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6호][칼럼] 표절과 대작 ‘슬픈 자화상’(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문화비평]표절과 대작 ‘슬픈 자화상’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신경숙 표절 사건이 벌어진 지 1년이 다가온다. 표절 사건은 그녀의 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문학계의 해묵은 문학권력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당시 문학 계간지마다 표절을 주제로 특집을 실었고, 이후 창작과비평사와 문학동네는 발행인과 편집위원을 교체하는 혁신안을 발표했다. 현재 ‘창비’는 발행인과 주간이 교체됐고, ‘문학동네’는 1세대 편집위원이 물러나고 문화 분야를 강화하며 젊은 편집위원들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신경숙 표절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다가오지만, 문학계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할 정도로 조용하다. 오히려 문학시장의 공멸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면서 표절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고심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던 차에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동안 우울했던 문학계는 한강의 수상을 1년 전 신경숙 표절 사건의 아픔을 씻어내는 반전의 계기로 반기는 분위기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고 다른 소설들도 덩달아 판매량이 증가하는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출간한 창비는 금전적 이득뿐 아니라 표절로 실추된 출판사의 명예도 회복되는 최고의 덤을 얻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문학계의 쾌거이고, 문학시장의 부활을 위한 지렛대가 될 수 있는 기회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신경숙 표절 사건을 성찰할 시간을 지워버린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신경숙 표절의 폐부를 키운 것도 어찌 보면, 젊은 문학평론가 오혜진의 지적대로 한국문학 세계화 대망론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강의 수상과 신경숙의 표절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강의 수상은 문학계에서 아직 충분히 논의가 끝나지 않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윤리와 출판사 공동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재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표절 작가를 옹호했던 한국문학의 심리 안에는 한강의 수상이 마치 표절이란 주홍글씨를 가슴에 패용하고 다녀야 했던 동료 작가와 출판사의 원죄를 사면하는 면죄부로 작용하는 듯하다. 문학권력의 장은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견고한 표절의 모든 것은 ‘깊은 슬픔’의 성찰 없이 순식간에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수 조영남의 그림을 대신 그렸다는 최근 한 무명작가의 폭로 역시 1년 전 신경숙 표절 사건의 미술계 버전으로 간주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조영남은 모든 아이디어와 콘셉트는 자신의 것이며, 대작 사실을 폭로한 송모씨는 단지 조수에 불과하고 이것은 현대미술의 관행이라고 해명했다. 대작 사건에 대해 진중권은 원래 현대미술이나 팝아트의 창작 경향이 다 그런 것이라며 대중들의 비난은 현대미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몇몇 작가들과 비평가들도 진중권의 발언에 동조하고 나섰지만, 대중들의 일반 상식은 달랐다.

대중들은 오히려 조영남이 사전에 대작의 사실을 밝히지 않은 점, 대작 작가에게 작품당 10만원 정도의 수고비를 주는 대신 자신의 그림을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받고 팔았다는 점에 분노했다. 조영남의 솔직하지 않은 행동과 대작 작가에 대한 천하의 ‘갑질’이 대중의 공분을 산 것이다. “현대미술의 관행” 운운하는 진중권류의 해명은 대중들에게는 잘난 체하는 ‘엘리트주의’로 힐난의 대상이 된다. 최근 검찰의 수사로는 송씨 이외의 대작 작가가 2~3명 더 있으며, 심지어 원천 창작가가 자신이라는 조영남의 주장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표절’과 ‘대작’은 우리 문화의 부끄럽고 슬픈 자화상이다. 표절은 소설에만 있는 게 아니라 박사학위 논문에서 대중음악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 ‘대작’ 역시 그 관행이 문화예술계에 만연해 있다. 무명 작가들이 당해야 하는 저작권 도난의 수난 사례는 아직 수면에 본격적으로 올라오지 않고 있다. 대작을 강요하고, 대신 창작자의 이름을 지워 버리는 문화계의 오랜 ‘갑질’의 관행을 “현대미술의 콘셉트”이자 “대량 제작 시스템의 관행”이라고 운운한다면 그것은 마치 가난한 작가에게 몇 푼의 돈을 쥐여주고 신체 포기 각서를 쓰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절’과 ‘대작’의 뻔뻔한 관행도 슬프지만, 더 슬픈 것은 그것을 마치 쿨하게 방관하고 해명하며, 애써 의미화하려는 비평적 행위이다. 그리고 더더욱 슬픈 것은 ‘표절’을 ‘수상’으로 지워 버리고, ‘대작’을 ‘관행’으로 지워 버리려는 대중과 문화권력의 공모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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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6호][칼럼] 남자에게 말 걸기(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남자에게 말 걸기

