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21호][칼럼] 지방 포르노그래피와 향토의 맛 (권명아)

[한겨레 칼럼]

지방 포르노그래피와 향토의 맛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유머 게시판에 캡처된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 설명에는 ‘○○대게 조형물’과 ‘△△인삼 동상’이라고 적혀 있다. 캡처된 사진과 캡션만으로 조롱과 희화화가 넘쳐났다. 캡처된 이미지만으로 대상을 폄훼하는 방식은 혐오발화와 다르지 않고 전시되는 방식은 포르노그래피를 닮았다. 여성 신체가 절취되어 전시되듯 지방은 ‘향토’라는 신체로 절취된다. 지방 포르노그래피에서 향토는 ‘야만적’일수록 맛있고, 맛있어야 할 뿐이다.

조롱거리로 전시된 지역 조형물이 지역-토산물의 조합인 건 향토에 대해 입맛을 다시는(taste) 근대적 지배의 전형이다. 향토를 자원화하는 데 매달릴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 토산물은 ‘토템’과 다르지 않다. 그 지역을 지켜주고 삶을 이어나갈 절대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료주의적인 지방정부의 전시행정은 거대한 기념물과 조형물을 양산한다. 그 결과 토템처럼 신성하지도 않으나 거대하고, 지역 주민의 문화 향유와 아무 관계도 없고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결국 캡처당해 조롱되는 무수한 조형물이 생산되는 것이다.

향토를 자원화해온 결과다. 그래서 저 거대한 조형물에는 지방의 경제와 문화와 삶을 둘러싼 총체적 비애가 담겨 있다. 먹방으로 넘쳐나는 온라인 네트워크는 향토에 대한 ‘입맛 다심’이 테크놀로지를 통해 다시 절취되는 경지와 지경이다. 약탈적 지리정보시스템은 지역의 정보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대규모 자본과 특정 정보 중심으로 지역의 생태계를 포획하고 재구축한다. 뜬금없는 가야사 논쟁은 이런 맥락에서 ‘향토 먹방’의 실시간 생중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약탈과 포획의 지도를 찢어버리고 새로운 지도를 그려낼 날을 기다리고 있는 지방 주민들에게 가야사 논쟁이나 사이비 역사 논쟁은 포르노그래피보다도 더 선정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조롱거리로 전시되는 ‘토템’을 이고 살아야 하는 지방의 현실에서 고대사 지도 따위를 새로 그려서 어쩌자는 건가. 실상 가야사든 근대사든 역사적 심상 지리를 지방 정체성의 준거로 삼는 건 지방을 향토로 자원화해온 오랜 관성의 반복일 뿐이다. 향토를 자원화해온 지방의 삶과 존엄이 어떤 지경인지는 먹방과 조롱의 지방 포르노그래피가 잘 보여준다. 고대사가 ‘향토 먹방’의 새 스토리가 된다고 지방 포르노그래피가 바뀔 전망은 전혀 없다.

그러나 자신들의 미래가 걸린 새로운 권역 상상과 담론에 막상 지역의 여러 주체는 ‘향토’의 판매자거나 구경꾼의 자리에 할당되기를 반복한다. 지방이 개발독재 시대의 향토정치와 단절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심상 지리를 준거로 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가야 한다. 지난 정권에서 지방은 4대강과 문화창조융합벨트와 같은 국가 스케일의 지리지에 포획되었다. 국가 스케일 단위의 권역 배치에서 지방은 낡은 산업자본주의적 배치와 할당에 포획되어 재산업화의 기반을 상실했다. 탈냉전의 기조로 가능할 수도 있었던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접 지역과 새로운 연결은 신냉전 기조로 막혀버렸다. 포르노그래피와 약탈적 지리지가 반복되는 것은 사회 내부의 지역혐오와 신냉전의 스케일이 결합된 결과다.

새로운 권역 구상에 대한 논의에 지역 주체의 자리는 사라지고 역사 연구의 진짜 주체에 대한 논의가 무성한 것은 ‘지방 영토’와 ‘원주민’이 영토분쟁에서 그저 포획의 대상으로 배제된 오랜 역사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지방 포르노그래피와 약탈적인 지리지와 단절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권역 구상에 대한 논의는 ‘역사 논쟁’이 아닌 지역 정치 차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8031.html#csidxd497dd8402cef13b81e262c8f8cd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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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1호] 문화과학 90호 신간안내

문화과학 90호 발간사

 

