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11호][칼럼] 시스템 고장과 봉기(권명아)

[야! 한국사회] 시스템 고장과 봉기

 

권명아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을 절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화가 강한 일본에서 시위는 ‘최고 민폐’이다. 게다가 일본에서도 ‘깍쟁이’로 유명한 교토 사람들이 시내 번화가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박수를 치며 흥분하는 모습이야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화이다. 지난 목요일 교토의 동네 데모 현장이다. 삼사십 명 정도 모인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시위였지만, 거리 시민들의 호응과 함성에 시위대의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경험해본 적이 있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시위에 참가한 일본 친구들은 “난생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몇 해 동안 ‘동네 인문 공동체’를 만나러 일본에도 자주 가고는 했다. 어렵게 만난 동네 문화운동가나 활동가들은 변화의 활력이 넘치는 한국을 부러워하곤 했다. 게다가 ‘3·11 사태’ 이후, 일본은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고층 건물에 내걸린 전광판에서 번쩍이던 ‘부흥’, ‘지역 살리기’ 같은 정부의 메시지는 너무 건전해서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 이때만 해도 일본이 이렇게 변할 것이라고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헬조선’이라는 한탄이 그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시위, 변화의 열정’ 같은 말은 고리타분한 옛날 사람 말로 치부된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낙관적인 말을 하는 것도 기성세대의 시대착오적 발상인 것 같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보면서 어두운 심연에서 예상치 못하게 출현하는 변화의 힘과 그 가능성에 좀 더 기대를 품게 된다. 물론 현재 일본 사회에서 출현한 힘들이 곧 소멸하거나, 일본 사회 전체를 바꿀 정도의 역량으로 이어지지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어떤 봉기의 힘도 사회 전체를 통째로 바꾸는 데 성공한 적은 없다. 다만 변화를 향한 힘들이 사회의 흐름을 바꾸고, 그렇게 바꾼 흐름을 이어갈 수 있는 역량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일본 사회에서 이러한 힘들은 어떻게 출현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내놓은 대답 중 하나는 ‘3·11’의 경험이다. ‘3·11’ 이후의 반원전 시위가 오늘날의 반전 시위로 이어졌음은 분명하다. 일본 비평가 히로세 준은 고장 난 채 정지되어 정상화가 불가능한 원전 시스템을 봉기의 전형적 이미지로 분석한 바 있다. 시스템이 정지된 뒤, 일본은 불바다의 한가운데 있는 것 같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이 혼란과 공포 속에서 ‘부흥’과 같은 총동원 시대가 다시 도래할 가능성이 커졌고, ‘정상국가’라는 이른바 ‘정상화’ 논리 역시 여기서 돌출할 여지를 얻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은 부흥과 정상화가 아닌, 정상화를 거부하는 길로 접어들고 있다. 시스템이 멈춘 악몽과 같은 경험 끝에, 일본의 많은 이들은 ‘다시, 정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는 원전 사고 경험 이후 시스템의 정상화(원전 재가동) 대신, 시스템 정지(원전 반대)를 선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노력도 모자라 ‘노오오오오오오력’을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헬조선에서 정상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암울한 전망에 휩싸인 한국 사회에서 변화의 힘은 과연 어떤 식의 ‘시스템 정지’를 통해 도래할 것인가? 일본의 동네 인문 공동체 친구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 모두가 정상적인 삶을 꿈꾸며 과로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가던 시절에 그렇게 살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 그들의 선택 속에 바로 변화의 잠재성은 이미 있었던 게 아닐지. ‘시스템 고장’은 환멸만이 아니라 봉기의 힘을 촉발한다. ‘헬조선’이라고 예외이랴.

 

(한겨레 2015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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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후기]목포대 민교협·문화과학 공동 세미나 후기

목포대 민교협·문화과학 공동 세미나 후기

 

대학 문제의 공유와 대안을 모색한 뜻 깊은 자리

 

지난 6월 11일, 목포대 민교협(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목포대 분회)과 문화과학이 공동 주최한 세미나, “대학, 위기의 담론에서 희망의 담론으로”가 목포대에서 열렸다. 목포대 민교협 총무를 맡고 계시는 홍석한 선생님에 따르면, “목포대 민교협은 대학과 대학 교육이 처해 있는 문제 상황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응과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주요사업의 하나로 삼고 있다.” 그 실천을 위한 첫 번째 행사로 “대학 구조조정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의 강연과 토론이 5월 20일에 진행되었고, 문화과학과의 공동 세미나는 두 번째 행사로 기획된 것이다.

대학 문제에 대한 목포대 민교협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이 날 세미나에는 많은 민교협 선생님들이 참석하였다. 문화과학 자문위원이기도 한 임춘성(목포대 중어중문과) 선생님이 사회를 맡으셨고, 이동연(문화과학 편집인) 선생님이 <문화/과학> 82호에 실렸던 “신자유주의 대학과 학력자본의 재생산”이라는 글로 기조 발제를 하셨다. 토론자로는 류동영(목포대 한약자원학과),최종명(목포대 컴퓨터공학과), 추정완(목포대 윤리교육과), 문화과학 편집위원인 이윤종, 조형근, 정원옥이 참여하였다. 3시간 동안 진행된 세미나의 열기는 뜨거웠다. 방청석에 계신 민교협 선생님들이 더 적극적인 질문과 논평, 대안 제시 등을 해주시면서 폭넓게 대학 문제를 공유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될 수 있었다.