 

오혜진(문화연구자)

 

지난 5월17일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부산과 서울 수락산 등지에서 연이어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일면식도 없는 여성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범죄’라 할 수 있다. 최근 이런 사건이 부쩍 늘어난 걸까, 아니면 원래 많았는데 이제야 가시화된 걸까? 당연히 후자다. 2000년대 이후 줄곧 한국 강력범죄 피해자의 10명 중 9명은 여자였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남성들은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생경하다며, 그 존재를 부인한다. 일부 ‘교양 있는’ 남성들조차 ‘문제는 혐오가 아니야’ ‘내가 여성혐오자일 리 없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하지만 ‘여혐’, 결코 어렵지 않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조차 항상 자기 안의 여성혐오와 치열하게 싸운다. 남성의 ‘여성멸시’와 여성의 ‘자기혐오’를 포괄하는 여성혐오는 마치 공기처럼 우리 일상 깊은 곳까지 스며 있다. 살인강간폭행 같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여성을 자연화신비화해온 오랜 전통도 여성혐오와 관련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저열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무조건적인 아름다움의 화신이나 숭배의 대상도 아니다. 여성도 그저 말하고 생각하고 실수하고 성찰하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가진 ‘인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같은 오랜 속담부터 최근의 ‘알파걸김치녀’ 논란까지 한국 여성혐오의 역사는 유구하고, 양상은 다양하다. 그러니 한국에서는 생각을 ‘억지로 해야만’ 여성혐오 발화를 안 할 수 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은 반드시 여성혐오와 만난다.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는 영원히 못 벗어날 ‘악마의 굴레’ 같은 게 아니라는 거다. 내 안의 여성혐오를 인정하고 고치면 된다. 다만, ‘공부’가 필요하다. 자신이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있지 않은지 매순간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그 ‘공부’ 중 하나일 수 있다. 페미니즘에 입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선 ‘나는 남자라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같은 말만 안 하면 된다. 이미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노동자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노동자가 되고자 위장취업까지 감행한 바 있지 않은가. 그 역사는 내게, ‘존재변이를 위해 죽을 때까지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것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는 꼭 여자가 돼야만 가능하시겠는가.

지난 토요일 밤, 강남역 살인사건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사건 자체는 물론,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고통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꽤 유익했다. 그런데 이날 “저도 남자입니다만”이라는 사회자의 말처럼 말을 거는 사람은 남성이었으며, 수신자 역시 (합리적 이성을 지닌 것으로 상정된) “우리 남성들”이었다. 사회자는 “가장 상처가 되는 것은 적의 말이 아닌 친구의 침묵”이라며 “우리 남성들”을 여성의 ‘친구’로 규정했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 아내, 혹은 딸들이 그 희생자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아들들이 그 가해자가 될 수가 있다”는 프로그램의 결론에서, 정작 ‘나(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이게 ‘나’가 아닌 ‘가족’과 ‘이웃’의 문제인가. 남자라서 페미니스트는 될 수 없지만 ‘친구’는 돼줄 수 있다는 이들에게, 우린 이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시혜’와 ‘보호’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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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6호][칼럼] 이야기가 들린다(손희정)

창비주간논평 기고문

 

이야기가 들린다

 

손희정(문화평론가)

 

청명하게 푸른 하늘에 오색으로 나부끼는 타르초. 그 타르초에는 티벳의 불교 경전이 씌어 있다고 한다. 바람을 따라 경전의 말씀이 세계의 곳곳으로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그래서 가끔씩 눈을 감고 상상하곤 했다. 평소에는 잘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이렇게 바람을 따라 세계로 퍼져간다면 어떨까.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세계를 바꿀 수 있다면.

요즘 내 귀에는 바람(風/願)을 타고 이 세계를 떠돌고 있는, ‘낡았지만 새로운’ 이야기들이 들린다. 그 이야기는 수백년 혹은 수천년을 반복되어왔기 때문에 낡았으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인식론과 다른 매체, 그리고 다른 역능을 따라 이 세계로 퍼지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새롭다. 강남역 10번 출구를 비롯해서 전국 곳곳에 마련된 추모의 공간에 여성들이 붙이고 있는 색색의 포스트잇 위에 씌어진 여자들의 이야기, 나는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는 살아남았으며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언니 나는 잊지 않을 거예요 / 내가 살해당했다면 네가 이 자리 이곳에 와주었겠지 / 나는 여전히 알고 싶다. 네 꿈은 뭐였니? / 살여(女)주세요. 넌 살아남(男)잖아 / 오빠가 지켜주는 사회 필요없고요. 물론 오빠도 필요없음 / 내가 될 수 있었던 그 죽음, 다음엔 내 차례일 수도 있다는 공포 / 다른 여자 대신 우연히 살아 있습니다 / 여성은 ‘퀘스트 보상’이 아닙니다. 당신과 같은 ‘플레이어’입니다 / 남자들은 여기서도 여자들을 가르치려 한다 / 우리는 살아남았으며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stop misogyny!”