착취당하고 지배받는 생산자 다중의 형성은 20세기 혁명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1917년과 1949년의 공산주의 혁명,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위대한 반파시스트 투쟁들, 그리고 1989년의 해방투쟁들에 이르기까지의 1960년대의 무수한 해방투쟁들 중에서 대중의 시민권의 조건들은 태어났고, 퍼졌고, 공고화되었다. 20세기 혁명들은 패배당하기는커녕, 서로를 계속 전진하도록 했고 계급갈등의 조건들을 변형시켜왔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제국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적 다중의 조건들을 제시해왔다. 혁명 운동들이 확립해왔던 리듬은 새로운 시대의 비트, 즉 시대의 새로운 성숙과 변형의 비트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는 올해는 1987년 민주화 항쟁 30주년과 촛불 시민혁명 원년의 해이다.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혁명은 얼마나 많이 일어났을까? 각 나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까지 합하면, 아마도 혁명은 수백 번이 넘을 것이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쳐, 전 유럽을 들썩이게 했던 1968년 혁명, 지금까지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는 1960년대 말 중국 문화대혁명과 1989년 천안문 사태,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2011년 튀니지아의 자스민 혁명, 1994년 시애틀 반세계화 투쟁에서 2011년 뉴욕 월가 점령운동, 그리고 1960년 한국의 419혁명에서 2017년 촛불혁명까지, 혁명은 체제 전복에서 국가권력에의 저항,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반대와 인민 주권의 자유로운 요구라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물론 혁명은 지난 100년 동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혁명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존재했고, 21세기 초기를 사는 지금에도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혁명은 인민의 무기이자, 희망이고, 저항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변절과 착취의 시작이기도 하다. 혁명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 그것은 역사의 유산이기도 하면서 미래로 향하는 민중의 힘이기도 하다.

계간 『문화/과학』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90호 특집으로 ‘혁명과 문화100년’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작년 겨울부터 올 초 봄까지 이어진 촛불 시민혁명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평가가 개시되는 시점에서 『문화/과학』의 특집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 혁명의 역사적 유산과 이행의 문제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시기적절하다. 다만 이 특집을 정하게 된 계기가 단지 러시아 혁명 100주년만이 아니라 촛불 시민혁명에 있다고 볼 때, 이번 촛불 시민혁명이 역사적 혁명의 수준에 준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촛불 시민혁명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의 수준으로까지 정의되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빼앗는 혁명의 일반적 정의를 고려하면, 촛불 시민혁명은 과도한 해석이며, 촛불 시민항쟁이나, 촛불 정국 정도가 적절하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또한 무장투쟁이나 물리적 충돌 없이 사법부와 경찰 권력과의 조율 하에 평화롭게 진행된 합법적 평화 시위가 과연 혁명에 값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촛불 시민혁명이 평화로운 합법적 투쟁의 방식을 취했지만, 시민들의 요구와 이해에 의한 사상 유례가 없는 지속적인 대규모 시위였고,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표현이 자유롭게 분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법부의 결정에 의한 것이지만, 통치자 박근혜를 탄핵하고 구속시키고, 지난 대선에서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수준에 준하는 의미를 가진다. 문제는 촛불 시민혁명이 그 의미에 값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시민적 이행의 요구와 관찰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특집에 실린 5편의 문제의식은 모두 지난 100년간의 혁명의 유산에서 최근의 시민 촛불혁명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이번 특집은 혁명과 문화의 관계를 이야기함에 있어, 우리가 언급해야 하는 다양한 토픽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가령 혁명과 시각예술, 음악, 영화, 공간의 관계 등 혁명의 순간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재현하는 것의 특이성에 대해 그리고 혁명의 공간을 지배하는 광장의 사건에 대해 이번 특집 글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이동연의 「혁명의 문화, 문화의 혁명」은 이번 특집의 총론에 해당되는 글이다. 특히 이 글은 혁명과 문화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조명하고 있는데, 그가 보기에 “혁명은 일상의 양식들을 바꾸어놓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지배를 받”으며, “혁명의 상품화 역시 일상의 지배의 한 결과”이다. 혁명의 문화가 일상에서 상품으로, 관습으로, 추억의 소재로 코드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을 혁명적으로 전환시키는 지속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이 생산되어야 하는 것이 이 글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러시아 혁명에서의 문학 당파성과 68혁명의 문화적 자율성을 검토하고 촛불 시민혁명에서 전위에 섰던 광화문 캠핑촌 예술행동의 의미를 주목한다. 그는 알렝 바디우를 언급하며 “문화는 혁명의 현재와 미래를 끝임 없이 질문하며 스스로 자신들을 사회적 연대를 위한 투사의 형상으로, 소수자의 형상으로, 다양성과 자율성의 가치의 형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조선령의 「혁명과 시각예술 :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은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혁명 또는 혁명적 이행기에 발생했던 ‘혁명적/정치적 예술’의 전개 양상과 쟁점들을 당시 시각 예술가들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그들이 직면했던 도전”을 정리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프랑스 68혁명,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2016년의 촛불정국에서 재현되었던 시각예술 분야의 혁명적 예술의 사례들을 다루면서 필자는 “혁명적 이행기의 많은 시각예술가들은 예술의 정치적 내용만이 아니라 정치적 형식에 대해 고민했으며, 삶을 변혁시키는 것만큼이나 예술의 형식을 변혁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이 글은 러시아 구축주의 예술가,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의 걸개그림과 판화, 촛불 정국에서의 새로운 예술가-시민 연대와 시각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혁명의 순간에 시각예술이 갖는 물질성, 우발성, 일상성을 강조한다.