문화과학 편집위원들을 반갑게 맞아준 목포대 민교협 선생님들의 환대와 애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임춘성 선생님께서는 바닷가가 멀지 않은 횟집에서 맛있는 점심식사를 대접해주셨고, 행사 후 뒤풀이에서는 대부분의 민교협 선생님들께서 자리를 함께 해주셔서 더 훈훈하고 속 깊은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목포대 민교협 선생님들의 높은 참석률과 강한 소속감, 끈끈한 애정에 대해 비결을 묻자, 한 선생님께서 “7년 동안 함께 공부해오면서 쌓인 힘”이라고 답변해주셨다. 목포대 민교협과의 짧은 만남은 공부를 통한 신뢰의 구축과 연대가 학문공동체를 활성화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 자리였다. 문화과학 편집위원들을 초대해주시고, 아낌없는 애정과 환대로 맞아주신 목포대 민교협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더 확장되고 정교해진 주제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고대한다.(편집부/정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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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연구자료]토론회: 신경숙표절사태와 한국문학의미래

[문화연대, 인문학협동조합 공동주최] 신경숙표절사태와 한국문학의미래

▪일시 및 장소 : 2015년 7월 15일(수) 10:00~18:00, 서교예술실험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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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연구자료]최근표절사태와 한국문학권력의 현재-1차 신경숙토론회 자료집

▪ 일시 및 장소 : 2015년 6월 23일(화) 낮 4시. 서교예술실험센터
▪ 공동주최 : 문화연대, 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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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대∙한국작가회의 긴급토론회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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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칼럼]‘이야기’라는 정글(오혜진)

‘이야기’라는 정글

 

오혜진(근현대문화 연구자)

 

 

과연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고, 이야기의 세계는 공정할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 자꾸 해보게 되는 생각이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인생은 단 한번뿐이라서,우리는 지금 여기에 다른 무엇이 돼서 살아볼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야기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왕자의 삶과 거지의 삶, 재벌의 삶과 대학생의 삶, 심지어 외계인의 삶이나 짐승의 삶마저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려질 수 있는 게 이야기의 세계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의 세계야말로 진정 모든 존재에게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인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 ‘풍부함’과 ‘다양성’이라는 ‘이야기 세계’의 메리트를 마음껏 누리고 있을까? 소설과 영화, 티브이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 등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을 접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세계도 내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폭의 너비만큼이나 비좁은 것 같다. 일일드라마를 보면 으레 큰 식탁에 빙 둘러앉아 식사하는 대가족이 나오고, 평일 저녁드라마를 보면 의사와 변호사, 재벌과 대학생들의 권력다툼과 연애가 나오고, 주말예능을 보면 귀여운 아이들을 둘셋씩 낳아 단란한 일상을 향유하는 이성애 가족이 나온다. 좋다. 그 자체로 나쁘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의 어떤 이야기들은 대중서사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사실이다. 철거민, 해고노동자, 국가폭력 희생자, 쪽방촌 노인, 성소수자들은 매일 수만명이 지나다니는 지하철역 한켠에 종일 앉아 있어도, 서울 한복판에서 온갖 형태의 집회와 시위를 해도 거의 재현되지 않는다. ‘돈이 안 돼서’, ‘비호감이라서’, ‘특정 소수의 이야기라서’, ‘다 지난 얘기라서’ 탈락하는 누군가들의 일상과 삶이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세계는 이토록 비정하고 냉혹하다.

 

그래서 더 낯설었다. 며칠 전에 새로 시작한 한 드라마에서 “단결” “투쟁”이라고 적힌 해고노동자들의 빨간 조끼를 비췄을 때, 계절마다 보는 문예지에 잊혔던 노동소설가가 쓴 <공장의 불빛>이나 <시인, 강이산> 같은 제목의 소설들이 실렸을 때, 과잉진압으로 아들을 잃은 아비의 ‘100원짜리’ 국가배상청구소송을 다루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지금 여기에 도착했을까. 얼마나 많은 견제와 외면과 망각의 힘들과 싸워왔을까.

 

  물론 안다. ‘무엇을 그리느냐’보다 ‘어떻게 그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 시장과 자본의 교활하고도 무소불위한 힘은 혁명마저 상품화한다는 것.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도 다 ‘좋았던 시절’의 이야기 같다. 408일간 굴뚝에 올라가 계속 같은 말을 외쳐도, 1년이 넘게 유가족과 함께 국가에 재난사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던 활동가가 잡혀가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면 그뿐. 식민시기에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를 그릴 수 없었듯, 한국전쟁 이후 북한과 공산주의자가 ‘멀쩡한’ 형상으로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할 수 없었듯, 1980년대에 노동운동가들이 신분을 숨기며 암약해야 했듯. 2015년의 대한민국에는 누구도 금지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하려 하지 않는 이야기들이 있다. 가장 효과적인 억압의 전략은 대상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그들도 우리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더 주목해볼 일이다. 정글 같은 이야기의 세계에 모종의 결기를 가지고 도착한 이야기들을. 다 안다고 생각했던, 너무 낡고 너무 뻔한 이야기들의 그로테스크한 ‘귀환’을. 그 이야기들, 정말 익숙한가.