 

타르초와도 같은 포스트잇에는 애도, 슬픔, 불안, 공포의 마음들과 당신이 바로 나라는 각성, 잊지 않겠다는 선언, 그리고 세상을 바꾸어나가겠다는 다짐 등이 깨알같이 쓰였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그녀는 하나의 이름이 아니라 ‘여자’라는 이름으로 이 세계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나였고, 너였거나, 그렇게 우리였다.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

여성들은 강남역 사건을 ‘여성혐오 살인사건’이라고 명명함으로써 그 이면에 놓인 거대한 구조인 가부장제를 드러냈다. 그리고 이렇게 세계를 보는 관점에 젠더라는 문제의식을 기입한 것은 공식적이며 이성적인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몇년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기 시작한 여성들의 재잘거림(tweet), 소문, 언어유희(mirroring)와 같은 이야기들을 통해서 시작되고 벼려진 통렬한 자기 인식과 각성의 결과였다. 그래서 ‘가부장제’나 ‘남성중심주의’ 등 한국사회의 성체계를 설명하는 다른 어떤 용어보다도, 최근 여성 대중 사이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는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선택됐다. ‘여성혐오’라는 규정은 여성들의 공유된 기억으로부터 터져나온 일종의 외침이었고, 그렇게 여성들이 그간 어떤 삶을 견뎌왔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구호였다.

 

낡은 인식을 뒤바꾼 여성들의 외침

이 사건이 여성들에게 무엇보다 ‘여성혐오’ 사건으로 닥쳐온 계기 중 하나가 언론의 선정적이며 남성중심적인 보도였음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언제나처럼 언론의 언어는 남성의 좌절된 꿈과 생활고, 정신건강 상태를 강조했다. 그 기록 안에 여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여성의 이야기는 말소되었다. 그렇게 남성의 언어는 이 사회의 낡은 성체계인 가부장제를 드러내는 사건의 충격을 흡수하여 이번 ‘5‧17페미사이드’를 젠더계급과 무관한 사건, 이 사회의 일탈을 보여주는 하나의 돌출된 ‘사고’로 기록하려고 했다.

이와 함께 ‘법리적 해석’이나 ‘정신의학’과 같은 과학의 언어는 단편적인 정보와 지식에 기반하여 이 사건을 여성혐오가 아닌 ‘정신질환자의 우발적 범행’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그 단순하기에 오히려 엄밀해 보이는 말들은 결국 ‘정신질환자 감금 확대’라는, 장애인 혐오에 기반한 또다른 폭력의 재생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언어가 지배층에게 이 사건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변명거리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범죄임을 인정하지 않는 그 여성혐오적 태도는 또다른 혐오로 계속해서 확장되어간다. 여성차별과 억압의 구조라는 근본적인 문제의 맥락을 회피하고 단순화시킬 때, 우리가 맞이할 세계는 혐오와 증오를 지배의 기술로 선택한 파시즘의 사회일 뿐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기억은 이야기를 만들어냈고, 그 이야기는 살아남아 이 사건을 새롭게 기록하고 있다. 좌충우돌 끝에 언론은 비로소 다양한 추모의 공간에 용기를 내어 나선 여성들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사건의 해석을 바꾸어낸 것이다. 포스트잇은 이처럼 기존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기록이다. 그것은 공식적인 기록과 역사에 틈입하는 새로운 아카이브다.

 

더 많은 목소리를 기다리며

 

“너의 잘못이 아니야 / 이젠 컵라면 드시지 말고 맛있는 거 많이 드세요 / 비정규직은 혼자 와서 죽었고, 정규직은 셋이 와서 포스트잇을 뗀다.”