서동진의 「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은 혁명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인터내셔널기」의 역사적 변용의 과정에서 갖는 상실감과 안도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에 주목한다. 필자는 “「인터내셔널기」를 경유하며 시간의 현상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경험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사유”하는 시도를 한다. 다양한 형태로 재연되는 「인터내셔널기」는 “상실된 혁명적인 이상을 물질화하는 사물 혹은 객체”이고, 그 사운드스케이프가 “혁명적인 비전과 실천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토록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쓰라린 상실로부터 고통스러운 우울과 더불어 야릇한 안도감과 애상적인 쾌감을 얻고 있음을 생생하게 상연”하는 경험하기도 한다.

하승우의 「혁명과 영화적 기억」은 혁명을 소환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혁명의 영화적 재현은 각각의 사회구성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계열화된다.” 필자는 “1917년 10월 혁명 후, 영화라는 시각 매체가 ‘기원 서사’로서의 혁명-사건을 어떻게 재현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를 대표했던 에이젠슈타인과 베르토프의 영화,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알렉산더 메드베드킨의 영화에 주목하면서, 러시아 혁명기 ‘영화의 혁명적 재현’에 대해 꼼꼼하게 분석한다. 필자는 글의 말미에 “혁명이라는 소재를 다룬다고 곧바로 혁명적인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혁명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 곧 영화가 혁명을 재현할 때 무엇을 재현하는가에서 어떻게 재현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철웅의 「혁명은 광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혁명과 광장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다룬다. 필자는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뉴욕의 주코티 공원,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 칠레의 산티아고, 홍콩의 센트럴 구역, 서울의 광화문 등지에서 일어난 최근의 혁명운동이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정권, 탐욕스러운 금융자본, 양극화와 불평등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최근 광장을 점거한 사례들은 그가 보기에 “단일한 이념이나 통일된 조직 없이 옛 질서를 파괴하기 원하는 듯” 보인다. 광장은 “통일되고 개방된 만큼이나 분리되고 배제적인 공간이”이며,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포괄적인(umbrella)’ 집회현장”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광장이 “정치의 대척점에 놓인 것이 아니라, 그곳이 바로 정치의 장소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광장의 신화에 열광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광장의 정치를 붙잡고 끈질기게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기획 란은 1987년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1980년대 문화운동의 역사적 궤적에 주목하여 세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김성일의 「1980년대 문화운동론의 구조」는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의 ‘리셋’ 열망이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에서의 ‘혁명’ 의지를 상기시키는 바, 양자 공히 현실에 대한 철저한 단절과 보다 나은 세계(체제)를 지향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1980년대 ‘혁명’이 2017년 ‘리셋’에 어떤 상상력과 대안을 제시해 줄지를 당시의 문화운동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1980년대 발간된 문화운동과 관련된 문헌의 독해 속에서 “여전히 그 생동감을 잃지 않은 그 시대의 목소리를 온전히 발굴해 현 시기 촛불민심의 진로 탐색”에 기여하고자 한다. 정원옥의 「1980년대 문화운동에서의 공동체담론과 오월 광주」는 이 글은 1980년대 문화운동론의 중요한 축이었던 공동체문화를 1980년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과 연결하여 다시 읽어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이 갖는 근본 취지는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격과 내용을 규정지었던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이 왜 공동체문화론에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문화운동에서의 공동체담론을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과 연관”해 읽으면서, “오늘날 귀환하고 있는 공동체의 문제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김대성의 「역사적 합창으로서의 노동자 글쓰기―석정남과 신경숙」의 글은 ‘소설을 쓰는 노동자’와 ‘노동을 쓰는 소설가’라는 서로 다른 위치가 1980년대 노동자의 삶의 어떻게 다루고, 문단은 그들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석정남의 글쓰기는 말할 수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자리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공’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아니 오래전부터 여공이 글을 써왔다는 것은 몫의 재분배를 위한 정치의 역사가 쓰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쓴다는 행위’와 ‘쓸 수 없는 대상’ 사이에서 신경숙은 내내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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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연구자료] 네덜란드 문화창조산업 동향, 각국문화정책동향(프랑스, 중국, 일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네덜란드 문화창조산업 동향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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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프랑스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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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중국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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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국문화정책동향 – 일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웹진 문화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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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연구자료] 블랙리스트 제도개선 국회토론회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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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소설과 지성 (이명원)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소설과 지성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황해문화>를 읽다가 문학평론가 오길영의 평론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는 세 권의 창작집을 대상으로 문학에서의 지성 문제를 논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문제제기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출발점은 한 좌담에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한 발언이었다. 요즘 소설을 읽어보려 애썼는데, 작가들이 자전적 경험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소설에서 객관화의 문제는 중요하다. 개인과 상황의 갈등은 근대소설의 핵심 문법인데, 많은 경우 현대소설은 개인의 내적 갈등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자의식과 정서 모두에서 주관적 과잉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1인칭이나 3인칭과 무관하게 주인공 시점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다.