 

 

한겨레, 2015년 7월 19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0084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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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칼럼]독점과 모욕의 자리(권명아)

독점과 모욕의 자리

 

권명아(동아대 국문과 교수)

 

 

한국 사회에서는 제도 비판이 불가능하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제도 비판을 인격화해서 개인적 모욕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정치 제도를 비판하는 걸 개인적 모욕으로 받아들여 보복하는 정치권에 대해서는 입을 모아 같이 한탄하지만, 자신이 속한 제도에 대한 비판에 직면해서는 모욕당했다고 펄펄 뛴다. 한국문학 제도 비판도 이런 악순환을 고스란히 반복해왔다. 역설적으로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의 제도가 추상적이고 공적인 형식이 아니라 인격화된 사적 형식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문학 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을 때도 비판을 사적 모욕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한국문학이 자기비판의 계기를 놓친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후 한국문학 제도는 인격화된 사적 형식의 면모를 더욱 심화해왔다. 논란이 되는 신경숙의 표절과 ‘문단 권력’에 대한 논의가 제도 비판의 계기가 되려면 바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먼저 끊어야 한다. 게다가 이른바 ‘문단 권력’의 안쪽에서는 문학 제도 비판을 ‘낙오자들의 원한’ 정도로 치부해온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인격화된 사적 형식으로 경도된 한국문학 제도가 출판 산업에서 독점적 지위를 점하게 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한국문학 제도에서 창비와 문학동네는 독점자본이라고 할 수 있다.이들은 경제적 생산의 차원뿐 아니라 상징자본과 문화자본 또한 독점하고 있다. 문학적인 것과 한국문학의 정통성을 수호한다는 “문학적인 이념”이 바로 창비나 문학동네가 독점자본이 될 수 있는 기반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창비나 문학동네는 제도 비판에 직면할 때마다 위기에 처한 한국문학의 수호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거듭 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입장에서 한국문학은 항상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에 수호자로서 자신들의 위치 또한 항상 소수자나 약자의 입장이라는 신념을 갖고 있다. 따라서 제도 비판을 위기에 처한, 소수자에 불과한 한국문학을 죽이는 적대적 행위로 여기게 된다.

 

  동어반복을 피하려면 이전과는 다른 논쟁이 필요하다. 주식회사 창비나 문학동네를 비롯한 여타 대형 출판기업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비판과 연구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국문학 제도에서 출판 산업의 독과점 방지를 위한 감시와 견제, 또는 제재가 필요하다. 대형 출판 주식회사의 상징적이고 실제적인 주주 자리에 있는 이들이 비평가나 편집위원을 겸하는 것은 금지되어야 한다. 사적이고 독점적으로 비평가를 재생산하는 방식도 공개적으로 비판되어야 한다. 논란이 되는 대형 출판사 관계자들이 한국문학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과 독점자본의 지위를 모순 없이 겸해왔던 이중성에 대해 근원적인 자기비판이 필요하다. 한국문학의 수호자라는 ‘신성한 자리’를 이후로도 유지할 수 있으려면 독점자본과의 실질적 분리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가 과연 가능한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런 최소한의 형식적 변화조차 불가능하다면, 한국문학 제도는 파산해버려도 아깝지 않은 한국문학 주식회사에 불과하다.

 

한국문학 제도의 모순은 그야말로 중층적이어서, 반성과 성찰로 해결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사실 한국문학 제도가 이러한 사적 제도화와 독점화로 기울어지면서 이로부터 이탈하는 여러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독점화된 제도의 힘은 이로부터 이탈하는 힘들이 자리할 토양을 사실상 황폐화했다. 1990년대 중반 나타났던 다양한 문학 집단들은 “본격문학의 가치”라는 깃발 아래, 신문 문화면과 선인세와 ‘밀어내기 출판’으로 무장한 대형 자본과의 전투에서 그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이탈의 힘과 역사를 되찾고 자리매김하는 게 더 중요한 시점이다.

 

한겨레 칼럼, 2015년 7월 8일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99421.html?_fr=mt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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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후기]단상과 전망-문화연대 주최 ‘신경숙 사태’ 2차 토론회 후기(천정환)

단상과 전망-문화연대 주최 ‘신경숙 사태’ 2차 토론회 후기

 

천정환(문화과학 편집위원, 성균관대)

 

엉겁결에 토론회 발제(‘몰락의 윤리학’이 아닌 ‘공생의 유물론’으로 : 문학장과 지식인 공론장의 구조 변동을 위하여)를 맡은 덕분에 ‘한국 문학장’을 둘러싼 제도적ㆍ물질적 상황과, 특히 주체들의 해묵은 정념(감정)과 인정투쟁의 구조에 대해서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

그런데 이 논쟁 아닌 논쟁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더 많다.선정성을 내포한 보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만으로 사태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장의 미래를 전망하고 실천적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동어반복과 평면적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1) 변곡점

어쩌면 우리는 한국 문학사의 변곡점에 서 있는 것이라 보인다.