 

그리고 2016년 5월 30일, 구의역, 스크린도어 위. 또다른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죽음을 조건으로 하는 노동으로 내몰렸던 또 하나의 생명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강남역 살인사건 희생자를 비롯하여 한국사회에 만연한 죽음들이 고통스럽게 외치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다시 전한다. “평등해야 안전하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에게 ‘생존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고 일하라고 강요하는 국가와 자본’의 아이러니를 드러낸다. 이 아이러니를 둘러싸고 생성되고 있는 이야기들은 과연 이 사회에 도달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지워진 이야기들이 세상에 들려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변화가 이 이야기들의 역능과 함께 시작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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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6호][칼럼] 여성살해를 쓰다(권명아)

한겨레 기고문

[야! 한국사회] 여성살해를 쓰다

권명아(동아대 국문과 교수)

강남역 살인 사건은 자신을 생존자로 규정한 여성들의 추모 릴레이가 없었다면 그저 신문 사회면 귀퉁이를 장식한 기사로 남았을 것이다. 이 사건의 개념 규정에 대한 논란도 뜨겁다. 개념의 정확한 규정도 중요하지만, 혐오, 차별 선동, 죽음과 살해로 이어지는 소수자 차별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와 연구가 더 시급하다. 여성 혐오를 비롯한 소수자 혐오가 신자유주의적 현상이라고 하지만, 특정 사회의 차별 구조와 역사가 혐오의 구체성을 좌우한다. 일례로 오언 존스의 를 보면 영국 사회에서는 ‘차브 혐오’라는 하층 계급 혐오가 지배적이다. 또 일본의 경우 차별 선동을 주도하는 ‘재특회’가 상징하듯이 인종 차별이 지배적이다. 인종 차별이나 계급 차별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여타의 소수자 차별이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계급 차별이 지배적인 경우, 성차별이나 지역 차별이 계급 차별의 지배적 규정하에 작동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성차별이 지배적이다. 성차별에는 여성 차별과 성소수자 차별이 모두 포함된다. 성소수자 차별이 최근 들어 차별 선동의 대상이 된 것은 성소수자들이 한국 사회에서 이제야, 겨우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 차별이 유례없이 난폭했다는 증거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번 강남역 살인 사건에 대해 젠더 규정보다, 사회구조와 계급 문제가 우선적이라고 조언한 여러 ‘진보’ 집단의 충고는 ‘원론’으로만 옳다. 현실과 역사가 없이 원론만 반복하는 ‘진보이론’은 곤란하다. 물론 젠더 규정과 계급 규정을 둘러싼 이런 마찰은 한국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에토스를 지닌 집단 사이의 이런 마찰을 정동 연구자 벤 하이모어는 자신의 판단 감각을 의심하지 않는 “거드름을 피우는 에토스”의 산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정치적 중요성, 긴급성, 정동의 강렬도에서 서로 다른 에토스를 지닌 집단들 사이에서 이런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은 항상 있다. 젠더 이론이나 페미니즘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여성 살해와 성폭력 범죄가 이어지는 것은 한국 사회가 이제야 이 사건들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 살해는 너무 만연해서 주목되지 않거나 주목되어도 사회병리 현상이라는 담론구조로 환원되었다. 이런 담론구조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여성 연예인에 대한 담론구조이다. 한국에서 연예산업이 활성화된 1990년대 이후에 국한해도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과 노예화는 선정적이고 성애화된 담론구조와 우울증과 같은 병리 담론 사이를 반복했다. 일반 여성에 대한 폭력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로 간주하여 주목되지 않았다면 여성 연예인은 이례적인 주목 대상이 되어 이중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그리고 이런 이중 폭력은 끝없이 이어진 여성 연예인 자살로 나타났다. 자살이 궁극적으로는 사회적 타살이라는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소수집단의 자살은 혐오의 구조적 결과라는 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통계로도 기록되지 않는 성소수자의 자살은 뿌리 깊은 혐오와 차별의 결과이다.

‘장자연 유서 파동’이 상징하듯이 ‘살해된’ 여성이 남긴 필사의 기록은 쉽게 부정되었다. 죽은 여성의 이야기는 음모론과 유서 진실 공방과 선정적 스캔들과 병리학 서사로 계속 환원되었다. 여성 살해의 구조는 바로 이 담론 생산구조이기도 하다. 강남역에 쓰인 추도와 생존자의 서사는 그런 점에서 이 오래된 반복을 깨뜨린 사건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보이지 않는 심연에서 필사의 저항을 계속해온 여성, 그리고 소수자 집단의 저항의 역사 속에서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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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문화/과학』 뉴스레터 1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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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5호][학술자료]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 보고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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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5호]북클럽 후기

<문화/과학> 제 15회 북클럽

신지영, <마이너리티 코뮌>(갈무리, 2016)

