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21호] 문화과학 90호 신간안내

문화과학 90호 발간사

 

착취당하고 지배받는 생산자 다중의 형성은 20세기 혁명사에서 더욱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1917년과 1949년의 공산주의 혁명,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위대한 반파시스트 투쟁들, 그리고 1989년의 해방투쟁들에 이르기까지의 1960년대의 무수한 해방투쟁들 중에서 대중의 시민권의 조건들은 태어났고, 퍼졌고, 공고화되었다. 20세기 혁명들은 패배당하기는커녕, 서로를 계속 전진하도록 했고 계급갈등의 조건들을 변형시켜왔으며, 그리하여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 제국 권력에 대항하는 반란적 다중의 조건들을 제시해왔다. 혁명 운동들이 확립해왔던 리듬은 새로운 시대의 비트, 즉 시대의 새로운 성숙과 변형의 비트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는 올해는 1987년 민주화 항쟁 30주년과 촛불 시민혁명 원년의 해이다. 지난 100년 동안 전 세계에서 혁명은 얼마나 많이 일어났을까? 각 나라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까지 합하면, 아마도 혁명은 수백 번이 넘을 것이다.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거쳐, 전 유럽을 들썩이게 했던 1968년 혁명, 지금까지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는 1960년대 말 중국 문화대혁명과 1989년 천안문 사태,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과 2011년 튀니지아의 자스민 혁명, 1994년 시애틀 반세계화 투쟁에서 2011년 뉴욕 월가 점령운동, 그리고 1960년 한국의 419혁명에서 2017년 촛불혁명까지, 혁명은 체제 전복에서 국가권력에의 저항, 그리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반대와 인민 주권의 자유로운 요구라는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물론 혁명은 지난 100년 동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혁명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존재했고, 21세기 초기를 사는 지금에도 혁명은 계속되고 있다. 혁명은 인민의 무기이자, 희망이고, 저항의 결실이기도 하지만 변절과 착취의 시작이기도 하다. 혁명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이어진다. 그것은 역사의 유산이기도 하면서 미래로 향하는 민중의 힘이기도 하다.

계간 『문화/과학』이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아 90호 특집으로 ‘혁명과 문화100년’을 택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더욱이 작년 겨울부터 올 초 봄까지 이어진 촛불 시민혁명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평가가 개시되는 시점에서 『문화/과학』의 특집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 혁명의 역사적 유산과 이행의 문제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시기적절하다. 다만 이 특집을 정하게 된 계기가 단지 러시아 혁명 100주년만이 아니라 촛불 시민혁명에 있다고 볼 때, 이번 촛불 시민혁명이 역사적 혁명의 수준에 준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촛불 시민혁명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혁명의 수준으로까지 정의되기는 어렵다고 평가한다. 체제를 전복하고, 권력을 빼앗는 혁명의 일반적 정의를 고려하면, 촛불 시민혁명은 과도한 해석이며, 촛불 시민항쟁이나, 촛불 정국 정도가 적절하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또한 무장투쟁이나 물리적 충돌 없이 사법부와 경찰 권력과의 조율 하에 평화롭게 진행된 합법적 평화 시위가 과연 혁명에 값하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촛불 시민혁명이 평화로운 합법적 투쟁의 방식을 취했지만, 시민들의 요구와 이해에 의한 사상 유례가 없는 지속적인 대규모 시위였고, 다양한 시민들의 목소리와 표현이 자유롭게 분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사법부의 결정에 의한 것이지만, 통치자 박근혜를 탄핵하고 구속시키고, 지난 대선에서 10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혁명적 수준에 준하는 의미를 가진다. 문제는 촛불 시민혁명이 그 의미에 값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시민적 이행의 요구와 관찰이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특집에 실린 5편의 문제의식은 모두 지난 100년간의 혁명의 유산에서 최근의 시민 촛불혁명까지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이번 특집은 혁명과 문화의 관계를 이야기함에 있어, 우리가 언급해야 하는 다양한 토픽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했다. 가령 혁명과 시각예술, 음악, 영화, 공간의 관계 등 혁명의 순간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재현하는 것의 특이성에 대해 그리고 혁명의 공간을 지배하는 광장의 사건에 대해 이번 특집 글들이 다루고 있는 것이다.

먼저 이동연의 「혁명의 문화, 문화의 혁명」은 이번 특집의 총론에 해당되는 글이다. 특히 이 글은 혁명과 문화의 변증법적인 관계를 조명하고 있는데, 그가 보기에 “혁명은 일상의 양식들을 바꾸어놓지만, 시간이 지나면 일상의 지배를 받”으며, “혁명의 상품화 역시 일상의 지배의 한 결과”이다. 혁명의 문화가 일상에서 상품으로, 관습으로, 추억의 소재로 코드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상을 혁명적으로 전환시키는 지속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이 생산되어야 하는 것이 이 글이 갖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이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러시아 혁명에서의 문학 당파성과 68혁명의 문화적 자율성을 검토하고 촛불 시민혁명에서 전위에 섰던 광화문 캠핑촌 예술행동의 의미를 주목한다. 그는 알렝 바디우를 언급하며 “문화는 혁명의 현재와 미래를 끝임 없이 질문하며 스스로 자신들을 사회적 연대를 위한 투사의 형상으로, 소수자의 형상으로, 다양성과 자율성의 가치의 형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맺는다.

