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21호][칼럼] 써드라이프의 시대가 온다 (이동연)

써드라이프의 시대가 온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전 세계 게임스타일의 지형을 흔들었던 ‘포켓몬 고’의 열풍은 인공지능 시대의 새로운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예고하는 하나의 징후로 읽을 법하다. ‘포켓몬 고’는 증강현실 기술과 소위 ‘구글맵’으로 대변되는 위치 추적 장치를 이용해서 최고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의 캐릭터들을 포획하는 게임이다. 기술적으로는 높은 수준을 적용한 게임은 아니지만, 컴퓨터와 미디어 안에 갇힌 기존 게임의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냈다. 말하자면 게임의 지형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포켓몬 고’라는 게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충격효과는 게임을 즐기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있다. 기존 게임들은 실제현실과 가상현실을 구분하여, 가상공간에서의 특이한 체험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꾀했다. ‘써든어텍’ 같은 1인칭 슈팅게임, ‘리니지’, ‘와우’같은 온라인 게임 등은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생생한 현장감을 즐기게 하지만, 그 자체가 현실공간은 아니다. 그런데 최근 인공지능과 유비쿼터스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융합하는,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가상공간이 실제 현실 안으로 들어와 개인의 감각을 활성화시키고, 놀이의 체험을 극대화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포켓몬 고’는 이러한 현상의 아주 단순하고 초보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현상을 ‘써드라이프’(Third Life)라고 명명하고 싶다. ‘써드라이프’는  말 그대로 제3의 삶의 시대가 왔다는 뜻이다. 현실공간에서 물리적인 삶을 사는 단계가 ‘퍼스트라이프’라고 한다면, 가상공간에서 잠시 흥미롭지만, 허구에 불과한 체험을 하는 단계는 ‘세컨드라이프’로 말할 수 있다. 미국에서 한 때 큰 인기를 얻었던 ‘세컨드라이프’라는 게임이 이에 해당된다. 실제 현실과 구분되어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집을 짓고, 가상의 애인과 결혼을 하고, 가상의 직장을 다니는 게임에 심취한 사람들은 대체로 현실공간에서 만족하지 못한 삶을 가상공간에서 보상받고 싶은 심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써드라이프의 시대는 가상공간이 제공하는 판타지 혹은 허구적인 대리 만족을 현실공간에서 체험하게 함으로써, 가상현실이 곧 실제 현실이 되게 하는 삶을 기능케 한다. 써드라이프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이 함께 연계-결합이 가능한 초현대 하이퍼 현실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을 의미한다. 최근 유행하는 “3D프린터”, “홀로그램”, “증강현실”을 활용하는 기술혁신과 그 기술을 활용한 놀이 콘텐츠들은 라이프스타일의 문화환경이 써드라이프로 이동 중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016년 다보스 포럼 이후, 한국에서도 4차 산업혁명에 따른 기술 혁신과 시민들의 일상의 변화에 대해 많은 예측 보고서가 나오고 있다. 4차 산업혁명에서는 “생명안전, 인공지능, 산업자동화, 메이커운동, 사물인터넷, 빅데이터, 딥러닝, 스몰비즈니스, 원격의료서비스” 등이 각광받을 예정이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신경제가 중심이 될 것이라는 예측인데, 자본의 논리가 아닌 문화의 논리에서 볼 때, 신경제란 과학과 공학의 첨단기술을 통해 인간의 삶을 윤택하고 가치 있게 만드는 경제, 인간에게 이로운 신 홍익인간 산업, 기술혁신과 사회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며 인간이 중심이 되는 신인류산업을 의미한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대선 후보들이 저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정작 그러한 산업적 변화가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대해서는 누구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중요한 것은 산업과 경제, 자본의 재생산에 있는 게 아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미래 사회에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떻게 바뀌고, 개인은 어떤 문화를 원하는 가에 대한 감성적 간파이다.

  써드라이프의 시대는 유비쿼터스 정보 기술과 생명공학 혁명에 따라 개인의 신체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그래서 “초감각지능산업”, 이른바 가상현실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창의적인 이야기가 가미된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산업이 발전할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혁신적으로 바꿀 수 있는 개인의 인지적 역량과 일상적 놀이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미래 예측이 필요하다.