지난 5월 4일(수) 서울시 NPO지원센터에서 신지영님의 신간 <마이너리티 코뮌> 북클럽이 열렸습니다. 2009년 가을에서 2015년 초까지 도쿄, 서울, 뉴욕의 길에서 만난 소수자 마을과 그 직접행동의 살아 숨쉬는 공기를 어떻게 기록하고 또 기억하고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이방인이라는 위치, 아카이빙의 의미와 방법, 마을과 코뮌을 어떻게 상상하고 또 조직할 것인가 등의 생생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6월에 출간될 <문화/과학> 86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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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5호][칼럼]‘예의바른 관계’의 지옥(최철웅)

경희대원 기고문

 

‘예의바른 관계’의 지옥

 

 

최철웅(카톨릭대 강사)

 

 

일본 츠쿠바대학에서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도이 다카요시 교수는 현대 일본 젊은이들의 관계맺음 형태를 ‘친절한 관계’라고 묘사한다. 그가 말하는 친절함은 타인과 적극적으로 관계 맺고 배려하는 통상적인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적극적인 관계맺음이 상대에게 부담을 줄까봐, 나아가 자신이 상처를 받을까봐 두려워 서로 주의 깊게 처신하는 데서 오는 친절함을 일컫는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신중하게 인간관계를 추구하고, 상호간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확인하려 들지 않으며, 조심스레 상대방의 눈치를 살펴 말과 행동을 가린다. 그리하여 친절한 이들이 모인 공간에는 살얼음을 밟듯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상호간의 암묵적인 합의 하에 형성된 ‘분위기’가 그 장소의 인간관계를 좌우한다. 이 관계는 서로 선을 넘지 않는 ‘예의바른’ 관계인 동시에, 끊임없이 타인의 눈치를 보는 숨 막히는 관계이기도 하다. 일본의 어느 중학생은 교실에서의 이런 관계를 두고 “지뢰밭 같은 교실”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도이 교수는 친절한 인간관계 유지의 중압감이 ‘친구지옥’을 만들고 있으며,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안된 기술이 ‘이지메’ 현상이라고 본다. 일본 사회에서 이지메는 오랜 연원을 갖지만,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이지메는 ‘피해자의 불특정성’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과거처럼 신체적, 문화적 차이를 지닌 약자를 차별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위기’를 깨는 누구나 이지메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우등생도 이지메 대상이 되고, 심지어 이지메의 가해자였던 학생이 다음번엔 피해자가 되기도 한다. 즉, 오늘날의 이지메는 특정한 가해 학생들의 일탈이나 비행이 아니라, 대립을 회피하고 서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친절한 관계’ 자체가 만들어낸 사회현상이라는 것이다. 친절한 관계 속에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타인의 행동에 항상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금 이 집단에서 버림받으면 끝장이다’라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한다. 대립이나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하지만, 인간관계에서 서로의 생각 차나 대립이 발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리하여 이 대립점을 숨기고 상호 관심의 초점을 다른 곳으로 돌릴 필요가 생기는데, 이때 집단 내에 잠복된 대립의 불씨를 해소하는 방식이 바로 ‘이지메’라는 것이다.

 

‘개취존’ 시대의 예의바른 관계

 

도이 교수의 진단은 일본의 젊은 세대의 인간관계 양상에 대한 관찰을 토대로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내 한국 청년들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학 강의실에서 학생들은 다른 수강생은 물론 교강사와도 깍듯하게 예의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가급적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전하지 않으려 애쓴다. 이들은 자신의 생각을 애매하게 표현하기 일쑤며, 토론 시간에도 상대방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이견을 표명하지 않는다. “그게 좋은 것 같아요”나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등으로 단정적 표현을 회피하며,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네, 그런 것 같네요”라며 무의미한 동의를 표시한다. 사실상 커뮤니케이션의 중심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에 놓이며, 상대와의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데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내심 아무런 의견을 표명하고 싶지 않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발언기회가 주어지면 빼지 않고 나름 최소한의 성의를 보인다. 묵묵부답의 상태로 괜히 분위기를 냉담하게 만들거나, 사람들의 의아스런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싫기 때문이다.