조선령의 「혁명과 시각예술 :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은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혁명 또는 혁명적 이행기에 발생했던 ‘혁명적/정치적 예술’의 전개 양상과 쟁점들을 당시 시각 예술가들이 가졌던 문제의식과 그들이 직면했던 도전”을 정리하고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프랑스 68혁명,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운동, 그리고 2016년의 촛불정국에서 재현되었던 시각예술 분야의 혁명적 예술의 사례들을 다루면서 필자는 “혁명적 이행기의 많은 시각예술가들은 예술의 정치적 내용만이 아니라 정치적 형식에 대해 고민했으며, 삶을 변혁시키는 것만큼이나 예술의 형식을 변혁시키는 방법을 모색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이 글은 러시아 구축주의 예술가, 1980년대 한국의 민중미술의 걸개그림과 판화, 촛불 정국에서의 새로운 예술가-시민 연대와 시각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혁명의 순간에 시각예술이 갖는 물질성, 우발성, 일상성을 강조한다.

서동진의 「인터내셔널!: 어느 노래에 대한 역사적 기억 연습」은 혁명의 주제가라고 할 수 있는  「인터내셔널기」의 역사적 변용의 과정에서 갖는 상실감과 안도감이라는 양가적 감정에 주목한다. 필자는 “「인터내셔널기」를 경유하며 시간의 현상학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경험의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특성을 사유”하는 시도를 한다. 다양한 형태로 재연되는 「인터내셔널기」는 “상실된 혁명적인 이상을 물질화하는 사물 혹은 객체”이고, 그 사운드스케이프가 “혁명적인 비전과 실천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음을 스스로에게 확인”토록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쓰라린 상실로부터 고통스러운 우울과 더불어 야릇한 안도감과 애상적인 쾌감을 얻고 있음을 생생하게 상연”하는 경험하기도 한다.

하승우의 「혁명과 영화적 기억」은 혁명을 소환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혁명의 영화적 재현은 각각의 사회구성체가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계열화된다.” 필자는 “1917년 10월 혁명 후, 영화라는 시각 매체가 ‘기원 서사’로서의 혁명-사건을 어떻게 재현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대 소비에트 영화를 대표했던 에이젠슈타인과 베르토프의 영화, 그리고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알렉산더 메드베드킨의 영화에 주목하면서, 러시아 혁명기 ‘영화의 혁명적 재현’에 대해 꼼꼼하게 분석한다. 필자는 글의 말미에 “혁명이라는 소재를 다룬다고 곧바로 혁명적인 영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혁명이라는 대상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달려있다. 곧 영화가 혁명을 재현할 때 무엇을 재현하는가에서 어떻게 재현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최철웅의 「혁명은 광장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혁명과 광장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다룬다. 필자는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 뉴욕의 주코티 공원,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 칠레의 산티아고, 홍콩의 센트럴 구역, 서울의 광화문 등지에서 일어난 최근의 혁명운동이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정권, 탐욕스러운 금융자본, 양극화와 불평등 현실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다. 최근 광장을 점거한 사례들은 그가 보기에 “단일한 이념이나 통일된 조직 없이 옛 질서를 파괴하기 원하는 듯” 보인다. 광장은 “통일되고 개방된 만큼이나 분리되고 배제적인 공간이”이며,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포용하는 ‘포괄적인(umbrella)’ 집회현장”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는 광장이 “정치의 대척점에 놓인 것이 아니라, 그곳이 바로 정치의 장소라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광장의 신화에 열광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광장의 정치를 붙잡고 끈질기게 사유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번 기획 란은 1987년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1980년대 문화운동의 역사적 궤적에 주목하여 세 편의 글을 실었다. 먼저 김성일의 「1980년대 문화운동론의 구조」는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에서의 ‘리셋’ 열망이 1980년대 사회변혁운동에서의 ‘혁명’ 의지를 상기시키는 바, 양자 공히 현실에 대한 철저한 단절과 보다 나은 세계(체제)를 지향하고 있음에 착안하여, 1980년대 ‘혁명’이 2017년 ‘리셋’에 어떤 상상력과 대안을 제시해 줄지를 당시의 문화운동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찾아보고자 한다. 필자는 1980년대 발간된 문화운동과 관련된 문헌의 독해 속에서 “여전히 그 생동감을 잃지 않은 그 시대의 목소리를 온전히 발굴해 현 시기 촛불민심의 진로 탐색”에 기여하고자 한다. 정원옥의 「1980년대 문화운동에서의 공동체담론과 오월 광주」는 이 글은 1980년대 문화운동론의 중요한 축이었던 공동체문화를 1980년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과 연결하여 다시 읽어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 글이 갖는 근본 취지는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격과 내용을 규정지었던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이 왜 공동체문화론에는 거의 수용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하여. “1980년대 문화운동에서의 공동체담론을 오월 광주의 공동체 경험과 연관”해 읽으면서, “오늘날 귀환하고 있는 공동체의 문제를 성찰적으로 되돌아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김대성의 「역사적 합창으로서의 노동자 글쓰기―석정남과 신경숙」의 글은 ‘소설을 쓰는 노동자’와 ‘노동을 쓰는 소설가’라는 서로 다른 위치가 1980년대 노동자의 삶의 어떻게 다루고, 문단은 그들을 어떻게 수용하는가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석정남의 글쓰기는 말할 수 없는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가질 수 있는 자리로 이행하는 것”이다. “‘여공’도 글을 쓸 수 있다는 것, 아니 오래전부터 여공이 글을 써왔다는 것은 몫의 재분배를 위한 정치의 역사가 쓰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 “‘쓴다는 행위’와 ‘쓸 수 없는 대상’ 사이에서 신경숙은 내내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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