  써드라이프 시대는 또한 ‘예술과 문화, 기술과 과학’이 통섭하여 새로운 초감각적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섭적 환경이 주는 감각의 새로운 지평들을 고려해야 한다. 새로운 기술문화 혁명에 따라 기존의 문화콘텐츠 영역이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새로운 문화콘텐츠 산업이 어떻게 지배적인 영역으로 부상하고 이들이 이용자들의 기술 감각과 콘텐츠 관여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일지에 대한 전망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개인의 감각을 극대화시키는 “써드라이프”의 시대는 책, 영화, 음악, 게임, 모바일, 메신저커뮤니티와 같은 미디어콘텐츠들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며, 그 체험이 그 자체로 가상이 아닌 현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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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1호][칼럼] 지식생산의 민주화 (강내희)

한겨레 칼럼

지식생산의 민주화

강내희
지식순환협동조합 대안대학 학장

오늘 칼럼 쓰는 데 참고하고자 발터 베냐민의 ‘내 장서를 풀며’라는 글을 다시 읽어 보려고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결국 못 찾고 말았다. 그 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가 누가 자기 장서를 보고 “선생은 이 책들을 다 읽었을 것 아니냐”고 하자 십분의 일도 못 읽었다며 집에 도자기 그릇이 있다고 매일 사용하느냐고 반문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프랑스가 한 말은 사실이라고 본다. 나도 읽지 않은 무수히 많은 책을 서가에 보관하고 있다.

  베냐민은 책 모으는 일이 꼭 읽기 위함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내용 때문보다는 흥미로운 물건이라는 점 때문에 책을 수집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책은 그 생김새나 냄새, 또는 그것을 구한 장소나 관련된 어떤 사연 때문에 소중할 수 있다. 이럴 때 그것은 지식의 보고이기 전에 소유의 대상이다. 아니 책이 소유의 주체가 될 때도 있다. 책 ‘안’에서 살아가는 ‘책벌레’, 서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애서가, 마음에 들면 꼭 사고 마는 사람에게 책은 이미 그의 주인이다. 이처럼 책은 꼭 읽을 대상으로만 그치진 않는다.

  하지만 책 수집은 이제 먼 옛날이야기다. 책 수집가가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것은 베냐민도 자기 시대에 인정한 바다. 물론 그는 책 수집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기꺼워하지는 않았다. 그런 관행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퇴색해가는 그것의 모습도 소중하게 관찰해야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의 시대는 전성기가 끝났고, 책 수집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으며, 화면 읽기가 보편적이 되면서 ‘독서’라는 표현도 시대착오적일 정도가 되었다.

  사실 오늘 아침 베냐민의 책을 찾지 못했어도 나는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피디에프 파일로 된 그의 글을 인터넷으로 바로 찾아낼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글을 쓸 때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에 의존하기 시작한 것이 10년은 족히 넘은 것 같다. 근년에 출간한 단행본 두 권을 준비할 때도 ‘구글링’을 자주 사용했던 편이다. 개인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서재는 여전히 소중한 공간이지만, 컴퓨터 화면으로 글을 읽는 일이 잦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와서는 자료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아졌다. 현직에 있을 때는 학교 도서관에 접속해 그곳과 연결된 다른 도서관 자료까지 검색해 내려받을 수 있었으나 정년 뒤에는 그러지 못한다. 주변에서 알아보니 비정규직이나 독립 연구자의 경우 비슷한 불편을 겪는 사례가 많았다. 얼마 전 참석한 한 토론회에서 듣기로는 국내 대학 도서관 가운데는 학술지 등의 구독료로 연 100억원대 예산을 쓰는 곳도 있다고 한다. 엄청난 규모이긴 하지만, 그런 대학에 적을 둔 학생과 교원, 연구자는 세계 유수의 도서관 자료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누리는 셈이다.

  반면에 내가 학장으로 있는 곳에서는 외국 자료 구입이란 상상도 못한다. 재정이 열악한 대안대학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학생들이 있고, 교수들이 있는 곳인데, 학술자료를 아예 접할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한국에는 독립 연구자도 많다. 이들 대부분은 대학 도서관 자료를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자료 검색을 원활하게 할 수 없는 연구자는 연구 등 지식생산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한국의 지식생산은 다른 열악한 점도 많지만, 학술자료에 접속하기 어려운 연구자들이 있는 만큼의 장애도 갖고 있는 셈이다.

  요즘 연구자는 책 수집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전자책이 제법 많이 보급되었고 기존의 책도 피디에프 파일로 전환되어 있거나 특히 학술자료가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 높은 자료를 읽으려면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문제다. 대학에 적을 두지 않은 연구자도 학술자료를 쉽게 검색할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이 지식생산에 참여해 사회적 창의성을 높일 수 있다. 연구자들이 필요한 자료를 쉽게 구하게 되면 지식생산의 수준도 높아질 것이다. 그러려면 대학 도서관을 통하지 않고도 좋은 자료를 볼 수 있게 적어도 공공도서관 한 곳에서는 외국 학술지를 포함한 자료를 확보하고 연구자 대중이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지식생산도 민주화될 수 있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0161.html#csidx46d01fdfa4182e7b0946e1d2891b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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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1호][칼럼] 자라지 않는 남자들의 연대 (손희정)