이들 예의바른 청년들의 거리두기는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신중함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나름 존중할 만한 태도이다. 우리는 친근감을 표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영역에 불쑥 침범하거나, 큰 관심도 없으면서 사사건건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들로 인해 충분히 고통 받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의 예의바름은 확고한 자기존중감에 기초하여 타인의 존재를 기꺼이 환대하는 태도라기보다 이질적인 타자와의 얽힘을 회피하는 냉담함에 가깝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적 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은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강렬한 경험을 수반하며, 그 과정을 통해 개인은 타자의 시선을 경유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해간다. 그러나 ‘예의바른 관계’는 이질적인 타자와의 교류를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그러한 주체성의 변용을 건너뛰고자 한다. 그 결과 타자성을 끌어안지 못한 주체의 내면에는 오직 ‘나는 나’라는 동어반복적인 자기승인과 본인의 ‘감정’에 대한 확신만이 남는다. 타자성을 언어를 경유해 상징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감정만이 가장 순수하고 확실한 판단의 근거로 격상되는 것이다. 이들은 무언가에 “빡쳤다”거나 “극혐”이라고 선언해버리고, 내키지 않는 무엇에든 그저 “불편하다.”고 내뱉는다. 논리적인 해명은 불필요하며, 내가 불편했거나 상처를 받았다는 사실이 절대적 기준이 된다. 이른바 ‘개인취향존중’의 시대에 감정/취향은 자아의 가장 순수한 부분으로 간주되며, 각자는 감정/취향을 지닌 존재로서 동등하다고 선언된다.

‘예의바른 관계’는 모든 참가자가 그러한 커뮤니케이션 상황에 몰입함으로써 유지된다. 왕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발설함으로써 이 관계가 깨지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따라서 청년들의 커뮤니티에서 가장 기피되는 인간은 ‘눈치 없는 자’이다. 분위기에 편승해 함께 열광해야 할 때 혼자 냉담한 태도를 취하는 이들, 예컨대 대학가의 운동권은 구성원들을 ‘분열’시킨다는 점에서 비난받으며, 사태의 잘잘못을 따지는 이들은 ‘선비질’한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구성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행사의 내용이나 가치가 아니라, ‘예의바른 관계’라는 형식 자체의 유지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이 형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동조하는 이유는 자기긍정감의 원천이 되는 타자의 인정을 바로 이 관계에서만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예의바른 관계로 맺어진 커뮤니티는 사회적 위계 없이 모두가 n분의 1의 구성원으로 참여한다는 점에서 평등한 공동체이기도 하다. 거기서 각자는 자신의 감정과 취향을 전시하면서, 적당한 거리의 타자들에게서 상처 없는 안전한 인정을 구한다. 온라인 커뮤니티들이 내부의 위계를 조장할 우려가 있는 ‘친목질’을 금지하는 데서 알 수 있듯, 그들은 평등하게 인정을 교환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거리감 있는 얕은 관계를 유지한다.

 

혐오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

 

‘예의바른 관계’를 맺은 청년들은 서로 미묘한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타인과의 섬세한 커뮤니케이션에 강박적으로 몰입한다. 그러나 사상이나 가치를 공유한다거나,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관계가 아니기에 당시의 상황이나 기분에 쉽게 좌우되고, 그리하여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정한 관계이다. 더욱이 대립을 회피하는 것을 최우선시 하므로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분노의 감정을 표출할 수 없다. 그에 따라 분위기를 거스르는 ‘눈치 없는 자’들이나 외부의 타자에게 응어리진 분노의 감정이 표출되고, 나아가 그것이 내부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편이 되곤 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대학 새내기에 대한 가혹행위는 냉담한 인간관계 내부의 분노를 표출하는 ‘이지메’의 한 사례가 아닐까. 아마 기존 구성원들은 순수한 가학의 쾌락에 탐닉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 의례의 일부였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들은 이미 선후배의 역할 관계나 공동체적 유대감이 사라진 대학가에서 ‘예의바른 관계’의 거리감을 깨뜨리기 위해 신규 참여자들을 모욕함으로써 강제로 위계적 구도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이건 좀 불편하네요.”라며 분위기를 깨버릴 것이기에.

