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칼럼
인격? 우우우!
서동진
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지난 몇 주 성가시리만치 문재인 정부의 새 내각 인선을 둘러싼 청문회가 이어졌다. 새 정부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될 인물의 면면을 헤집고 고발하면서 적임인지 아닌지 시비가 뜨거웠다. 정치적으로 큰 역할을 하게 될 인물이, 누가 봐도 본보기가 될 만한 인품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럴듯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범적인 인격을 지닌 이들에 의해 세상이 좌지우지된다는 선량한 믿음 속에는 어딘지 구린 구석이 있다. 의롭고 떳떳한 인물을 정치지도자로 뽑아야 한다는 원칙은 그럴듯하지만 정치가 인격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볼 이유는 전연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격 숭배는 오늘날 갑질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호황을 누리는 주인의 인격에 대한 호된 비판과도 상관이 있을 듯싶다. 헤겔은 어느 책에서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주인이 좋은 주인인 줄만 알고 도덕적으로 지저분한 짓을 한 주인을 흉보면서 주인을 이겼다고 믿는 하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다. 우리에게도 크게 먼 일은 아닐 것이다. 오늘 정치 행위는 정당이나 다른 정치조직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것으로부터 더없이 멀어져 있다. 대신 명사나 스타와 같은 정치지도자에 대한 팬 혹은 ‘안티’가 되는 것이 그나마 정치 행위라면 행위이다. 당연히 인격이라는 휘장은 개인의 내면적인 인격을 들여다보느라 그 뒤에서 자연처럼 굳건히 굴러가는 얼굴 없는 지배를 잊는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가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곳의 사람들과 돈과 상품으로 연결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얼굴을 맞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를 세계의 모델로 삼는다.
배려, 존중, 인정, 공감 등의 모호한 윤리적 개념이 사회적 관계를 바꾸는 원리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모든 개념들은 오직 개인들만이 살아가는 세계, 원하든 원치 않든 어쩔 수 없이 생존을 하자면 감내해야 하는 사회적 관계를 까마득히 잊은 세계를 가리키는 탓이다. 내가 너와 맺는 관계의 윤리는 고용도, 계약도, 자격도, 소외도 없는 세계일 것이다. 너를 배려하기 위해 후한 임금을 준다거나 너에게 공감하여 이자를 받지 않겠다거나 너를 존중하기 위해 기꺼이 국적을 주겠다거나 하는 일은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자연현상인 듯 오늘의 날씨와 함께 등장하는 오늘의 주가는 어떤 인격적인 만남 없이 펼쳐지는 세계의 풍경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오늘의 온도처럼 오늘의 삶의 바로미터로 삼는다. 그런 세계에서 인격이 더없이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은 심상찮은 일이다.
평생 법 없이도 살 것처럼 순하게 묵묵히 일만 하는 부모들을 보며 대학으로 공장으로 갔던 이들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민주화를 위한 위대한 걸음을 디뎠다. 그들이 본 것은 아름다운 인격 따위는 아랑곳 않은 채 군림하는 구조적 지배였다. 그때 나는 어떤 불온한 대학생 서클에서 세미나를 하다, 대체 몇 번이나 구조란 말들을 뱉는지 세어보곤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보이지 않는 구조를 향해 아무런 구조도 없는 거리로 나섰다. 전투경찰만 보일 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아득한 도로에서 그들은 목이 터져라 새로운 세상을 요구했다. 민주화 3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손을 뻗어야 할 곳은 다시 그 구조일 것이다. 가진 자들이 행한 구조조정을 잊은 채 인격만 따지다간 이제 다시 그 구조를 바로잡을 기회를 잃고 말 것이다. 인격이라고? 우우우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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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0032.html#csidxf6e68856e0fe3418c204e145a3be4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