분명 낡은 것은 수명을 다하고 새 대안이 나타나야 하는데 사실 아무도 준비가 안 돼 있다. 문제는 크고 복잡하며 해결의 전망은 어둡다. ‘문학판 바깥’이라 할 문화연대가 토론회를 조직했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필요한 것은 기존의 문학권력 개념 또는 프레임을 업그레이드시켜, 다른 ‘문학’의 개념과 글쓰기, 다른 미디어전략과 독자들과의 관계- 문학 자본주의와 ‘사회적’ 경제를 상상하고 결합하는 다른 방식, 다른 창작의 주체들 등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 + 문학문화의 새로운 ‘사회적 경제’를 구체화하는 것이다.

 

(2) ‘주니어시스템’과 ’문학소녀’

40대 이상이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신선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30대의 역량에 달려있다 보인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그들의 참여나 발언권은 원천적으로 제한돼 있거나, 힘이 없다. 잘 뭉치지도 못한다. 그들은 일단 ‘애들’로 돼 있다.

‘노령화’는 다른 한쪽의 지속적인 ‘유아화’ㆍ‘주체화의 연기’를 대가로 하는 것이다.(예컨대 종이접기 할배가 그들을 ‘꼬딱지’라 호명하자 그들은 좋고 또 서러워서 울었다 한다.) 386들이 늙어 죽을 때까지 한국 사회와 문화를 지배할 것이라는(마치 4.19세대가 그러고 있듯) ‘장기 386 시대’ㆍ‘장기80년대’ 같은 끔찍한 명제를 기억해야 한다.

 

이미 나이가 만만찮은 그들을 ‘애들’로 묶어 말 잘 듣게 사육하거나 입을 막아 놓은 이 체제와 관련하여, 김대성 평론가는 “주니어시스템이 20-30대 비평가들의 사태에 대한 침묵을 강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 실제로 논쟁(?)은, 50년 동안 한 자리에 계신 ‘최고 어른’과 그 제자ㆍ에피고넨들인 586 ‘편집위원’들을 한 축으로 하고, 그 밖의 각종 올드보이들과 2000년대 초에는 젊었던 40대들을 한 축으로 진행된다.

 

40-50대 비평가-아저씨 중심의 논의 구도에서 ‘미래’가 생산적으로 사유되기가 쉽지 않다 보인다. 그래선지 논쟁에 동원되는 언어나 정념은 다분히 ‘도덕적’이고 앙상한 경우도 많다.

신경숙이나 90년대 문학의 재평가도 중요하지만, 이 또한 ‘과거’에 초점이 맞춰진 연구자나 비평가의 주된 관심사이다. 역시 규범적이고 이념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사용되는 언어들이 퇴행적인 경우도 있다. 예컨대2차 토론회에서 발제자인 여성 비평가가 ‘미성숙한 소녀 취향’ ‘문학소녀’ 운운하며 신경숙을 평가해서 좀 놀랐다. 그리고 이는 몇몇 언론에서 크게 부각됐다.

물론 신경숙 문학을 낮게 볼 수는 있다 해도 그런 프레임은 곤란하다. 저런 용어ㆍ인식 자체가 남자 문학가-언론인들이 여성문학과 대중문학, 그리고 그 독자를 폄하하며 만든 역사적ㆍ남성중심적인 것이다. 그리고 문학사 연구를 통해 이는 이미 극복(?)돼 있다.

 

(3) 독자-편집자라는 실천역

마지막으로 이 논쟁 아닌 논쟁에는 독자와 편집자 같은 장의 다른 참여자에 대한 고려ㆍ시각 자체도 빠져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오늘날 ‘문학권력’과 문학문화의 젠더와 세대 문제, 그리고 권력의 물질적 토대는 절실하게 중요한 논제다. 독자와 유통ㆍ경영의 문도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는 매우 ‘실천적인’ 문제다. 현실에서의 문학의 존재 양태를 규정하는 것이 ’이념’이나 도덕보다는 ’물질’의 문제라는 점을 일깨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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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ㆍ문동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그들의 진로 뿐 아니라 문학장과 문학사의 많은 것들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관행이나 ‘적폐’를 제대로 못 청산하면 ‘신뢰의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또 많은 독자들을 잃을 것이다.

대신 뭔가 ‘다른 움직임’도 활발해지긴 할 것이다. 문학판에서의 신자유주의와 공멸적 상황에 가까운 공론장의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위해 원칙적으로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경영 능력과 ‘운동’이다. 문화연대가 약속한 후속 토론회가 이런 문제를 다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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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칼럼]복면가왕, 클레오파트라의 가면 놀이(이동연)

복면가왕, 클레오파트라의 가면 놀이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매주 일요일 늦은 오후에 방영되는 문화방송의 <복면가왕>이 요즘 화제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가 압도적인 가창력으로 모든 도전자들을 물리치고 4연승을 달리면서 그 가면의 주인공이 과연 누구인지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독주는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그 가면을 벗길 사람은 누가 될 것인가를 놓고 벌이는 가면놀이가 제대로 흥미를 끌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가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승리가 계속될수록 가면의 주인공에 대한 심증은 확증으로 바뀌고 있다. 4주 연속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는 가창력의 소유자, 작은 키의 남성 보컬, 고음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특유의 보컬 음색, 목에 있는 두 개의 점, 그리고 타 방송 프로그램에서 부른 ’오페라의 유령’과의 높은 싱크로율 등 클레오파트라가 가수 김연우일 거라는 예측은 이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하다.

