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기고문
[크리틱] 소설과 지성
이명원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황해문화>를 읽다가 문학평론가 오길영의 평론에 눈길이 머물렀다. 그는 세 권의 창작집을 대상으로 문학에서의 지성 문제를 논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문제제기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문제의 출발점은 한 좌담에서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이 한 발언이었다. 요즘 소설을 읽어보려 애썼는데, 작가들이 자전적 경험을 소설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자기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소설에서 객관화의 문제는 중요하다. 개인과 상황의 갈등은 근대소설의 핵심 문법인데, 많은 경우 현대소설은 개인의 내적 갈등을 조명하고 있기 때문에 자의식과 정서 모두에서 주관적 과잉이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1인칭이나 3인칭과 무관하게 주인공 시점에서 흔히 나타나는 문제다.
오길영은 이인휘의 <폐허를 보다>에 대한 세간의 호평에 이견을 제출한다. 이 소설 속의 화자 ‘나’는 “너무 쉽게 인물과 세계를 이해하고 소통”하며, 소설 속에서 되풀이되는 “부끄러움이나 죄책감이 정서적 충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노동현장에 대한 묘사와 등장인물의 상황인식 역시 “현 단계 노동과 자본이 처한 실상, 그 사이의 세력관계에 대한 구체적 분석과 묘사”를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정조”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침묵과 삶의 복마전 속에서 소설에 대한 재기를 다짐한 작가 입장에서는 아픈 비판일 수 있다. 만약 내가 이인휘의 소설에 대해 썼다면, 오길영이 지적한 한계를 단편 양식의 불가피성이라는 문제로 논의하는 것과 동시에, 소설의 전반적인 기저음을 이루고 있는 상실감과 부채의식을 소시민성과 관련해 분석하면서, 이인휘의 편에서 공감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는 유혹에 흔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오길영의 주장이 중요한 문제제기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어찌 보면 내가 공감적 논의라고 겸양되게 표현한 것 역시 오길영이 말하는 “강인하고 냉철한 지성의 결핍”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문학비평에서 작가와 평론가의 관계는 연루된 동족관계 비슷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지성의 힘으로 작품과 대결하기보다는 정서적으로 작가와 화해하려는 포즈가 비평으로 오인되는 일도 자주 나타난다.
백수린의 <참담한 빛>이나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에 대한 논의 역시 귀담아들을 만하다. 오길영은 백수린 소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공간적 배경인 이국의 도시들이 갖는 효과의 적절성에 대해 말한다. 즉 백수린의 소설에서 이국적 공간은 “독특한 현실탈출의 분위기, 혹은 인물들의 고통과 기억을 강화시키는 주변적 분위기로만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인물과 공간이 단지 애매몽롱한 분위기로 만들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반면 최은영의 소설은 공간적 배경의 이국성은 유사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생활감각”이 살아있으며, 서사와 묘사에서의 “구체적 섬세함”은 문학적 정확성 혹은 지성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소설가는 지성을 필요로 한다. 소설에서의 지성이란 인물들로 하여금 주관주의의 유혹을 차단하고, 인물과 상황을 구체화하고 객관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단편 양식에서 등장인물은 작가를 향해 정서적으로 동일시될 가능성이 더욱 크다. 그러나 역시 소설은 ‘나’가 아닌 ‘타자’를 부각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내적 상황은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는 외적 상황 전체를 음미할 공간을 여는 데에 읽기의 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