경향신문 칼럼

자라지 않는 남자들의 연대

손희정
문화평론가

‘자라지 않는 아재들’은 최근 한남 엔터테인먼트의 흥미로운 광경 중 하나다. <아는 형님>(JTBC)에서 아재들은 여전히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으며, <미운 우리 새끼>(KBS)에서는 아직도 ‘생후 오백 몇 개월’을 사는 어머니의 아들이다. <아재 독립 만세!! 거기서 만나>(TV조선)의 내레이션은 원로배우 김영옥이 맡았다. 나이든 ‘어머니뻘’ 여성이 아재들을 굽어보며 행동 하나하나에 애정이 담긴 목소리로 코멘트 하는 것이다.

  이 퇴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특히나 우리 시대에 아버지란 <명량>이나 <국제시장>과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70~80대 어르신의 얼굴이 되어버린 지금, 대중문화는 왜 40~50대 남자를 어른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 중 하나가 한국 사회의 남성 중심적 역사관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386 남성들은 여전히 상징적으로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고, 그리하여 어른의 몸에 갇힌 ‘어린 아들’의 정신세계를 살고 있다. ‘자라지 않는 아재’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예컨대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은 문 대통령이 얼마나 성숙한 어른인지와 무관하게 그에게 “우리 이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며 “오구오구 우쭈쭈” 했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문인들이 대선 당시 그를 지지하기 위해 만든 인터넷 사이트의 주소가 ‘www.5959uzuzu.com’이었다는 건 충격적이다. 그리고 이 사이트는 비판적인 칼럼이 한 편 등장하자마자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다. 이에 대한 책임 있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것이 그저 무한한 애정과 지지를 표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기실 여당 및 그 지지자들이 짜고 있는 정치적 프레임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때 정청래 전 의원의 ‘소수 권력’이라는 말은 주목할 만하다. 그는 팟캐스트 <파파이스>에 출연해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아직은 ‘소수 권력’이라고 말하며 ‘감시 없는 지지’를 호소했다. 이 말은 기이하다. ‘소수’란 단순히 수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 위계에서 하위에 놓인 존재를 일컫는 표현이라고 할 때, ‘소수 권력’은 말 그대로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불가능한 유머에 불과하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역사 인식 안에서 유시민 작가의 ‘진보 어용 지식인 선언’ 역시 가능해진다. 청와대 권력만 바뀌었을 뿐 한국 사회의 적폐 권력은 그대로라고 주장하면서, 유 작가는 문재인 정부의 ‘열악한 위치’를 이유로 ‘어용’이라는 단어에 새겨질 수밖에 없는 수치심을 간단히 지워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진보, 어용, 지식인이라는 도저히 공존할 수 없는 세 단어가 하나의 단어를 구성하는 놀라운 시대를 살게 된다. 이야말로 자라지 않기로 결심한 남자들의 화려한 정치적 쇼다.

  하지만 ‘어용 지식인’조차도 냉정한 얼굴로 문재인 정부의 선택에 철퇴를 내리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강경화 외교부 장관 후보자 앞에서였다. 그는 <썰전>(JTBC)에 출연하여 “자기 앞가림도 잘 못한다”면서 강 후보자를 폄하했다. 국민의당에서 “지금은 안보 현안이 중요한 만큼 이번에는 국방을 잘 아는 남자가 해야 한다”거나 “여객선이라면 모를까 전시를 대비할 항공모함 함장을 맡길 순 없다”며 부적격 입장을 낸 것과 다르지 않은 수사다.

  ‘어용 지식인’은 자신들의 권력적 지위를 부인하고 계속해서 ‘지켜 달라’고 징징거리면서도, 여성 앞에서만은 짐짓 근엄한 척한다. 남자들이 스스로 자라지 않았다고 주장할 때에도 누구를 배제하면서 그 권력을 유지하고 있는가는 명백해 보인다.

  이 철없는 남자들의 강고한 연대는 역시 탁현민 의전비서관실 행정관을 비호하는 것에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탁현민의 10년 전 책은 그저 ‘젊은 한때의 과오’가 아니다. 사과 한마디로 넘어갈 것이 아니라 어른스럽게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706122115005&code=990100#csidx27b4e3b328375c9bdaae3d4515e399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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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1호][칼럼] 인격? 우우우! (서동진)