아주 분명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복면가왕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식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가면놀이의 독특한 심리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복면가왕의 게임은 노래 대결에서 지는 사람만 가면이 벗겨지는 룰을 가지고 있다. 클레오파트라가 노래 대결에서 이기는 한 그의 가면을 벗길 수 없다. 아무리 클레오파트라가 김연우라고 주장해도 그가 노래 대결에서 지지 않은 이상 그의 정체를 밝힐 수 없다. 한쪽은 가면을 벗기려하고 다른 쪽은 가면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이 가면놀이는 가창을 생명으로 삼는 가수 입장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게 만드는 게임의 규칙이다. 그리고 가면놀이는 가왕의 자리를 지키려는 자와 그것을 뺏으려는 자 사이의 ’배제와 전복’의 법칙이라는 매우 원시적인 권력 투쟁의 원리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클레오파트라가 김연우라는 것을 확신해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 주인공이 다른 사람이었으면 하는 반전의 기대 심리를 가지고 있다. 1999년에 미국 프로레슬링 WWE 소속 선수 오웬 하트는 항상 가면을 쓰고 링 위에 등장한다. 항상 푸른색 검은 망토와 가면을 쓰고 나왔기 때문에 그는 ’블루 블레이저’라는 애칭을 갖고 있었다. 관중들은 블루 블레이저가 등장하면 상대방 선수가 그의 가면을 벗겨주길 기대한다. 왜냐하면 상대방 선수가 그의 가면을 벗겼을 때, 간혹 다른 선수가 나타나거나, 심지어는 블루 블레이저의 반대파 선수가 얼굴을 드러내 관중들을 충격에 빠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레슬링 게임의 승패의 여부는 가면을 벗기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

대중들은 문제의 가면을 벗겨내 자신이 예상한 사람을 확인하고 싶지만, 반대로 전혀 엉뚱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이중의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심리로 가면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욕구와 그냥 가면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욕구를 동시에 갖는다. 이것이 복면가왕, 클레오파트라 가면놀이의 이중의 심리구조이다.

대중들은 클레오파트라의 노래를 계속 듣고 싶은 마음과 그의 가면을 빨리 벗겨 정체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두 마음은 양립할 수 없다. 노래를 계속 듣고 싶다면, 그 가면을 벗길 수 없다. 그리고 가면이 벗겨지는 순간,듣고 싶은 노래의 순간은 그 걸로 종식된다. 클레오파트라의 가면놀이는 그래서 그 결과가 자명하면서도 재미있다. 그것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더불섬’ 게임이다. 언젠가는 밝혀질 클레오파트라의 가면놀이이지만, 대중들은 반전의 순간마저 기대하면서 그 실체의 순간을 유보하는 쾌락을 즐기고 있다. 복면가왕, 클레오파트라의 가면놀이는 최근 유승민 대표의 사퇴로 마무리된 ’배신의 정치’란 이름의 권력의 가면놀이보다 훨씬 건전하고 즐겁다. ‘배신의 정치’란 가면놀이에서 결국 누구의 가면이 벗겨져 민낯이 드러난 것일까? 클레오파트라의 가면은 여전히 흥미진진하게 벗겨지지 않고 있는 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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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후기]신경숙의 표절 그리고 문학권력(박범기)

신경숙의 표절 그리고 문학권력

 

박범기

 

 

표절 논란의 확산

 

언제나 그렇다. 확 끓었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한참 들끓을 때는 그것이 무엇이라도 바꿀 수 있을 것처럼 기대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잠깐의 반응일 뿐이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가라앉는다. 어떤 이슈든 대게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 역시 지난달에 잠깐 들끓었던 이슈에 불과하다. 지금은 거의 다 가라앉은 것으로 보이는 이슈이다. 물론, 이 이슈는 중요한 이슈이고, 그래서 이후에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쨌든 지금으로써는 이미 한풀 꺾여버린 이슈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6월 23일,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최근의 표절 사태와 한국 문학권력의 현재>라는 제목으로 토론회가 열렸다. 문화연대와 한국작가회의가 공동주최한 토론회였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토론회는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을 전면으로 다루었다. 때문에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일일이 숫자를 세어본 것이 아니라 확실히 말할 수는 없겠지만, 얼핏 보기에 청중들의 숫자보다 기자들의 숫자가 더 많아 보였다. 그만큼 기자들이 많이 왔다는 이야기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읽히고 있고 가장 널리 호평 받는 작가 중 한 사람”(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의 영문 소개글의 일부로, 이날 발제를 맡은 평론가 오창은이 이를 언급했다) 인 신경숙이 표절을 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더욱이 신경숙은 여러 정황상 표절이 확실한데도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했고, 그래서 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말을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그 말들을 전한다는 핑계로 다시 자신의 말을 한 이들이 있다. 언론 보도라는 것은 늘 그들의 구미에 맞춰지기 마련이다. 본래 말의 형태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말의 형태로 재구성하여 보도하는 일은 어디서나 손쉽게 볼 수 있다. 이날 토론회에 대한 수많은 보도도 대부분 그랬다. 이날의 토론회에서 강조되었던 바는 신경숙 표절 사건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걸 용인하고, 가능케 했던 힘들에 대한 논의였다. 발제를 맡은 평론가 이명원과 오창은이 공통적으로 강조했던 부분도 이 지점이다. 그런데 많은 언론들은 이 토론회가 신경숙의 표절을 확정하고, 그것에 대해 질타하는 토론회인 것처럼 보도했다.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할 따름인 언론의 생리 때문일 것이다. 이날의 토론회를 비교적 충실히 잘 정리한 기사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문학장의 자정작용?