오길영은 이인휘의 <폐허를 보다>에 대한 세간의 호평에 이견을 제출한다. 이 소설 속의 화자 ‘나’는 “너무 쉽게 인물과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소설 속에서 되풀이되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이 정서적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현장에 대한 묘사와 등장인물의 상황인식 역시 “현 단계 노동과 자본이 처한 실상, 그 사이의 세력관계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묘사”를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정조”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침묵과 삶의 복마전 속에서 소설에 대한 재기를 다짐한 작가 입장에서는 아픈 비판일 수 있다. 만약 내가 이인휘의 소설에 대해 썼다면, 오길영이 지적한 한계를 단편 양식의 불가피성이라는 문제로 논의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의 전반적인 기저음을 이루고 있는 상실감과 부채의식을 소시민성과 관련해 분석하면서, 이인휘의 편에서 공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는 유혹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길영의 주장이 중요한 문제제기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어찌 보면 내가 공감적 논의라고 겸양되게 표현한 것 역시 오길영이 말하는 “강인하고 냉철한 지성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문학비평에서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연루된 동족관계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지성의 힘으로 작품과 대결하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작가와 화해하려는 포즈가 비평으로 오인되는 일도 자주 나타난다.

백수린의 <참담한 빛>이나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에 대한 논의 역시 귀담아들을 만하다. 오길영은 백수린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공간적 배경인 이국의 도시들이 갖는 효과의 적절성에 대해 말한다. 즉 백수린의 소설에서 이국적 공간은 “독특한 현실탈출의 분위기, 혹은 인물들의 고통과 기억을 강화시키는 주변적 분위기로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물과 공간이 단지 애매몽롱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면 최은영의 소설은 공간적 배경의 이국성은 유사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생활감각”이 살아있으며, 서사와 묘사에서의 “구체적 섬세함”은 문학적 정확성 혹은 지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소설가는 지성을 필요로 한다. 소설에서의 지성이란 인물들로 하여금 주관주의의 유혹을 차단하고, 인물과 상황을 구체화하고 객관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단편 양식에서 등장인물은 작가를 향해 정서적으로 동일시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러나 역시 소설은 ‘나’가 아닌 ‘타자’를 부각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내적 상황은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외적 상황 전체를 음미할 공간을 여는 데에 읽기의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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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빼앗긴 극장에도 봄은 오는가? (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세상읽기] 빼앗긴 극장에도 봄은 오는가?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지난 주 광화문 블랙텐트에는 두 개의 의미 있는 공연이 있었다. 하나는 이윤택 연출의 연희단 거리패의 ‘씻금’ 공연이고 다른 하나는 정월 대보름맞이 ‘얼쑤, 탄핵하세!’ 국악공연이다. ‘씻금’은 진도 씻김굿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극으로 이런저런 사연으로 진도 앞바다에 몸을 던진 망자들의 혼을 달래주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천을 떠돌던 망자들이 각자의 원혼을 씻고 영원한 안식처로 떠나려할 즈음, 저 멀리서 울부짖는 아이들의 통곡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는 장면은 세월호 어린 희생자들을 위한 애도의 시간이기에 충분하다. 공연을 마치고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하얀 천을 들고 배우들과 관객들은 광화문 광장으로 나아가 세월호 희생자들의 영정이 있는 곳으로 향하여 넋을 달랬다. 당초 원작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세월호 희생자를 위한 씻김의 예식은 광화문 광장 블랙텐트였기에 더 깊은 공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지난주 토요일 퇴진행동 본부의 본 집회를 마치고, 저녁 8시부터 블랙텐트에서 있었던 ‘얼쑤, 탄핵하세!’ 국악공연 역시 감동의 무대로 연주자와 관객들이 하나가 되는 자리였다. 특히 공연의 맨 마지막 순서로 나온 ‘앙상블 시나위’의 격정적인 연주는 관객들에게 새로운 차원의 국악공연을 선사했다. 알다시피 ‘앙상블 시나위’는 2015년 11월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예정된 ‘소월산천’ 공연을 한 문화 관료의 어처구니없는 검열로 인해 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소월산천’ 공연에서 연극적인 요소가 극장 특성상 맞지 않아 삭제를 요청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소월산천’ 공연을 함께 만들었던 박근형 연출가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풍자한 ‘개구리’라는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앙상블 시나위는 블랙텐트에서 평소처럼 격정적으로 연주했고, 말미에는 이 팀의 검열에 분노하여 1인 시위를 벌인 안무가 정영두와 함께 즉흥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모든 공연의 감동은 모순적이게도 블랙리스트 덕분이다. 광화문 캠핑촌에 블랙텐트라는 극장이 들어서고 나서 무대에 오를 수 없었던 공연들이 무대에 올려 졌고, 모든 공연은 매진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검열 사태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 세월호 유가족들이 직접 만든 연극, 그리고 우리 시대의 재난의 아픔으로 각인시켜준 마임공연과 영화상영, 시낭송, 국악공연까지 블랙텐트는 검열로 빼앗긴 극장을 대신해서 예술인들의 정겨운 유배지이자 창작의 수용소가 되었다. 비록 시설은 열악하지만, 열정은 충만하다. 발은 시립지만, 마음은 따뜻하다. 그럴듯한 대접은 못 받지만, 검열은 없다. 오직 예술가로서 자기 주권과 관객의 감동적인 환호만 있을 뿐이다.