청년들이 협소한 인간관계 내에서 피곤하리만치 강박적으로 예의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그러한 관계 속에서만 자기표현과 자기긍정의 계기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방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적 역할이나 공적인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청년들은 자기긍정감의 원천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없으며, 내 존재를 고통스럽게 뒤흔들 이질적인 타자성의 개입에 취약하다. 과거 오르막 시대의 청년들이 진보의 감각과 결부된 자기변용의 가치를 적극 받아들였다면, 내리막 시대의 청년들은 현재의 순수한 나를 보존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타자성은 자기변용의 계기가 아니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확고한 정박점 없이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의존하는 자아는 곧잘 ‘멘붕’하고 만다. 물리적으로는 가까우나 심리적으로는 멀기만 한 ‘예의바른 관계’가 쌓여갈수록,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외로움과 강박적인 자기애만 강화된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관계를 일거에 ‘리셋’하거나 자아의 요새 속으로 도피하려는 충동에 곧잘 사로잡힌다.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길은 어디에 있을까. 일단은 타자성과 정면으로 대면하면서 순수한 자아라는 허상을 깨뜨리는 것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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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5호][칼럼]언케니벨리 알파고(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언케니벨리 알파고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의 바둑 대결이 끝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인간의 창조적 직관을 뛰어넘지 못할 거라는 당초 예상을 뒤 업고 알파고가 압승을 하자 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미디어는 앞 다투어 인공지능의 본격 시대가 곧 다가올 것이라는 기획기사를 쏟아냈다. 자비 없는 인공지능 알파고에 맞선 이세돌은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인류의 구원자 존 콘너에 비유되고, 신의 한수로 유일하게 승리한 제4국은 절대 기계에 맞선 인간의 전설적인 승리로 칭송되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에서 인간의 일말의 희망을 보았지만, 사실상 결과는 인공지능의 압승이었다. 빅 데이터와 네트워크 정보로 무장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직관과 경험의 능력을 이긴 것이다. 이번 대전을 주도한 알파고 창시자, 데미스 하사비스는 알파고의 승리도 결국 인간의 승리임을 강조했지만, 인공지능, 안드로이드, 로봇에 대한 인간의 실제적인 공포가 마침내 시작되었다.

 

알다시피 알파고는 구글의 인공지능개발 자회사인 구글 딥마인드가 개발한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이번에 사용된 알파고는 최고 수준의 기업용 서버 300대를 병렬로 연결한 슈퍼컴퓨터이다. 한 서버 당 3테라바이트의 디램 모듈이 들어갔으니 알파고의 연산을 지원하는 메모리 용량은 900테라바이트가 되는 셈이다. 그래픽을 담당하는 처리장치가 176개가 되고 총 106만개의 메모리 반도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알파고의 연산속도는 1초에 10만개의 수를 계산할 정도여서, 순간 초읽기에 몰리는 이세돌이 알파고와 싸운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공평한 것이었다. 알파고는 적어도 이세돌과의 바둑대결에서만큼은 명인보다 더 명인처럼 둔 것이다. 천재적 인간의 두뇌보다 더 영민한 두뇌가 되고 싶은 알파고는 지금 인간에게는 언케니벨리하다.

 

‘언케니벨리’(uncanny valley)는 인간과 비슷해 보이는 기계와 로봇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불편함이나 혐오감을 말한다. 가령 ‘로봇 태권브이’에 나오는 깡통로봇이나, ‘스타워즈’에 나오는 BB-8 로봇은 귀엽고 친근하지만, 인간과 거의 비슷한 피부조직에 심줄과 주름이 선명한 로봇을 만나게 되면 왠지 섬뜩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이 언케니벨리 효과이다. 말하자면 로봇이나 안드로이드가 완전히 인간의 형체를 고스란히 복제한다 해도 그것이 기계인 한에서 인간이 느끼는 불편하고 징그러운 감정은 기계와 인간 사이에 가로 놓인 까마득한 ‘감성의 골짜기’가 된다. ‘케이팝 스타’ 시즌5 심사위원 박진영은 한 참가자가 노래 말미에 감정에 복받쳐 우는 장면을 듣고 심사평에서 알파고는 사랑을 모르고, 노래하며 우는 감정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인간의 수리적 사고능력을 앞지른다 해도,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알지 못하는 한 인간을 넘어설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인간의 감정을 복제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가상세계 안에서 인간의 감정에 반응하여 형성된 가상 인간이 실제 인간의 감정과 상호작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좀 더 업그레이드 된 세컨드라이프, 사이버섹스 프로그램들이 그것이다. 영화 ‘블레이드러너’에서 개발된 안드로이드 ‘넥서스6’의 목표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이다. 데커드 형사와 사랑에 빠진 타이렐사의 최고의 제품 레이첼은 어느 인간의 생애가 정교하게 입력된 프로그램 안드로이드지만, 살면서 스스로 자신만의 감정을 갖게 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을 스스로 학습하여 인간처럼 행동할 때, 지금까지 ‘언케니벨리’로 표현된 넘을 수 없는 감성의 간극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언케니벨리는 어떤 점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완벽하게 따라할 수 없다는 최후의 미소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인간이 비인간의 존재에 종속될 수 있다는 공포심의 발로 일 수도 있다.