 

이 글에서 나는 이날의 토론회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다소 과도한 측면이 있었으며, 이날의 토론회의 의미에 대해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이 지점에서 이날 토론회에서 토론을 맡은 심보선 시인의 말을 인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심보선은 이날의 자리가 “한국문학의 자정작용이 시작되는 자리가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며, “문학이 하나의 생태계라면 차라리 자정작용은 이미 시작했고 이미 실패했고 이미 다시 시작해 왔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사실, 이 자리가 목표한 것은 신경숙의 표절 사건 이후에 문학장의 자성을 촉구하는 논의의 장을 여는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에 대한 논의의 장은 마련된 바 없다. 게다가 사건의 당사자인 신경숙이나 창비, 문학동네, 문지 같은 대형 출판사 쪽에서 이에 대해 논의하고, 변화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그랬듯이(이날의 토론회에서 이명원은 신경숙이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유독 빈번하게 표절 논란에 휩싸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최근의 신경숙의 표절 논란은 그 당시에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던 표절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논란이 시간이 지나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날의 토론을 비롯하여, 이후에 여러 비평가들이 지적했듯이 신경숙 표절 사건은 단순히 신경숙 개인의 일만이 아니라, 그녀를 비호한 출판자본과 그들 주위에 있는 수많은 문학권력들에 대한 일이다. 그들은 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주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장 안에서 이득을 보는 주체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변화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개인이 말해봤자 별로 바뀔 것은 없을 테니 이쯤 해야겠다. 그래도 한 마디만 더 말하고 싶다. 내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나는 학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했다. 글을 쓴다는 것, 문학 공부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삶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알았음에도 그것이 지닌 의미를 믿고 공부를 했었다. 그때만 해도 그쪽 동네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녔던 믿음은 지나칠 정도로 나이브한 것에 불과했던 것 같다. 신경숙의 표절과 그 이후의 문학장의 반응은 그 바닥의 수준을 가감 없이 드러내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회의하게 만들었다, “같은 걸 다르다고 못해”라고 말했던 평론가를 비롯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려고만 애쓰는 문학장의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후배들 부끄럽지도 않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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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10호][후기]제12회 『문화과학』 북클럽 참관 후기-현실의 ‘영웅’들을 찾아

제12회 『문화과학』 북클럽 참관 후기

-현실의 ‘영웅’들을 찾아

 

 

정 일 수

(중앙대 영문학 박사과정)

 

 

“국가들의 기억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국가는 공동체가 아니며 그런 적도 없었다. 어떤 나라의 역사가 한 가족의 역사처럼 보이더라도 사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주인과 노예, 자본가와 노동자, 인종 및 성별상의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에서 (때로는 폭발하지만 대부분은 억압되는) 이해관계의 격렬한 갈등을 감추고 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의 세계, 희생자와 가해자의 세계에서 알베르 카뮈의 표현처럼 가해자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 생각 있는 사람의 할 일이다. …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워드 진)

 

 

지난 6월 12일 금요일 초저녁, 예정된 오후 일정을 미루고 광화문 광장으로 발길을 옮겼다.도착한 곳은 이순신 장군 동상 앞. 현재 이곳은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과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공간이다. ‘신화’속 한 영웅이 이토록 간절했던 적이 또 있을까. 영웅은 바라지도 않는다. 동상을 잠시 바라보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비극적 사건들과 그에 희생된 무고한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영웅은 없고 비극만을 목격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을 마주한 우리의 숙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고 다듬어지며 심지어 부활되기도 하는 것이 ‘영웅’이라면 그 영웅을 만든 비극의 희생자들은 항상 왜곡되고 뒤틀리며 지워져왔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책임은 어쩌면 현실의 목격자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지 모른다. 기억의 매체와 수단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정보의 범람과 그 속도에 짓눌려 채 너무나 쉽게 망각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무엇을 기억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기억하는가’를 되묻는 것이 여전히 진행 중인 시대이다.

 

제12회 <문화과학 북클럽>이 비록 안산, 팽목항은 아니더라도 실내가 아닌 광화문 광장 한복판, 그것도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서명운동과 추모의 공간 한 가운데에서 개최된 점은 매우 긍정적이라 생각한다. 4·16 1주기 추모집회 이후 다시 찾은 이곳은 다양한 시민단체와 종교단체가 모여 진상조사를 위한 서명운동과 추모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비극이 일어난 지 1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발길을 지나치지 않고 국화꽃 한 송이를 헌화하거나 서명에 참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도 보였다. 오후 일곱 시부터 시작된 토론은 밤 아홉 시가 다 되어서야 마무리되었다. 북클럽의 사회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이자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이신 이명원 선생께서 맡으셨다. 토론에는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후지이 다케시 선생, 수유너머N연구원이자 『문화과학』 편집위원 정정훈 선생, 인문학협동조합 대외이사 강부원 선생이 참여하셨다. 북클럽에서 토론한 책은 『금요일엔 돌아오렴』,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 『세월호를 기록하다』였다. 첫 번째 책이 유가족들의 목소리와 현장의 소리를 담았다면, 두 번째는 세월호 사건을 목격하고 분석하는 학자들의 목소리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상세한 과정을 담은 것이다.