박근혜 탄핵을 향한 촛불의 리듬은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를 뚫고 봄을 맞이하려 한다. 2월에는 탄핵되길 희망했지만, 국면 상 3월 초를 기다려야 한다. 아니 그 이상을 견뎌야 할지도 모른다. 블랙텐트는 그날까지 광장에서 수많은 예술인들과 관객들을 만날 것이다. 빼앗긴 극장에도 봄은 오는가? 아마도 올 것이다. 최소한 물리적으로 계절의 순환 원리에 따라 따스한 봄은 올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의미하는 ‘은유의 봄’도 올 것이다. 사악한 통치자는 탄핵당할 것이고, 감옥에 갈 것이며 블랙리스트의 실체를 위한 진상규명의 목소리는 더욱 거세야 한다.

그런데 블랙텐트에는 정말 봄이 올 것인가? 역설적이게도 박근혜 탄핵이 인용되면 블랙텐트는 아마도 광화문 광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광화문 캠핑촌의 텐트와 각종 작품들과 시설도 서서히 정리될 것이다. 만일 기각되면 블랙텐트는 저항의 시간을 연장하며 존속될 것이다. 블랙텐트에 봄이 오려면 블랙텐트는 소멸되어야 한다. 빼앗긴 극장에 봄이 오면 우리는 다시 블랙텐트를 정리하고 본래의 극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최선의 길일까? 아니다. 빼앗긴 극장에도, 그래서 애써 만든 블랙텐트에도 진정 봄이 오려면, 광화문 광장에 블랙텐트가 영구적으로 존치되었으면 한다. 블랙리스트의 참혹한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노래를 들을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의 연기를 할 수 있도록 광화문 블랙텐트는 탄핵과 탄핵 이후에도 그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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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문 후보님, 초대합니다.” (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문 후보님, 초대합니다.”

오혜진(문화연구자)

    좀 쉬라는 방학이지만, 최근 국문학계에는 작은 ‘파란’이 일어나 학계 안팎의 사람들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이번 겨울에 특별히 기획한 학술행사들이 각계 시민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으며 유례없이 흥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0일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에서 개최한 ‘반동의 시대와 ‘성전쟁’’ 포럼에는 무려 250여명의 청중이 모였고, 13일부터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가 서울시청년허브에서 열흘간 진행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강좌에는 매일 근 100명의 수강생이 열띠게 참여하고 있다. 어찌 된 일일까?

두 행사의 이례적인 선전은 우선, 기존 학술대회 및 강좌의 주제와 형식을 넘어서고자 한 데 있다. ‘반동의 시대와 ‘성전쟁’’ 포럼은 그간 학계에서 ‘여성적 주제’라며 부분적으로 취급하거나 ‘가십’이라고 사소화해온 젠더와 섹슈얼리티 문제를 현재 한국 사회의 구체적 현안과 결부시켜 광범위한 대중의제로 이끌어냈다. 이 포럼에서는 신예 연구자들의 시각으로 최근 온라인게임의 ‘여성 대상화’, 페미니즘 서적 붐, 박근혜 ‘여성/대통령’ 창출에 깃든 아시아적 독재와 젠더, 힐러리를 매개로 한 글로컬 페미니즘, 욕망과 폭력의 영역을 오가는 미성년 섹슈얼리티, 여성을 섹슈얼리티로 환원하는 것을 ‘미학적인 것’으로 승인해온 한국문학 전통, 한국문학장에서 젊은 페미니스트 독자들이 새롭게 펼치는 문화정치 등을 다뤘다.