한겨레 칼럼

인격? 우우우!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지난 몇 주 성가시리만치 문재인 정부의 새 내각 인선을 둘러싼 청문회가 이어졌다. 새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될 인물의 면면을 헤집고 고발하면서 적임인지 아닌지 시비가 뜨거웠다.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될 인물이, 누가 봐도 본보기가 될 만한 인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범적인 인격을 지닌 이들에 의해 세상이 좌지우지된다는 선량한 믿음 속에는 어딘지 구린 구석이 있다. 의롭고 떳떳한 인물을 정치지도자로 뽑아야 한다는 원칙은 그럴듯하지만 정치가 인격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볼 이유는 전연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 숭배는 오늘날 갑질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호황을 누리는 주인의 인격에 대한 호된 비판과도 상관이 있을 듯싶다. 헤겔은 어느 책에서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주인이 좋은 주인인 줄만 알고 도덕적으로 지저분한 짓을 한 주인을 흉보면서 주인을 이겼다고 믿는 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크게 먼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 정치 행위는 정당이나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으로부터 더없이 멀어져 있다. 대신 명사나 스타와 같은 정치지도자에 대한 팬 혹은 ‘안티’가 되는 것이 그나마 정치 행위라면 행위이다. 당연히 인격이라는 휘장은 개인의 내면적인 인격을 들여다보느라 그 뒤에서 자연처럼 굳건히 굴러가는 얼굴 없는 지배를 잊는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가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곳의 사람들과 돈과 상품으로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세계의 모델로 삼는다.

  배려, 존중, 인정, 공감 등의 모호한 윤리적 개념이 사회적 관계를 바꾸는 원리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모든 개념들은 오직 개인들만이 살아가는 세계, 원하든 원치 않든 어쩔 수 없이 생존을 하자면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관계를 까마득히 잊은 세계를 가리키는 탓이다. 내가 너와 맺는 관계의 윤리는 고용도, 계약도, 자격도, 소외도 없는 세계일 것이다. 너를 배려하기 위해 후한 임금을 준다거나 너에게 공감하여 이자를 받지 않겠다거나 너를 존중하기 위해 기꺼이 국적을 주겠다거나 하는 일은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자연현상인 듯 오늘의 날씨와 함께 등장하는 오늘의 주가는 어떤 인격적인 만남 없이 펼쳐지는 세계의 풍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오늘의 온도처럼 오늘의 삶의 바로미터로 삼는다. 그런 세계에서 인격이 더없이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심상찮은 일이다.

  평생 법 없이도 살 것처럼 순하게 묵묵히 일만 하는 부모들을 보며 대학으로 공장으로 갔던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걸음을 디뎠다. 그들이 본 것은 아름다운 인격 따위는 아랑곳 않은 채 군림하는 구조적 지배였다. 그때 나는 어떤 불온한 대학생 서클에서 세미나를 하다, 대체 몇 번이나 구조란 말들을 뱉는지 세어보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구조를 향해 아무런 구조도 없는 거리로 나섰다. 전투경찰만 보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도로에서 그들은 목이 터져라 새로운 세상을 요구했다. 민주화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손을 뻗어야 할 곳은 다시 그 구조일 것이다. 가진 자들이 행한 구조조정을 잊은 채 인격만 따지다간 이제 다시 그 구조를 바로잡을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인격이라고? 우우우우우!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0032.html#csidxf6e68856e0fe3418c204e145a3be4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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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1호][칼럼] 지방 포르노그래피와 향토의 맛 (권명아)

[한겨레 칼럼]

지방 포르노그래피와 향토의 맛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유머 게시판에 캡처된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설명에는 ‘○○대게 조형물’과 ‘△△인삼 동상’이라고 적혀 있다. 캡처된 사진과 캡션만으로 조롱과 희화화가 넘쳐났다. 캡처된 이미지만으로 대상을 폄훼하는 방식은 혐오발화와 다르지 않고 전시되는 방식은 포르노그래피를 닮았다. 여성 신체가 절취되어 전시되듯 지방은 ‘향토’라는 신체로 절취된다. 지방 포르노그래피에서 향토는 ‘야만적’일수록 맛있고, 맛있어야 할 뿐이다.

조롱거리로 전시된 지역 조형물이 지역-토산물의 조합인 건 향토에 대해 입맛을 다시는(taste) 근대적 지배의 전형이다. 향토를 자원화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 토산물은 ‘토템’과 다르지 않다. 그 지역을 지켜주고 삶을 이어나갈 절대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료주의적인 지방정부의 전시행정은 거대한 기념물과 조형물을 양산한다. 그 결과 토템처럼 신성하지도 않으나 거대하고, 지역 주민의 문화 향유와 아무 관계도 없고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결국 캡처당해 조롱되는 무수한 조형물이 생산되는 것이다.