세월호 사건에 관하여 이 세 권의 책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자의 질문에 먼저 강부원 선생은 이 책들이 세월호 사건의 속류 정치화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면서 동시에  담론적 성찰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특히 세 권의 책 중에서도 『세월호를 기록하다』는 단순히 일반적인 재난 서사로 볼 수 없다고 덧붙여 설명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책이 비선형적 서사와 기록 서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 재난 서사와는 달리 『세월호를 기록하다』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잠재된 무책임을 드러내준 책이다. 강부원 선생의 이야기에 따르면 현장의 유가족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표출할 수 있는 언어를 달라고 지식인들에게 요청하였다고 한다. 언론의 의견이 아닌 자신들의 의견을 담아낼 ‘언어’가 부재함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 자리에 있던 나는 유가족들의 요청사항을 듣는 순간 세월호 사건을 기록한 세 권의 책이 가진 중요성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정정훈 선생은 『금요일엔 돌아오렴』 과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무엇보다 혼란스러운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정리를 잘 해준 책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세월호를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말’과 ‘진실’ 그리고 앞으로 더 나아갈 필요성이 요구되는 ‘행위’의 어려움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어떤 무력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출구를 모색하게 해줄 수 있는 책이라고 언급하였다.이어서 후지이 다케시 선생은 『금요일엔 돌아오렴』과 『세월호를 기록하다』 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록이 중심인 반면에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4·16 이후 벌어진 양상을 기록한 점을 특징으로 언급하면서 “왜 ‘우리’의 모습은 기록하지 않는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였다. 세월호 사건을 목격한 ‘우리’의 상처를 감히 희생자와 유가족에 비견할 수는 없지만 그 충격으로 트라우마와 우울증을 겪고 있다는 점에서 목격자인 ‘우리’는 4·16의 당사자라고 다케시 선생은 주장하였다.

이어서 다케시 선생은 세월호 사건을 단지 해경과 국가의 책임이라는 틀로 바라보려는 것에 문제성을 제기하였다. 현장에 나간 해경들과 관련 공무원들이 책임의식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위치가 요구하는 제한된 ‘책임의식’만을 지녔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최소한의 의무만을 다하는 것을 ‘책임’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어쩌면 우리 개인들과 사회 전체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반문을 던지면서 그는 지시만을 따르는 사람들은 무책임한 것이 아니라 공감능력이 부재한 것이며 이점을 세월호 사건의 본질로 보았다. 그의 주장은 ‘책임’이 아닌 다른 문제의 틀로써 이 사건을 바라볼 필요성을 우리에게 제기하였다. 사회자 이명원 선생은 다케시 선생의 논의에 덧붙여 자신의 위치에서만 책임을 다하는 자세는 곧 인간으로서의 보편적인 수준으로 가져야 할 공감능력이 부재함을 지적하면서 세월호 사건을 우리가 한 개인의 피해로 몰아가는 것은 목격자인 ‘우리’를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그는 세월호 참사와 함께 드러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맥락들을 목격자인 우리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정정훈 선생은 모든 기록들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분명하게 밝히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면서 만일 이 모든 책들의 기록이 진실이라면, “이 책들이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먼저 던졌다. 이어서 그는 책을 읽는 독자들이 겪는 감정적 효과를 통한 ‘호명효과’를 언급하면서 호명효과를 통하여 목격자 ‘우리’를 기록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명원 선생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두고 책의 기록된 내용들이 ‘사실’ 혹은 ‘진실’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우려를 표명하였다. 사실부터 왜곡되는 지금의 현실을 지적하면서 그는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진실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현실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가능할 수는 있지만, 눈물 없이 읽기 힘든 기록이 오히려 일종의 카타르시스 같은 효과를 만들어냄으로써 공감해야 할 고통의 정서가 휘발성을 가지게 되지는 않을까라는 염려를 표명하였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정정훈 선생은 『금요일엔 돌아오렴』이 단순한 카타르시스 효과만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세월호 사건은 “결말이 없는 비극”이다. 죽은 아이의 시신이 돌아왔는데도 부모가 오히려 정부에 고마워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두고 목격자인 우리는 감히 애도할 수도 없으며 잊을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극이야말로 이 시대의 ‘우리’를 호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명원 선생의 지적에 대하여 나는 개인적으로 공감하는 바가 없진 않다.개인적으로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끝까지 읽지 못했던 이유가 좀 더 분명해진 듯하다. 그러나 나는 정정훈 선생의 주장을 부분적으로나마 수용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하겠다. 이는 세월호 문제에 접근하기가 그만큼 어렵고도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양한 관점의 연구가 절실히 요구된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설명이 복잡한 것은 그만큼 그 문제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어느 학자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세월호 문제는 담론적 차원에서 계속 나아가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논의가 계속되는 가운데 다케시 선생은 우리가 세월호 문제에 대해 아무 성찰 없이 나아가는 것보다는 철저히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역사란 무조건적인 성장 위주의 세계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아주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이승만 정권에서는 불가능했던 6·25 전쟁 피해자 유가족의 활동이 4·19 혁명 이후에 와서 가능할 수 있었던 역사적 사례를 언급하면서 세월호 유가족과 우리에게 필요한 ‘진실’은 우리가 머물러 있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지는 논의에서 강부원 선생은 정치 공학적 출구전략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소위 말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선전된 ‘피로 프레임’을 경계하고 사회적 반성능력이 고갈된 현실을 직시하면서 더 나은 발전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프레임 설정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토론의 방향은 이어서 국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강부원 선생은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요구가 무참히 거부된 현실은 곧 우리 정부의 민낯이므로 추상적인 차원에 머물러있는 국가의 한계를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리 사회가 이제는 다시 국가 이전에 ‘공화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였다. 그의 논의에 덧붙여 다케시 선생은 국민국가가 노동력 확보를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산업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면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금융자본주의 사회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산물임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돈과 폭력만이 남은 시대라고 하였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민낯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례로 그는 세월호 사건과 관련하여 나타난 경찰폭력의 양상을 지적하였다.