당연히 질의응답 시간의 분위기도 확 바뀌었다. 평소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도록 마이크를 놓지 않던 (남성) 권위자들의 훈화말씀이 사라진 대신, 최근의 현안과 쟁점을 민첩하게 장악하고 있는 젊은 시민들의 예리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현장에서 채 답을 내지 못한 이 토론은 현재 온·오프라인에서 계속 진행 중이다.

‘페미니스트 시각으로 읽는 한국 현대문학사’ 강좌의 흥행도 놀랍다. 이 강좌가 내세운 것이 ‘페미니즘 문학사’가 아니라 ‘페미니스트 시각’이라는 점에 주목해보자. 이 강좌의 목표는 기존의 제도화된 여성문학사의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최근 리부트된 페미니즘적 정동과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 현대문학사의 외연과 내포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이 강좌가 노린 바다. 방법은 두 가지다. 기존에 제출된 페미니즘적 연구와 비평의 재맥락화, 그리고 ‘페미니즘 문학사’의 ‘버전 업’을 위한 새로운 주제와 방법론, 텍스트들의 (재)발견. 무엇보다 그걸 여성 연구자와 비평가들만의 고립된 숙제로서가 아니라, 대중적으로 확장된 젊은 여성 지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 시도에 대한 적절한 평가에는 좀더 시간이 필요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기획이 현재 표절과 문학권력, 성폭력 사태 등에서 보듯, 새롭게 갱신된 민주적 감수성으로부터 가장 낙후된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는 한국문학장의 역동적 변화와 관계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게다가 쓰라린 ‘여성 대통령’ 시대를 거쳐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대선 후보조차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형국이니, 이제 정말 때가 왔다. 서로 다른 경험과 입장과 관심사를 가진 다양한 젊은 연구자들과 독자들이 만들어내는 이 ‘페미니즘 스펙트럼’이 한국 지식문화장의 뉴웨이브를 비추는 다채로운 빛이 되길 기대해본다. 그러니 일단 이번주 평일 저녁 7시30분, 서울시청년허브로 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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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3시 STOP!’ 캠페인의 메시지 (손희정)

경향신문 칼럼

[청춘직설]‘3시 STOP!’ 캠페인의 메시지

손희정(문화평론가)

    2016년 10월24일 오후 2시38분. 여성 수천명이 아이슬란드의 거리로 뛰쳐나왔다. 남성에 비해 평균 14~18% 적은 임금을 받는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임금격차로 보자면 여성들은 매일 2시38분 이후부터는 공짜로 일하고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이어서 11월7일 오후 4시34분에는 프랑스 여성들이 손에서 일을 내려놓았다. 성별임금격차 15.5%를 기준으로 봤을 때, 여성들은 이날, 이 시간부터 연말까지 무급 노동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항변이었다. ‘이퀄 페이 데이(Equal Pay Day·동일임금의 날)’로 불리는 이 시위는 같은 해 11월10일 영국으로도 이어졌다. 이뿐 아니다. 호주의 한 대학 여성 모임은 ‘페미니스트 주간’을 맞아 임금격차분을 반영하여 남성에게는 컵케이크를 더 비싸게 파는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런 소식들을 접하며 우리는 왜 거리로 뛰쳐나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국이야말로 성별임금격차 38%,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국가 아닌가? 그런데 며칠 전, 3월8일 여성의 날을 앞두고 한국 여성 노동계에서 조기 퇴근 시위 ‘3시 STOP!’ 캠페인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주최 측에서는 집회와 행진을 예고했고, 거리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여성들에게는 각자의 자리에서 ‘3시 알람 맞추기, 3시 되면 회의하다 멍 때리기, 괜히 탕비실 가기’ 등 태업으로 동참할 것을 제안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남녀 성별 간 노동의 질과 조건의 차는 심각하다. 원인에 대한 분석은 분분한데, 크게는 다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 남녀 사이에 능력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한민국의 유독 높은 임금격차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는 명백하게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학자 신광영은 한국 노동시장에서는 동일한 조건에서 여성 임금이 남성에 비해 30% 정도 낮게 나타나며, 이 가운데 50% 이상이 차별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고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직접적인 성차별은 많이 사라졌다고들 한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 노동은 남성 노동에 비해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여성 노동의 결과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가를 받으며, 인사고과 불이익 등 남성중심적인 노동 체계 안에서 발생하는 간접적인 차별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게다가 경력단절 등의 성별화된 문제는 전혀 시정되지 않았다.