 

그런데 알파고의 언케니벨리의 효과는 감정 혹은 감각에 있지 않다. 알파고의 감정에 대한 논쟁,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다. 알파고의 실험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번 대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공지능의 연산적 실수를 제거하는 데 있었다. 실수하지 않고 예기치 않는 사태에 대처하는 완벽한 인공지능의 일처리 능력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인공지능이 외과 의사 없이도 완벽하게 수술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이번 세기의 바둑대결에서 보여주고 싶어 했다. 실제로 구글은 현재 IT 기술과 의료산업을 결합하는 유비쿼터스 헬스케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인공지능은 향후 적어도 20년 안에 사용될 디지털 바이오 의료산업의 핵심 주체이다. 언케니벨리 알파고에 대한 불편하고 으스스한 감정은 기계와 인간의 감정 대결이 아닌, 바로 인간을 대상화하는 자비 없는 자본의 비인간적 논리 그 자체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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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15호][칼럼]선거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오혜진)

한겨례 기고문

 

[2030 잠금해제] 선거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오혜진 (문화연구자)

 

총선이 코앞이다. 훗날 역사에 이번 선거는 어떻게 기록될까. ‘가족정치, 아재정치, 읍소정치’ 같은 명명에서 보듯, 이번 선거에서 시민의 복지, 공동체의 발전과 관련된 정책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논의가 희미했다. ‘옥새투쟁’이나 ‘윤절’(4년마다 돌아오는 새누리당의 ‘큰절’) 같은 해프닝들이 콩트의 한 장면처럼 씁쓸하게 기억될 뿐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여성의 정체성을 ‘섹스어필한 화장품 소비자’로 고정시킨 선관위의 투표 홍보 영상, “치마와 연설은 짧을수록 좋다”는 국민의당 행사 사회자의 발언, 정의당이 선정한 ‘중식이밴드’의 여성 혐오적 테마송 논란 등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폭넓게 펼쳐진 여성 혐오 양상이다. 이 문제는 단지 여성 혐오를 대중적인 선거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했다는 차원에만 그치지 않는다. 이는 여성의 권익을 대변하는 정책과 후보의 부재(또는 비가시화), 남성으로 상정된 ‘표준시민’ 혹은 ‘유권자’의 상과 긴밀히 관련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대의제에서 다차원적으로 행해지는 여성에 대한 체계적 배제에 공모한다. 2차대전 참전 소녀병사들의 증언을 기록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말을 바꿔 말하자면, 2016년 한국에서 ‘선거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현실은 ‘여성대통령’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가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를 뼈아프게 학습해야 했던 이 나라에서 이미 예고된 ‘재앙’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전히 선거는 ‘여성과 민주주의’라는 도전적 명제를 사유하고 실험할 수 있는 가장 역동적인 계기 중 하나라는 점이다. 이 절호의 기회를 퇴행적인 현실에 붙들려 소진해버려도 좋을까? 선거 정국의 수많은 여성 혐오 사례들은 가히 수공업에 가까운 모니터링과 지속적인 계도·교정을 요하는데, 이는 마치 ‘여성과 정치’에 대한 급진적 기획을 저지하려는 거대한 음모 같다. 그럴수록 중요한 것은 ‘여성의 정치적 대표성’, ‘대의제와 소수자 정치’ 같은 의제들에 대한 축적된 사유를 더욱 진전시키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1990년대 프랑스에서 벌어진 ‘남녀동수제’ 논의는 시사적이다. ‘대표자의 성비를 50 대 50으로 선출’하자는 이 논의는 남녀의 해부학적 이원성을 공화주의적 대의제가 전제하는 ‘추상적 개인’의 기본값으로 인정하자고 말한다. 이는 그간 ‘중성’(사실상 ‘남성’)으로 상징화된 ‘인간’을 성적 특징을 지닌 ‘두 존재’로 조정함으로써 외려 정치적 영역에서 성차가 탈상징화되는 효과를 노린 역설적 전략이다. 물론 이 논의는 일부 논자들에 의해 동성애 혐오 정당화 논리로 왜곡되거나, ‘할당제’ 혹은 ‘반차별법’과 혼동되기도 했다.

그러나 남녀동수제의 의의가 여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논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경계하고, ‘엘지비티’(LGBT, 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등 성소수자)의 성정치와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정체성 정치’와 구분되는 성차의 정치학을 발명하고자 한 치열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이는 여성을 ‘보편적 개인’으로 등록시킴으로써 대의제와 민주주의의 잠재적 가치를 최대화하려 한 가장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시도로 평가된다. 무엇보다 이 사례가 말해주는 것은, 여성과 정치의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은 다양하다는 점이다. ‘여성과 민주주의’라는 과제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으나 달성 불가능한 것도 아닌 채로,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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