향토를 자원화해온 결과다. 그래서 저 거대한 조형물에는 지방의 경제와 문화와 삶을 둘러싼 총체적 비애가 담겨 있다. 먹방으로 넘쳐나는 온라인 네트워크는 향토에 대한 ‘입맛 다심’이 테크놀로지를 통해 다시 절취되는 경지와 지경이다. 약탈적 지리정보시스템은 지역의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대규모 자본과 특정 정보 중심으로 지역의 생태계를 포획하고 재구축한다. 뜬금없는 가야사 논쟁은 이런 맥락에서 ‘향토 먹방’의 실시간 생중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약탈과 포획의 지도를 찢어버리고 새로운 지도를 그려낼 날을 기다리고 있는 지방 주민들에게 가야사 논쟁이나 사이비 역사 논쟁은 포르노그래피보다도 더 선정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조롱거리로 전시되는 ‘토템’을 이고 살아야 하는 지방의 현실에서 고대사 지도 따위를 새로 그려서 어쩌자는 건가. 실상 가야사든 근대사든 역사적 심상 지리를 지방 정체성의 준거로 삼는 건 지방을 향토로 자원화해온 오랜 관성의 반복일 뿐이다. 향토를 자원화해온 지방의 삶과 존엄이 어떤 지경인지는 먹방과 조롱의 지방 포르노그래피가 잘 보여준다. 고대사가 ‘향토 먹방’의 새 스토리가 된다고 지방 포르노그래피가 바뀔 전망은 전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미래가 걸린 새로운 권역 상상과 담론에 막상 지역의 여러 주체는 ‘향토’의 판매자거나 구경꾼의 자리에 할당되기를 반복한다. 지방이 개발독재 시대의 향토정치와 단절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심상 지리를 준거로 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지난 정권에서 지방은 4대강과 문화창조융합벨트와 같은 국가 스케일의 지리지에 포획되었다. 국가 스케일 단위의 권역 배치에서 지방은 낡은 산업자본주의적 배치와 할당에 포획되어 재산업화의 기반을 상실했다. 탈냉전의 기조로 가능할 수도 있었던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접 지역과 새로운 연결은 신냉전 기조로 막혀버렸다. 포르노그래피와 약탈적 지리지가 반복되는 것은 사회 내부의 지역혐오와 신냉전의 스케일이 결합된 결과다.

새로운 권역 구상에 대한 논의에 지역 주체의 자리는 사라지고 역사 연구의 진짜 주체에 대한 논의가 무성한 것은 ‘지방 영토’와 ‘원주민’이 영토분쟁에서 그저 포획의 대상으로 배제된 오랜 역사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지방 포르노그래피와 약탈적인 지리지와 단절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권역 구상에 대한 논의는 ‘역사 논쟁’이 아닌 지역 정치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8031.html#csidxd497dd8402cef13b81e262c8f8cd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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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1호] 문화과학 90호 신간안내

문화과학 90호 발간사

 

착취당하고 지배받는 생산자 다중의 형성은 20세기 혁명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1917년과 1949년의 공산주의 혁명,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위대한 반파시스트 투쟁들, 그리고 1989년의 해방투쟁들에 이르기까지의 1960년대의 무수한 해방투쟁들 중에서 대중의 시민권의 조건들은 태어났고, 퍼졌고, 공고화되었다. 20세기 혁명들은 패배당하기는커녕, 서로를 계속 전진하도록 했고 계급갈등의 조건들을 변형시켜왔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제국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적 다중의 조건들을 제시해왔다. 혁명 운동들이 확립해왔던 리듬은 새로운 시대의 비트, 즉 시대의 새로운 성숙과 변형의 비트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는 올해는 1987년 민주화 항쟁 30주년과 촛불 시민혁명 원년의 해이다.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혁명은 얼마나 많이 일어났을까? 각 나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까지 합하면, 아마도 혁명은 수백 번이 넘을 것이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쳐, 전 유럽을 들썩이게 했던 1968년 혁명, 지금까지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는 1960년대 말 중국 문화대혁명과 1989년 천안문 사태,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2011년 튀니지아의 자스민 혁명, 1994년 시애틀 반세계화 투쟁에서 2011년 뉴욕 월가 점령운동, 그리고 1960년 한국의 419혁명에서 2017년 촛불혁명까지, 혁명은 체제 전복에서 국가권력에의 저항,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반대와 인민 주권의 자유로운 요구라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물론 혁명은 지난 100년 동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혁명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존재했고, 21세기 초기를 사는 지금에도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혁명은 인민의 무기이자, 희망이고, 저항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변절과 착취의 시작이기도 하다. 혁명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 그것은 역사의 유산이기도 하면서 미래로 향하는 민중의 힘이기도 하다.