한국의 노동정책은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 지금까지의 성인지적 노동정책은 ‘여성노동정책’으로 바로 치환되어 ‘여성’만을 대상으로 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박근혜 정부의 ‘일·가정 양립정책’이었다. 사적 영역인 ‘가정’과 공적 영역인 ‘일’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둘 다를 책임지기를 사회적으로 요구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불안정한 여성 일자리를 양산하고, 여성을 ‘과로사 권하는 사회’로 내몰았다. 한 가지도 인간적으로 수행하기 힘든 사회에서의 일·가정 양립은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3시 STOP!’ 조기 퇴근 캠페인이 던지고자 하는 또 하나의 메시지가 여기에 있다. 노동시장에서의 남녀 차별은 공적 영역에서의 여성의 입지를 남성의 입지로까지 끌어올린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노동을 둘러싼 사회적 인식의 드라마틱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서야 가능해진다.

이제 노동에 대한 이해가 달라져야 한다. 매일 야근하고, 회식에 시달리며, 무한히 경쟁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일이라는 판타지는 깨져야 한다. 공과 사, 남성과 여성 등으로 나뉘어 있는 분리의 벽을 깨고 노동 성격 전반을 바꿔내야 ‘사람’이 살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것의 핵심은 남녀 노동자 공히 적용되는 노동시간 단축이다. 대선 정국에서 공론화되기 시작한 ‘남성 육아 휴직’은 노동 시간 단축의 한 예다. 우리는 저출산 패러다임의 외부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여성 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결국, 노동자 보편의 삶의 질을 바꾸는 것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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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굿즈 (서동진)

한겨레 기고문

[크리틱]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굿즈

서동진(계원예술대교수)

    나이 먹은 탓인가. 걸핏하면 심화가 치밀어 오른다. 눈이 침침하고, 자고 나면 흰 머리가 희끗하고, 매일 다르게 눈 밑이 처지는 꼴을 봐서는 분명 짜증을 달고 살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도 그런 나이에 따른 짜증인지 모를 일이다. 걸음을 했댔자 찾는 책도 없어 걸음을 마다하던 서점엘 우연히 들렀다, 그만 또 짜증이 났다. 사달의 원인은 서점 입구에 자리한 가판대 때문이었다. 거기엔 서로 다른 장정과 표지를 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처음 책이 나올 때의 표지를 복원한 판본부터 그간 이런저런 곳에서 낸 갖은 모양의 책들이 주르르 낯을 내밀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아닌 같은 내용의 여러 권의 책이 함께 자리할 때, 그것은 더 이상 책이랄 것도 없을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이런 건 책이 아니라 수집할 물건이거나 가방 속에서 삐죽이 얼굴을 내민 ‘간지’ 나는 소지품 정도일 것이다. 명품 시계나 값진 헤드폰은 어쩐지 천박해 뵈지만, 시집은 주인의 안목이나 취향을 자랑스레 내비치는 표지일지 모른다. 이렇게 더 이상 책이 아니게 된 책을 가리킬 적절한 말을 찾자면, 그건 아마도 시쳇말로 ‘굿즈’일 것이다. 책이 정신도, 지식도, 관념도, 감정도, 이념도, 뭐랄 것 없는, 그저 탐나는 물건으로 변신하였을 때, 오늘날 사람들이 굿즈란 말로 암시하려는 것과 맞아떨어질 것이다.

책이 멋있어지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근사하고 품위있게 가죽 장정된 책을 소장하던, 먼 옛날 유럽 부르주아들처럼 우리라고 아름다운 책을 가지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상품이면서 상품 아닌 듯이 존립했던 책의 운명을 생각하면, 굿즈가 된 책은, 어딘지 가지 않아야 할 세계에 발을 디딘 듯한 쓰린 기분을 자아낸다. 굿즈로서의 책은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세계를 증언하는 얼룩일 것이다. 물론 책이 한 번도 상품이 아닌 적은 없었다.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내는 데 선수인 출판사와 출판기획자도 있고 그들은 시장에서 어떤 책을 원하는지 점쟁이처럼 예언할 것이다. 책은 가격이 매겨진 채 팔려나가고 수완 좋은 저자들은 두둑한 인세와 보너스를 챙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책은 상품이면서도 또한 상품이라고 우길 수만도 없는 상품이었다. 가격이 얼마이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건 어떤 표지로 꾸며졌건 어느 서점에서 산 것이건 책은 마치 그것이 전하는 생각과 이야기로 인해 그런 상품적 가치를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 무엇의 화신인 듯 여겨지곤 했기 때문이다.

