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0호][후기]신경숙의 표절 그리고 문학권력(박범기)

신경숙의 표절 그리고 문학권력

 

박범기

 

 

표절 논란의 확산

 

언제나 그렇다. 확 끓었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한참 들끓을 때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기대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잠깐의 반응일 뿐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가라앉는다. 어떤 이슈든 대게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 역시 지난달에 잠깐 들끓었던 이슈에 불과하다. 지금은 거의 다 가라앉은 것으로 보이는 이슈이다. 물론, 이 이슈는 중요한 이슈이고, 그래서 이후에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으로써는 이미 한풀 꺾여버린 이슈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6월 23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라는 제목으로 토론회가 열렸다. 문화연대와 한국작가회의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토론회는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을 전면으로 다루었다. 때문에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일일이 숫자를 세어본 것이 아니라 확실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얼핏 보기에 청중들의 숫자보다 기자들의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그만큼 기자들이 많이 왔다는 이야기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고 가장 널리 호평 받는 작가 중 한 사람”(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 소개글의 일부로, 이날 발제를 맡은 평론가 오창은이 이를 언급했다) 인 신경숙이 표절을 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신경숙은 여러 정황상 표절이 확실한데도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고, 그래서 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말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 말들을 전한다는 핑계로 다시 자신의 말을 한 이들이 있다. 언론 보도라는 것은 늘 그들의 구미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본래 말의 형태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말의 형태로 재구성하여 보도하는 일은 어디서나 손쉽게 볼 수 있다. 이날 토론회에 대한 수많은 보도도 대부분 그랬다. 이날의 토론회에서 강조되었던 바는 신경숙 표절 사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걸 용인하고, 가능케 했던 힘들에 대한 논의였다. 발제를 맡은 평론가 이명원과 오창은이 공통적으로 강조했던 부분도 이 지점이다. 그런데 많은 언론들은 이 토론회가 신경숙의 표절을 확정하고, 그것에 대해 질타하는 토론회인 것처럼 보도했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할 따름인 언론의 생리 때문일 것이다. 이날의 토론회를 비교적 충실히 잘 정리한 기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문학장의 자정작용?

 

이 글에서 나는 이날의 토론회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었으며, 이날의 토론회의 의미에 대해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지점에서 이날 토론회에서 토론을 맡은 심보선 시인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심보선은 이날의 자리가 “한국문학의 자정작용이 시작되는 자리가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며, “문학이 하나의 생태계라면 차라리 자정작용은 이미 시작했고 이미 실패했고 이미 다시 시작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사실, 이 자리가 목표한 것은 신경숙의 표절 사건 이후에 문학장의 자성을 촉구하는 논의의 장을 여는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에 대한 논의의 장은 마련된 바 없다. 게다가 사건의 당사자인 신경숙이나 창비, 문학동네, 문지 같은 대형 출판사 쪽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고,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그랬듯이(이날의 토론회에서 이명원은 신경숙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독 빈번하게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최근의 신경숙의 표절 논란은 그 당시에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던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논란이 시간이 지나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의 토론을 비롯하여, 이후에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신경숙 표절 사건은 단순히 신경숙 개인의 일만이 아니라, 그녀를 비호한 출판자본과 그들 주위에 있는 수많은 문학권력들에 대한 일이다. 그들은 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주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장 안에서 이득을 보는 주체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개인이 말해봤자 별로 바뀔 것은 없을 테니 이쯤 해야겠다. 그래도 한 마디만 더 말하고 싶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학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글을 쓴다는 것, 문학 공부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삶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알았음에도 그것이 지닌 의미를 믿고 공부를 했었다. 그때만 해도 그쪽 동네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녔던 믿음은 지나칠 정도로 나이브한 것에 불과했던 것 같다. 신경숙의 표절과 그 이후의 문학장의 반응은 그 바닥의 수준을 가감 없이 드러내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회의하게 만들었다, “같은 걸 다르다고 못해”라고 말했던 평론가를 비롯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고만 애쓰는 문학장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후배들 부끄럽지도 않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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