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0호][칼럼]‘이야기’라는 정글(오혜진)

‘이야기’라는 정글

 

오혜진(근현대문화 연구자)

 

 

과연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고, 이야기의 세계는 공정할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 자꾸 해보게 되는 생각이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한번뿐이라서,우리는 지금 여기에 다른 무엇이 돼서 살아볼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왕자의 삶과 거지의 삶, 재벌의 삶과 대학생의 삶, 심지어 외계인의 삶이나 짐승의 삶마저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려질 수 있는 게 이야기의 세계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세계야말로 진정 모든 존재에게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인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풍부함’과 ‘다양성’이라는 ‘이야기 세계’의 메리트를 마음껏 누리고 있을까? 소설과 영화, 티브이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 등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접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세계도 내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폭의 너비만큼이나 비좁은 것 같다. 일일드라마를 보면 으레 큰 식탁에 빙 둘러앉아 식사하는 대가족이 나오고, 평일 저녁드라마를 보면 의사와 변호사, 재벌과 대학생들의 권력다툼과 연애가 나오고, 주말예능을 보면 귀여운 아이들을 둘셋씩 낳아 단란한 일상을 향유하는 이성애 가족이 나온다. 좋다.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의 어떤 이야기들은 대중서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철거민, 해고노동자, 국가폭력 희생자, 쪽방촌 노인, 성소수자들은 매일 수만명이 지나다니는 지하철역 한켠에 종일 앉아 있어도, 서울 한복판에서 온갖 형태의 집회와 시위를 해도 거의 재현되지 않는다. ‘돈이 안 돼서’, ‘비호감이라서’, ‘특정 소수의 이야기라서’, ‘다 지난 얘기라서’ 탈락하는 누군가들의 일상과 삶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는 이토록 비정하고 냉혹하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며칠 전에 새로 시작한 한 드라마에서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해고노동자들의 빨간 조끼를 비췄을 때, 계절마다 보는 문예지에 잊혔던 노동소설가가 쓴 <공장의 불빛>이나 <시인, 강이산> 같은 제목의 소설들이 실렸을 때, 과잉진압으로 아들을 잃은 아비의 ‘100원짜리’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다루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지금 여기에 도착했을까. 얼마나 많은 견제와 외면과 망각의 힘들과 싸워왔을까.

 

  물론 안다.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그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 시장과 자본의 교활하고도 무소불위한 힘은 혁명마저 상품화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다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 같다. 408일간 굴뚝에 올라가 계속 같은 말을 외쳐도, 1년이 넘게 유가족과 함께 국가에 재난사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활동가가 잡혀가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그뿐. 식민시기에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를 그릴 수 없었듯,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공산주의자가 ‘멀쩡한’ 형상으로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할 수 없었듯, 1980년대에 노동운동가들이 신분을 숨기며 암약해야 했듯. 2015년의 대한민국에는 누구도 금지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장 효과적인 억압의 전략은 대상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그들도 우리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더 주목해볼 일이다. 정글 같은 이야기의 세계에 모종의 결기를 가지고 도착한 이야기들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너무 낡고 너무 뻔한 이야기들의 그로테스크한 ‘귀환’을. 그 이야기들, 정말 익숙한가.

 

 

한겨레, 2015년 7월 19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08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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