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6호][칼럼] 남자에게 말 걸기(오혜진)

한겨레 기고문

 

[2030 잠금해제] 남자에게 말 걸기

 

오혜진(문화연구자)

 

지난 5월17일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부산과 서울 수락산 등지에서 연이어 여성 대상 범죄가 발생했다. 이 사건들은 일면식도 없는 여성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 범죄’라 할 수 있다. 최근 이런 사건이 부쩍 늘어난 걸까, 아니면 원래 많았는데 이제야 가시화된 걸까? 당연히 후자다. 2000년대 이후 줄곧 한국 강력범죄 피해자의 10명 중 9명은 여자였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남성들은 ‘여성혐오’라는 개념이 생경하다며, 그 존재를 부인한다. 일부 ‘교양 있는’ 남성들조차 ‘문제는 혐오가 아니야’ ‘내가 여성혐오자일 리 없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하지만 ‘여혐’, 결코 어렵지 않다. 남녀노소 누구나 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조차 항상 자기 안의 여성혐오와 치열하게 싸운다. 남성의 ‘여성멸시’와 여성의 ‘자기혐오’를 포괄하는 여성혐오는 마치 공기처럼 우리 일상 깊은 곳까지 스며 있다. 살인강간폭행 같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여성을 자연화신비화해온 오랜 전통도 여성혐오와 관련된다. 여성은 남성보다 저열한 존재가 아닐뿐더러, 무조건적인 아름다움의 화신이나 숭배의 대상도 아니다. 여성도 그저 말하고 생각하고 실수하고 성찰하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가진 ‘인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같은 오랜 속담부터 최근의 ‘알파걸김치녀’ 논란까지 한국 여성혐오의 역사는 유구하고, 양상은 다양하다. 그러니 한국에서는 생각을 ‘억지로 해야만’ 여성혐오 발화를 안 할 수 있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은 반드시 여성혐오와 만난다.

중요한 것은, ‘여성혐오’는 영원히 못 벗어날 ‘악마의 굴레’ 같은 게 아니라는 거다. 내 안의 여성혐오를 인정하고 고치면 된다. 다만, ‘공부’가 필요하다. 자신이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있지 않은지 매순간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한다. 페미니즘이 그 ‘공부’ 중 하나일 수 있다. 페미니즘에 입문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우선 ‘나는 남자라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 같은 말만 안 하면 된다. 이미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노동자 억압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 노동자가 되고자 위장취업까지 감행한 바 있지 않은가. 그 역사는 내게, ‘존재변이를 위해 죽을 때까지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것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그런데 페미니스트는 꼭 여자가 돼야만 가능하시겠는가.

지난 토요일 밤, 강남역 살인사건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는 사건 자체는 물론, 여성들이 겪는 일상적 고통을 가시화했다는 점에서 꽤 유익했다. 그런데 이날 “저도 남자입니다만”이라는 사회자의 말처럼 말을 거는 사람은 남성이었으며, 수신자 역시 (합리적 이성을 지닌 것으로 상정된) “우리 남성들”이었다. 사회자는 “가장 상처가 되는 것은 적의 말이 아닌 친구의 침묵”이라며 “우리 남성들”을 여성의 ‘친구’로 규정했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 아내, 혹은 딸들이 그 희생자가 될 수 있고 우리의 아버지와 형제, 그리고 아들들이 그 가해자가 될 수가 있다”는 프로그램의 결론에서, 정작 ‘나(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아직도 이게 ‘나’가 아닌 ‘가족’과 ‘이웃’의 문제인가. 남자라서 페미니스트는 될 수 없지만 ‘친구’는 돼줄 수 있다는 이들에게, 우린 이제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다시 말하지만, ‘시혜’와 ‘보호’는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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