우리 사회를 공권력이 사라진 사회로 규정한 다케시 선생의 말은 우리 시민들이 그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경찰폭력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기에 충분하였다.마이크를 이어받은 정정훈 선생은 국민을 살게 하면서 죽는 것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근대 국가권력의 적극성과 합리성이라고 주장하였던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통치성’ 이론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따르면 심각한 점은 최근 한국 사회의 국가권력은 푸코의 이론과는 전혀 다른 현상을 보여 왔는데 이는 한국 사회의 국가권력이 소극적이고 비합리적리며 사적 합리성에 치우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이명원 선생 역시 폭력화된 억압적 질서와 시민들의 무력감만이 남아 있는 현실을 두고 이제는 국가도 사라지고 사회도 사라진 것이 아닐까라는 첨언으로 우려를 표명하였다. 강부원 선생은 이어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중간 매개체 없이 정부와 직접 대면하는 것을 방관하는 것은 우리 시민사회가 유가족과 후대에 죄를 짓는 것이며 ‘시민’이라는 것의 최소한의 의미가 바로 협력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우리 사회 시민들은 이제부터라도 유가족들과 협력하여 소극적인 정부와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추가로 다케시 선생은 우리 사회에 대하여 물질적 이득에 눈이 먼 손쉬운 재개발 문화를 예로 들면서 “머물지 않으려는 시민 의식”에 대하여 질타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의 역사적 원인으로 그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재건된 한국 사회 특유의 이민사회 분위기를 언급하면서 “전후(戰後) 한국사회는 국가보다는 사회를 먼저 만들었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라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가 말하는 ‘국가보다는 먼저 사회’라는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마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듯한 암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국가 체제라는 지금의 현실에서 다케시 선생의 말은 언뜻 이상적인 수사처럼 들렸다. 그러나 세월호 유가족들 곁에 함께 머물러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는 다케시 선생의 의견을 듣고 나서야 마음 한 구석에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정치적 입장을 벗어나 ‘안전할 권리’라는 공통된 목표야말로 시민 사회의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 가치가 아닐까? 시민사회가 여전히 각자도생의 길을 가려는 움직임이 안타깝다. 건강한 시민 사회야말로 건강한 국가의 초석이자 국가체제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교과서적인 진부한 이야기임을 안다. 하지만 우리가 그 ‘진부함’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새롭고 독특한 것만을 추구하면서 간과한 것들이 또한 얼마나 많은가? 다케시 선생의 논의를 이어받아 우리 사회는 지속적인 투쟁을 위하여 지속 가능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정훈 선생의 주장과 국가라는 환상, 지도자라는 환상, 물질(돈)환상 등 많은 환상들이 붕괴되어가고 있는 이 시점이 바로 우리의 현재라고 주장한 이명원 선생의 발언으로 토론회는 마무리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어진 청중 토론에서 한 청중은 국가체제를 단지 환상으로 바라보고 시민 사회만을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국가에 대한 패배주의에 젖어들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힘이 없는 것은 권리가 아니다”라는 스피노자의 논의를 빌려 그는 ‘발언권’을 예로 들면서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이 발언권이 아니라 발언자의 주장을 우리 사회 모두가 들을 수 있어야 진정 발언권이 실현된 사회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점에서 시민 사회는 국가체제에 대하여 패배주의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국가와 투쟁을 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일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제12회 째를 맞이한 계간 『문화과학』의 북클럽. 잦은 초대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학업이라는 궁색한 핑계로 참석 못한 것이 부끄러웠다. 개인적으로 이번 북클럽을 참관하며 느낀 점이 많았다. 많은 학자들의 진지한 토론 간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내 자신이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들을 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세월호 사건 목격자로서 현실을 살아가며 고수해야 할 우리 자신의 위치에 대하여 고민해볼 수 있었다. 임금의 명령임에도 지는 싸움에는 결코 출전하지 않았던 장군 이순신. 그의 동상 앞에서 진행된 북클럽 토론 내내 나는 영웅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신화가 된 한 영웅의 동상을 앞에서 역사적 비극 속에서 왜곡되고 잊혀져가며 사라져간 수많은 백성들도 떠올려 보았다. 이제껏 나의 현실에 영웅은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하다. 적어도 내 시대에 영웅은 없다고 입 밖으로 내뱉곤 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자신의 위치에서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규정한 범위를 넘어서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이웃과 연대하며 싸우는 존재들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항상 소수이다. 현실의 ‘영웅’들이 우리 사회에 결코 적지 않음에 오늘도 작지만 강한 희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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