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20호][칼럼]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세상 읽기] 혁명은 못 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구나!

권명아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한국에서 인종적 소수자는 엄연히 존재하지만 ‘인정되지 않는’ 존재였다. 인종적 소수자는 ‘혼혈 연예인’으로 범주화되어 계속 미디어에 등장했지만, ‘시청자들’의 단일민족 신화는 이어졌다. 순수혈통 계승의 서사는 ‘악의 없이’ 인종적 소수자를 사회에서 지워버렸다. 인종적 소수자의 존재를 삭제하는 데에는 단일혈통의 서사만이 아니라 사회 통념과 미풍양속의 이념이 함께 작용했다. 인종적 소수자는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퇴폐풍조의 온상으로 여겨져 ‘혼혈문제’라는 분류 항목으로 처리되었다.

혈통 계승과 사회 통념의 명목으로 소수자는 삭제 처리되었고, 대상을 바꾸며 반복되었다. 사월혁명 이후 5·16 쿠데타 세력은 ‘제어할 수 없는 미성년 주체의 정치적 열정’에 강한 공포를 느꼈다. 박정희 체제는 청소년을 범죄의 온상(우범소년)으로 간주하고 무지막지한 통제를 지속했다. 학교 인권 조례와 청소년 인권 조례 제정을 위한 운동은 이런 오래된 ‘적폐’와 싸우는 최전선이다. 학교 인권 조례 제정은 극우 세력에 의해 계속 저지되고 있고, 청소년 노동 인권 조례 역시 혐오 세력에 의해 저지되었다. 작년 12월에는 인천시, 이번 달에는 달서구가 조례 제정을 보류했다. ‘정상적’ 인구 재생산이라는 혈통 계승 서사와 청소년을 자기규율이 불가능한 미숙한 집단으로 분류하는 범주화를 통해 청소년 인권 침해는 이어졌다.

한국에서 소수자를 삭제하는 방식은 독재와 파시즘을 정당화하고 계승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혈통 계승의 서사는 매번 혁명을 배신하고, 학살된 소수자의 피를 제단에 바치며 이어졌다. 성 소수자에 대한 문재인 전 대표의 발언이 뜨거운 논란이 되고 있다. 문재인 전 대표가 한국교회연합을 방문한 다음날 자문단 ‘10년의 힘’이 출범했다. 문 전 대표는 축사에서 차기 정부를 “제3기 민주정부”라고 칭하고 “제3기 민주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고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기 정부가 ‘10년의 힘’의 계승자라는 이런 논리는 자신을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의 적자로 자리매김하는 혈통 계승 서사의 전형이다. 민주주의의 두 아버지를 계승하는 적자라는 혈통 서사는 또다시 소수자를 배제하고, 혁명의 열망을 배반한다. 이 장면은 역사적이다. 그 역사는 단지 성 소수자 문제와 관련된 역사가 아니다. 혁명을 배반한 역사, 혁명 대신 상속만이 남은 역사가 이 장면에서 다시 연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장면을 성 소수자라는 특수 문제로 전가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혁명을 배신한 혈통 서사에 입적한다. 그렇게 적자들의 혈통 서사는 이어진다.

민주주의는 계승되는 것이 아니고 발명되는 것이며, 정치적 주체는 적자 경쟁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 정국이 혁명의 시간이 되었던 것은 바로 이렇게 누적된 세습 권력과 ‘아비-적자’로 이어지는 ‘한국식 민주주의’와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촛불 정국의 혁명적 열기가 고조되면서 미지의 정치적 주체가 출현하고 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광장을 불태웠다. 자신을 ‘민주주의의 적자’로 여기는 이들에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출현이 마냥 반갑지 않은 게 분명하다. 사실상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자들’이라는 기이한 가부장적 혈통 계승의 서사가 소수자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적자들’은 혁명을 소문으로 만들고 있다. 혁명의 열정은 타오르는데 자칭 ‘민주주의의 적자들’은 아비의 목은 치지 못하고 아비의 이름만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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