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16호][칼럼] 표절과 대작 ‘슬픈 자화상’(이동연)

경향신문 기고문

 

[문화비평]표절과 대작 ‘슬픈 자화상’

 

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신경숙 표절 사건이 벌어진 지 1년이 다가온다. 표절 사건은 그녀의 소설을 좋아했던 독자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문학계의 해묵은 문학권력 논쟁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당시 문학 계간지마다 표절을 주제로 특집을 실었고, 이후 창작과비평사와 문학동네는 발행인과 편집위원을 교체하는 혁신안을 발표했다. 현재 ‘창비’는 발행인과 주간이 교체됐고, ‘문학동네’는 1세대 편집위원이 물러나고 문화 분야를 강화하며 젊은 편집위원들로 재구성했다.

그러나 신경숙 표절 사건이 일어난 지 1년이 다가오지만, 문학계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어?”라고 할 정도로 조용하다. 오히려 문학시장의 공멸에 대한 두려움을 공유하면서 표절의 아픈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고심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던 차에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영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동안 우울했던 문학계는 한강의 수상을 1년 전 신경숙 표절 사건의 아픔을 씻어내는 반전의 계기로 반기는 분위기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순식간에 베스트셀러 1위에 등극하고 다른 소설들도 덩달아 판매량이 증가하는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 <채식주의자>를 출간한 창비는 금전적 이득뿐 아니라 표절로 실추된 출판사의 명예도 회복되는 최고의 덤을 얻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은 문학계의 쾌거이고, 문학시장의 부활을 위한 지렛대가 될 수 있는 기회인 건 분명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신경숙 표절 사건을 성찰할 시간을 지워버린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신경숙 표절의 폐부를 키운 것도 어찌 보면, 젊은 문학평론가 오혜진의 지적대로 한국문학 세계화 대망론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물론 한강의 수상과 신경숙의 표절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한강의 수상은 문학계에서 아직 충분히 논의가 끝나지 않은 베스트셀러 작가의 윤리와 출판사 공동의 책임이라는 문제를 재론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표절 작가를 옹호했던 한국문학의 심리 안에는 한강의 수상이 마치 표절이란 주홍글씨를 가슴에 패용하고 다녀야 했던 동료 작가와 출판사의 원죄를 사면하는 면죄부로 작용하는 듯하다. 문학권력의 장은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 견고한 표절의 모든 것은 ‘깊은 슬픔’의 성찰 없이 순식간에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가수 조영남의 그림을 대신 그렸다는 최근 한 무명작가의 폭로 역시 1년 전 신경숙 표절 사건의 미술계 버전으로 간주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조영남은 모든 아이디어와 콘셉트는 자신의 것이며, 대작 사실을 폭로한 송모씨는 단지 조수에 불과하고 이것은 현대미술의 관행이라고 해명했다. 대작 사건에 대해 진중권은 원래 현대미술이나 팝아트의 창작 경향이 다 그런 것이라며 대중들의 비난은 현대미술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몇몇 작가들과 비평가들도 진중권의 발언에 동조하고 나섰지만, 대중들의 일반 상식은 달랐다.

대중들은 오히려 조영남이 사전에 대작의 사실을 밝히지 않은 점, 대작 작가에게 작품당 10만원 정도의 수고비를 주는 대신 자신의 그림을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받고 팔았다는 점에 분노했다. 조영남의 솔직하지 않은 행동과 대작 작가에 대한 천하의 ‘갑질’이 대중의 공분을 산 것이다. “현대미술의 관행” 운운하는 진중권류의 해명은 대중들에게는 잘난 체하는 ‘엘리트주의’로 힐난의 대상이 된다. 최근 검찰의 수사로는 송씨 이외의 대작 작가가 2~3명 더 있으며, 심지어 원천 창작가가 자신이라는 조영남의 주장도 확신할 수 없다고 한다.

‘표절’과 ‘대작’은 우리 문화의 부끄럽고 슬픈 자화상이다. 표절은 소설에만 있는 게 아니라 박사학위 논문에서 대중음악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 ‘대작’ 역시 그 관행이 문화예술계에 만연해 있다. 무명 작가들이 당해야 하는 저작권 도난의 수난 사례는 아직 수면에 본격적으로 올라오지 않고 있다. 대작을 강요하고, 대신 창작자의 이름을 지워 버리는 문화계의 오랜 ‘갑질’의 관행을 “현대미술의 콘셉트”이자 “대량 제작 시스템의 관행”이라고 운운한다면 그것은 마치 가난한 작가에게 몇 푼의 돈을 쥐여주고 신체 포기 각서를 쓰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표절’과 ‘대작’의 뻔뻔한 관행도 슬프지만, 더 슬픈 것은 그것을 마치 쿨하게 방관하고 해명하며, 애써 의미화하려는 비평적 행위이다. 그리고 더더욱 슬픈 것은 ‘표절’을 ‘수상’으로 지워 버리고, ‘대작’을 ‘관행’으로 지워 버리려는 대중과 문화권력의 공모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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