옷이니 액세서리니 따위를 파는 유명 상점이나 소문난 카페, 식당의 한구석에서 마주하는 책들은 잔인한 냉소를 머금고 있다. 그것은 말과 글이란 것이 세상을 드러내고 밝히며, 나아가 그것을 부정하는 몸짓을 자아내는 데 별 역할을 못함을 슬며시 증언한다. 솜씨 좋게 추출한 커피와 이름도 기억하기 어려운 과자 조각을 우물대며 집어든 카프카 소설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인테리어 소품이거나 문화적 위신을 과시하기 위해 동원된 작은 징표이거나,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값으로 쇼핑의 욕망을 채워줄 물건일 것이다. 모든 글과 말은 모종의 이념을 비춘다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온 내게, 이런 세상은 낯설고 무섭다. 그래서 부아가 치밀고 억울한 기분이 들고, 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진짜 화가 나는 것은 그를 통해 치를 대가이다. 그 대가란 다른 세상이 도래할 가능성이다. 책이 굿즈가 되었을 때, 다른 세상은 저 멀리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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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20호][칼럼]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세상 읽기]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한국에서 인종적 소수자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인정되지 않는’ 존재였다. 인종적 소수자는 ‘혼혈 연예인’으로 범주화되어 계속 미디어에 등장했지만, ‘시청자들’의 단일민족 신화는 이어졌다. 순수혈통 계승의 서사는 ‘악의 없이’ 인종적 소수자를 사회에서 지워버렸다. 인종적 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는 데에는 단일혈통의 서사만이 아니라 사회 통념과 미풍양속의 이념이 함께 작용했다. 인종적 소수자는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퇴폐풍조의 온상으로 여겨져 ‘혼혈문제’라는 분류 항목으로 처리되었다.

혈통 계승과 사회 통념의 명목으로 소수자는 삭제 처리되었고, 대상을 바꾸며 반복되었다. 사월혁명 이후 5·16 쿠데타 세력은 ‘제어할 수 없는 미성년 주체의 정치적 열정’에 강한 공포를 느꼈다. 박정희 체제는 청소년을 범죄의 온상(우범소년)으로 간주하고 무지막지한 통제를 지속했다. 학교 인권 조례와 청소년 인권 조례 제정을 위한 운동은 이런 오래된 ‘적폐’와 싸우는 최전선이다. 학교 인권 조례 제정은 극우 세력에 의해 계속 저지되고 있고, 청소년 노동 인권 조례 역시 혐오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작년 12월에는 인천시, 이번 달에는 달서구가 조례 제정을 보류했다. ‘정상적’ 인구 재생산이라는 혈통 계승 서사와 청소년을 자기규율이 불가능한 미숙한 집단으로 분류하는 범주화를 통해 청소년 인권 침해는 이어졌다.

한국에서 소수자를 삭제하는 방식은 독재와 파시즘을 정당화하고 계승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혈통 계승의 서사는 매번 혁명을 배신하고, 학살된 소수자의 피를 제단에 바치며 이어졌다. 성 소수자에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발언이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한국교회연합을 방문한 다음날 자문단 ‘10년의 힘’이 출범했다. 문 전 대표는 축사에서 차기 정부를 “제3기 민주정부”라고 칭하고 “제3기 민주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고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 정부가 ‘10년의 힘’의 계승자라는 이런 논리는 자신을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의 적자로 자리매김하는 혈통 계승 서사의 전형이다.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를 계승하는 적자라는 혈통 서사는 또다시 소수자를 배제하고, 혁명의 열망을 배반한다. 이 장면은 역사적이다. 그 역사는 단지 성 소수자 문제와 관련된 역사가 아니다. 혁명을 배반한 역사, 혁명 대신 상속만이 남은 역사가 이 장면에서 다시 연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성 소수자라는 특수 문제로 전가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혁명을 배신한 혈통 서사에 입적한다. 그렇게 적자들의 혈통 서사는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계승되는 것이 아니고 발명되는 것이며, 정치적 주체는 적자 경쟁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 정국이 혁명의 시간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누적된 세습 권력과 ‘아비-적자’로 이어지는 ‘한국식 민주주의’와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촛불 정국의 혁명적 열기가 고조되면서 미지의 정치적 주체가 출현하고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광장을 불태웠다. 자신을 ‘민주주의의 적자’로 여기는 이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이 마냥 반갑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상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자들’이라는 기이한 가부장적 혈통 계승의 서사가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적자들’은 혁명을 소문으로 만들고 있다. 혁명의 열정은 타오르는데 자칭 ‘민주주의의 적자들’은 아비의 목은 치지 못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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