계간 『문화/과학』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90호 특집으로 ‘혁명과 문화100년’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작년 겨울부터 올 초 봄까지 이어진 촛불 시민혁명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평가가 개시되는 시점에서 『문화/과학』의 특집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 혁명의 역사적 유산과 이행의 문제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시기적절하다. 다만 이 특집을 정하게 된 계기가 단지 러시아 혁명 100주년만이 아니라 촛불 시민혁명에 있다고 볼 때, 이번 촛불 시민혁명이 역사적 혁명의 수준에 준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촛불 시민혁명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의 수준으로까지 정의되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빼앗는 혁명의 일반적 정의를 고려하면, 촛불 시민혁명은 과도한 해석이며, 촛불 시민항쟁이나, 촛불 정국 정도가 적절하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또한 무장투쟁이나 물리적 충돌 없이 사법부와 경찰 권력과의 조율 하에 평화롭게 진행된 합법적 평화 시위가 과연 혁명에 값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촛불 시민혁명이 평화로운 합법적 투쟁의 방식을 취했지만, 시민들의 요구와 이해에 의한 사상 유례가 없는 지속적인 대규모 시위였고,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표현이 자유롭게 분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법부의 결정에 의한 것이지만, 통치자 박근혜를 탄핵하고 구속시키고, 지난 대선에서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수준에 준하는 의미를 가진다. 문제는 촛불 시민혁명이 그 의미에 값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시민적 이행의 요구와 관찰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특집에 실린 5편의 문제의식은 모두 지난 100년간의 혁명의 유산에서 최근의 시민 촛불혁명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이번 특집은 혁명과 문화의 관계를 이야기함에 있어, 우리가 언급해야 하는 다양한 토픽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가령 혁명과 시각예술, 음악, 영화, 공간의 관계 등 혁명의 순간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재현하는 것의 특이성에 대해 그리고 혁명의 공간을 지배하는 광장의 사건에 대해 이번 특집 글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이동연의 「혁명의 문화, 문화의 혁명」은 이번 특집의 총론에 해당되는 글이다. 특히 이 글은 혁명과 문화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조명하고 있는데, 그가 보기에 “혁명은 일상의 양식들을 바꾸어놓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지배를 받”으며, “혁명의 상품화 역시 일상의 지배의 한 결과”이다. 혁명의 문화가 일상에서 상품으로, 관습으로, 추억의 소재로 코드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을 혁명적으로 전환시키는 지속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이 생산되어야 하는 것이 이 글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러시아 혁명에서의 문학 당파성과 68혁명의 문화적 자율성을 검토하고 촛불 시민혁명에서 전위에 섰던 광화문 캠핑촌 예술행동의 의미를 주목한다. 그는 알렝 바디우를 언급하며 “문화는 혁명의 현재와 미래를 끝임 없이 질문하며 스스로 자신들을 사회적 연대를 위한 투사의 형상으로, 소수자의 형상으로, 다양성과 자율성의 가치의 형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조선령의 「혁명과 시각예술 :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은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혁명 또는 혁명적 이행기에 발생했던 ‘혁명적/정치적 예술’의 전개 양상과 쟁점들을 당시 시각 예술가들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그들이 직면했던 도전”을 정리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프랑스 68혁명,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2016년의 촛불정국에서 재현되었던 시각예술 분야의 혁명적 예술의 사례들을 다루면서 필자는 “혁명적 이행기의 많은 시각예술가들은 예술의 정치적 내용만이 아니라 정치적 형식에 대해 고민했으며, 삶을 변혁시키는 것만큼이나 예술의 형식을 변혁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이 글은 러시아 구축주의 예술가,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의 걸개그림과 판화, 촛불 정국에서의 새로운 예술가-시민 연대와 시각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혁명의 순간에 시각예술이 갖는 물질성, 우발성, 일상성을 강조한다.

서동진의 「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은 혁명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인터내셔널기」의 역사적 변용의 과정에서 갖는 상실감과 안도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에 주목한다. 필자는 “「인터내셔널기」를 경유하며 시간의 현상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경험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사유”하는 시도를 한다. 다양한 형태로 재연되는 「인터내셔널기」는 “상실된 혁명적인 이상을 물질화하는 사물 혹은 객체”이고, 그 사운드스케이프가 “혁명적인 비전과 실천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토록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쓰라린 상실로부터 고통스러운 우울과 더불어 야릇한 안도감과 애상적인 쾌감을 얻고 있음을 생생하게 상연”하는 경험하기도 한다.

