돼 있다.
‘노령화’는 다른 한쪽의 지속적인 ‘유아화’ㆍ‘주체화의 연기’를 대가로 하는 것이다.(예컨대 종이접기 할배가 그들을 ‘꼬딱지’라 호명하자 그들은 좋고 또 서러워서 울었다 한다.) 386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한국 사회와 문화를 지배할 것이라는(마치 4.19세대가 그러고 있듯) ‘장기 386 시대’ㆍ‘장기80년대’ 같은 끔찍한 명제를 기억해야 한다.
이미 나이가 만만찮은 그들을 ‘애들’로 묶어 말 잘 듣게 사육하거나 입을 막아 놓은 이 체제와 관련하여, 김대성 평론가는 “주니어시스템이 20-30대 비평가들의 사태에 대한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실제로 논쟁(?)은, 50년 동안 한 자리에 계신 ‘최고 어른’과 그 제자ㆍ에피고넨들인 586 ‘편집위원’들을 한 축으로 하고, 그 밖의 각종 올드보이들과 2000년대 초에는 젊었던 40대들을 한 축으로 진행된다.
40-50대 비평가-아저씨 중심의 논의 구도에서 ‘미래’가 생산적으로 사유되기가 쉽지 않다 보인다. 그래선지 논쟁에 동원되는 언어나 정념은 다분히 ‘도덕적’이고 앙상한 경우도 많다.
신경숙이나 90년대 문학의 재평가도 중요하지만, 이 또한 ‘과거’에 초점이 맞춰진 연구자나 비평가의 주된 관심사이다. 역시 규범적이고 이념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사용되는 언어들이 퇴행적인 경우도 있다. 예컨대2차 토론회에서 발제자인 여성 비평가가 ‘미성숙한 소녀 취향’ ‘문학소녀’ 운운하며 신경숙을 평가해서 좀 놀랐다. 그리고 이는 몇몇 언론에서 크게 부각됐다.
물론 신경숙 문학을 낮게 볼 수는 있다 해도 그런 프레임은 곤란하다. 저런 용어ㆍ인식 자체가 남자 문학가-언론인들이 여성문학과 대중문학, 그리고 그 독자를 폄하하며 만든 역사적ㆍ남성중심적인 것이다. 그리고 문학사 연구를 통해 이는 이미 극복(?)돼 있다.
(3) 독자-편집자라는 실천역
마지막으로 이 논쟁 아닌 논쟁에는 독자와 편집자 같은 장의 다른 참여자에 대한 고려ㆍ시각 자체도 빠져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오늘날 ‘문학권력’과 문학문화의 젠더와 세대 문제, 그리고 권력의 물질적 토대는 절실하게 중요한 논제다. 독자와 유통ㆍ경영의 문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는 매우 ‘실천적인’ 문제다. 현실에서의 문학의 존재 양태를 규정하는 것이 ’이념’이나 도덕보다는 ’물질’의 문제라는 점을 일깨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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