하승우의 「혁명과 영화적 기억」은 혁명을 소환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혁명의 영화적 재현은 각각의 사회구성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계열화된다.” 필자는 “1917년 10월 혁명 후, 영화라는 시각 매체가 ‘기원 서사’로서의 혁명-사건을 어떻게 재현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를 대표했던 에이젠슈타인과 베르토프의 영화,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알렉산더 메드베드킨의 영화에 주목하면서, 러시아 혁명기 ‘영화의 혁명적 재현’에 대해 꼼꼼하게 분석한다. 필자는 글의 말미에 “혁명이라는 소재를 다룬다고 곧바로 혁명적인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혁명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 곧 영화가 혁명을 재현할 때 무엇을 재현하는가에서 어떻게 재현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철웅의 「혁명은 광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혁명과 광장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다룬다. 필자는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뉴욕의 주코티 공원,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 칠레의 산티아고, 홍콩의 센트럴 구역, 서울의 광화문 등지에서 일어난 최근의 혁명운동이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정권, 탐욕스러운 금융자본, 양극화와 불평등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최근 광장을 점거한 사례들은 그가 보기에 “단일한 이념이나 통일된 조직 없이 옛 질서를 파괴하기 원하는 듯” 보인다. 광장은 “통일되고 개방된 만큼이나 분리되고 배제적인 공간이”이며,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포괄적인(umbrella)’ 집회현장”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광장이 “정치의 대척점에 놓인 것이 아니라, 그곳이 바로 정치의 장소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광장의 신화에 열광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광장의 정치를 붙잡고 끈질기게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기획 란은 1987년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1980년대 문화운동의 역사적 궤적에 주목하여 세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김성일의 「1980년대 문화운동론의 구조」는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의 ‘리셋’ 열망이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에서의 ‘혁명’ 의지를 상기시키는 바, 양자 공히 현실에 대한 철저한 단절과 보다 나은 세계(체제)를 지향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1980년대 ‘혁명’이 2017년 ‘리셋’에 어떤 상상력과 대안을 제시해 줄지를 당시의 문화운동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1980년대 발간된 문화운동과 관련된 문헌의 독해 속에서 “여전히 그 생동감을 잃지 않은 그 시대의 목소리를 온전히 발굴해 현 시기 촛불민심의 진로 탐색”에 기여하고자 한다. 정원옥의 「1980년대 문화운동에서의 공동체담론과 오월 광주」는 이 글은 1980년대 문화운동론의 중요한 축이었던 공동체문화를 1980년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과 연결하여 다시 읽어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이 갖는 근본 취지는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격과 내용을 규정지었던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이 왜 공동체문화론에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문화운동에서의 공동체담론을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과 연관”해 읽으면서, “오늘날 귀환하고 있는 공동체의 문제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김대성의 「역사적 합창으로서의 노동자 글쓰기―석정남과 신경숙」의 글은 ‘소설을 쓰는 노동자’와 ‘노동을 쓰는 소설가’라는 서로 다른 위치가 1980년대 노동자의 삶의 어떻게 다루고, 문단은 그들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석정남의 글쓰기는 말할 수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자리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공’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아니 오래전부터 여공이 글을 써왔다는 것은 몫의 재분배를 위한 정치의 역사가 쓰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쓴다는 행위’와 ‘쓸 수 없는 대상’ 사이에서 신경숙은 내내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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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소설과 지성 (이명원)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소설과 지성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황해문화>를 읽다가 문학평론가 오길영의 평론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는 세 권의 창작집을 대상으로 문학에서의 지성 문제를 논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문제제기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출발점은 한 좌담에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한 발언이었다. 요즘 소설을 읽어보려 애썼는데, 작가들이 자전적 경험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소설에서 객관화의 문제는 중요하다. 개인과 상황의 갈등은 근대소설의 핵심 문법인데, 많은 경우 현대소설은 개인의 내적 갈등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자의식과 정서 모두에서 주관적 과잉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1인칭이나 3인칭과 무관하게 주인공 시점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다.

오길영은 이인휘의 <폐허를 보다>에 대한 세간의 호평에 이견을 제출한다. 이 소설 속의 화자 ‘나’는 “너무 쉽게 인물과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소설 속에서 되풀이되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이 정서적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현장에 대한 묘사와 등장인물의 상황인식 역시 “현 단계 노동과 자본이 처한 실상, 그 사이의 세력관계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묘사”를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정조”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침묵과 삶의 복마전 속에서 소설에 대한 재기를 다짐한 작가 입장에서는 아픈 비판일 수 있다. 만약 내가 이인휘의 소설에 대해 썼다면, 오길영이 지적한 한계를 단편 양식의 불가피성이라는 문제로 논의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의 전반적인 기저음을 이루고 있는 상실감과 부채의식을 소시민성과 관련해 분석하면서, 이인휘의 편에서 공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는 유혹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길영의 주장이 중요한 문제제기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어찌 보면 내가 공감적 논의라고 겸양되게 표현한 것 역시 오길영이 말하는 “강인하고 냉철한 지성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문학비평에서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연루된 동족관계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지성의 힘으로 작품과 대결하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작가와 화해하려는 포즈가 비평으로 오인되는 일도 자주 나타난다.

백수린의 <참담한 빛>이나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에 대한 논의 역시 귀담아들을 만하다. 오길영은 백수린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공간적 배경인 이국의 도시들이 갖는 효과의 적절성에 대해 말한다. 즉 백수린의 소설에서 이국적 공간은 “독특한 현실탈출의 분위기, 혹은 인물들의 고통과 기억을 강화시키는 주변적 분위기로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물과 공간이 단지 애매몽롱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면 최은영의 소설은 공간적 배경의 이국성은 유사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생활감각”이 살아있으며, 서사와 묘사에서의 “구체적 섬세함”은 문학적 정확성 혹은 지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소설가는 지성을 필요로 한다. 소설에서의 지성이란 인물들로 하여금 주관주의의 유혹을 차단하고, 인물과 상황을 구체화하고 객관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단편 양식에서 등장인물은 작가를 향해 정서적으로 동일시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러나 역시 소설은 ‘나’가 아닌 ‘타자’를 부각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내적 상황은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외적 상황 전체를 음미할 공간을 여는 데에 읽기의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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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세상 읽기]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한국에서 인종적 소수자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인정되지 않는’ 존재였다. 인종적 소수자는 ‘혼혈 연예인’으로 범주화되어 계속 미디어에 등장했지만, ‘시청자들’의 단일민족 신화는 이어졌다. 순수혈통 계승의 서사는 ‘악의 없이’ 인종적 소수자를 사회에서 지워버렸다. 인종적 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는 데에는 단일혈통의 서사만이 아니라 사회 통념과 미풍양속의 이념이 함께 작용했다. 인종적 소수자는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퇴폐풍조의 온상으로 여겨져 ‘혼혈문제’라는 분류 항목으로 처리되었다.

혈통 계승과 사회 통념의 명목으로 소수자는 삭제 처리되었고, 대상을 바꾸며 반복되었다. 사월혁명 이후 5·16 쿠데타 세력은 ‘제어할 수 없는 미성년 주체의 정치적 열정’에 강한 공포를 느꼈다. 박정희 체제는 청소년을 범죄의 온상(우범소년)으로 간주하고 무지막지한 통제를 지속했다. 학교 인권 조례와 청소년 인권 조례 제정을 위한 운동은 이런 오래된 ‘적폐’와 싸우는 최전선이다. 학교 인권 조례 제정은 극우 세력에 의해 계속 저지되고 있고, 청소년 노동 인권 조례 역시 혐오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작년 12월에는 인천시, 이번 달에는 달서구가 조례 제정을 보류했다. ‘정상적’ 인구 재생산이라는 혈통 계승 서사와 청소년을 자기규율이 불가능한 미숙한 집단으로 분류하는 범주화를 통해 청소년 인권 침해는 이어졌다.

한국에서 소수자를 삭제하는 방식은 독재와 파시즘을 정당화하고 계승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혈통 계승의 서사는 매번 혁명을 배신하고, 학살된 소수자의 피를 제단에 바치며 이어졌다. 성 소수자에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발언이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한국교회연합을 방문한 다음날 자문단 ‘10년의 힘’이 출범했다. 문 전 대표는 축사에서 차기 정부를 “제3기 민주정부”라고 칭하고 “제3기 민주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고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 정부가 ‘10년의 힘’의 계승자라는 이런 논리는 자신을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의 적자로 자리매김하는 혈통 계승 서사의 전형이다.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를 계승하는 적자라는 혈통 서사는 또다시 소수자를 배제하고, 혁명의 열망을 배반한다. 이 장면은 역사적이다. 그 역사는 단지 성 소수자 문제와 관련된 역사가 아니다. 혁명을 배반한 역사, 혁명 대신 상속만이 남은 역사가 이 장면에서 다시 연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성 소수자라는 특수 문제로 전가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혁명을 배신한 혈통 서사에 입적한다. 그렇게 적자들의 혈통 서사는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계승되는 것이 아니고 발명되는 것이며, 정치적 주체는 적자 경쟁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 정국이 혁명의 시간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누적된 세습 권력과 ‘아비-적자’로 이어지는 ‘한국식 민주주의’와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촛불 정국의 혁명적 열기가 고조되면서 미지의 정치적 주체가 출현하고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광장을 불태웠다. 자신을 ‘민주주의의 적자’로 여기는 이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이 마냥 반갑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상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자들’이라는 기이한 가부장적 혈통 계승의 서사가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적자들’은 혁명을 소문으로 만들고 있다. 혁명의 열정은 타오르는데 자칭 ‘민주주의의 적자들’은 아비의 목은 치지 못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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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연구자료] 블랙리스트 제도개선 국회토론회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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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연구자료] 네덜란드 문화창조산업 동향, 각국문화정책동향(프랑스, 중국, 일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네덜란드 문화창조산업 동향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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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프랑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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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중국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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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일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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